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3화 끝으로 (22) >
가장 처음 이 미래를 봤을 때 걱정했던 것은 김현성이 이기영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느냐에 대한 것이었다.
혼자서 여러 가지 가정을 하기도 했다. 녀석이 나를 찌르지 못할 경우 반드시 찌르게 만들어야 했으니까.
정말로 이기영이 가면의 영웅이었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부터, 1회 차 가면 쓰레기 이기영을 연기하는 상황까지. 심지어 김현성을 자극할 만한 대사 리스트를 뽑기까지 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그냥 자극할 만한 대사 정도가 아니라 1회 차의 김현성을 원초적, 근본적으로 깎아내리며, 녀석의 미국 간 동료들까지 모욕할 만한 대사들이었다.
그걸 꺼낼 수 없다는 게 조금 아쉽게 느껴지기는 했지만….
지금은 다른 종류의 걱정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여겨진다.
단순히 배에 칼을 박는 것뿐만이 아니다. 김현성은 지금의 이기영을 최대한 괴롭게 죽이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팔다리를 자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온갖 모욕적인 방법을 계속해서 떠올리고 있다.
이 새끼가 너무 실험적인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될 정도였다.
‘이단심문관으로 일해도 되겠는데… 익숙하지가 않네.’
무섭다. 김현성이 내 목을 잡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을 초월한 무언가가 쏟아내고 있는 적의 때문에 숨이 턱하고 막힌 것만 같다.
김현성이 손아귀에 힘을 주면 여린 목은 순식간에 부러질 것이다. 아니, 단순히 부러지는 정도가 아니라 손으로 두부를 으깨버리는 것처럼 산산 조각나지 않을까.
김현성이 조심하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최대한 흥분을 가라앉히려고 하고 있다.
자신의 손아귀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지 않을까 하는 종류일 것이다.
녀석이 지금까지 내가 생각하고 있었던 김현성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개 쓰레기 같은 자식. 내가 이날을 얼마나 기다려왔는지 알아?”
“케… 켁….”
“구역질 나는 놈.”
그 와중에 풀어낼 수 있는 모욕적인 언어의 한계치가 보이기는 했지만….
으지직.
“케… 케헥…. 으그으읍….”
순간적으로 숨을 멈추게 만드는 고통이 팔에서 느껴진다.
‘시바… 시바 새끼야. 시바… 진짜.’
웃고 있는 얼굴이 보인다.
‘개새끼. 시발 새끼. 진짜로… 진짜로… 때렸어. 시발. 시발. 시발.’
물론 이렇게 해야 한다는 건 알고 있지만 갑작스레 내가 처한 상황이 서러워지기 시작했다.
‘동네 사람들 이 새끼가 저 진짜로 때렸어요. 시바.’
다리는 이미 감각이 없고 이제는 팔이 너덜너덜해졌다. 어마어마한 고통 때문인지 정상적인 생각을 하기가 힘들 정도.
그나마 정신이 붙어 있는 이유는 높은 지력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솔직히 이 고통에 익숙해질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내가 생각했던 김현성과 너무 달라 억울하기까지 하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한계에 다 달았을 때 녀석이 움켜쥐었던 내 목을 놓아주는 것이 느껴진다. 자연스럽게 몸은 땅바닥을 나 뒹굴고 한쪽 손은 망가진 팔을 붙잡게 된다.
그만큼 고통스럽다. 마취물약을 가지고 있었다면 조금이나마 여유가 있겠지만 그런 여유 따위는 없다.
온몸이 땀으로 젖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호흡도 비정상이다. 눈에서는 자꾸만 눈물이 차오르고 있었고 입을 열면 곧바로 신음을 내뱉을 것만 같은 상태였다.
‘시바. 정신 나간 새끼. 나쁜 새끼. 천벌 받을 새끼. 시바. 시바… 나쁜 새끼. 진짜 복수할 거야. 진짜로 복수할 거라고.’
