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8화 가치 (4) >
서로를 향해 적의를 드러내고 있는 모습은 오래 알고 있던 사이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아, 진짜 어디 팝콘 없나.’
세라핌 대 케루빔, 케루빔 대 세라핌, 지금까지 이런 대결은 없었다.
분위기도 심상치 않았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원래 같은 편끼리 싸우는 게 그렇게 재미있더라.
서로 감정도 상하고, 뭐 그런 거 있자너. 흥미진진한 거.
원래 파워레인저 같은 것도 레드랑 블루랑 싸우면 재미있잖아. 꿈의 대결이잖아. 그런 거.
개인적인 호기심도 생겨난다.
‘비둘기 중에서는 누가 제일 강하려나.’
단순히 무력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는 쓰로누스가 가장 강한 것 같았지만 여러 가지를 종합해 생각해 보면 꼭 그런 것도 아니다.
‘신체 능력은 케루빔이 가장 우위에 있었던 것 같은데. 희라 누나랑 치고받은 거 보면 단단하기는 할 거야.’
뭐 전투를 신체 능력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게 아니지만….
이점이 있다는 건 확실했다. 반대로 세라핌이 가지고 있는 이점은 아무래도 권능 같은 특수기겠지.
같은 천사를 상대로 놈의 권능이 얼마나 통할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없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내 기대에 부응하듯 세라핌은 벌써부터 케루빔을 몰아붙이기 시작, 들려오는 굉음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정도였다.
‘힘내라. 세라핌. 작은 세계의 미래가 네 손 안에 달려 있어. 지면 안 돼. 미래를 우리 손으로 쟁취해야지.’
“케루빔!”
“이 멍청한 놈!”
서로를 부르며 무기를 맞대는 모습은 그럴듯한 영화의 한 장면 같지 않은가.
아직 치명타라고 부를 만한 대미지는 없었지만 둘의 몸이 점점 더러워지는 것이 보인다.
콰앙!
소리와 함께 케루빔이 벽으로 튕겨 나가고, 잠시 후에는 같은 소리를 내며 세라핌이 벽에 처박힌다.
공중에서 몇 번이나 몸을 부딪친 이후에는 계속해서 빛이 번쩍거린다.
파란색의 천사가 낫을 휘두르자 백금색의 천사는 거대한 장막으로 자신을 보호한다.
쉽게 끝나지는 않을 싸움이다. 녀석들은 서로가 어떤 걸 할 수 있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너는 벗어나야 한다, 세라핌. 네가 아직도 망령에 얽매여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냐.”
“입 다물라고 이야기했어. 케루빔.”
“네 진짜 모습이 어땠는지 떠올려 봐라. 지금의 모습이 진정 네 모습인가. 아무도 네게 달라지라고 강요한 적이 없다. 세라핌.”
“개소리를 지껄이는군.”
“벗어나야 해. 네놈뿐만이 아니다.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벗어나야 한다. 그 빌어먹을 망령에서 벗어나야 한단 말이다.”
“이게 내 모습이야, 케루빔. 벗어나야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네놈이야. 네놈이야말로 그 편협한 생각에서 멀어져야 해. 우리는 더 높은 곳을 향해 올라갈 수 있어.”
“편협한 생각이 아니다. 난 그저 우리를 지키고 싶을 뿐이다.”
“네놈은 썩었어. 케루빔. 달라지지 않고 고여 있는 것은 썩을 수밖에 없어. 흐르지 못하고 계속 그 자리에 서 있는 거야. 애초에 흐르고 싶다는 생각도 없겠지. 그게 편하니까. 그게 안전하다고 느끼니까. 너는 이런 일에 주사위를 던지지 않지만 나는 주사위를 던지는 편이야.”
“…….”
“달라지지 않는 걸 선택하는 게 편하니 움직이지 않는 거야. 아니, 최소한 조금의 변화는 있었구나. 이딴 미친 계획을 실행시킬 정도라니.”
“인간을 이곳으로 부른 것은 내가 아니라고 이야기했을 터였다. 너는 속고 있는 것이다. 세라핌.”
“그 누구도 나를 속일 수는 없어. 케루빔.”
“정신이 나갔군. 어디서 많이 들어본 대사 같지 않으냐.”
“…….”
“너는 스스로를 잃어버리고 있다. 세라핌.”
“난 잃어버리지 않아. 찾은 거야. 본래의 모습을 되찾은 거라고. 이게 내 모습이야.”
“그건 네 모습이 아니다.”
“아니, 지금의 내가 진짜 나야.”
“넌 지금 그를 모방하고 있을 뿐이야.”
‘어우야. 너무 아픈 곳 건드린다.’
“미친 소리 집어치워.”
