< 771화 마지막 (4) >
“아무리 그래도 너무….”
“개새끼.”
“…….”
“…….”
항상 그렇기는 했지만 디아루기아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뭐라 설명하기 힘든 혐오감이 뒤섞여 있었다.
“…….”
“…….”
조금 억울한 면이 없지 않아 있기는 했지만 슬그머니 눈치를 살핀 이후에는 괜스레 아래를 내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졸지에 이곳에 묶여 버리게 된 디아루기아의 마음이 이해가 가기도 했고… 현시점에서 중요한 건 이쪽이 아니라 아래쪽이었으니까.
‘진짜 죽여주자너… 그림 죽여주자너. 시바.’
우리 사랑스러운 회귀자가 성스러운 육신을 안은 채로 신전을 내려오는 저 모습을 보라.
‘없던 신앙심도 생기겠다. 진짜.’
너무나도 숭고한 장면이라 뭐라 설명하기도 어렵다. 밝은 빛이 쏟아지고 길이 열린다.
마치 모세가 바다를 가르는 것처럼 김현성이 걸어가는 길에 인파들이 갈라지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이미 죽었다는 걸 말해주듯 성스러운 육신의 고개와 팔이 땅으로 떨어지려 하고 있었지만 김현성이 다시 한번 이쪽을 제대로 안아 드는 것이 눈에 보였다.
‘내가 저거 어울릴 줄 알았자너.’
교단에서 나오는 수의 잘 어울릴 줄 알았자너. 진짜.
베니고어 교단에서도 교황들만 입을 수 있다는 수의를 입고 있는 것을 보면 우리 바젤 교황님이 제대로 신경 좀 써준 모양.
사실 추기경급들이 입는 수의는 성스러운 느낌이 덜해 걱정하기도 했었는데 그런 내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던 것 같았다.
무려 대륙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영웅의 죽음이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오직 힘없는 자들을 위해 살아왔던 성자의 죽음이었다.
평범한 장례를 치러줄 리가 없지 않은가.
교단에서 얼마나 이 이기영의 추도식을 신경 썼는지 눈에 보인다.
이마에 그려져 있는 베니고어와 같은 문양은 사실 잘 어울리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세히 보니 기존의 수의보다 더 화려한 것 같다.
베니고어가 입고 있는 옷과 뭔가 느낌이 비슷하기도 했고 디테일 적인 부분에서 유사한 면들이 시야에 비친다.
오직 베니고어의 아들만이 가능한 복장 양식.
누가 저 모습을 보고 빛기영의 빛에 의심을 품을 수가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충족되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 있었지만 김현성의 등장으로 인해 모든 그림이 완벽해진 것만 같다.
노을빛의 등장은 단언컨대 저 장면에 정점을 찍었다고 자부할 수 있다.
‘얼마나 벌렸지. 이거 대체 얼마나 벌린 거냐구.’
방금의 그림으로 벌린 신성이 지금까지 모아놓은 신성보다 많다.
확실히 죽는 게 좋기는 좋아. 일단 그렇잖아.
어울리는 예는 아니지만 예술가가 숨을 거둔 이후 작품이 떡상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이쪽의 경우에는 오히려 더하면 더했지 부족하지도 않다. 성자의 죽음으로 이루어낸 평화. 이미 우상화되기 좋은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베니고어의 아들이라는 수식어만 봐도 대륙의 빛이 어느 정도 위치에 있는지 예상해 볼 수 있다.
-베니고어의 아들….
-노을빛의 검사가 베니고어의 아들을….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김현성을 향하는 신성까지 들어오고 있는 중, 회귀자 사용설명서의 효과인지는 모르겠지만 벌리는 족족 자동이체 되듯 신성이 이동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회귀자 사용설명서의 효과는 아닌 것 같은데.’
다단계 같은 느낌일 수도 있고… 뭐 아무렴 어떠랴. 계속해서 신성이 쏟아지고 있다는 게 중요한 거지.
“이런 상황에서… 웃음이 나오는 겁니까?”
“이런 상황이니까 웃는 거죠. 왜 저라고 불안하지 않겠습니까. 밑에 있는 얘들도 걱정되는 건 물론이거니와 지금 우리가 여기 어째서 있는 건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정황상 하늘나라에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생각한 거랑 조금 다른 것 같기도 하고…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일단 벌어둬야죠. 보험이라는 건 그런 거잖습니까, 디아루기아.”
“…….”
“보시다시피 아무것도 없는 공간인데 신성이라도 있어야 먹고 살죠. 이번에는 뭐로 드시겠습니까?”
“…….”
“…….”
“다시 돌아갈 수는 있는 겁니까?”
“다시 돌아가야죠. 아마 돌아갈 수 있을 겁니다.”
당장 해결해야 할 일이 많았으니까.
