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7화 가치 (3) >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이제는 확신할 수 있다.
‘도대체 뭐가 그렇게 잘나 보였을까.’
이미 답이 나와 있는 질문이기는 했다.
‘하, 이거, 미친 카리스마 이거…. 종자가 다르다니까. 종자가 달라요. 가만히 있어도 애새끼들이 꼬여요. 그냥 평범하게 살려고 해도 꼭 누군가의 롤모델이 되더라니까. 시바… 이거 어떻게 하냐. 진짜. 미치겠다. 이기영 네가 최고다.’
가면의 영웅의 모습을 보고 질투하거나 동경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결단은 항상 과감했고 행동하는 것에 주저함이 없었다.
세라핌이 나를 존경하게 된 게 당연하게 느껴진다. 사대 천사 중에서도 녀석은 리더라면 리더라고 할 수 있는 위치에 앉아 있지 않은가.
아니, 리더는 아니었지만 중심에 있다는 건 반론의 여지가 없다. 녀석이 처한 배경을 떠올려보면 무언가 영감을 받았을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거다.
‘네가 가지고 있지 않은 걸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어?’
1회의 세라핌이 어땠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마 지금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지 않았을까.
어쩌면 다소 소극적이었을지도 모른다. 보통 이런 이들은 자신에게 없는 것들을 동경하니 말이다.
사교성도 없었을 거고 무언가 명령을 내리는 것을 주저하거나 부담스러워 했을 수도 있다.
마음 약하고 쉽게 휘둘리는 성격이었겠지. 내 흉내를 내는 지금도 선택을 내게 맡기는 것을 보면 답이 나온다.
무리하게 허리를 펴고 있는 것을 보니 실제로 허리를 조금 구부리고 다녔겠네.
1회 차의 녀석의 모습이 점점 오버랩된다. 나를 따라 하는 행동을 제외하면 녀석에게 남는 것이 없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어째서 자신을 의심하지 않는지에 대한 개연성도 충족되는 것 같지 않은가.
‘자기세뇌 하고 있는 거야.’
특성은 없지만 스스로를 세뇌하고 있을 수도 있다. 자신의 판단이나 능력에 대해 의문을 가지는 순간,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겠지.
뭐, 이 새끼는 예전으로 돌아가는 걸 무서워하고 있다.
‘이거 시바, 가면의 영웅이 대단하기는 대단해. 너무 꽁으로 먹는 것 같아서 미안해질 정도야.’
이것 역시 2회 차를 위한 가면 영웅의 안배일지도 모르겠다. 의도적인 건지, 아니면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내게 유리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다.
“네, 그렇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어디까지나 가능성입니다.”
“단순히 가능성이라고 하기에는 마음에 걸리는 점이 많아. 인간들을 자극한 것도 이번 사건을 일으키기 위한 거라고 생각해도 돼. 어쩌면 인간들과 내통하고 있을 가능성도 고려해 봐야 해.”
‘그렇지?’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었어. 기관의 설립부터, 아니, 어쩌면 그 이전부터 짜여진 각본이었던 거겠지.”
‘그래, 네 말이 맞아. 이건 처음부터 짜여진 각본이었어.’
“케루빔은 아직까지 전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어. 이게 뭘 의미하는 거겠어?”
‘애초에 싸울 생각이 없다는 거죠. 신전이나 동포들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목적만 이루겠다는 더러운 심보가 아니겠습니까.’
“너라면 알고 있겠지.”
‘당연히 알고 있습죠.’
이걸 생각하고 있던 게 맞냐는 듯 살짝 나를 바라보는 얼굴이 보였다. 마치 동의해 달라고 물어보는 것 같지 않은가.
녀석은 확실하게 정답 버튼을 눌렀다. 케루빔이 이번 일의 흑막일 수밖에 없다는 개연성을 자기 자신 스스로 충족시키고 있다.
계속해서 머리를 굴리는 척하는 모습은 가관이다. 이 비둘기 새끼의 민낯을 들여다보니 웃음이 나오기 시작했다.
물론 소리 내어 웃을 수 있을 리는 만무, 심각한 표정으로 세라핌을 바라보자 녀석 역시 내게 같은 표정을 보내기 시작했다.
“쓰로누스와 이야기가 잘되지 않았던 건가. 그래서 쓰로누스를 먼저 제거해야겠다고 생각한 거겠지?”
“네. 쓰로누스 님은 신인류 계획에 반대하기는 했지만… 이런 미친 계획에는 찬성하지 않았을 겁니다. 아마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속으로 삭이고 있었겠죠.”
