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5화 끝으로 (14) >
-그러니까….
대충 봐도 빠르게 끝날 것 같지는 않았다. 사실 슬그머니 감정을 잡는 김현성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을 때부터….
‘이미 예견된 상황이기는 했지.’
김현성은 평소에는 과묵한 편에 속하기는 하지만 한 번 물꼬가 트이면 말이 많아지는 스타일이었으니까.
사람 자체가 재미없는 편에 속하는 인간이다 보니 기실 대화를 받아주는 입장에서는 힘든 면이 있기도 했다.
마음 같아서는 빠르게 끊고 가고 싶었지만… 그건 너무 사이코패스 같다는 생각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녀석 나름대로는 마지막 추억여행이기도 했고, 희생 엔딩 내기 전에 정리하고 싶은 것이 있을 테니 말이다.
아무튼 간에 김현성은 이 시간을 무척이나 기다려왔다는 듯 조심스레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파란 길드에 처음 들어갔을 때는 여러 가지로 신경을 써드리지 못해 너무나도 죄송스러웠습니다.
“네….”
그래, 그건 솔직히 네가 심했지.
아직도 녀석이 내게 길드의 모든 업무를 맡기던 상황이 떠오른다. 지금 생각해 보면 돌멩이를 수백 번 맞아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최대한 빠르게 길드를 키워야 한다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부담을 드린 것 같습니다.
“…….”
‘이 새끼 구라 치네. 뭔 저도 모르게 부담을 드려. 아주 작정하고 갈아버리려고 했잖아.’
-당시 기영 씨의 능력을 믿었기 때문에 내린 결정이기는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철없기 그지없는 행동이었습니다. 이후에 기영 씨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혜진 씨를 데려오기는 했지만 그것마저도 기영 씨를….
‘지가 잘못한 건 알고 있네. 진짜. 지금이야 내가 혜진이랑 절친 먹었으니까 괜찮은 거지만 그땐 너 죽이고 싶었어. 개 짜증 났었다고. 그때 선물까지 들고 갔었는데.’
하지만 일단 훈훈한 분위기는 유지하도록 하자.
“이제는 모두 지난 이야기니까요. 솔직히 원망스러웠냐고 물어보신다면 원망스러웠다고 말씀드리겠지만….”
-죄송합니다.
“죄송스러울 것도 없습니다. 지금 떠올려보면 전부 다 재미있게 웃을 수 있는 이야기니까요.”
-하… 하하. 그렇게 생각해 주셔서 정말로 다행입니다.
“던전행도 마찬가지였어요. 당시에는 따라가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지치고 괴롭기도 했지만… 전부 다 즐거운 경험이었던 것 같습니다. 맨 처음 공포의 정원에 갔을 때도 그랬죠. 정유라 씨였나요? 정말로 통쾌하기는 했습니다. 현성 씨가 특별한 면이 있다는 걸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그걸 확신할 수 있었던 원정이었죠. 아마 현성 씨가 없었다면 그런 원정은 경험하지 못했을 겁니다.”
-저주받은 신단도….
‘아, 그것도 있었지.’
-조금 위험하기는 했습니다만 솔직히 기영 씨가 물약을 제조해 공략에 일조해 주실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본래 신단의 공략방법은 그게 아니었는데… 아직도 기영 씨가 게드릭의 흉내를 내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정말… 하… 하하… 결과적으로 율리에나를 빼앗기기는 했지만….
‘뭐야 너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어?’
-처음부터 제 물건이 아니었던 거겠죠. 지금에서야 말씀드리는 거지만 율리에나는 마검사 정진호가 사용하던 물건이었습니다.
대충은 예상했는데 역시 그랬던 모양이다.
-여러모로 좋은 아이템으로 느껴져 2회 차 초반부터 사용할 생각이었는데….
‘은근히 속 좁네.’
-그때는 스스로 움직이지 않았지만… 그렇게 생각해 보면 기영 씨가 그 검을 얻은 게 천운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잠깐 검술 수련을 한 것도 기억하십니까?
“네. 정말 힘들었었는데… 길드 일이 본격적으로 바빠지다 보니 흐지부지되기는 했지만 솔직히….”
‘너 그때 나한테 감정 있었지? 율리에나 뺏어간 것 때문에 꿍해 있었던 거지?’
-혹시나 오해하실까 드리는 말씀이지만 결코 기영 씨를 힘들게 할 의도는 없었습니다. 좋은 검을 얻으신 것 같아서… 기본기만이라도 배우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거짓말하지 마. 시바. 어차피 나는 희망 없을 거라는 거 알고 있었잖아.’
-저… 저는… 결과적으로 다음 원정에서는 더 좋은 검을 얻기도 했고….
“네. 박물관에서….”
