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0화 마지막 (3) >
분명히.
[살아가세요.]
목소리가 들렸다.
“…….”
[더 이상 스스로를 괴롭게 하지 마세요. 고통스러운 짐을 떠안지 마세요. 이제는 짐을 완전히 내려놓으시고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세요. 당신은 행복한 삶을 영위할 자격이 있습니다.]
“…….”
분명히 들려왔다.
[당신은 그 누구보다도 행복한 삶을 살아갈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스스로를 미워하지 마세요. 스스로를 자책하지 마세요. 그 누구도 당신을 원망하지 않을 겁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수많은 이들과 앞으로 이 대륙에서 살아갈 이들을 구한 업적은 오래도록 그들의 가슴과 영혼 속에 기억될 것입니다. 대륙이 사라지는 그 날까지, 모든 신의 피조물들이 당신을 축복할 것입니다.]
천천히 상반신을 일으킨다. 어두운 방 안에 희미한 빛이 조금씩 차오르고 있다.
누군가 램프를 껐다가 켠 것처럼 작은 빛이 계속해서 깜빡이고 있었다.
혹시나 잘못 들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들려오는 목소리는 분명히 착각이 아니었다.
머릿속이 아니라 영혼 속에서 울리는 것만 같이 느껴지는 목소리. 몸 전체에서 울려 퍼지는 듯한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알… 타누스?”
[기나긴 전투였습니다. 당신에게는 특히 가혹한 투쟁의 나날이었을 겁니다.]
“아니, 베니고어?”
[많은 것을 잃어버리며 원하지 않는 전장에 섞여 들어가야 하는 힘든 나날이었습니다. 고통과 시련을 감당하며 성장해야 했던 나날이었습니다. 당신은 그 힘들고 어려웠던 시간을 훌륭히 견뎌내 많은 이들을 구해냈습니다. 당신의 투쟁과 희생 정신, 용기와 찬란한 노을빛에 찬사를 보냅니다. 당신의 이겨낸 그 모든 것들에 진심 가득한 존경을 표합니다.]
“알타누스… 베니고어… 아니 누구라도 상관없어… 보고 있다면 나를 회귀시켜줘… 부탁이야. 베니고어.”
계속해서 희미한 빛이 어둠을 밝힌다.
“제발… 부탁이야. 베니고어. 제발….”
[대륙의 위협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이제는 고통을 겪을 이유도, 당신이 새로운 희생을 할 이유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지옥 같은 삶을 다시 한번 시작해야 할 이유는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이… 여기가 바로 지옥이야. 차라리 한 번 만 더 기회를 줘. 제발… 그게 불가능하다면 나를 죽여줘… 제발… 최대한 고통스럽게. 끔찍한 고통을 느낄 수 있도록….”
계속해서 희미한 빛이 어둠을 밝힌다.
[당신의 부탁은 들어드릴 수 없습니다. 힘든 시간이라는 것에는 공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라면 틀림없이 커다란 슬픔을 딛고 일어설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웃기지 마….”
[당신은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내가 그럴 자격이 없다는 거 알고 있잖아….”
계속해서 희미한 빛이 어둠을 밝힌다.
[아니요. 당신은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당신은 알고 있잖아. 내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내가 금수만도 못한 짓을 저질렀다는 거 알고 있잖아.”
[당신의 탓이 아닙니다. 그 누구도 당신을 원망하지 않을 겁니다.]
“웃기지 마. 웃기지….”
[그 역시… 당신을 원망하지 않을 겁니다.]
“그 입 닥쳐! 네가… 네가 뭘 알아.”
[맹세컨대 그 역시 당신을 원망하지 않을 겁니다. 그는 당신이 행복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떨쳐내고 과거의 굴레와 죄악감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앞으로 살아갈 삶과 당신이 앞으로 겪을 일상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웃기지 마! 제기랄! 개 같은 놈들! 개새끼들! 개새끼들아!! 너희들이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다른 놈들도 아니고 너희 개 같은 새끼들이! 너희 쓰레기 같은 새끼들이! 감히 그 사람에 대해 떠들 수 있어? 너희 개새끼들이…흐윽….”
서둘러 몸을 일으켜 세웠던 바로 그때였다.
다시 한번 희미한 빛이 어두운 방 안을 밝힌다.
천천히 옆을 바라본다.
