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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767화 (758/1,590)

< 767화 끝으로 (26) >

노을빛에 둘러싸인 김현성에게 어떤 수식어를 붙여야 할지 모르겠다. 그 김현성이 신성하게 느껴질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루시퍼의 것도, 베니고어의 것도 아닌 온전히 자신의 빛을 뿜어내고 있는 녀석의 모습이 괜스레 대견하게 느껴진다.

‘처음부터 자격이 있었던 거였어.’

말 그대로, 처음부터 자격이 있었다는 말로밖에 설명할 수가 없는 광경이지 않을까.

베니고어가 준 신성을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애를 먹었던 나와는 반대로 김현성의 신체는 이미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한 계단 더 위로 올라갈 수 있는지 없는지는 위에 있는 적폐 연놈들의 선택이 아닌 김현성의 선택에 달려 있었던 거다. 어째서 모두가 김현성을 원하고 있었는지도 이해가 간다.

경력 있는 신입이자너.

흑이든 백이든 간에 곧바로 이런 자원을 영입할 수 있다는 건 놈들에게도 무척 달콤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시바 저걸 보라고.’

노을빛의 날개. 노을빛의 뿔, 노을빛의 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커다란 소리를 내지르고 있는 녀석의 모습은 뭔가 주먹을 꽉 쥐게 만드는 힘이 있다.

불가능한 걸 가능하게 만들 거라는 기대감을 품게 된다.

저런 건 많은 사람이 봐야지. 영웅이 우리와 함께 해주고 있다는 걸 더욱더 많은 사람이 알아야지.

생각과 동시에 동시다발적으로 공중에서 여신의 거울들이 떠오른다. 불가능에 도전하는 영웅의 이야기를 노래할 수 있게, 싸움에 지친 전사들을 위로해 줄 수 있게, 앞장서 걸어주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각인시켜줄 수 있게.

모두가 저 모습을 바라봐야지.

일순간 전장이 조용한 상태가 된 것 같다.

갑작스럽게 공중에 떠 있는 커다란 여신의 거울을 바라보며 모두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김현성이 검을 휘두르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지금까지 녀석에게 응답하지 않았던 노을빛의 검은 그 어느 때보다도 밝게 녀석을 비춰주고 있었다.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이들이 보인다. 무언가 할 말을 잊은 채로 조용히 고개를 올리고 있는 모두가 눈에 보인다.

도미니온스를 한 손으로 부축하며 신전을 빠져나가고 있는 조혜진도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어째서 쟤를 챙겨 나오고 있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입가에 미소를 그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안심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마침내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되찾은 김현성에게 보내는 미소같이 느껴진다.

그럴 만도 하다. 그동안 조혜진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얼마나 속이 후련한 모습일까.

악마의 모습으로 수많은 백금색의 검에 꽂혀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었던 그때의 김현성과는 다른 모습이다.

-길드마스터….

길드마스터라고 딱딱하게 부르지만 않았으면 더 그림이 됐을 것 같기는 했지만 저게 울 조노보노의 한계잖어.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곱게 묶여 있던 자신의 파란색 머리끈을 풀어 손에 꽉 쥐는 것이 눈에 보였다.

조혜진의 긴 머리카락이 순식간에 바람에 휘날리는 것이 시야에 비쳤지만 본인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모양.

얘가 도대체 왜 이러나 싶기는 했지만 계속해서 머리끈을 꽉 부여잡으며 바라보고 있는 게 수상하다.

‘시바, 혹시 현성이가 선물해 준 거 아니지?’

-힘내세요. 길드마스터.

분위기상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그게 아니라면 저걸 저렇게 꽉 쥐고 있을 이유가 없었으니까.

지혜 누나와 했던 내기가 생각나 미소를 흘리며 시선을 돌리자 이미 도미니온스의 몸에서 빠져나와 휴식을 즐기고 있는 이지혜가 눈에 보인다.

아, 누나 진짜.

‘아직 전쟁 끝난 거 아닌데….’

본인이 할 수 있는 걸 전부 하고 쉬고 있으니 뭐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창문에 걸터앉아서 커피 한잔하는 건 아니잖아.

