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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758화 (749/1,590)

< 758화 끝으로 (17) >

‘이 머저리 같은 놈이 드디어 해냈구나. 드디어 해냈어.’

드디어 내게 한 방 먹일 방법을 찾았다는 듯이 입꼬리를 올리는 세라핌의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그래. 너는 자격 있다. 진짜.’

녀석은 저렇게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을 자격이 있다. 첫 단추를 조금 잘못 끼우기는 했지만 지금에 와서라도 본인의 역할을 깨닫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곧바로 열심히 노력해주고 있는 세라핌을 독려하고 싶었지만 현재의 상황에서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을 리 만무, 일단은 상황을 지켜보는 게 최우선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녀석이 포문을 열기는 했지만 이번 작업의 빌드업은 지금까지 해왔던 그 어떤 작업과 비교해도 어렵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힘든 작업이었으니까.

어째서냐고?

그야 뻔하자너.

‘믿을 리가 없지. 뭐.’

김현성이 녀석이 되는 대로 지껄이는 말을 쉽게 믿어줄 리가 없다.

‘상식적으로 저게 귀에나 들어오겠어?’

내가 스스로 고백한다고 하더라도 믿어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몇 년 전에 김현성이었다면 티끌만 한 의심이 가슴 속에서 무럭무럭 자라났겠지만, 묘령의 여인이 해준 조언과 노을로 정화된 우리의 빛현성이의 따뜻한 가슴 속에 마구니 따위는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최소한 무의식 세계에 합의를 본 순간부터 이기영이 가면 쓰레기라는 공식은 녀석 안에서 절대로 성립되지 않는다는 거다.

충신들이 궁궐 앞에 모여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전하! 그자는 전하를 망치고 있는 간신이옵니다!’라고 상소문을 올리며 버티기에 들어선다고 한들 김현성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그러할진대, 그러할진대 평생의 숙적이라고 한 비둘기가 지껄인 개소리를 믿는다니 그게 가당키나 한가.

‘개소리죠.’

당연히 개소리로 들리겠죠.

최소한 ‘그게 무슨 소리지?’ 또는 ‘뭐라고?’ 따위의 반응을 기대하고 있었던 세라핌 역시 입술을 꽉 깨물기에 여념이 없다.

아예 반응조차 하지 않는 모습은 가관, 세라핌의 말을 듣기는 들은 것인지 의심이 될 정도였다.

‘와… 이거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가야 하냐. 라핌아, 이거 어떻게 할 거야?’

아마 세라핌 역시 나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지 않을까.

‘뭐 어쩌겠어. 일단은 밀어붙여야지. 마침 전투도 소강상태에 들어간 타이밍이잖아. 이런 타이밍 잘 안 온다고. 조금 더 해봐. 여기서 포기하면 안 돼.’

-설마 모르고 있었던 거야?

-개소리에 대답해 줄 시간 따위는 없다.

-나는 네 인생을 망가뜨린 이가 누구인지 알고 있어. 너도 사실은 알고 있을지도 몰라. 단지 부정하고 있을 뿐이지. 불쌍한 김현성. 불쌍한 알타누스의 회귀자. 너도 사실은 알고 있잖아?

‘아니, 시바, 모르고 있는 것 같은데. 잘 좀 해볼 수 없어? 그런 식으로 말을 하면 얘가 어떻게 받아들이겠어.’

-우리와 함께 한 가면을 쓴 남자가 누구일까?

‘아, 이 새끼 틀린 것 같은데. 졸라 못하자너. 말에 두서도 없잖아. 시바.’

처음부터 차근차근 설명해 줘도 알아들을까 말까 한 상황에서 저따위 말을 지껄이는 걸 보니 희망이 있을 것 같지가 않다.

-우리가 그에게 손을 내민 것이 아니야. 김현성. 그가 우리에게 손을 내민 거지. 그는 우리와 함께하고자 했어. 함께 손을 잡고 인류를 정화하고, 관리하는 것을 도울 수 있다고 말했지. 그는 자신이 우리에게 선택받은 인간이라고 이야기했어. 앞으로 우리가 관리하게 될 세상에 일원으로써 살아가겠다고 이야기하기도 했지. 지금의 인간들은 잘못됐다고. 썩어 문드러지고 오염됐다고. 그들에게는 통제가 필요하며 새로운 가치관이 필요하다고 주장했….

‘그래 그런 식으로 빌드업 하는 거야. 그런 식으로.’

천천히 말을 이어나가는 녀석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당연히 김현성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있는 것 같았지만 말이다.

-잠깐 체력을 회복하겠습니다.

‘그래. 체력 회복 많이 해놔.’

진실을 듣고 있는 김현성보다 진실을 말하고 있는 세라핌 쪽이 더 절박해 보인다.

믿어달라고 외친다기보다는 뭔가 본인이 말하면서도 울컥울컥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어느새 말투도 조금 달라진 것 같다. 목소리 톤이나 어조 같은 것들이 뒤죽박죽이 바뀌고 있다.

본래의 모습이 얼핏 얼핏 나오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내게 있어서 반가운 소식은 아니었다.

