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4화 끝으로 (23) >
‘이제 된 거지? 그렇지?’
사실… 사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모르겠다.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들어와 꽂히기는 했지만 뱃속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감각이 정상적인 사고를 방해하고 있다.
당연하지만 기분 좋은 감각은 아니다. 계속해서 이물감이 느껴지는 것은 물론 누가 용암이라도 부어버리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천천히 아래를 내려다보니 확실하게 배때기를 관통하고 있는 검이 시야에 비쳤다.
이미 입고 있는 옷은 붉은색으로 흠뻑 젖어 있었고 축축한 무언가가 하의까지 적시고 있는 게 느껴진다.
‘시바… 진짜로 찔렀자너.’
울컥울컥하는 소리와 함께 자꾸만 피를 토하게 된다.
“아… 어… 쿨럭….”
“…….”
김현성의 손이 진동이 온 것처럼 떨리는 게 느껴진 것도 잠시, 듀렌달을 그대로 손에서 놔버린 녀석은 피로 범벅이 된 자신의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회귀자 사용설명서는 아직까지 끊어지지 않고 있었지만 지금 녀석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내가 생각을 읽을까 조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완벽한 백지상태가 됐다는 말이 가장 어울리지 않을까.
‘복수는 허무할 뿐이자너. 이 새끼 지금 상태 이상하자너.’
“아… 으….”
‘지금 타이밍이 맞는 건 맞지?’
자꾸만 배에 꽂힌 듀렌달 쪽으로 손이 향하게 된다.
검의 손잡이를 꾸욱 움켜쥐면서 망원경을 바라보자 확실히 타이밍이 나쁘지 않았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카스가노 유노를 통해서 본 미래 그대로다.
차희라는 온몸에 창이 꽂힌 채로 적들과 맞서고 있었고 정하얀이나 골드 드래곤 역시 같은 장면을 보여주고 있었다.
카스가노를 통해 보지는 못했지만 내게 영향을 받았는지 땅바닥으로 추락하고 있는 디아루기아의 모습도 보인다.
‘아, 우리 디아루기아를 깜빡했네.’
사소한 문제를 제외하면 거의 다 온 것 같기도 하다.
김현성이 나를 싸늘한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지는 않았지만 아마 곧 그렇게 내려다보지 않을까.
일단 내가 쓰러진 상태가 아니니까. 미래에서는 분명히 쓰러진 상태였었지?
억지로 비틀거려 철푸덕 누워볼까 하는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괜히 부자연스러운 액션을 취하고 싶지는 않았다.
자연스럽게 그 시간에 딱 맞추는 게 이상적이다.
“너… 너는… 내 삶을… 앗아갔어.”
“…….”
“모두가… 모두 네 잘못인 거야. 모두가… 네 잘못이야. 나는 아무런 잘못 없어. 나는… 나는…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어. 그러니까 죄책감을 느낄… 필요도 없어.”
나를 바라보면서 하는 말이 아니다. 피로 흠뻑 젖어 있는 본인의 손을 바라보며 김현성은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저런 혼잣말을 하는 와중에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게 소름 끼치기는 하지만 아마 곧 녀석의 머릿속에서 정리가 끝나지 않을까.
조금 문제가 있다면 녀석이 나를 아직까지도 바라보고 있지 않다는 것.
그리고.
‘배때기에 검 들어가면 짠 하고 나타나는 거 아니었어?’
루시퍼 쪽에서 뭔가 피드백이 없다는 것뿐이었다. 아직 머릿속에서 본 미래가 완성된 것은 아니었지만 슬슬 조짐이라도 보여줬으면 좋겠다.
‘아니, 진짜. 이거 이러다가 시바 개죽음당하는 거 아니야?’
이거, 시바, 장면 완성되면 피드백이 오기는 오는 거지? 싸늘한 눈 등판하면 바로 피드백 오는 거지?
정말로 그냥 뒈지면 우리 디아루기아 불쌍해서 어떻게 해? 이렇게 죽기는 싫자너. 혼자 죽는 게 아니라 외롭지는 않겠지만 아무튼 싫자너….
그럴 리가 없다는 건 알고 있지만 슬그머니 불안해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점점 의식이 흐려지고 있었고 정말로 서 있기가 힘들다. 놈이 나를 내려다보는 순간 쓰러지고 싶었지만 저 새끼는 아직도 자신의 손을 바라볼 뿐 다른 리액션을 취하지 않고 있었다.
드디어 고개를 살짝 들어 올리는 게 시야에 비치기는 했지만 주저하는 것만 같다. 얼굴도 제대로 보이지 않아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모르겠다.
망원경 각도를 살짝 틀어 놈의 얼굴을 바라보자….
‘이 새끼 왜 울어.’
일그러진 얼굴로 눈물을 뚝 뚝 떨어뜨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너 우냐?’