“뭐라고 변명이라도 지껄여 봐. 이 역겨운 새끼야.”
‘네가 시바 어떻게 나한테 이래? 시발놈. 네가 진짜로 어떻게 나한테 이래. 개새끼야.’
“하아… 하윽… 아….”
“고통스러워? 괴로워? 벌써부터 그런 표정 지으면 안 되지. 지금부터가 시작인데. 아주 즐거워질 거야.”
‘이 사이코패스 같은 새끼.’
“이렇게 될 줄은 누가 알았겠어. 그렇지 않아?”
‘그래 나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이 나쁜 새끼야.’
당연히 입술을 꽉 깨물 수밖에 없었다.
‘진짜 이러다가 이 나쁜 새끼가 사람 잡을 것 같자너. 트라우마 생길 것 같자너.’
일단 이 미친 폭주 기관차를 어떻게든 멈추는 것이 급선무였다. 배때기까지는 기분 좋게 내어 주겠지만 온몸이 걸레짝이 된 채로 돼지우리에 던져지고 싶은 생각은 없다.
옆쪽에서 즐겁다는 듯이 웃고 있는 세라핌의 표정도 마음에 들지 않고….
사실 누가 봐도 현재의 김현성은 이성을 잃은 상태로 보이지 않은가.
자신의 모든 걸 망친 빌런에게 분노를 쏟아내는 것 말고 다른 걸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어떻게 생각해도 이 새끼들 진정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
“현… 현성 씨.”
“그 더러운 입으로 내 이름을 부르지 마. 개자식.”
“아… 아파요. 아… 아파.”
“겨우 그 정도로?”
‘이 새끼 시바 피도 눈물도 없네. 진짜.’
“어째서….”
“네가 더 잘 알고 있잖아.”
‘말할 틈을 안 주자너.’
기왕 눈물 나오는 거 더 서럽게 울어보자. 이미 아파 뒤지겠는데 더 아픈 척 한번 해보자.
이럴 때는 일단 모르쇠로 일관하는 게 최선의 선택일 테니까. 이기영이 가면의 영웅인가 아닌가의 여부는 일단 건너뛰고 현재의 이기영은 1회 차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는 포지션을 취해보자.
‘난 아무것도 몰라. 진짜. 너 나한테 왜 그래. 갑자기 왜 그러는 거야. 나는 기억나는 것도 하나도 없고 네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도 모르겠는데. 도대체 이러는 이유가 뭐야? 가면 쓰레기는 진청이었자너. 내가 아니라 진청인데 도대체 왜 그래.’
정도로. 아, 여기에 한 가지 더.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거야? 세뇌라도 당한 거야? 형은 네가 너무 걱정된다. 현성아. 내 몸은 어떻게 돼도 상관이 없는데 네가 걱정돼서 참을 수가 없어.’
후자가 더 빛기영에 어울린다.
가슴 따뜻했던 그 녀석이라면 분명히 후자의 포지션을 취할 것이다.
자신의 몸이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머릿속에는 회귀자의 상태에 대한 걱정으로 꽉 차 있을 것이 분명하다. 그래야 이 새끼가 지금 하는 행동에 죄책감이라도 느끼겠지.
사실 조금 주저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든다. 지금이야 이성을 잃은 상태기도 하고 의심이 머릿속에 꽉 찬 상태이기는 했지만….
‘나는 김현성을 알아. 시바.’
인간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온갖 전쟁을 겪고 거친 생활을 해 인격이 바뀌었다고 한들, 김현성은 본질적으로 여리다.
녀석이 정말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자신을 걱정하고 있는 빛기영에게 단죄의 철퇴를 날릴 수 있다고?
물론 날릴 수야 있겠지만 머릿속으로 상상하고 있는 짓까지는 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 유대감은 끊어졌지만 그래도 추억은 남아 있는 상태자너. 물론 네가 거기에서 아무것도 느끼고 있지 못한다고 한들, 기억은 하고 있을 거 아니야.