다들 걱정이 되기도 한다. 우리 하얀이, 돼지 새끼, 사랑스러운 김현성의 멘탈도 멘탈이었지만 지혜 누나가 선희영, 카스가노와 함께 여단을 재창설할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김현성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것에 성공했으니 아마 이지혜라면 소식을 듣지 않았을까.
상황이 달라졌다는 걸 깨달았을 테니 금방 합류해서 방법을 찾아 주겠지, 뭐.
다시 한번 생각해도 살려달라고 말하지 않기를 백번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추잡하게 다시 살고 싶다고 부활시켜 달라고 떼쓰는 것보다는 이렇게 담담하게 아직 희망이 있다는 메시지를 주는 게 정답이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끈끈한 교감. 어차피 이 새끼가 날 살릴 거라면 이런 방식이 더 좋지 않은가.
“정말로… 정말로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겁니까? 디아루리아를 다시 볼 수 있는 겁니까?”
“우리 디아루리아한테는 제대로 상황을 설명했으니 괜찮을 겁니다. 그나저나 드래곤들이 정말 신기하기는 하더라고요. 저야 특성 때문에 현성이한테 메시지를 보낼 수 있다고는 하더라도….”
“저 역시 갑자기 쌓인 이상한 기운이 아니었다면… 상황을 전할 수 없었을 겁니다.”
“이제 신성한 용, 디아루기아니까요. 신의 아들과 함께 싸운 빛의 드래곤 디아루기아. 좋은 울림이네요.”
“…….”
“아무튼 가장 걱정하고 있던 게 일단락됐으니 안심입니다. 일단 저쪽에서도 방법을 찾아야 여기서도 뭔가 희망이 생기는 거니까요.”
“아직도 여기가 어떤 곳인지….”
“…….”
“잘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
“일반적인 공간은 아니니까요. 대충 예상해 보자면 뭔가… 누군가 준비해 둔 것 같은 느낌도 듭니다.”
“누군가 말입니까?”
“네. 누군가가 준비해 놓은 공간이라고 말하는 게 편하겠네요. 본래대로라면 눈을 감은 이후에는 아예 사라지거나 베니고어가 있는 곳으로 올라가는 걸 상상했었는데 여기는… 누가 봐도 이질적이니까요.”
“대체 누가….”
“글쎄요.”
기억을 지우기 전의 이기영?
아니면 1기영?
누가 됐든 간에 이 공간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공간이라는 데는 반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럼… 저 빛들은 어째서….”
시선을 돌리자 은색의 빛과 푸른 빛, 갈색빛이 덩그러니 놓여 있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쓰로누스, 케루빔, 도미니온스.
“글쎄요. 근데 생각나는 건 있네요.”
“뭡니까.”
“아무래도 제가 신이 될 준비를 하고 있나 봅니다.”
“정신 나간 새끼.”
“뭐 정신 나간 소리니 그렇게 들으시고 싶으시면 그렇게 들으셔도 됩니다. 제가 기억을 잃기 전의 저에 대해 이야기한 거, 기억하십니까?”
“…….”
“그냥 이 공간을 준비한 게 저라면 어떨까 싶은 생각에 망상 한번 해본 거예요.”
“…….”
“제가 죽을 거라는 걸 제가 미리 알고 있을 거라고 가정해 봅시다. 아니, 실제로 알고 있었으니 가정이 아닙니다. 무언가 준비를 해야 된다고 생각했을 테고… 어디론가 이동되거나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잠깐 체류할 수 있는 장소가 필요했을 겁니다.”
“그게… 이곳이라는 겁니까?.”
“아래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지켜보고 우리 현성이를 인도할 컨트롤 타워라고 가정해 보면… 네… 뭐. 대충 말이 끼워 맞춰지는 기분이 들기도 하고… 아닐 수도 있지만…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아요.”
“그게 저 빛들과 무슨 상관입니까? 저들은 지금의 사태를 만든 이들입니다.”
“지금은 단순한 빛 덩어리죠. 그 이질적인 프로그램, 그 괴물새끼가 사라지고 난 이후에 남은 것들이에요.”
가까이 달라붙으려고 하는 은색 빛을 손으로 쳐낸 이후에 다시금 말을 잇는다.
“그러니까. 어째서….”
“글쎄요. 어쩌면 기억을 잃기 전의 이기영은 이렇게 생각했을 거예요.”
“뭐라고.”
“지긋지긋하다고 말입니다.”
“…….”
“기억을 잃기 전의 이기영은 지금의 이기영과 다르게 컨트롤 프릭 같은 성향이 있었을 겁니다. 자신이 상황을 통제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견딜 수 없는 성향을 가지고 있었을 게 분명합니다.”
“당신은 지금도 그렇습니다.”
“…….”
“…….”