“네가… 나를 망친 거야. 네가… 아무 죄 없는 나를… 네가… 네가… 지옥 같은 곳으로 끌어들였어.”
“…….”
“네가 내 모든 걸 빼앗아 갔어…. 모든 걸… 내 소중한 이들을 전부 죽이고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 걸 앗아간 거야… 이건 정당한 심판이야. 아주… 정당한… 이… 개… 개….”
“…….”
그럼 고개를 들어야지. 그게 보통 아니야? 복수할 대상이 어떻게 죽어가는지 구경하는 게 원래 제일 꿀잼 아니었나? 비릿한 조소라도 보내든가. 빨리 싸늘한 눈빛 보내줘야지.
아무래도 지금 피드백이 없는 게 장면이 완성되지 않은 것 같아서 그렇단 말이야.
막 혐오한다는 눈 있잖아. 아니면 아예 감정이 없다는 듯한 눈으로 딱 내려다봐야 될 것 같은데.
나 이제 막 쓰러질 것 같은데 다리에 힘도 풀리고 있고… 지금 뒤로 넘어가니까, 꼭 그렇게 내려다봐야 해. 쓰레기 보는 것 같은 눈으로 바라봐 줘야 되는 거. 알지?
천천히 몸이 뒤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저도 모르게 손을 내뻗고 있는 김현성이 보인다. 쓰러지는 내 몸을 붙잡으려고 하는 것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어째서 저 새끼가 저런 행동을 취했는지 알 수가 없다.
“어… 아… 아….”
같은 이상한 소리만 중얼거리고 있지 않은가. 심지어 제대로 잡아주지도 못했다. 손바닥을 적신 피 때문에 미끄러워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애초에 이걸 놓친다는 게 김현성의 신체 스펙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현상이다.
아마 몸에 힘이 전부 빠져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만큼 경황이 없다는 걸 말해주고 있는 것 같다.
덕분에 드라마틱하게 뒤로 꼬꾸라질 수 있었지만….
정신이 점점 멍해진다. 몸이 땅바닥에 붙어 있다는 것도 느껴지지 못할 정도로 멍하다.
그 와중에도 김현성 이 새끼의 얼굴에는 걱정이 묻어나오는 중. 뭔가 무조건반사적인 느낌이기도 했다.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인 것이다. 호흡이 점점 가빠지고 숨을 쉬기가 힘들어진다.
꺼억, 끄윽 소리만 나올 뿐 제대로 말이 나오지 않는다. 루시퍼가 깜짝 파티를 열어줬으면 좋겠지만 아직도 조짐이 없다.
김현성 이 개새끼가 걱정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싸늘한 눈빛 대신 자리한 것은 흔들리고 있는 눈빛이었다.
‘이 개새끼야….’
유대감 날아간 거 아니었어? 어떻게 이래? 지금 뭐가 어떻게 돼 가고 있는 거야. 너 왜 그래. 시발. 붙이지 마. 전부 다 찢어서 날려 버린 거 스스로 기워 붙이지 마.
이런 게 가능한 거야? 저항하지 마. 다시, 시발, 주워 담지 말라고. 다시 주워 담지 마. 믿고 있겠습니다 괜히 한 건가? 그 스노우볼이 이렇게 굴러온 거야?
물론 싸늘한 눈 엔딩이 스위치라는 보장은 없다. 루시퍼가 다른 준비를 하고 있을 수도 있고 어쩌면 정말로 숨이 끊어지기 직전에 나타날 확률도 존재한다.
하지만 녀석이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다는 것 부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다른 변수를 완전히 차단하고 싶은 내 입장에서는 현재의 김현성이 하려고 하는 짓은 위험을 감수하는 행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머릿속으로 다시 한번 아까 봤던 이미지가 떠오른다. 내 손으로 내가 쳐낸 녀석과의 유대감이다.
‘저는… 저는 회귀자입니다.’
그래, 너는 내가 선택한 알타누스의 회귀자지. 그러니까.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마. 내가 그린 그림을 망치지 마. 내가 시키는 대로 해야 돼. 알아들어?
‘꼭 받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사과의 의미도 있고 여러 가지로 기영 씨에게 필요한 물건일 테니까요.’
아무것도 필요 없으니까. 그냥 닥치고 네 역할에 집중해.
‘저는 조금 못난 사람이었습니다.’
뭐가 제일 못난 건지 알아? 네가 지금 하고 있는 짓이 가장 못난 짓이야. 이미 조각조각 난 걸 다시 붙여서 뭘 어쩌려고 그래? 감당할 수 있어? 지금 네가 저지른 일은 감당할 수 있냐고.
‘하지 마! 하지 말라고! 더 이상 짐을 들게 하지 마!! 더 이상!! 기영 씨! 거기서 나와요! 거기서 나오라고요! 하지 마… 흐으윽… 하지 말라고. 더 이상 뭘 어쩌려고… 더 이상 뭘 어떻게 하라고….’
