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 사용설명서-730화 (721/1,590)

< 730화 의심과 확신 (4) >

“비극이로군요. 참 비극입니다.”

장내가 조용해진 것이 느껴진다.

딱 꼬집어 케루빔을 지칭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뉘앙스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할 이가 어디 있을까.

당장 녀석을 잡아 족치고 싶기는 했지만 나 역시 조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아직 준비물이 전부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 섣부르게 들어갈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으니까.

잠깐의 침묵이 장내에 감돈다. 모두가 케루빔과 나를 바라보고 있어 조금은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원래 빛기영은 근본부터가 무대 체질이 아니었던가. 저런 시선이야 오히려 즐겁게 느껴진다.

의연한 척 살짝 고개를 돌리자 시야에 비치는 것은 파란색 머리를 한 천사.

케루빔이 머리를 굴리는 게 보인다. 그만큼 모호하게 말하기는 했다.

언성을 높이자니 모양새가 이상해질 테고 부정하기에도 적절하지 않다.

결국 녀석이 선택한 것은 내 말에 수긍하는 것. 아마 그 정도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을 게 분명했다.

“…….”

“…….”

“네 말에 동의한다. 아무래도 쥐새끼가 숨어 있는 것 같군.”

쥐새끼가 있다는 건 확정된 이야기네.

“네. 그런가 봅니다.”

케루빔 역시 가장 적절한 선택지에 손을 얹었다. 조금은 시간을 두고 싶다는 표현이 아닐까?

이쪽이 섣부르게 들어가기를 주저하고 있는 것처럼 녀석 역시 갑작스레 이쪽을 몰아붙이는 것을 주저하고 있었다.

아마 하고 싶은 말은 많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 아니겠는가.

빌드업이라는 게 그만큼 중요하다. 기왕이면 흥분해 날뛰어 자폭해 줬으면 싶었지만 그 정도로 멍청이는 아닌 모양.

오히려 이쪽을 바라보는 눈은 한번 해보자고 말하는 듯했다. 이다음이야 뻔했다.

‘분위기를 한 번 환기시키겠지.’

“그리고, 그 질문은 나를 겨냥해서 한 말인 것이냐.”

이런 식으로.

아마 놈의 입장에서는 자신을 한 번 정도는 변호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을 것이다.

“어떤 질문을 말씀하시는 것인지….”

“인간과 전쟁을 원하고 있냐는 질문 말이다.”

“그렇지 않습니다.”

“일이 틀어지면 힘든 것은 여기 있는 원로들과 그대뿐만이 아니다. 나 역시 손해를 입는다는 것은 여기 있는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닌가. 변명하는 것은 아니다만 방금의 발언에 사과해 줬으면 좋겠군. 나는 이미 신인류 계획에 함께 하기로 손을 내밀었다. 기존의 계획을 유지하기를 바라고 있었다는 것은 부정하지 않겠지만 이미 과거의 이야기다. 여기 있는 모두가 같지 않은가. 생각이라는 건 바뀔 수 있는 법이다.”

‘일단은 모르는 척하겠다. 이거지?’

“불편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굳이 케루빔 님을 겨냥해 드린 말씀은 아니었습니다. 너무 갑작스러운 상황이라…. 네, 저도 경황이 없었나 봅니다. 다시 한번 정식으로 사과드리겠습니다.”

“받아들이지.”

“하지만 찍찍거리는 쥐새끼가 신전 안에 숨어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정확히 무엇이 목적인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가 힘을 모아 그자를 색출해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이 이후에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네가 말하지 않았나. 정확히 우리에게 손을 내민 인간들이 습격당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은 나와 도미니온스, 세라핌, 그리고 이기영 너뿐이다. 물론 외부에 이 말이 빠져나갔을 가능성을 아예 배제할 수는 없지만, 네 말이 사실이라면 너 역시 용의자 선상에 올려야 함이 옳다.”

“동기가 없지 않습니까.”

“동기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가령 네가 아직 인간의 탈을 벗지 못했다고 가정해 보자.”

“저는 인간이 아닙니다. 제 등 뒤에 있는 날개가 바로 그 증거가 아닙니까.”

“그럼 인간의 탈을 벗지 못한 것이 아니라 네 마음이 아직 그들에게 가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어떨까.”

“저는 이미 죄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이 진정으로 대륙을 위하는 길인지는 그 누구보다 제가 가장 잘 알고 있습니다. 신인류 계획 역시 그 때문에 고안해 낸 방법이 아닙니까. 저는 이미 그들과 섞일 수 없어요. 본질이 달라졌습니다.”