-혹시 보고 있어도 너무 나무라지 마요, 오빠. 솔직히 나는 할 거 다 한 거 알고 있잖아. 여기서도 미끄러지는 거면 운이 없는 거지. 이미 내 영역을 벗어난 일인데 뭐 어쩌겠어요? 하늘에 맡겨야지.

심지어 하연수가 성심성의껏 이지혜의 팔다리를 주물러 주고 있는 모습은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예쁘네요. 언니. 정말 예뻐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저런 거 보면 정말로 신이 있기는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니까. 아니, 이미 신인가?

그녀가 들고 있던 커피잔을 손에서 놓친 것은 바로 그때. 하연수가 급하게 떨어진 커피잔으로 손을 뻗어 봤지만 결국에는 쨍그랑 소리를 내며 땅바닥으로 쏟아진 커피잔을 볼 수 있었다.

뭔가 불길한 일이 일어날 거라는 클리셰를 보여주는 건 나쁘지 않기는 했지만 왠지 모르게 내가 불안해졌다.

-…….

-이기영…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아니, 무슨 일 일어난 것 같아. 이것도 잘 안 보이기 시작했거든.

-…….

-…….

-연수야 나갈 준비 해.

-네? 갑자기요?

-지금 당장 나갈 준비 하라고. 제기랄.

이 누나 표정 좀 보라고… 한 번 비웃어 주고 싶은데 카스가노 유노를 보면 정말로 큰일 난 것 같아서 뭐라고 말을 못 하겠네. 아무 말 없이 주저앉아서 눈물만 줄줄 흘리고 있는 걸 내가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르겠어.

아무래도 행복한 미래가 보이지 않는 것 같다. 보이지 않는 건지, 볼 수 없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그녀의 표정이 이기영의 끝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환호성을 보내는 쪽이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노을빛의 검사다. 하핫. 노을빛의 검사라고!

-조금만 더 힘을 내라. 노을빛의 검사가 우리와 함께 싸우고 있다.

-부탁해요! 파란 길드마스터!

-할 수 있다고! 할 수 있어! 하하하핫!

전투에 지친 전사들은 전쟁의 끝이 오고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고 있다. 교국, 그리고 내 고향 같은 린델의 시민들도 저걸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아직 끝이 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저들은 종국에는 김현성이 승리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만 같다.

끊임없이 기도를 드리고 환호성을 보내며 대륙을 지키는 영웅을 위한 노래를 부른다.

눈물을 흘리며 서로를 껴안고 있었고 본인들을 이끌어 주는 영웅을 위한 기도를 드린다.

조금만 더 힘을 내주기를, 조금 만 더, 조금 만 더, 조금 만 더….

박덕구 이 새끼도 예외는 아닌 모양이다.

-멋있다. 그지. 아저씨. 우리 길드마스터 오빠. 진짜 멋있어.

-크으… 내가 뭐라고 했는지 기억하냐니깐. 우리가 승리할 거라고 말하지 않았나. 거, 결국에는 우리 형씨가 파바바박! 하고 전부 해치워 버릴 거라고 내가 몇 번이고 말했는데. 그게 이렇게 된 거 아니요.

-정말로 이걸로 끝날 수….

-거, 기모 형씨. 당연히 해낼 수 있을 거요. 내가 장담한다니깐. 형님과 형씨가 함께라면… 분명히 할 수 있을 거요.

웃음이 나오는 광경이다. 언제부터 쟤들이 저렇게 붙어 다니게 됐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좋은 풍경처럼 보인다.

1회 차 박덕구를 떠올려 보면 더욱더 그렇다. 저렇게 성장한 모습을 보니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다.

슬그머니 다가온 황정연이 녀석의 손을 잡고 있다. 둘 모두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고 박덕구는 다시 한번 중얼거렸다.

-분명히 할 수 있을 거라니까.

-네. 분명히 할 수 있겠죠?

이를 보이며 웃고 있는 모습, 왠지 모르게 나를 편안하게 만드는 웃음이었다. 그래서 내가 저 돼지를 좋아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쓸데없는 걱정이 순식간에 날아가 버리니까.