의심이 아니라 확신하고 있겠지만 나는 영문도 모르는 채로 이렇게 고통받고 있는데.
솔직히 네가 그렇게까지 나쁜 새끼는 아니잖아. 전혀 흔들리지 않을 거라고는 생각 안 해. 죄를 저지른 건 1회차 이기영이지 2회차 이기영이 아니야.
아, 물론 내가 가면 쓰레기라는 말은 아니지만 굳이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1회 차와 2회 차를 분리할 필요가 있다는 거야.
“현성… 현성 씨. 괜찮으신….”
“그 더러운 입으로 날 부르지 말라고 이야기했다.”
“아으윽! 아아아아아악!”
‘개새끼 또 찔렀어. 아니, 욕하면 안 되지. 이해해 줘야지. 현성이 지금 많이 힘들자너. 외신 비둘기한테 정신 마법 당한 거라고 생각해야지.’
범인은 세라핌 저 개자식일 것이다. 녀석이 김현성을 뒤흔들었고 아무 죄 없는 나를 의심하게 만들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조금만….”
“뭐?”
“제가 해결할 수 있을 것 같… 습니다. 조금만….”
“내가 속을 것 같아?”
‘응.’
속을 것 같아. 의심은 지울 수 없겠지만 최소한 내가 1회 차를 자각하지 못한다는 설정을 때려 받는 것 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
장담하건대 분명히 가능할 것이다.
이미 표정을 뒤바꾼 상태이기는 했지만 곧바로 김현성을 걱정하는 눈빛으로 갈아치운다.
고통을 최대한 참은 채로 오직 녀석의 상태만 걱정하는 성자 중의 성자의 모습을 보이자.
얼마나 집중했는지 몸에 새겨진 통증들이 더 고통스럽게 느껴진다. 새어 나오는 신음과 비명을 억지로 삼켜내며 말을 잇는다.
“정확히 무슨 말씀… 말씀을 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전부… 전부 잘 해결될 겁니다. 그러니 조금만 참으세요.”
“…….”
잘 뻗어지지는 않았지만 억지로 손을 뻗는 행동을 보여주는 것도 괜찮겠지.
지금 내 모습이 어떻게 보일까. 정말로 비참한 것처럼 보일 것 같은데.
여기로 오는 동안 땅바닥에 두 번 정도 처박혔고 지금 한쪽 다리도 이상하잖아. 팔도 거의 박살 난 것 같고… 전장도 한 번 굴렀으니 온몸이 피범벅이 되었을 거야. 극적이잖아. 그렇지 않아?
“나는 네 말 따위는 믿지 않아. 더러운 새끼.”
“조금만… 조금만 더….”
“어떻게든 이 상황을 빠져나가려고 발악하는 거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눈치 빠르기는 하네.’
일단 울어야지. 진짜 실감 나게 눈물 뚝뚝 떨어뜨려야지. 사과도 한 번 박아주자.
“제가… 제가 죄송합니다.”
“웃기지 마. 그 혓바닥을 당장 뽑아버리기 전에 입 다물어. 사실은 너도 알고 있잖아. 전부 다 기억하고 있지 않아? 이 모든 상황을 자초한 거 너였어. 네가, 네가 내 삶을, 내 영혼을 망친 거야. 내 모든 걸 앗아가고 나를 부정하고 네 손바닥 위에서 나를 춤추게 만든 거라고. 그런 모습을 보인다고 내가 동요할 것 같아? 모든 게 연기라는 걸 내가 정말로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 이제는 알아.”
‘혓바닥이 길어지셨네요.’
“얼마나 나를 병신으로 생각했을까. 그동안 네가 내 옆에 서서 나를 손에 쥐고 흔들었을 때, 그걸 보고 얼마나 나를 비웃었을지가 상상이 되지 않아. 이제는 절대로 내게 속는 일 따위는 없을 거야. 더러운 새끼야.”