“나 역시 네가 범인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만약 그렇다고 가정한다면 네게도 동기는 충분하다. 우리에게 손을 내민 인간들, 그 인간들을 네 입장으로 생각해 보자면 적이 되는 것이 아닌가? 인류에게는 배신자로 여겨질 수 있는 인간들이다.”

“저는 천사들을 이끌 능력이 없습니다. 케루빔 님. 커다란 결정에 허가를 내리거나 명령을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닙니다. 만약 제가 그 쥐새끼가 맞다면 어떻게 그들을 포섭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렇잖아. 나는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없어. 네가 제일 잘 아는 거 아닌가?

“천사의 형태를 한 무언가일 확률도 존재하지 않을까.”

“가정, 가정, 가정이라니. 지금 케루빔 님께서 정확히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케루빔 님의 말씀은 제가 천사와 비슷한 형태를 한 무언가를 만들어, 인간 측의 배신자를 처단하기 위해 그들을 보냈다는 겁니까? 물론 증거는 없으시고요? 아, 가정이라고 하셨죠. 제가 깜빡했습니다. 단순한 가정을 구태여 입을 열어 꺼낸 이유도 궁금해집니다.”

“또다시 그렇게 과대 해석해 표현할 필요는 없다. 네가 쥐새끼라고 말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저 너 역시 그 후보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에둘러 표현한 것뿐이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야 하는 것이 맞는 것 같아 말을 꺼낸 것이지.”

“네.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둬야지요. 하지만 그 말씀은.”

“물론 나 역시 용의 선상에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으마. 조사가 필요하다면 성실히 임할 수 있다. 다만 그대 역시 마찬가지다. 세라핌, 그리고 도미니온스도 마찬가지겠지. 그 외에도 조사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이가 있다면….”

‘정면 돌파.’

녀석답다는 생각이 든다. 잘못한 것이 없으니 당당해도 되겠다는 태도로 보인다. 이쪽이 증거를 조작할 가능성에 대해서도 상정하고 있는 게 분명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저렇게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뭔가 준비된 게 있나?’

지금부터 준비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최소한 자신은 변호할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느끼고 있을 것이다.

살짝 주변을 둘러보자 비둘기들이 애매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새로운 기관을 만들어 운영하는 것이 옳다. 첫 용의자로 지목된 네 명은 관여할 수 없는 독립적인 기관 말이다. 기관이 만들어지는 대로 차례대로 조사를 받는다면 무언가 나오는 게 있지 않겠지.”

‘예상한 건가.’

“신인류 계획에 투자한 천사들 반과 그렇지 않은 천사들 반으로 구성하는 게 괜찮을 것 같군.”

‘너무 스무스하게 넘어가는 것 같은데… 너 이 새끼 뭐 준비라도 했어?’

“스스로를 변호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게 이로울 것이다.”

‘아니… 이 새끼 예상했구나?’

이 앙큼한 새끼.

정말로 준비한 거구나?

잠깐이었지만 뒤통수가 가려워진다. 확실하게 맞은 것은 아니었지만 놈이 내 뒤통수를 쓰다듬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나를 노려보고 있는 눈을 보자 내 생각이 맞았다는 걸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머리 아픈 짓거리를 하지 않는 타입이라고 판단했었는데 그건 또 아닌 모양.

정말로 케루빔이 내가 함정을 팔 것이라는 걸 예상하고 있었다고 생각하자 조금 싸해지기 시작했다.

물론 어떤 종류의 함정일지는 예상하지 못했겠지만 최소한 자신을 엮을 거미줄이 준비될 거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잘 알고 있네.’

오히려 이 퍼랭이가 쓰로누스보다 나에 대해서 더 잘 알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적어도 녀석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를 의심하고 있었다.

‘이제 발톱을 드러냈다고 보면 되는 거야? 역갱 준비한 거지? 역으로 털어먹겠다?’

세라핌의 죄의 심판에 대해서는 애초에 믿지도 않았다는 거네. 내 뒤에 있는 날개도 마찬가지고.

나도 이제 녀석에 대해 알 수 있을 것 같다. 녀석은 자기 자신의 판단을 믿는다. 주변에서 뭐라고 한들, 놈은 놈이 옳다고 판단한 것만 믿는다.

“좋은 방법인 것 같습니다. 케루빔. 저 역시 성실하게 조사에 임하겠습니다. 밝혀질 게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동의해 줘서 고맙다. 도미니온스.”