녀석도 1회 차와는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박덕구답게. 매번 떠들썩하고 재미있게. 황정연과는 아마 결혼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놈이 가정을 이룬다는 게 어색하게 느껴지기는 했지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박덕구의 자식들이 파란 길드에서 뛰어다닐 거라고 생각하니 정말로 웃음이 다 나온다.

그러고 보니까 나도 결혼하기로 했었지. 그래. 우리 하얀이 저기 있네.

‘이대로 죽으면….’

하얀이… 하얀이는….

자리에 철퍼덕 주저 앉아 한소라의 신체 일부를 껴안고 있는 모습. 하늘을 올려다 보며 안심했다는 듯이 숨을 몰아쉬고 있는 얼굴이다.

치열한 격전이 끝으로 다가왔고 이제야 조금 여유가 생긴 것 같은 표정이었다.

‘…….’

이후가 조금 걱정되기는 했지만 소라가 있으니 잘 버틸 수 있지 않을까.

아니, 왜 자꾸 내가 죽게 되는 걸 떠올리게 되는 건지 모르겠다. 이기영은 벽에 똥칠할 때까지 잘 살 텐데. 너무 연기에 심취한 모양이다. 그래도….

-오빠?

눈치 빠르네.

-오… 오빠?

방금 눈 마주친 것 같은데. 쟤는 진짜 귀신 같아. 무섭자너.

-오빠… 오… 오, 오빠.

허겁지겁 다시 한번 몸을 일으키다 앞으로 풀썩 꼬꾸라지는 것이 보인다. 주변 병사들과 마법사들이 정하얀을 붙잡고 있다.

그래. 쟤는 못 오게 하는 게 좋겠어. 한 줌의 마력도 남아 있지 않은 게 오히려 다행이네.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부여잡고 있는 정하얀의 모습이 주변의 다른 이들의 모습과 대비된다. 웃으며 환호성을 보내는 이들 사이에 정하얀은 한소라를 손에 꽉 쥐며 울부짖고 있었다.

정하얀의 눈에는 내가 보이는 모양이다.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는데… 너 혹시 이기영 사용설명서 같은 특성이라도 얻은 건 아니지? 제발 아니라고 해줘.

아, 만약에 정말로 내가 죽으면….

희영 씨. 그래. 희영 씨 말도 잘 듣고. 그나마 길드에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에 한 명이니까. 지금도 차분히 기도드리고 있는 것 봐.

첫 만남이 조금 안 좋기는 했지만 기회가 있었더라면… 조금 더 가까워질 수 있었을 텐데….

엘레나와 엘리오스도 보이네. 이종족들 사이에 선 두 남매는 조용히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후회하지는 않느냐.

-지금 보고 계시잖아요. 파란 길드가 제가 있어야 할 곳이에요.

-그래. 그렇게 보인다. 하하. 그렇게 보여. 지금까지 많은 기적을 봐왔다고 생각했지만… 이 광경은 정말이지….

-아름다운 광경이에요.

파란 길드에 온 걸 후회하지 않는다니 다행이네.

그 와중에 희라 누나는 노을현성이랑 싸울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제발 참아줘. 본능대로 움직이는 건 좋은데 너무 몸을 맡기면 주변 사람들이 힘들어지잖아.

그나마 붉은 용병이 있어서 다행이야. 저 길드가 그나마 누나를 가두는 철장이라는 게 믿기지가 않는다고.

-고생하셨습니다. 여왕님.

-전투는?

-거의 마무리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흠….

-여왕님?

-어때? 저거랑 나랑 싸우면 누가 이길 것 같아?

싸우지 마. 제발.

-아니, 대답하지 마. 지금은 그냥 즐기지 뭐. 정말로 이게 끝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더 올라갈 수 있는 곳이 보이는 게 다행이기도 하고. 저걸 보니 왜 우리 자기가 쟤한테 그렇게 달라 붙었는지 알겠네.

강함을 숭상하는 길드여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모두가 박수를 치며 존경의 눈빛을 보내고 있는 게 눈에 띈다.