“아무튼 그래서 지긋지긋 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이겁니다. 누군가가 대륙을 관리하는 게 아니꼽게 비친 거겠죠. 자기도 모르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게 짜증나지 않겠어요? 뭐. 제가 그렇다는 게 아니라 기억을 잃기 전의 이기영이 그렇다는 거니 오해는 하지 마세요. 그래서… 바꾸고 싶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직접 대륙을 관리하고 싶다고, 직접 하는 게 속이 편할 것 같다고 느꼈을지도 모르죠. 손이 많이 가는 일이니 혼자 힘으로는 힘들다고 느껴… 얘네들을 준비했나 봅니다.”
“하지만 그들은….”
“메인 시스템이 달라졌으니 이들의 생각이나 행동에도 변화가 있을 겁니다. 물론 특유의 성향이나 만들어진 성격은 고치지 못할지는 몰라도 긍정적인 방법으로 교정할 수는 있겠죠. 아마 이전에 일어났던 일들을 기억하지 못하게 할 수도 있을 겁니다. 중요한 건 얘네들이 귀찮은 일을 떠맡아 준다는 거죠. 실제로 대륙을 관리하기 위해 태어난 이들이니 효율이 나쁘지는 않을 겁니다. 뭐가 어찌 됐든 간에 간부급의 자원을 만든다는 건 어마어마한 신성을 필요로 하는 일이니까요. 알맹이를 건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성비가 내려온다는 거예요. 누군가가 파산해서 경매에 내놓은 물건을 욜라 싸게 가져온 거라니까요.”
“정말로… 괜찮겠습니까?”
“안 괜찮을 이유가 뭐가 있겠어요? 메인 시스템이 옮겨진 건데. 무슨 문제가 생기겠습니까. 디아루기아 님도 제 작은 실험에 참가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이미 한 놈한테 육체를 만들어 줬는데도 별문제가 안 생기잖아요. 혹시라도 문제가 생길 걸 대비해서… 계획한 일들도 많아요.”
디아루기아의 옆에서 초조하게 입술을 물어뜯고 있는 백금색의 녀석을 보고 말을 이었다.
“이들이 인간처럼 되고 싶다고 느끼고 있는 거 알고 계셨습니까? 얘네들이 창조주에게 비상식적인 애정결핍을 느끼고 있는 건 알고 계셨어요?”
“…….”
“천사들은 인간을 부러워하고 동경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들을 인간처럼 키울 생각입니다. 아주 어린 육체를 만들어 이들이 인간처럼 자랄 수 있게 배려할 거예요. 주어진 역할은 다르겠지만 아마 케루빔, 쓰로누스, 도미니온스는 인간처럼 자랄 겁니다. 과거를 잊고 행복하게 살아가겠죠? 저는 이들의 창조주가 하지 못했던 일들을 이들에게 베풀 생각입니다. 이전의 이질적인 괴물 창조주와는 다르게 저는 다시 태어난 우리 천사들에게 무한한 사랑을 줄 생각입니다.”
다시 한번 힐끗 녀석을 바라본 이후에는 다시 말을 잇는다.
“지금 디아루기아 님께 맹세코 말하건대 저는 정말로 제 몸을 바쳐 제 손발이 되어줄 이 천사들을 사랑할 겁니다. 사랑하고 또 사랑하고 사랑할 거예요. 이 천사들이 지칠 때까지 저는 이들에게 사랑을 베풀 거라니까요?”
“악취미… 로군요. 당신은….”
“한 놈만 빼고 말입니다.”
“정말로… 악취미예요.”
“푸… 흐… 푸흐하헤하하하핫! 딱 한 놈만 빼고! 딱 한 놈만 빼고… 모두에게 평등한 사랑을 내릴 겁니다. 딱 한 놈만 빼고요. 시바… 그 새끼는 안 살릴 거예요. 그 새끼는 태어나지도 못하고 뒈질 겁니다. 우리가 다 이곳을 빠져나가도 그 새끼는 영원히 여기를 못 빠져나갈 거라니까요. 푸흣… 푸… 푸흣….”
“…….”
“푸흡! 푸흐흐핫… 들었어? 세라핌? 나는 절대로 너를 다시 태어나게 하지 않을 거야. 이미 내게 육신을 내리기는 했지만 너를 다시 만들지도 너를 데려가지도 너를 사랑하지도 않을 거라고….”
“죄송… 합니다.”
“응? 뭐라고?”
“죄송… 죄송… 합니다.”
“응? 안 들리는데?”
“제가… 잘못했습니다. 흐으윽… 제가… 제가 진심으로 잘못했습니다. 부디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제발….”
무릎을 꿇은 채 이곳을 바라보고 있는 세라핌이 시야에 비쳤다. 나는 녀석을 내려다보며 다시 한번 말을 이었다.
“싫어. 새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