여기서 어떻게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겠어? 지혜 누나 역시 선택지가 없었을 것이다.

“나 역시 동의하겠어. 케루빔.”

“세라핌.”

‘부정하는 순간 역적으로 몰릴 분위긴데.’

“저 역시 동의하겠습니다. 케루빔 님.”

이건 호응할 수밖에 없다.

녀석이 정론이다. 물타기와 인민재판으로 호로록 상황을 정리하려고 했던 이쪽보다는 확실히 이성적인 선택이다.

‘이게 불리하게 작용할까?’

당연하지만 나 역시 증거를 남기지 않았다. 애초에 이기영이 쥐새끼라는 건 영 들어맞는 이야기도 아니다.

‘케루빔이 증거를 가지고 있나?’

가능성은 적다. 녀석이 아무리 모든 상황을 안배해 놓았다고 한들, 이런 것까지 완벽하게 예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럼 곧바로 시행하도록 하지. 독립기관의 구성은 쓰로누스를 통해서.”

“네.”

“최대한 빨리 구성한다고 해도 삼 일은 걸릴 테니 그 이후부터는 순차적으로 빠르게 조사에 임했으면 좋겠군.”

“옳으신 말씀입니다. 케루빔 님.”

그렇게 이틀이 흘렀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다고 할 수 있는 시간이었지만 결코 유익하지 못한 시간은 아니었다.

여느 때처럼 더미 월드를 만지작거리고 있었을 때 옆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준비하고 있었던 거 맞아요.”

“그래?”

“네. 거의 백 퍼센트라고 봐도 되지 않을까 싶은데요? 이쪽에서 함정을 파놓는 걸 기다리고 있었네요.”

“조사받는 건 조금 어땠어? 누나?”

“뭐 어쩌고 말고 할 게 있나요. 살얼음판 같은 분위기죠. 구성원을 구성하는 것도 예정된 시간보다 빠르게 진행됐잖아요? 미리 준비하지 않았으면 이런 속도가 나올 리가 없죠.”

“세라핌은 어때?”

“케루빔을 의심하고 있는 것 같았어요. 그 비둘기야 원래 그렇잖아요? 자신의 능력에 대해 의심하지 않으니 오빠가 죄를 씻었다고 생각하는 놈인데. 그나저나 준비한 건 있어요? 왜 이렇게 태연해요? 그동안 바쁘게 움직인 것 같지도 않고 그냥 더미 월드나 만지작거리면서 빈둥대고 있는 것밖에 안 보였는데. 일 시작하기 전에 이미 준비 다 끝내 놓은 거예요? 이렇게 여유로워도 돼요?”

“왜 재미있잖아. 더미 월드.”

“저쪽에서 이 갈고 준비하고 있잖아요. 얘가 은근히 만만치 않다니까요. 케루빔한테 작업 치려고 한 거 아니었어요?”

“…….”

“작업 들어가려고 한 게 케루빔이 아니었어요?”

“…….”

“너무 태연하다 싶었는데… 정말로 케루빔이 아니었던 거예요?”

“…….”

“아니, 답답하게 진짜 말 좀 해요. 그래야 여기서도 호응을 해주거나 하지. 세라핌이에요? 쓰로누스? 케루빔 맞죠? 지금 여기서 시간만 죽이면….”

“누나도 이런 건 절대 안 알려주잖아. 오히려 안심되네. 누나가 아직 못 깨닫고 있다는 건 저쪽에서도 절대 알아차리지 못하는 게 되는 거잖아.”

“무슨 수수께끼 게임해요? 이제 말할 때도 됐잖아요.”

“작업 치려고 한 건 케루빔이 맞아.”

“그런데요?”

“한 놈 더 있거든. 사실 케루빔은 겉절이지. 진짜로 작업 치려고 한 건 따로 있다 이거야.”

“…….”

“…….”

“누군데요?”

“지금 아군 병력은 어때?”

“갑자기 무슨 뚱딴지… 같은… 아.”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이 입을 벌리는 도미니온스, 아니, 이지혜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녀가 천천히 말을 건넨다. 궁금증이 해결된 얼굴은 속이 다 시원해 보인다.

“이제 알겠네요. 오빠가 작업을 치려고 한 게 뭔지. 이제 알겠어요.”

“뭔데?”

“…….”

“…….”

“시간.”

역시 누나는 눈치가 빠르다니까.

나도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정답.”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