‘조금 더 강한 어조로. 시바, 확신의 찬 어조로 말을 해야지. 저게 뭐야. 시바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고 우물쭈물거리기나 하고… 저러면 시바 현성이가 퍽이나 믿어주겠다. 시바.’

-…….

-그래. 그 쓰레기 같은 가면을 쓴 남자의 말대로, 그는 새로운 대륙에서 살아가기 위해 적합한 인간처럼 보였… 보였다. 그는 누구보다도 헌신적이었고, 때로는 순수했으며 때로는 과감하기도 했지. 그는 결단을 내리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그… 그… 그 누구보다 우리를 더 잘 이해해 주고 있는 것처럼… 아니 그때는 틀림없이 우리를 이해해 주고 있었다. 우리를… 여기서부터는 너도 아는 이야기일 거야. 김현성.

-…….

-그는 인류를 파멸시켰다. 그들을 벼랑 끝으로 내몰았지. 인류에게서 대마법사를 빼앗고, 그들을 분열시켰다. 그는 개체 수를 줄인다는 과업에 그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임했던 거야. 너희들의 저항은 거셌지만 너희들 역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을 거야. 그렇게, 그렇게 매번 너의 앞을 가로막고 네게 절망을 선사한 이가 누구인 것 같아?

-…….

-나도 확실히 알 수 없었지만 이제는 알아. 김현성. 어째서 그가 우리에게 와서 인류를, 아니, 대륙을 부숴버린 건지, 그의 진짜 목적이 뭔지. 이제는 알 것 같아.

‘조금 횡설수설하고 있기는 한데 전달력은 괜찮아졌어. 가면의 영웅한테 말하는 법은 안 배웠어?’

-그자는 새로 시작하기를 원했던 거야. 모든 걸 처음부터 시작하기로 마음먹은 거라고. 목적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것 하나는 확실하게 알 수 있어. 그는 너를 선택한 거야. 김현성. 모든 걸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게 하는 계획에 너를 끌어들였지. 대륙을 관리하는 신들이 복구할 수 없을 정도로 대륙을 부숴버린 이후에 너를 자신의 장기 말로 사용하기로 결심한 거야. 시련을 내리고 짐을 떠안겼지.

‘점점 더 괜찮아지고 있네. 이거 응원하면 상태 더 좋아지기는 하는 거지?’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를 생성합니다.]

[너…. (0/1)]

일단은 당황하는 척해줘야지. 그래야 자신감 팍팍 살아나잖아.

아니나 다를까 침을 꿀꺽 삼키고 있는 놈의 모습이 눈에 띈다. 메시지를 받은 이후에는 뭔가 여유를 찾은 것만 같다.

본인이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고 있다고 느끼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내게 커다란 타격이 갈 거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을까.

한 번 더 메시지를 보내도 괜찮겠지.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를 생성합니다.]

[그만…. (0/1)]

‘키야. 이거 좋다. 그만.’

-모든 건 자기 자신의 추악한 욕심을 위해서였을 거야. 김현성. 그자에게 너 같은 종류의 인간은 다루기 쉽게 느껴졌을 테니까. 나는 너보다 그자에 대해 잘 알고 있어. 생각해 봐. 누군가를 회귀시킨다는 게 쉬운 일인 것 같아? 정말로 이 대륙을 관리하고 있는 신들이 이 커다란 리스크를 떠안고 너를 회귀시켰을까? 어째서 마지막에 너만 남겨졌을까? 어째서 네가 움직이는 곳에 그가 있었고, 어째서 너는 그 커다란 절망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야 했을까. 어째서 안 좋은 일은 항상 너에게만 일어났고, 어째서 네 주변의 모든 사람은 차례차례 죽어갔을까. 어째서 너는 처음부터 모든 걸 다시 시작해야 했을까. 어째서 네 두 번째 시작에는 그가 함께하고 있었을까. 모든 게 이상하지 않아?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를 생성합니다.]

[제발 그만…. (0/1)]

-그자가 제일 걱정하는 것은 자신의 안위야.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관심이 없어. 그는 누구의 편도 아니고 누구의 아군도 아니야. 오직 자신만을 생각하는 지독한 인간이야.

‘이 새끼 나쁘지 않네.’

진짜로 잘해주고 있는 것 같아. 칭찬받아야 좀 살아나는 타입인가 봐.

화술이 좋다고 콕 집어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뭔가 목소리에서 진실 됨이 느껴진다. 심지어 일이 어떻게 된 건지에 대한 걸 순간적으로 캐치해 내는 능력도 좋은 것 같다.

가면의 영웅의 참된 의도와 정확히 김현성이 어떻게 회귀했는지에 대한 경위에 대해서 파악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녀석이 저 정도까지 해줬다는 건….

‘진짜 힘 제대로 줬나 보네.’

녀석 나름대로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고 있는 거라고밖에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는 어디까지나 욕심을 위해 너를 선택한 거야. 모든 이들을 손으로 주무르고 자신이 원하는 데로 움직이게 만드는 악마. 가면을 쓴 남자. 그 남자의 정체가 누구인지 궁금해?