“쓰로누스는 이전부터 그랬어. 멍청한 놈.”
멍청한 건 너야.
“그래서 이곳으로 왔던 겁니다. 정말로 케루빔 님이 노리는 것이 신인류 계획이 맞다면 무얼 목표로 삼았는지는 너무 뻔하니까요.”
“너 아니면 이 작은 대륙이겠지. 케루빔의 생각이야 뻔해. 조금 신경 쓰이는 점이 있기는 하지만 근거는 충족되고도 남아.”
‘그렇죠. 그 말이 맞습니다.’
“하지만 세라핌 님.”
“?”
“만약 케루빔 님이… 정말로 이 모든 일의 원흉이 맞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
“…….”
“저도 케루빔 님이 이렇게나 극단적으로 움직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원인은 다른 곳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신인류 계획에 불안감을 느끼셨을 수도 있고, 너무나도 빠르게 변화하는 환경이 두려우셨을 수도 있을 겁니다. 단순히 제가 마음에 들지 않아 그런 일을 저질렀을 거라고는… 무언가… 다른 합의점을 찾아야 할 수도 있습니다.”
말을 내뱉자 조금 의아해하는 놈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그지 이상하지? 내가 내뱉을 대사는 아니잖아. 그렇지 않아?’
너무 몰아붙이기만 하는 것도 좋지 않다. 원래 사람 하나 병신 만드는 데 가장 필요한 기술이 밀고 당기기가 아니었던가.
‘가면의 영웅은 저렇게 말하지 않았을 거야. 맞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놈의 모습이 눈에 보인다. 녀석은 방금 깨달았을 것이다.
1기영과 2기영은 다르구나. 생각하는 방향은 비슷하지만 해결하는 방식에는 차이가 있구나.
이유는 모르겠지만 입꼬리가 올라가는 표정이 보인다.
‘즐거워하고 있는 건가?’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본인이 1기영을 완벽히 대체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게 맞다면 저런 표정을 지을 만도 하다.
별개로 녀석이 다른 합의점을 찾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가면의 영웅은 절대로 합의하지 않는다.
“왜 내가 합의점을 찾아야 하지?”
“네?”
“케루빔이 무슨 생각을 하건, 어떤 심정으로 이 일을 저질렀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녀석이 죄를 저질렀다는 거다. 합의점을 찾아야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녀석이야. 나는 양보하지 않아.”
‘키야.’
“그리고 용서하지도 않지.”
‘이야. 이 새끼 그냥 복사 붙여넣기 수준이구나?’
내가 다 부끄러울 정도의 대사를 그대로 입 밖으로 내는 걸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렇지. 가면의 영웅은 양보하지 않지. 좋은 자세야. 그리고 용서 같은 것도 안 했다고, 죄를 저질렀으면 처형하고 다 죽이고 그랬지. 절대로 피하지 않았다니까.
양보하는 건 다른 사람이 할 일이지 자신이 할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지.
마음에 안 드는 악당 새끼들은 그냥 묻어 버렸자너. 너도 그럴 거지? 그럴 수 있지?
“그래. 나는 양보하지 않아.”
“…….”
이 새끼 좀 멋있다는 눈으로 바라봐 줘도 괜찮을 것 같다.
얼마나 신이 날까. 본인이 1회차에 롤모델로 삼았던 대상이 자신을 바라보며 눈을 반짝이고 있는데.
내가 롤모델을 만들 리는 없겠지만 아마 만들었다면 나 역시 춤이라도 추고 싶었을 것이다.
멍청한 새끼라고 욕을 박아주고 싶지만 저런 종류의 우월감과 성취감을 느끼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말 그대로다.
‘기분 좋았어? 내가 이렇게 바라봐 주니까 기분 좋아?’
소름이라도 돋았는지 날개에 달려 있는 깃털이 쭈삣쭈삣 서 있는 것이 보인다. 녀석은 자기 날개가 저렇게 됐는지도 모르고 있을 것이다.
‘나도 둠기영 할 때 저렇게 취했었나? 아, 저런 모습이었으면 조금 쪽팔릴 것 같은데. 저것보다는 덜 취했겠지?’
어찌 됐건 간에 저것보다 부끄러운 모습은 아니었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다.
대충은 준비가 된 것 같은 느낌, 녀석의 말대로 녀석은 양보하지 않는다. 케루빔에게 제대로 된 본때가 뭔지 보여주려고 마음을 먹은 것이 눈에 보인다.
딱 이 정도 타이밍이면 케루빔도 이곳으로 도착하지 않을까.
“양보하지 않는다고 하시면….”
“죗값을 치러야지.”
“…….”