-네. 지금 이 시기까지 사용할 수 있는 검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는 정말로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파티가 그렇게 커다란 위험에 처하게 될지도 몰랐고요. 고대신의 파편이라니… 대륙의 멸망이라니, 무척 놀랐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어때요? 지금은 지금 박물관으로 돌아간다면….”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아마 지금의 상태라면 가능성이 클 겁니다.
“현성 씨가 얼마나 많이 성장했는지 대충 알 것 같네요. 하하.”
-전부가 제힘은 아니지만….
씁쓸한 듯이 웃고 있는 녀석의 모습이 눈에 보였다.
-굉장히 커다란 사건들도 많았던 것 같습니다. 제국을 교국으로 변화시키기도 했죠?
“샤를리아를 황제로 만들 수 없었거든요. 저도 일이 이렇게 잘 풀릴지 몰랐으니 어떻게 보면 현성 씨 덕을 본 거나 다름없죠. 지금에서야 하는 말이지만 그때는….”
‘너, 시바, 어디서 뭐 하고 있었지?’
-흑마법사 집단을 찾고 있었습니다. 1회 차와는 달라진 것이 너무 많아 제대로 일을 처리할 수는 없었지만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중요한 일이 생겼을 때는 기영 씨와 항상 떨어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라이오스에서 벨리알이 소환됐을 때를 생각하시는 겁니까?”
-네. 정말 많이 걱정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뒤늦게 찾아갔지만… 기영 씨를 지켜드리지는 못했었죠. 진청 그자는 교묘하고 악마 같은 자였지만 제 무능이 만든 사고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겁니다.
“구태여 그렇게 스스로 자책할 필요는 없죠, 뭐. 상황이 조금 꼬이기도 했고, 현성 씨도 현성 씨 나름대로 할 일이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때 입었던 대미지는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조금 자랑스럽기까지 해요. 라이오스의 국민들이 저를 위해 기도했던 그 순간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하얀이한테도 고맙고, 함께 싸워준 소라 씨와 덕구에게도 너무 고마웠죠. 아 물론 현성 씨에게도 감사한 마음뿐이었습니다.
-아니요. 아마… 아마 기영 씨가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겁니다. 만약 진청 그자가 지금까지 남아 있었다면… 이번 전쟁 역시….
안 좋은 생각을 하는지 표정이 심각해지는 놈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사실 그거 난 것 같아. 현성아.’
“현성 씨에게 처음 1회 차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정말로 놀랐었습니다. 사실 진청 그자가 그 정도로 악한 인간이었을 줄은 몰랐으니까요.”
-그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려면 아마 밤을 새워도 부족할 겁니다. 그 정도로 치가 떨리는 인간이었습니다.
‘조금 상처받는데. 다 널 위해서였어.’
“그러고 보니 현성 씨가 저를 의심한 것도 기억이 나네요.”
-그건… 죄송합니다.
‘아니야. 굳이 죄송할 건 없어. 어차피 조금 있다가 또 의심하게 될 테니까. 이번에는 확신할 수 있을걸.’
-당연히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계속해서 되뇌고 또 되뇌어 봤지만 제게 무언가가 쓰였던 모양입니다. 조금이나마 변명해 보자면 아직 모두를 믿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마음을 바꾼 계기가….”
-한 여성분을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걸로는 부족하기는 했지만….
‘아, 그것도 난 것 같아. 근데 이건 그냥 묻어두자. 굳이 밝힐 이유도 없잖아.’
-그 여성분이 제게 말씀하시더군요. 자신 역시 소중한 사람을 잃어본 적이 있다고, 믿음을 주지 못해서였다고…. 당시 제가 처한 상황과는 조금 다르기는 했지만 그 조언이 커다란 힘을 준 것 같았습니다. 물론 저는 그분께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드리기는 했지만… 언젠가 만나면 정말로 죄송했다고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아마 현성 씨가 다른 나쁜 뜻이 있다는 게 아니었다는 걸 이해해 주실 겁니다.”
-그런 거라면 좋겠지만… 하하. 네. 정말로 그분이 그렇게 생각하고 계신다면 정말로 다행인 거겠죠. 하지만 아마 저를 미워하시고 계실 겁니다.
녀석은 살짝 쓴웃음을 흘린 이후에 곧바로 검을 치켜들었다. 계속해서 비둘기들을 썰어 넘기면서도 저렇게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게 조금 놀랍기도 했지만 전투보다는 대화에 집중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했다.
‘임무 수행하는 데는 딱히 문제가 없으니까.’
딱히 지적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막상 대화를 나누다 보니 내 기분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어느 쪽이냐고 묻는다면 기분 좋은 쪽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였다. 물론 녀석과는 다르게 나는 온전히 집중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오랜만이니까.’
김현성과 이렇게 터놓고 이야기를 나누는 게 정말로 얼마 만인 줄 모르겠다.
-함께 호수에 간 것도 재미있었죠.
