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9화 가치 (5) >
-이대로 괜찮겠어?
‘이대로가 괜찮을 거야.’
-그래, 잘 생각했어. 이대로가 괜찮은 거야. 네가 뭘 할 수 있겠어? 그렇지 않아?
‘…….’
-내게 맡기는 게 가장 좋은 선택일 거라고 생각해. 너도 그렇기 때문에 내 손을 잡은 거잖아?
‘맞아.’
-그럼 그걸로 됐어.
‘하지만.’
-하지만? 아직도 그런 게 필요해? 네가 패배한 것은 내 힘 때문이 아니라 네 무능 때문이야. 그 커다란 힘을 가지고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 네 무능이 지금의 상황을 자초한 거라고. 내 말이 틀려?
‘…….’
-네 말이 틀린 거냐고 묻잖아.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녀가 준 힘이 어느 정도로 강한 힘인지는 잘 알고 있었으니까.
만약에 이 힘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상황을 여기까지 끌고 올 수도 없을 것이다.
천사들과 싸울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쓰로누스와 검을 부딪치는 것 자체가 성립하지 않았을 것이다.
-너는 약해.
알고 있다. 강했다면 그녀가 준 힘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너라는 인간을 한 단어로 규정하면 실패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저 말도 부정할 수 없다. 말 그대로, 김현성의 삶은 실패한 삶에 가까웠다.
소중한 가족들을 잃고, 소중한 동료들을 잃은 1회 차에서만 실패한 것이 아니다.
2회 차 역시 마찬가지였다. 강해지려고 하고 싶었지만 강해질 수 없었다. 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할 수 없었고, 일어서고 싶었지만 끝내 쓰러졌다.
이번에도 역시, 소중한 사람 하나 구하지 못했다. 심해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자신을 끌어준 사람에게 손을 뻗지도 못했다. 오히려 그에게 해를 끼친 것은 자신이었다.
편해지고 싶어서였다. 함께 짐을 들어 주고 싶다는 말에 짐을 맡긴 이후에는 안심했다.
걱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불안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었다. 내가 떠넘긴 짐을 상대방이 감당할 수 있을지에 대해 스스로 물음표를 던지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애써 무시했던 것 같다. 당시에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지만 분명히 무시했을 것이다.
기뻤으니까. 말 그대로 그런 종류의 이기심 때문이었다.
나를 이해해 주고, 내 과거를 이해해 주고, 내 현재를 이해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 생기는 마음의 안정은 마약이나 다름이 없었으니까.
힘들어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당시의 자신은 분명히 그가 보내는 신호를 못 본 척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부담을 안겨주지는 않았을까. 그를 초조하게 만들고 힘들게 하지 않았을까.
그에 대해 모르는 것도 아니었잖아. 짐을 맡긴다면 그가 어떻게 행동할지도 이미 알고 있었잖아.
그가 기억을 잃은 것은 나 때문이야. 그가 죽어가고 있는 것도 나 때문이고, 위험에 빠진 것 역시 나 때문이야.
내가 끌어들인 거야. 내가… 내가 끌어들인 거라고.
잘못됐어. 처음부터 잘못된 거야.
손을 건네지 말았어야 했어. 함께 하자고 말하지 않았어야 했어. 튜토리얼에서 만났을 때부터 지나쳤어야 했던 거야.
-만약 시간을 되돌린다면? 그때는 모르는 척하는 게 좋을 것 같아?
‘…….’
-아, 맞다. 내가 괜한 걸 물어봤구나? 너는 다시 회귀할 용기도 없는 쓰레기지. 겁쟁이. 너는 네가 그때에 비해 조금 달라졌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렇지 않아. 인간의 본질은 변하지 않지. 튜토리얼에서 겁을 먹고 도망쳤던 김현성, 그게 바로 네 추악한 본질이야. 너는 계속해서 도망칠 거야. 그게 편하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
-그게 네가 덜 아픈 방법이라는 걸 잘 알고 있으니까. 네가 지금 옳은 선택을 하고 있다는 걸 모욕하는 게 아니야. 넌 합리적인 선택을 했어. 그 합리적인 선택에는 아주 추악하고 저열한 감정이 숨어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거라고.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고 있지?
‘…….’
-넌 계속 도망칠 거야. 끊임없이. 끊임없이 도망치겠지. 비열하고 더럽고 추하게.
‘…….’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 네가 아무리 저열한 인간이라고 해도 나 정도는 너를 바라봐 주고 있잖아? 난 네 그런 더러운 면이 마음에 들더라. 이중적인 모습 말이야.