너나 하지 마. 너나 하지 말고 거기서 나와. 더 이상 뭘 어쩌려고 그래? 여기서 뭘 어떻게 하려고. 그거 알아? 미래가 바뀐다고. 미래가 바뀌는 거야. 예정에 없는 일이 내가 제일 싫어하는 일이야.
‘죄송합니다.’
죄송할 짓을 하지 마.
‘기영 씨?’
내 이름 부르지 마.
‘저는 믿고 있습니다.’
개새끼야. 나는 이제 못 믿어. 시바.
‘그야 물론. 짐을 함께 들어주실 거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이미 벗어버린 거 아니었어? 다시 들지 않아도 돼. 너 지금 후회할 짓 하고 있는 거야.
이미 산산조각 난 것들을 다시 붙이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애초에 말을 할 수 있는 상태도 아니었지만 어처구니없어서 말이 나오지 않을 지경.
정말로 김현성은 회귀자 사용설명서에 저항하고 있었다. 아니, 내가 죽어가고 있기 때문에 지배력이 약해진 걸지도 모르겠지만 이를 악물고 다시 한번 컨트롤하려고 해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아까 봐왔던 것들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이미 한 번 본 것들이기는 했지만 내가 무심코 넘긴 것들도 전부 다 주워 담고 있다.
어마어마한 죄책감이 쏟아진다. 굳이 감당하지 않아도 될 감정들을 감당하려고 하는 모습은 코웃음이 다 나올 정도. 계속해서 이걸 붙이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하… 하… 하지… 마.”
“…….”
“안… 안 돼… 콜록….”
“흐… 윽… 흐윽….”
“개… 새… 끼… 하지 말라고… 쿨럭….”
미래는 변하고 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카스가노 유노를 바라보자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는 그녀의 모습이 보인다.
당황한 것 같은 얼굴이다. 예정에는 없었던 일에 무척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표정이 시야에 비친다.
장면들이 넘어간다. 차희라는 몸에 박힌 창을 전부 빼낸 채로 웃고 있었고 정하얀은 한소라의 실체 일부를 휘두르며 주문을 쏟아낸다.
김현성이 나를 싸늘한 눈으로 내려다봐야 할 타이밍은 이미 지나갔다. 적어도 1분 전에는 그 그림이 만들어졌어야 했다.
최대한 회귀자 사용설명서를 컨트롤하려고 해보지만 김현성의 정신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굳건했다.
그동안 너무나도 쉽게 휘둘렸던 것과는 다르게 이 개새끼가 내 의도대로 움직여지지 않는다.
아주 작은 감정을 움직이는 것부터 하려고 했지만 그것마저도 저항하고 있다. 조금의 틈도 보이지 않고 본인이 하고 싶은 작업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눈물만 뚝뚝 떨어뜨리고 있을 뿐 다른 말도 하지 않는다. 어마어마한 통증이 느껴진다.
내 배때기에서 느껴지는 통증이 아니다. 김현성이 조각조각 난 것들을 다시 끼워 맞추며 느끼는 죄책감에서 느껴지는 통증이다.
녀석은 그 고통을 전부 하나하나 곱씹으면서도 계속해서 망가진 것들을 주워 담고 있었다.
어째서? 이해가 안 되는데. 본인이 반병신이 될 거라는 걸 알면서 왜 주워 담고 있는 건데.
또 쓸데없는 책임감 때문이야? 그런 거야? 책임감 때문에 이러고 있는 거야? 네가 한 걸 네가 스스로 감내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그래? 그럴 필요 없는데. 굳이 그럴 필요 없다고.
마치 시간이 다시 되돌아가는 것만 같다.
악마소환 사태나 거울호수, 함께 식사를 하거나 그리폰 축제에 간 일, 길드원들과 시간을 보내고 쓸데없는 이야기를 나눈 일, 훈련을 함께 하고 원정에 간 일, 내게 업무를 몰아준 사건이나 박덕구와 함께 직업 선택에 대해 열변을 토한 일.
그리고.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기영이라고 합니다.’
내가 제일 먼저 끊어버린 첫 만남까지.
녀석은 끝끝내.
내가 던져 버린 것들을 다시 주워 담았다.
화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
“아… 으…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어… 흐… 윽… 끄으윽…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우웨에에에엑. 우웨에에에에엑… 흐윽… 흐으윽… 우웨에에에엑.”
“…….”
머리를 부여잡고 그 자리에서 허물어져 토악질을 하고 있는 김현성의 모습을 보게 될 때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기영 씨… 기영 씨… 기영 씨?”
“…….”
“기영 씨? 아… 안 돼… 흐으윽… 제발… 제발… 제발…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