“그건 네 모습이 아니다. 세라핌. 너는 그를 모방하고 있는 거다. 따라 하고 있는 거야. 그의 행동, 말투, 사상까지.”
“상대할 가치도 없는 개소리로군.”
“스스로의 모습을 생각해 봐라. 세라핌. 이전의 네가 어땠는지를 떠올려 봐라. 그게 정녕 네 모습이더냐. 네가 되고 싶은 이의 모습일지언정, 네 모습은 아닐 것이다.”
“입 다물어.”
“넌 저 인간이 되고 싶은 거야.”
“그 입 닥쳐!!”
왜 자꾸 얘를 부끄럽게 만들고 그래. 당사자 앞에서 그런 소리를 하면 어떻게 해.
방금 전까지만 해도 동경의 시선을 보냈던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 치부를 드러내면 어떻게 하냐고.
얼마나 당황스럽고 부끄럽겠어. 그렇게 직접적으로 말하면 조금 그렇지. 표정 봐. 얘가 제정신이 아니잖아. 얼마나 치욕스러워.
실제로도 부끄러워 하는 것 같기도 하다. 방금까지만 해도 깃털이 쭈삣쭈삣 서 있을 정도로 흥분한 상태였던 것 같은데 지금은 얼굴이 벌게져 있다.
‘나라도 싫겠다. 야. 얼마나 쪽팔리겠어?’
그 부끄러움과 치욕이 분노로 뒤바뀌는 데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다.
예상했던 그대로 이를 갈고 있는 모습이지 않은가.
세라핌은 다시 검을 치켜들었고 케루빔은 그런 녀석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놈을 자극한다.
“어째서 저 인간을 따라 하….”
“닥쳐어어어!!!!”
콰아아아아아아앙!!
케루빔의 몸이 반대쪽으로 날아가는 것은 순식간, 필사적으로 케루빔의 입을 막으려고 하는 것 같아 내 가슴이 다 아파온다.
‘부끄럽기는 부끄러웠던 모양이네.’
나름의 신념을 걸고 부딪쳤던 싸움이 감정싸움이 되는 것은 순식간이다.
아마 케루빔도 어쩔 수 없지 않을까. 저쪽에서 감정적으로 나오면 괜스레 이쪽에서도 감정적으로 행동하게 되는 것이 기본 심리가 아닌가.
사실 케루빔이야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쟤 입장에서는 조금 황당할 수도 있지.
친구의 잘못을 딱 꼬집어 말해준 게 잘못은 아니잖아. 오히려 퍼랭이 입장에는 맞는 말 한 거라니까.
기껏 생각해서 말해줬더니 저딴 식으로 나오면 케루빔도 기분이 안 좋지. 이번 건 세라핌이 너무 했네. 너무 했어.
“닥쳐어! 닥쳐! 닥쳐! 닥쳐!!”
“그 입을 다물어야 하는 것은 네놈이다! 세라핌! 언제까지 철없이… 눈을 뜨고 현실을 직시해라. 자신이 어떻게 행동하고 있는지 되돌아보라 이 말이다!”
“닥쳐!!! 이 배신자 새끼!”
‘아, 이거 감정 격해지죠. 배신자 새끼 나왔죠.’
“이… 이 더러운 배신자 놈! 내가 네, 네 말을 들을 것 같아? 인간을 신전으로 끌어들인 네 말을 내가 들을 것 같아? 저 배신자가 한 말은 전부 다 거짓말이다. 이기영. 저놈의 말에 귀 기울이지 마라.”
‘아 굳이 여기서 나한테 변명하는 게 더 추해 보이는데요. 세하다. 추라핌아.’
“너는 이기영이 아니다! 세라핌!”
‘아… 너는 이기영이 아니다 나왔죠. 아, 이거 치명타인데요. 맥일려고 작정을 한 건가요. 잘못을 꼬집어 줄 수는 있어도 방법이랑 타이밍이 잘못된 것 같은 느낌입니다. 케루빔 님.’
“닥쳐어어어!!!!”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아 이거 이러다가 더미 월드 다 망가지겠다. 이 새끼들아.’
“저, 저, 저… 저 미친 배신자의 말에 귀 기울이지 마, 이기영. 아니, 지금 당장 자리를 피해. 내가 길을 열어주마.”
녀석의 다급한 표정을 보니 정말로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게 불안한 모양인 것 같았다.
마침 딱 좋은 타이밍이 아닌가. 슬슬 라파엘이 들어올까 걱정되기도 했고, 괜히 여기 있다가 전투에 휘말리면 큰일 나자너.
세라핌이 이길 것 같기는 한데 혹시 케루빔이 이기면 난처해지니까.
“네… 네.”
“두려워하지 말고 어서!”
‘아, 이제 와서 멋있는 척하네요.’