-…….

-네게 지금 말을 걸고 있는 그자잖아. 네게 지시를 내리고 있는 그자라고. 이제 알겠어? 이제야 이해가 돼?

‘아니. 시바,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세라핌이 나빴다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조금 더 차근차근히 풀어나가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아 있기야 했지만, 이 정도라도 해준 게 어딘가 하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일단 자신이 말하고 싶은 건 전부 토해낸 것 같이 보이기도 했고 결정적으로 핵심을 잘 꼬집어 이야기했다.

이기영이 가면을 쓴 남자였고, 그 목적이 너를 회귀시킨 것이라는 거까지 설명을 마쳤다.

‘뭔가 감정에 호소하는 것 같은 느낌도 마음에 들기는 했었는데.’

결과물은 아웃이라는 게 문제였지.

-거의 다 회복한 것 같습니다. 기영 씨. 다시 가도 되겠습니까?

‘이 새끼 한 귀로 듣고 그냥 한 귀로 흘린 것 같은데. 제대로 들은 건 맞는 거지? 확실히 듣기는 들었지?’

듣기는 들었다만 재고해 볼 가치도 없는 쓰레기 같은 말이라도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너무나도 굳건한 믿음에 나 역시 내가 그런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그래, 시바, 나라도 안 믿겠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저 미친 비둘기가 전투 중에, 그것도 지가 밀리니까 입 터는 느낌인데 저걸 누가 믿겠어?’

하지만 김현성은 믿어야 한다. 무조건 믿게 될 것이다. 조금 미안하기는 하지만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전투 외 부분에서 건드리는 건 조금 찝찝한데. 윤리적으로도 조금 그렇고… 막 내가 현성이를 함부로 쥐락펴락하고 조종하고 그러는 것 같아서….’

그래도 대의를 위해 이번 한 번은 예외를 두는 게 좋을 것 같다. 카스가노 유노가 보여줬던 풍경이 실제로도 아른거리는 타이밍.

김현성은 여기서 번쩍하는 뭔가를 얻어 가야만 했다.

‘움직일 수 있어.’

회귀자 사용설명서는 김현성의 감정을 인위적으로 조종할 수 있다.

녀석이 찬반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내가 그렇게 움직이게 유도한다면 녀석은 그렇게 움직일 수밖에 없다.

“네. 곧바로….”

일단 아주 작은 것부터 시작하자.

너무 갑작스럽게 커다란 게 들어서면 이상할 수도 있으니까 머릿속에 아주 작은 의심을 키우는 것부터 시작하자.

그때랑 똑같은 거야. 현성아. 딱 그 정도. 노을로 합의 보기 전에 했던 아주 작은 의심 있잖아. 내가 그걸 심어 줄게.

정황상 세라핌의 힘찬 연설을 듣고 마구니가 들어왔다고 생각하면 되겠네. 그렇지?

-어?

하는 소리와 함께 김현성이 잠깐 머리를 부여잡는 것이 보인다.

무척 당황하고 있는 얼굴이 눈에 띈다. 무슨 이미지를 떠올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내가 가면의 영웅과 겹쳐 보이는 이미지일 것이다. 최대한 순진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야지.

“왜 그러십니까? 현성 씨?”

-네… 아…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네. 죄송합니다.

‘아무것도 아니지는 않잖아. 솔직히. 세라핌 너도 가만히 있을 거야? 한마디 더 해줘야지.’

-진실이 뭔지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직시해. 김현성. 그자는 네가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야.

-…….

-내 말이 진실이라는 거 눈치채고 있잖아.

-그 입 다물어라, 세라핌.

‘진전이 있었죠?’

아예 상대 자체를 하지 않았던 전과는 다르게 세라핌의 말에 민감한 것 같다.

이쪽의 생각대로 일이 진행되고 있다는 걸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김현성은 지금 무서워하고 있다. 자신이 녀석의 궤변에 흔들리는 것은 아닌지 두려워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말을 걸어오는 모습마저 눈에 띈다.

-기영 씨… 혹시 제게 정신착란 마법이나 비슷한 종류의….

“그런 전황은 없습니다. 현성 씨. 뭔가 문제라도 생긴 건가요?”

-아니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기영 씨. 죄송합니다.

‘뭐에 대한 사과야? 나를 의심하고 있는 거? 아니면 현재 상황에 집중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거? 전자면 굳이 사과할 필요는 없잖아. 어차피 나는 네가 날 의심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는 상태인데.’

김현성은 살짝 떨리고, 울먹이는 목소리로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다시는 이런 생각을 하지 않겠다는 듯 고개를 양옆으로 계속해서 저으며 말을 이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제가… 그러니까… 죄송합니다.

나는 혼란스러워하는 녀석의 머릿속에 다시 한번 의심을 한 스푼 집어넣었다.

‘현성이 멘탈 괜찮은 거지?’

하지만 지독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자기혐오에 둘러싸인 녀석을 느끼기까지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고, 결국에는 그 감정을 이기지 못해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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