[진심으로 저는 당신이 앞으로 살아갈 행복한 삶들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당신과 당신의 친구와 가족들이 함께 만들어갈 이야기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거울에 비친 한쪽 눈에서 빛이 깜빡이고 있었다.
[당신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다시 한번 눈에서 빛이 깜빡인다.
[고개를 들어 당신이 지킨 대륙을 둘러보세요. 많은 것이 달라진 앞으로의 대륙을 경험하세요. 원정이 아닌 여행을 떠나고 전우가 아닌 친구들과 함께 새로운 풍경을 눈에 담으세요. 새로운 일상을 즐기고 그 이야기들을 보여주세요.]
목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계속해서 빛이 깜빡이고 있었다.
“흐… 흐으윽… 흐으으으윽… 흐윽….”
[많은 것들을 누리고 경험하세요. 당신의 이야기를 완성하세요.]
계속해서 깜빡이고 있었다.
“흐윽… 흐으으으윽… 흐윽… 끄으윽….”
[당신이 하지 못한 일들은 아직 많이 남아 있습니다. 당신이 경험할 것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 모두가 당신이 이룬 것들입니다. 당신 때문에 존재할 수 있었던 것들입니다. 당신은 그 누구보다도 행복한 삶을 영위할 자격이 있습니다.]
“흐으윽… 흐윽….”
[나아가세요. 이전의 일들을 잊고 새로운 시작을….]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럴 수 없어요. 기영 씨.”
[…….]
“절대로… 그럴 수 없어요. 새로운 대륙도, 여행도, 새로운 풍경도, 새로운 일상도 상상할 수 없어요. 아무것도… 흐윽…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아요. 절대로 잊을 수 없을 겁니다. 저는 그 모든 것들을 누릴 자격이 없어요.”
[새로운 시작을 위해 문을 박차고 나아가세요.]
황급히 문을 박차고 나간다.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오기는 하지만 무작정 발걸음을 옮긴다.
“혼자서였다면 절대로 불가능했을 겁니다. 저 혼자만이었다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 거예요. 기영 씨야말로 행복을 누릴 자격이 있는 사람이에요. 당신이야말로 저보다 더 많은 것을 희생한 사람입니다. 진정으로 이 대륙을 위하고 이 풍경을 지키고 싶어 한 사람이에요. 네.”
계속해서 빛이 번쩍인다.
[더 이상 주저앉지 마세요. 제발 스스로를 상처 입히지 마세요.]
“저야말로 기영 씨의 이야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기영 씨가 어떤 삶을 살아갈지, 어떤 이야기를 써 내려갈지 보고 싶어요. 새로운 풍경, 새로운 삶, 덕구 씨와 함께 평소처럼 떠드는 것도, 길드원들과 함께 여행을 떠나는 것도… 하… 하하… 그런 것도 상상해 보세요. 조금 먼 미래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이후에 하얀 씨와 함께 맺어진다면… 두 분이 어떻게 될지, 두 분의 아이가 어떨지, 그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저는… 저는… 즐거워집니다. 앞으로 기영 씨가 써 내려갈 이야기들입니다. 당신이 마땅히 누려야 할 것들이에요. 제가 아닌 당신이 누려야 할 삶입니다.”
[…….]
“아니, 가능하다면 함께 누리고 싶습니다. 제가… 제가 자격이 없다는 건 알고 있지만… 조금만… 아주 조금만 욕심을 내본다면 이 모든 것들을 함께 누리고 싶어요.”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긴다. 조금씩 조금씩 풍경이 뒤바뀐다. 별로 수 놓인 밤하늘이 눈에 들어온다. 건물들이 계속해서 옆으로 지나간다.
사람들이 스쳐 지나간다. 조금 더 빠르게 발걸음을 옮기다 이내 날개를 펼치자 밝은 노을빛이 쏟아졌다.
순식간에 하늘로 몸이 떠오르자 광활한 대륙이 한눈에 들어왔다. 전쟁으로 인해 폐허가 된 북부의 아래에 보이는 대륙의 풍경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작은 빛들이 눈에 보인다. 수없이 많은 숫자의 아주 작은 불들이 대륙을 비추고 있었다.
마치 대륙에 별이라도 깔린 것 같지 않은가. 미치도록 아름다운 밤하늘의 풍경이었다.
“보고 계십니까?”