기왕 보여주는 김에 확실하게 보여주려고 마음먹은 느낌, 본인이 얼마나 대단한 비둘기인지 스스로를 증명하려고 하고 있다.
‘세라핌 님 믿고 있겠습니다.’
혹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됐지만 그런 생각은 애초에 하지도 않았던 모양.
커다란 문이 열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슬슬 올 때가 된 게 아닌가 생각했지만 마침 딱 좋은 타이밍에 빌런이 무대 위로 발걸음을 옮기는 게 시야에 비친다.
파란색 머리를 단정히 묶은 천사. 들어온 이후에 곧바로 표정을 구기는 모습이 눈에 띈다.
‘케 배우 왔구나? 타이밍도 참 기가 막혀.’
당연하지만 얼굴에는 분노가 서려 있다. 조용히 주변을 한 번 살핀 이후에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기 시작.
뭐, 뻔한 대사였다. 안 들어봐도 뻔하다. 갑자기 등장한 악역이 뭣 모르고 지껄이는 개소리일 것이다.
“무엇을 하고 있는 거지? 세라핌?”
들어오자마자 한마디 박아주시네요.
“…….”
“…….”
분위기 조금 이상한 거 눈치 깠죠?
“내 전언을 듣지 못한 건가?”
“…….”
“그 쥐새끼 같은 놈이 우리를 다시 한번 배신했다. 쓰로누스가 죽어가고 있어. 모든 게 다 저 비열한 놈의 계획이었다. 애초에 신인류 계획이라는 건 없었다. 모든 건 신성을 탕진시키고 우리를 분열시키기 위한 개소리였다. 저 쓰레기를 다시 한번 받아들인 게 실수였어.”
“…….”
“그자는 해악이다. 사라져야 할 인간이고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종류의 무언가다.”
‘거, 말이 심하시네.’
“개자식.”
‘많이 화났었어요?’
“쓰로누스는 너를 믿었다.”
‘아, 그래? 나는 걔 안 믿었어.’
“끝까지 너를 걱정하고 너를 믿었단 말이다.”
‘아, 그러셨어요?’
“인간 같지도 않은 놈.”
‘저 천사예요. 이 양반아. 그리고 당신도 인간 아니잖아요. 마음껏 지껄여 보세요. 이 악마 새끼야. 내가 눈 하나 깜빡하나. 지금 내 앞에 있는 분 보이지? 네가 아무리 지껄여도 이분은 흔들리지 않으신다구.’
혼자만의 분노 타임을 즐기셨던 우리 케루빔 님이 뭔가 이상한 걸 감지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세라핌을 한 번 바라보고 나를 바라본다. 나를 바라보고 다시 한번 세라핌을 바라보고 있다.
백금색 비둘기의 추악한 욕망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케루빔이라면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정도는 깨닫지 않을까.
“너….”
녀석의 기대에 부응하듯 세라핌이 오만하게 입을 열었다.
“배신자는 네놈이다. 케루빔.”
“뭐?”
“우리가 네 계획을 모를 거라고 생각하지 마.”
“이… 이 멍청한 놈!”
“멍청한 것은 너야. 케루빔.”
“저 쥐새끼가 네게 뭐라고 지껄이더냐. 세라핌.”
“그는 내게 아무 말도 한 적이 없어. 모든 것은 내 판단이야.”
‘아픈 곳 건드리면 안 되지. 그런 말 하면 얘가 상처받아요. 트라우마 건드리지 말라고.’
“네가 이상하다는 것은 이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망가져 있을 줄은 몰랐다.”
“내가 네게 하고 싶은 말이야. 케루빔.”
“기어코 내 앞을 막아서겠다는 거냐.”
“네 더러운 계획을 저지하는 거라고 표현해 줬으면 좋겠어.”
“더러운 것은 네 추악한 욕망이다.”
“입 다물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한 것뿐이다. 너는 망가져 있다. 세라핌.”
“나는 망가지지 않았어.”
“이야기가 통하지 않는군.”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분위기 좋죠.
잠깐의 침묵, 저 둘은 이후의 일이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 알고 있다.
케루빔은 조용히 나를 바라본 이후에 세라핌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나를 용서해라. 세라핌.”
“너는 얼마만큼의 죄를 가지고 있을까. 궁금하지 않아? 케루빔?”
‘와, 시바. 이거 팝콘각인데.’
두 비둘기가 천천히 공중으로 떠오르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아무나 뒈져라. 그래 기왕이면 이번에는 네가 뒤지는 게 좋겠다. 파랭아.’
비웃음이 입가를 비집고 터져 나오는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