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9화 마지막 (2) >
감고 있던 눈을 뜨고.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평소와 같은 풍경이 시야에 비쳤다.
“길드마스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오기는 했지만 곧바로 발걸음을 옮긴다.
-빛의 성자는, 베니고어의 아들은, 제 친구는 대륙을 비추는 빛이 되어 우리와 함께할 것….
여신의 거울을 통해 새어 나오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이윽고 사라져 버렸다.
잠깐 동안 여러 가지 소리가 섞여 들려왔던 길드 하우스 안이 조용해지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텅 빈 공간이 눈에 보인다.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고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적막함이 감도는 공간이 괜스레 더 어두워 보였다. 천천히 문 앞에 선 이후에는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은 방이 시야에 들어왔다. 조용히 의자에 앉아 방을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저어버렸다.
‘무슨 일이십니까?’
한동안 방 안을 서성이다 몸을 일으켰지만 여전히 아무런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괜스레 책상에 있는 책들을 쓰다듬었다.
그가 읽던 책이었다.
그는 항상 이곳에 앉아 업무를 처리하거나 책을 읽고는 했다. 할 일이 없을 때는 연금 키트를 가져와 이해하지 못하는 실험들을 하기도 했고, 조용히 앉아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급할 때는 식사를 이곳에서 하기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흔적들이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보내는 시간을 즐거워 한 것 같기도 했다. 한참이나 방 안을 둘러봤지만 여전히 아무런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아, 네. 식사라면… 이제 막 먹으려던 참이었습니다. 마침 좋은 타이밍이었네요.’
다시 한번 발걸음을 옮기자 테이블이 눈에 들어왔다.
간단히 할 수 있는 음식이 뭐가 있을까 떠올리다 이내 식재료 보관 창고에 손을 집어넣었다.
‘좋네요.’
간단한 생선 요리 정도가 괜찮을 것 같다.
그가 가장 좋아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와인도 괜찮겠네요.’
아무런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았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접시 두 개를 테이블 위에 놓은 이후에는 요리된 것을 입으로 밀어 넣었다.
맛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예전에 했던 것은 훨씬 더 괜찮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는다.
와인을 조금 마신 이후에는 다시 한번 몸을 움직였다.
어디로 향하는지는 자신도 알 수 없었지만 일단은 걷는 게 좋을 것 같다. 길드를 한번 둘러보는 것도 좋겠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자 훈련장이 시야에 비쳤다.
사실 그는 이곳으로는 잘 내려오지 않았다. 테라스에 나와 조용히 커피를 마시며 길드원들이 훈련하는 모습을 내려다보기는 했지만 이곳을 밟지는 않았다.
생각해 보면 몸을 움직이는 걸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다.
체력훈련이라도 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지만 선천적으로 몸이 약했던 탓인지 금방 녹초가 되어버렸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조용히 웃고는 했다. 잘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고, 너무 힘든 것 아니냐고 웃으며 이야기하고는 했다.
쓴웃음을 지으며 목검을 한 번 들고 휘둘러 봤지만 금방 흥미를 잃어버렸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서는 간혹 파티를 했던 것도 같다. 따로 연회장이 만들어진 길드 하우스였지만 훈련을 하고 난 이후에 모여 맥주를 마시고 이야기를 하다 곧바로 자리를 만든 경우가 많았다.
떠들썩한 분위기에 자연스레 자리가 만들어진 것 같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아니었던 것 같기도 했다.
훈련하던 모습을 내려다보던 그가 길드 직원들에게 넌지시 이야기를 건넸던 것이 분명할 것이다.
간이 테이블이 만들어지고 자리가 만들어지고, 준비가 끝나면 조용히 내려와 이야기를 건네고는 했다.
‘오늘도 고생 많았다, 덕구야. 현성 씨도… 고생하셨습니다.’
“저는….”
즐겁게 떠들고 웃다 보면 어느새 시간이 많이 흘러가 있었다. 너무 순식간에 시간이 흘러가 버려 조금 아쉽게 느껴지기도 했고 신기하게도 느껴지기도 했다.
다음 날의 스케줄에 지장을 줄까 걱정되기도 했지만 그래도 당시에는 자리를 즐겼던 것으로 기억한다.
실제로 몇몇은 다음 날 훈련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항상 같은 시간에 나와 커피를 마시며 신문을 읽고는 했다.
잠깐 눈을 마주치면 손을 들어 올렸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눈인사를 건넸다.
가끔 하얀 씨와 함께 나와 있기도 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제대로 들을 수는 없었지만 크게 웃는 모습을 본 적이 많다.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손님들도 저곳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교국의 의원들, 캐슬락 의원이나 카트린 의원, 교단의 손님들도 많이 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규모가 큰 티파티를 열 때면 항상 테라스가 떠들썩했었다.
그럴 때면 아래에서 훈련을 하는 길드원들은 조용히 훈련에 임하거나 실내 훈련장으로 들어갔었다. 티파티에 방해가 될까 걱정이 됐던 탓이다.
하지만 대부분은 이곳에서 시간을 보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마 모두가 그랬던 것 같았다. 서로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모두가 같은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여러 사람과 그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 잔잔하게 울려 퍼지는 음악 소리와 웃음소리, 간혹 새소리가 들려오거나 가벼운 해프닝에 소란스러운 소리는 이상할 정도로 마음을 편하게 했으니 말이다.
정확히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아마 평화롭다는 걸 실감했기 때문인 것 같다.