[…….]
어제 봤던 풍경과 마찬가지다. 완전히 무너져 내린 북부의 성벽 아래의 풍경은 싸움이 난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
거울 호수, 균열 박물관, 라이오스, 공화국, 그 외에도 아름다운 풍경들에 작은 빛들이 수 놓여 있었다.
“기영 씨가 지킨 것들입니다.”
서둘러 하늘을 가로지른다. 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향해 쏟아진다.
[당신이 지킨 것들입니다.]
“기영 씨를 위해 기도하고 있는 거예요.”
[당신을 위한 것들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당신을 위한 것입니다.]
몸은 어느덧 린델을 벗어난다. 빛이 계속해서 깜빡인다.
조용히 하늘에 내려앉자 수많은 시선이 쏟아져 내렸다.
“노을빛….”
“노을빛의 검사다.”
안으로 들어서자 익숙한 얼굴들이 시야에 비친다.
“길드마스터?”
“여기는 어떻게….”
“파란 길드 마스터.”
많은 사람이 몰려 있는 곳이다. 조용히 발걸음을 옮기자 천천히 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오빠? 이 새끼들이… 지금… 이 개새끼들이….”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 예리도 눈에 비친다.
“길드마스터. 여기는 어떻게….”
뭔가 초조해 하는 김미영 씨의 모습도 보였다.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어깨를 두드리자 조용히 길을 비켜주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앞을 가로막는 성기사들이 눈에 보였다. 초조하게 보이는 얼굴들이 이곳에 오기 전 뭔가가 있었다는 걸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지만….
“파란 길드마스터, 여기는 어쩐 일로 오신 겁니까. 미리 말씀을 해주셨더라면….”
“…….”
“현재 명예추기경님을 모시고 있는 중입니다. 아무리 노을빛의 영웅이라고 한들, 이런 식의 무례는 교단에서 용납할 수 없습니다.”
“…….”
“명예추기경님을 봐서라도….”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네? 그건….”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러니 데리고 가겠습니다.”
“…….”
“제가 데리고 가겠습니다.”
“…….”
“…….”
조용히 이쪽을 바라보는 바젤 교황의 모습도 보인다.
“그렇게 하게. 노을빛의 검사.”
“바젤 교황님. 하지만 명예추기경님은… 우리 교단에서….”
“내가… 내가… 데려가도 된다고 이야기하지 않았나! 이 멍청하고 아둔한 것아!!”
“네? 그건… 그러니까….”
“우리 명예추기경도… 그편이 더 행복할 게야.”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바젤 교황님.”
“신경 쓰지 말게나. 노을빛의 검사. 명예추기경을 잘 부탁하네.”
조용히 아래를 바라보자 누워 있는 이의 모습이 눈에 담겼다.
새하얀 색의 옷을 입고 조용히 미소 짓고 있는 얼굴은 너무나도 편안해 보인다. 정말로 이 모든 것이 만족스러운 것만 같다.
천천히 시신을 안아 든 이후에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길드마스터….”
“늦어서 죄송합니다. 혜진 씨.”
“아니요. 정말로 잘 와주셨습니다. 흐윽… 네….”
“다른 사람들은….”
“하얀 씨와 소라 씨는 먼저 돌아가셨습니다. 아마 가까운 곳에서 일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지금 연락해 주세요.”
“네.”
“길드원들을 전부 소집해 주세요. 덕구 씨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조금이라도 기영 씨와 접점이 있었던 분이라면 전부 다 불러주세요.”
“네.”
“…….”
“길드마스터.”
“네.”
“실례지만… 방금 전에 하셨던 이야기는….”
“네.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분명히 기영 씨였습니다.”
“…….”
“기영 씨가 제게 말을 걸어줬습니다.”
“…….”
“방법은 알 수 없지만… 어쩌면… 어쩌면 되살릴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건….”
“기영 씨도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분명히요.”
* * *
“진짜 이런 상황이랑 이런 분위기에서 이런 말 하기는 싫은데… 조금 감동적이기도 하고… 근데 이게 살살 녹기는 하네요. 그렇지 않습니까? 디아루기아?”
“이 미친 쓰레기 새끼.”
“…….”
“구역질 나는 자식.”
“대륙을 구한 영웅한테 말이 조금….”
“개새끼. 저주받을 쓰레기 같은 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