녀석의 얼굴에 들어서 있는 것은 나를 지키고 싶어 하는 감정이 아니라 부끄러움이다. 자신의 치부가 더 드러날까 무서워하고 있다.
눈치 없는 케루빔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해서 눈을 떠라 세라핌 포지션을 유지하고 있는 중, 저 새끼도 참 눈치가 없어요.
어째서 1기영이 이토록 쉽게 이 새끼들을 주물렀는지도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이 비둘기들은 기본적으로 커뮤니케이션에 서투르다. 인간과의 차이점이라고 판단해도 상관이 없을 것 같다.
케루빔도 그렇고, 쓰로누스도 그렇고, 세라핌도 그렇다.
너희 1, 2년 본 사이 아니잖아.
상처가 곪아 터질 때까지 세라핌에게 이 건에 관해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케루빔이나, 다른 천사들에게 뒤처진다고 느껴 자기 자신을 자책한 쓰로누스.
그리고 애초에 정상적인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한 건지 의심이 되는 수준의 세라핌.
뭐, 도미니온스는 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
원래부터 이랬던 건지, 아니면 갑자기 난입한 가면의 영웅 때문에 놈들이 정신병자가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사실 이 새끼들 정신병이 생긴 원인이야 내 알 바 아니고.’
나는 그냥 꿩 먹고 알 먹고 하면 그만이지 뭐.
허겁지겁 발걸음을 옮긴 것은 당연했다. 도망치라고 길을 열어줬으니 빨리 도망가야지.
작은 세계의 데이터를 손에 안고 달리자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온다.
“날아가라!”
‘나도 날고 싶은데. 시바. 그게 안 돼요. 이렇게 긴박한 상황에서 힘주면 날개가 꼬인다고. 그럼 땅바닥으로 바로 처박히는 거라고.’
하지만 눈에 불을 켜고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케루빔을 보자 날긴 날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추하게 달리다 다리가 꼬여 넘어지는 것보다 날개가 꼬여 땅바닥에 처박히는 게 더 멋있겠지.
퍼덕퍼덕거리기 시작하자마자 놈이 낫을 휘두르는 것이 보인다. 단번에 목을 쳐낼 각오로 신성을 가득 밀어 넣은 것만 같다.
‘으악 시바.’
세라핌이 그 낫을 막아주기는 했지만.
‘시발 괜히 날았자너. 시바. 날개 꼬일 줄 알았다고.’
어느새 내 몸은 땅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손에서 뭔가를 놓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게 목숨보다 중요할까. 곧바로 바닥을 손으로 짚은 이후에는 허겁지겁 발걸음을 옮겼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뒤쪽에서 굉음과 섞인 목소리가 들려온다.
“내 앞을 가로막지 마라, 세라핌! 너는 지금….”
“입 닥쳐! 케루빔!”
다시 한번 발바닥에 힘을 줘 달리자 곧바로 문이 보이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문을 열자 보이는 것은 넓은 복도. 문을 빠져나가기 직전에 거대한 빛이 바로 옆을 지나갔다.
‘방금 뒈질 뻔한 거야?’
-죽어! 이 더러운 배신자!
-눈을 떠라! 세라핌! 배신자는 내가 아니다!
밖으로 빠져나간 이후에 망원경으로 녀석들을 바라보니 아직까지도 신나게 치고받는 놈들의 모습이 눈에 보인다.
얼마나 달렸을까. 벽 너머로 인기척이 느껴진 것은 바로 그때였다.
‘내 동생이야? 내 동생 라파엘?’
“여기에요! 이쪽으로.”
하지만 들려오는 목소리는 라파엘의 목소리가 아니다. 비둘기가 아닐까 걱정되기는 했지만 들어본 적이 있는 목소리, 내 예상이 맞다는 듯. 기분 좋은 강아지 소리가 들려온다.
“왕!”
“주변에 적은 없어요. 계속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아요! 빨리, 빨리요! 조금만 더, 조금만 더요!”
망원경으로 이미 한 번 봤던 얼굴이었지만 저도 모르게 기대감이 샘솟는다.
‘내가 그리워하긴 했나 보네.’
딱히 생각을 하지도 않았고 그간 떠올리지도 않았었지만 가슴이 뛴다.
‘이해가 안 되네.’
내가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되는 감정이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정이 들기는 들었나 보다.
마침내 코너를 돌고 반가운 얼굴을 마주친 순간 나는 커다랗게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어?”
“야… 이… 이 미친 돼지 새끼야!”
“형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이 돼지 새끼! 시발! 이 돼지 새끼! 하핫! 돼지 새끼!”
당황한 얼굴을 한 돼지 새끼가 몸을 던진 나를 받아 드는 것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