‘왜 자꾸 더럽다고 해? 나 깨끗한 사람이야.’
“말해… 모든 걸 알고 있었다고 이야기해.”
“현성… 씨?”
“말하라고. 1회 차의 가면을 쓴 남자가 너였다고 이야기해.”
“그런 확인이 필요한가? 김현성?”
“넌 그 입 닥쳐. 세라핌.”
“…….”
병신 새끼 한마디 거들려다가 본전도 못 건졌죠? 찌질해 가지고 바로 입 다물죠?
“…….”
“마지막 기회를 주는 거야. 네가 저지른 모든 악행에 대해 고백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야. 어차피 넌 죽을 거야. 난 알아. 네가 그 가면을 쓴 남자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어.”
‘그건 확신하고 있겠지, 뭐.’
“나는 네가 뭘 선택하는지는 관심 없어. 어차피 너 같은 벌레 새끼는 이 세상에 없는 게 이로우니까. 네가 지금 걱정해야 하는 건 하나야. 평생을 가축처럼 살다가 비참하게 끝을 맞이할 것인지, 아니면 인간답게 죽을 것인지. 그러니 말해. 진실을 이야기해. 이 모든 게 네가 저지른 일이라고 말해.”
‘내가 말 못 할 것 같아?’
김현성이 원하는 말은 백 번이라도 더 해줄 수 있다. 다만 그게 어떤 뉘앙스냐는 게 문제겠지.
최대한 감정을 잡는 게 좋지 않을까 싶다.
뭘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지금의 김현성을 이해하고 있다는 눈빛을 보낸다. 네가 그걸로 마음이 편해질 수 있다면 몇 번이라도 더 고통을 겪을 수 있다는 태도를 보인다.
머릿속에 있는 복잡한 생각들이 그걸로 해결될 수 있다면 기꺼이 이기영의 배때기를 내어 주겠다는 얼굴을 선보이자.
아프겠지만 참아야겠지. 괴롭고 슬프지만 이제는 눈물을 흘리지 말자. 빛기영은 절대 슬픔 때문에 눈물을 흘리지 않으니까.
아니, 이건 기쁨의 눈물이다. 이미 타들어 가는 생명을 가장 아꼈던 친우를 위해 희생할 수 있다는 기쁨의 눈물이다.
잘 일으켜지지 않는 몸을 억지로 일으킨다.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아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것 같았지만 고통을 삼키며 정면으로 회귀자를 마주 본다.
나를 경계하는 김현성의 모습이 보인다.
하지만 내가 저항할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일까. 한 손으로 검을 꽉 쥔 채로 나를 바라보는 게 시야에 비쳤다.
지금까지 대륙을, 친우를, 형제를 위해 모든 걸 희생했던 빛은,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희생하기 위해, 자신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선의의 거짓말을 입을 담았다.
“네. 저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걸로 네 마음이 편해진다면, 그걸로 대륙을 지킬 수 있다면 이런 고통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다시 한번 눈물 젖은 모습으로 그렇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분명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김현성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네가… 네가… 네가 내 모든 걸 망친 거야.”
“…….”
“네가!! 흑… 내 삶을, 내 영혼을 좀먹은 거라고! 나는 이유도 모른 채로 네게 수없이 휘둘렸어. 이유도 모른 채로 내가 원하지 않은 것들을 해야 했고 원하지 않은 죽음을 목도해야 했어. 모든 게 너 때문이야. 모든 게! 모든 게 너 때문이라고!”
“…….”
“쓰레기 자식. 더러운 새끼! 이 더러운 개자식!!”
어째서인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는 김현성이 보인다.
분노로 얼룩진 얼굴 역시 시야에 비쳤다.
김현성은 속에 있는 한을 풀어내듯,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검을 내지른다.
녀석의 검이 내 복부를 꿰뚫은 순간.
나는 작은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
“믿고 있겠습니다. 현성 씨.”
순간 일그러진 표정으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는 녀석이 시야에 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