‘…….’
-다시 한번 다녀와. 이번에는 정말로 일이 끝나 있을 테니까.
‘…….’
순식간에 눈앞에 있는 시야가 변하기 시작한다. 잠깐 동안 온몸에 거부감이 치솟는다.
당연하다. 당연한 반응이다. 나는 내가 지금 보고 있는 풍경은 만들어진 풍경이었으니까.
무의식 세계에서 한 번 경험해 보지 않았던가. 이곳에서 빠져나와야 한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하지만 이내 미소 짓게 된다.
모든 게 거짓말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이 노을 진 풍경이 비추는 이들의 모습은, 이 가짜에 저항할 의지를 상실하게 만들었다.
-어차피 너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잖아? 너는 실패한 인간의 표본이야. 너는 필연적으로 일을 망치게 되어 있고 주변에 고통을 주게 되어 있어. 그렇게 설계된 인간이야.
‘…….’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더 도움이 될 거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야.
그럴지도 모르지.
-내 말이 맞아.
그래. 그녀의 말이 맞아.
“어디를 보고 있는 겁니까? 길드마스터.”
일어나면 모든 게 끝나 있겠지. 어차피 김현성은 실패한 인간이고 실패할 인간이잖아.
입을 떼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저절로 입을 떼게 된다. 작은 속삭임에 계속해서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해서, 계속해서 가라앉게 된다.
“여기서는….”
“네?”
“여기서는 길드마스터가 아니지 않습니까. 편하게 부르셔도 됩니다. 혜진 씨.”
“아… 그렇죠. 이곳은 지구니까요. 생각해 보니까 조금 재미있군요. 이런 곳에서 길드마스터라니. 누가 이야기를 들었을까 봐 괜히 부끄럽습니다.”
“기껏해야 온라인 게임 동호회에서 만난 사람들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그나저나… 누가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겁니까?”
“거, 형님은 조금 늦는답디다. 요즘 들어서 바쁘다고 바쁘다고 하더니 진짜로 바쁜 모양이요. 거, 이번에도 겨우 시간 낸다는 것 같은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우리 형님 진짜 대단한 거 아니요?”
“원래도 부길드마스터는 대단하신 분이었습니다.”
“거, 희영 누님, 설마 내가 그걸 모를까 봐. 원래도 대단했지만 진짜로 대단하다는 걸 말하고 싶은 거요. 지구로 돌아오자마자 갑자기 변호사 한 번 해볼까 말하더니 덜컥 되어버리고, 거 로펌에 취직한 지 얼마 된 것 같지도 않았는데 엄청 높은 위치까지 올라간 거 보면 확실히 난 사람은 난 사람이요.”
대단한 사람이지.
“이러다가 나중에는 정치 같은 거라도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이 말이요. 막 20년 뒤, 10년 뒤에는 어디 어디 국회의원 되고 더 나중에는 막 대통령까지 되는 거 아니요?”
“정말로 그렇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무척 잘 어울릴 것 같군요.”
“그렇게 바쁘니까 요즘 하얀이 누님이랑은 일이 잘 안 풀리고 있다는 것 같아 아쉽기는 하지만… 뭐 그래도 그 둘이 어디 보통 인연이요. 혹시나 몇 년 안에 결혼 소식이 들려와도 이상하지 않다니까. 그건 소라 후배가 더 잘 알고 있지 않나? 지금 둘이….”
“네… 정하얀 님은… 잘, 잘 지내고 계세요. 네… 식사도 잘하시고요.”
“뭐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그러고 보니, 거 소라 후배도, 지금 형님 회사에서… 무슨 로펌 비서인가 뭔가 하고 있는 거 아니요?”
“네. 덕분에 잘 지내고 있어요. 너무 바쁘시다는 것만 빼면요… 원래는 오늘도 바쁜 날이라 제가 함께 있어야 했는데… 먼저 퇴근해도 된다고 배려해 주셨어요.”
“그 중국인 변호사랑….”
“자세히 설명을 드릴 수는 없고… 맡고 계신 게 있거든요. 그 건 때문에 정말로 바쁘세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자 익숙한 얼굴들이 시야에 비쳤다. 대륙에서 함께 한 길드원들과 동료들.
이렇게 한자리에 모이게 된 것도 굉장히 오랜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가슴 속에서는 뭐라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충족감이 채워진다.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라는 건 알지만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미소가 지어졌다. 지구로는 돌아갈 수 없지만 이런 풍경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모든 게 끝난 이후엔 이렇게 모이는 일도 많겠지.