-힘내. 파란 길드마스터님. 다들 응원이나 보내자고.

-힘내라! 힘내!

-하하하하하핫! 드디어 끝났다. 시발. 끝이야!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아직 끝난 건 아니야. 아직까지 싸움은 진행 중이니까.

김현성의 검에서 뻗어 나온 노을빛이 하늘에 부딪치자 모두가 환호성을 보낸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질적인 빛은 형태를 만들어낸다. 이대로 있으면 본인이 당할 것이라는 것은 직감한 시스템은 어마어마한 신성을 투자해 하늘을 꽉 채운 거인으로 변모한다.

김현성의 검에서 뻗어 나오고 있는 노을빛을 두 손으로 어떻게든 틀어 막으려고 하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왠지 모르게 옆구리가 비어 있는 것만 같다.

전에 낚시했을 때 박덕구가 신의 옆구리를 찌른 롱기누스의 창을 외쳤던 장면을 잠깐 동안 떠올리기는 했지만 다시 한번 고개를 흔들어버렸다.

김현성은 해낼 수 있을 테니까.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흐으윽… 으아아아아아아!!”

힘들지? 조금만 힘내. 널 응원하고 있는 새끼들이 이렇게나 많다. 야.

지금까지 마음의 눈으로 훑어 봤던 것들, 환호성을 지르고, 김현성을 위해 노래를 부르고 기도를 드리는 이들, 그래. 우리를 믿고 있는 길드원들.

아, 정하얀 같은 경우에는 조금 필터가 필요하기는 하겠지만… 하얀이는 살짝 빼고….

우리 병아리들. 이제 병아리라고 하기에는 뭣 하지만 아영이랑 창렬이… 그리고 신입 길드원 알프스까지. 열심히 응원하고 있자너. 그렇지?

너 좋다는 검은백조 길드 마스터도 있고,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기도하고 있잖아. 어쩌면 진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아니, 왠지 정말로 진짜로 마지막인 것 같아.

이게 정말로 내 마지막 회귀자 사용설명서가 될 것 같다고. 그러니까 확실하게 받아.

내가 본 것들. 너를 믿고 있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아. 널 응원하고 있는 새끼들이 이렇게나 많단다. 새끼야.

회귀자 사용설명서로 내가 본 것들을 김현성에게 흘려보낸다.

아마 김현성도 느끼고 있을 것이다. 내가 잠깐 동안 본 것들을, 이 마지막 싸움을 대륙이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느끼고 있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녀석에게 힘을 보내고 기도를 드리고 있는지 분명히 알고 있을 것이다. 입술을 꽉 깨물고 울음을 참고 있는 놈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힘내라. 시바. 우리 회귀자.’

마침내 녀석의 등 뒤에서 한 쌍의 날개가 더 솟아난다.

‘그래. 힘내라. 알타누스의 회귀자.’

노을빛의 검이 이질적인 빛을 가르는 게 눈에 들어온다.

어쩌면 불가능할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나를 배신하듯.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흐으으윽… 으아아아아아아아!!”

김현성의 빛은 이질적인 빛을 완전히 지워 버렸다.

쏟아지는,

쏟아지는 노을이 보인다.

“하… 하… 하하….”

역할극에 심취했는지 웃음이 나온다. 정말로 웃기지 않은가.

이후의 일이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이 이렇게 됐다는 게. 이기영의 마지막이 정말 이렇게 됐다는 게 우스워.

나는 김현성이 대륙 구하기와 이기영 구하기 중 후자를 선택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는데.

결국 희생하는 게 나라는 게 어이없지 않냐고. 진짜… 당황스러워 죽겠네.

나도 내가 왜 이랬는지 모르겠어. 설마 설마 하면서 지켜봤지만… 정말로… 정말로… 내가… 정신이 나갔었나 봐. 너무 심취했었나 봐.

“기영 씨?”

“…….”

그래도.

뭐.

풍경은 괜찮네.

“…….”

“…….”

“…….”

“기영 씨?”

“…….”

눈이 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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