오늘도 일상이 시작됐구나, 이런 게 일상이구나 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물론 파티에 초대된 적도 있었다. 아니, 사실 거의 대부분 초대받았었지만 굳이 위로 올라가지는 않았다. 방해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실수를 할 수도 있지 않을까 곤란하게 하지 않을까 따위를 고민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참석하는 게 훨씬 좋았던 것 같다. 참석해야 했던 것 같다.
‘그러게 제가 뭐라고 말했어요. 현성 씨도 여러 사람과 친분을 다져 놓는 게 좋을 거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
‘몇 주 뒤면 마를린 영애의 생일이라고 들었습니다. 아마 이곳에서….’
“네.”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이후에는 다시 한번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누군가가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오기는 했지만 멈추지 않고 발걸음을 옮긴다.
회의실에 잠깐 앉았다 일어선 이후에는 괜스레 책상 위로 올라가 몸을 뉘었다. 우스운 짓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크게 상관하지 않았다.
조용히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다시 한번 텅 빈 공간이 눈에 들어온다.
‘오늘 회의는….’
아무런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았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원정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김미영 팀장님이 다시 한번 브리핑을….’
김미영 팀장님이 앞자리에서 이야기를 꺼낼 때면 항상 웃고 있었던 것 같다. 아니, 모두가 저마다 말을 건넬 때도 즐거워 했었던 것 같다.
심각한 회의가 쓸데없는 농담 때문에 옆길로 샐 때도 기분 좋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불편하다는 듯한 모습을 보일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웃고 있었던 것 같다.
‘뭔가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현성 씨?’
“아니요. 저는… 네… 괜찮습니다.”
‘그럼 오늘 회의는 이만 끝내는 게 좋겠네요. 커피라도 한잔할까요?’
다시 한번 발걸음을 옮긴다. 어디가 어딘지 잘 모르겠지만 일단은 걷자.
도서관.
창고.
그리폰 우리.
공방.
연회장.
천천히 거닐다 위를 올려다 바라보자 어느새 붉어지고 있는 하늘이 눈에 비친다. 아무런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았지만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길드 하우스의 옥상에 올라서자 린델의 정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전쟁이 일어났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린델의 풍경은 이전과 다를 바 없다.
저 멀리서도 보이는 붉은용병과 검은백조의 길드 하우스. 모험가들이 모여 만든 린델의 광장. 커다란 분수대.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경매장도 눈에 보인다. 그가 즐겨 찾던 레스토랑이나 카페도 이전 그대로다.
항상 떠들썩했던 광장이었지만 오늘따라 유독 조용했다.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조용히 하늘을 바라보자 점점 더 붉어지고 있는 하늘이 눈에 보인다. 날이 저물고 있다.
‘아름다운 풍경이네요.’
“네. 아름다운… 풍경입니다.”
‘약속을 지키게 돼서 다행입니다.’
“약속.”
‘언젠가 다시 함께하자는….’
“네… 다시 함께….”
오늘따라 정말로 이 풍경이 아름다워 보인다. 조금씩 조금씩 변하기 시작하는 하늘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미소가 지어진다.
조용히 옆을 바라보자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보인다. 하지만 눈을 깜빡이자 이내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어버렸다.
다시 한번 하늘을 올려다보고 옆을 바라보자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검이 시야에 비쳤다.
“다시 함께.”
천천히 검을 들어 올린다.
위를 올려다본다. 붉은색 풍경에 휩싸인 하늘이 세상을 비추고 있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아마 그가 비추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목에 서늘한 감촉이 느껴진다. 팔에 힘을 주고 검을 그대로 긋는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제대로 힘이 들어가기 전에, 날이 목을 파고들기 전에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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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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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으윽… 흐으윽…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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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이러지 마세요.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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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저주에서 벗어나게 해주세요. 제발… 제발….”
검 면에 비친 금색의 눈동자가 보인다.
이미 예전에 바뀌어버린 본래의 색은 돌아오지 않는다.
“제발… 부탁입니다. 제발… 이제 풀어주세요. 제발… 이제 매듭을 짓게 해주세요. 기영 씨. 제발… 제발… 제가 속죄할 수 있게 해주세요….”
[신화 등급의 특성 회귀자 사용설명서가 발동됩니다.]
누군가가 몸을 부여잡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다시 한번 검을 뻗었지만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검이 손에서 떨어져 내린다. 금색의 눈동자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이 검 면에 비친다.
아무것도 느껴지는 것이 없다. 연결되어 있는 감각도, 유대감도, 그가 살아 있다는 것도.
그 무엇 하나 느껴지지 않았지만 이 빌어먹을 주박은 여전히 자신을 옭아매고 있었다
“제발… 제발… 흐으으윽… 흐윽….”
아무런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살아가세요.’
“제발… 제발… 흐으윽… 이제… 됐어요. 이제 지쳤다고요. 흐윽… 제발… 다시 한번….”
아무런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살아가세요.’
“제발….”
‘살아가세요.’
하늘이 저문다.
붉은색의 빛나는 하늘에 검은색 장막이 덮인다.
손으로 얼굴을 한 번 훔친 이후에는 다시 한번 몸을 일으킨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검이 손에 잡힌다.
천천히 검을 허리춤으로 집어넣은 이후에는 다시 한번 발걸음을 옮겼다.
“내일은… 반드시 함께.”
‘살아가세요.’
“반드시.”
‘살아가세요.’
“함께….”
발걸음을 옮긴다.
방문을 열고 들어간 이후에.
천천히 눈을 감는다.
그리고.
[살아가세요.]
목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