“어디 형님만 대단한가. 혜진이 누님도 대단하지. 시험에도 합격했으니까 이제 검사되는 일만 남은 거 아니요.”
“저는… 이제 시작입니다. 한참 뒤처졌죠.”
“처음에 지구에 다시 왔을 때만 해도 어안이 벙벙했었는데 이렇게 각자 자리 잡은 모습을 보니까 신기하기도 하고 뭐 새롭기도 하고 그런 느낌이요. 예리도 대학을 다니고 있고, 거, 안기모 씨도 배우로 승승장구하고 있으니까. 이제 영화 개봉도 앞둔 거 아니요. 자동차왕 안복동인가 뭔가… 희영이 누님도 봉사활동 때문에 여기저기 돌아다니느라 정신없고… 엘레나 님은 뜬금없이 스트리머….”
이제는 밝은 얼굴을 하고 있는 김예리가 입을 열어오는 게 시야에 비쳤다.
“구독자 수 450만. 외국에서도 유명해.”
“정말로 그렇게 유명해요? 김예리 님?”
“응. 정말로 유명해. 웬만한 연예인보다 더 유명할걸? 헬닭볶음면 먹는 영상이 조회 수가 2,500만… 이것 봐.”
“대단하네요. 정말로… 생소한 곳에 오셔서 잘 적응하실 수 있으실까 걱정했는데… 오히려 저보다 더 잘 적응하셨는데요.”
“아영 후배도 공방 취직해서 잘살고 있으니까. 뭐 걱정하고 그럴 게 있나. 우리 길드 마스터 형씨가 더 걱정이지. 현성이 형씨는 공부 열심히 하고 있는 거요?”
“네. 덕구 씨. 솔직히 뭘 하고 있는지도 잘 모르겠지만… 일단 하고는 있습니다.”
“사실 현성이 형씨도 빨리 자리 잡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네. 더디죠. 아무래도 지구 생활에 아직까지 잘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다른 분들이 이렇게 잘 되는 모습을 보니 정말 기분이 좋습니다. 네. 정말로 기쁩니다.”
나는 제대로 적응할 수 없겠지만, 만약 지구로 돌아간다면 모두 행복한 인생을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틀림없이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처럼 모두 빛나고 있을 것이다.
“현성이 형씨도 잘 자리 잡을 거요. 안 그래도 형님도 형씨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더라고.”
“그렇습니까?”
“자세히는 못 들었는데 신경 쓰인다고 하기는 합디다. 아, 마침 저기 들어오는 것 같은데. 한번 직접 물어보쇼.”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리자 실내로 들어오는 두 사람의 모습이 시야에 비쳐왔다. 천천히 웃으며 발걸음을 옮기는 모습이 눈에 담겼다.
“여기요! 형님! 누님!”
“덕구야.”
“부길드마스터. 오랜만이에요.”
“네. 다들 오랜만입니다.”
“누님도 잘 지낸 거요?”
“오, 오, 오랜만에 뵙네요. 다들….”
“네.”
“현성 씨도 오랜만입니다.”
“아, 네. 기영 씨.”
“정말 너무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서 죄송스럽군요.”
“아니요. 바쁘시다는 거 알고 있으니까요. 폐가 될까 봐 선뜻 연락에 답장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사실 오늘도… 무리하시는 건 아닌지 걱정됩니다.”
“괜찮습니다. 현성 씨. 지구에서의 삶도 물론 중요하기는 하지만, 대륙에서의 기억들보다 중요하지는 않으니까요. 허락하신다면 앞으로 종종 찾아뵙겠습니다. 가까운 거리에 있는데 생각해 보니 제가 너무 무심했던 것 같네요.”
“그건.”
“허락해 주신 거로 알고 있겠습니다.”
“아니요. 괜찮….”
“이번 일만 끝나면 조금 여유가 생길 겁니다. 그러니 정말로 괜찮습니다. 아! 제가 너무 자리에 서 있게 만들었네요. 하얀아, 앉자.”
“…….”
“현성 씨는 어떻게… 잘 지내고 계셨습니까?”
평소와 같은 웃음을 머금은 얼굴이 눈에 보인다.
“네… 저는….”
“잘 지내고 계셨습니까?”
걱정이 없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저는….”
“잘… 지내고 계셨습니까?”
“잘 지내고 있지….”
“네?”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