“덕구가 그렇게 큰 배를 만들었을 줄은 몰랐으니까요. 이렇게 전쟁에 쓰일 거라고는 본인도 예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와인이라도 한잔하면서 여유롭게 이야기 나누면 참 좋을 텐데 말이야. 전쟁 중이라는 게 아쉽게 느껴진다.
“거울 연어가 정말 맛있었는데. 솔직히….”
안주로 거울 연어 곁들이면 딱일 것 같은데.
-네. 기영 씨는 입이 짧으셨으니까요. 그렇게 잘 드실 거라고는 저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제가 말씀을 드렸었나요? 거울 연어 양식에 성공했다고….
“네?”
-연구비가 조금 들어가기는 했지만….
‘아니… 조금이 아닐 것 같은데? 그거 시바 차원을 돌아다니는 물고긴데 그걸 어떻게.’
“좋은 소식이네요. 그래도….”
‘시바 길드 자금 함부로 쓰면 안 되는 거 알지?’
-네. 저도 다시 한번, 다시 한번 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니, 나는 다시 가자고 이야기하려고 한 게 아니었는데…. 아 이 새끼 또 지가 대사 쳐놓고 지가 꿀꿀해졌네.’
“같이 가면 됩니다. 그것 말고도 할 게 많아요. 모든 게 끝난 이후에 해야 할 게 참 많습니다.”
‘우리 노을도 보러 가기로 했자너. 아, 근데 또 괜히 말했나 봐.’
왠지 울음을 참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네. 그렇죠. 모든 게 끝난 이후에… 네….
어쩔 수 없이 희생해야 하는 본인의 운명을 쉽사리 받아들이기 힘든 모양이다.
‘너 희생할 일 없어요. 그만 감정 잡으세요.’
-저… 기영 씨.
“네?”
아까와는 말투부터가 조금 달라진 것 같다. 슬슬 타이밍이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기다리고 기다렸던 어쩌고저쩌고 타임이 돌아온 모양이다.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는 게 느껴진다.
-저는… 저는… 구제 불능의 인간이었습니다.
‘그래. 시바, 내가 이거 왜 안 나오나 했다. 근데 현성아. 그 정도는 아니야. 너무 자책하지 마.’
-아무도 믿지 못하고… 인간관계에도 서툴고… 항상 실패만 반복하는 인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1회 차의 이야기를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라… 생각해 보면 김현성이라는 인간이 그렇게 살아왔던 것 같습니다. 겁이 많고 회피하고 매번 도망만 치는 그런 인간으로 살아왔던 겁니다. 바뀔 수 있다고 달라질 수 있다고 항상 다짐하고 실제로도 결심을 하기는 했지만 항상 제자리걸음이었죠. 제가 달라질 수 있었던 것은 기영 씨 때문입니다.
“글쎄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기영 씨가 저를 믿어주셨기 때문에 저도 기영 씨를 믿을 수 있었던 겁니다. 누군가를 완전히 신뢰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누구보다도 제가 가장 잘 알고 있습니다. 기영 씨는 제게 누군가를 믿는다는 게 뭔지, 그 의미를 알려 준 사람입니다.
고맙기는 한데… 걱정되기도 한다 야.
‘원래 믿음이 클수록 배신당할 때의 배신감도 큰 법인데… 이 새끼가 배때기에 안 찌르고 다른 데 찌르면 어떻게 해.’
활화산 같은 분노를 감당하기 힘들어 목을 뎅겅 베어버리지는 않을까. 한 방만 쑤셔도 되는데 여러 번 찔러서 뱃속을 헤집지는 않을지 걱정된다.
그만큼 현재의 김현성이 느끼고 있는 감정에는 무한한 신뢰와 믿음이 섞여 있었다.
어떻게 인간이 저렇게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지 놀랍게 느껴질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알아서 조절하시겠지?’
“말뿐이라도 감사합니다만 저는 그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말뿐만이 아닙니다.
“하… 하하….”
-기영 씨에게는 사람들을 바꾸는 힘이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을 보면 알 수 있어요. 하얀 씨도 그렇고 차희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모두를 긍정적으로 만드는 에너지를 타고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주위 사람들을 밝게 비춰주는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맙기는 한데….’
-저 역시 제가 이렇게 달라질 수 있을 거라고는….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처럼 웃고, 떠들고, 친구를 사귀고, 별것 아닌 일로 즐거워 할 수 있을 거라고는….
‘그래 내가 봐도 너 엄청 달라진 것 같기는 했어. 거울 호수에서 아이템 낚시 성공했을 때도….’
“어?”
-이제는 제가 보답하고 싶습니다.
“…….”
즐거웠던 분위기도 잠시. 조용히 위쪽을 바라보는 김현성이 시야에 들어왔다.
-제가 마침표를 찍겠습니다.
그곳에는 일그러진 표정으로 김현성을 바라보는 세라핌이 자리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