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7화 의심과 확신 (1) >
그야말로 비둘기들의 무수한 악수 요청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대충 봐도 분위기가 가열된 것이 느껴진다. 휘파람 부는 소리나 괴성을 지르는 이들은 없지만, 우레와 같은 함성과 박수 소리가 뒤섞여 전해져 오는 게 들려왔다.
심지어 우리 쪽 진영의 비둘기들 같은 경우에는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보내고 있으니 분위기가 어떤지는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으리라. 마치 시상식 같지 않은가. 기립박수. 그래. 기립박수다.
쓰로누스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기는 했지만 함께 온 반대파벌 비둘기들이 혼란스러워 하는 것이 보인다. 실제로 이렇게 빠르게 일이 진행될 줄은 몰랐겠지.
아니, 이렇게 구체화시켜 작정하고 들어가 있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 분명하다. 말 그대로 이건 단순한 이론이었을 뿐이니까. 막대한 신성과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을 투자해야 얻을 수 있는 결과물이었다.
반대파벌의 주요 비둘기들이 꼬투리를 잡을 때 주로 사용하는 단어가 이상론이라는 단어가 아니었던가.
현실성 없는 이야기고, 이루어질 수 없는 이야기라고, 단순히 망상이라고 주장한 녀석들은 모두 심기가 불편한 얼굴들을 하고 있다.
물론, 이건 더미들이 살아가고 있는 세상에 불과하다. 신성을 섞은 데이터 쪼가리고 별 의미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들은 가능성을 읽었다. 새로운 이론과 그 이론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기술을 직접 목도하고 있다.
‘혁신 기술이라는 건 좋아.’
다른 건 둘째 치고 일단 있어 보이잖아. 단순한 개소리를 그럴듯한 개소리로 보이게 만들어 준다구.
눈으로 보이는 결과물이다. 아마 머리가 조금 돌아가는 비둘기라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저 기술이라면 가능하다. 수많은 오류에 대비할 수 있으니 비용을 최소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원가절감 개꿀이자너. 투자자 입장에서 이것보다 좋은 게 어디 있겠어?
‘시간 단축도 가능하겠지. 한번 닦아놓은 길을 다시 걸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메리트 있는 일인가.’
속도도 나오면 말 다했지. 뭐.
이건 안전주다. 안전한 투자고 안전한 주식이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부족하다. 믿고 맡길 수 있는 창업자인가, 라는 요소도 굉장히 중요하겠지만 이미 이기영 코인은 믿고 매수하는 코인이 아니었던가.
사대천사 중 두 명이 이쪽의 지지를 보내고 있는 것만 생각해 봐도 답이 나온다.
신진 소기업이나 스타트업 기업이 갑작스레 새로운 기술을 가지고 시장에 등판했다 생각해 보자.
투자해달라고 아무리 목소리를 높여봤자 단순 개소리로 들리겠지만 대기업 회장님께서 자리에 함께 있다면 분위기는 달라진다. 심지어 상석에 앉아 박수 세례에 동참하고 있단다.
젊은 기업인, 지금껏 없었던 새로운 인재, 대기업의 자본을 지원받고 있는 상황이라면 투자자들이 군침을 흘릴 만도 하다. 비둘기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투자하겠습니다!”
‘무수한 악수의 요청이!’
“대단하군! 대단해! 하하하하!”
‘그래 형 원래 대단하잖아. 그걸 이제 알았어?’
“역시 다릅니다. 이기영 님은 달라요! 세라핌 님도 정말 대단하지 않으십니까. 신인류 계획이라니, 완전히 새로운 바람이 아닙니까. 실제로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반대파벌도 흔들리고 있는 게 느껴진다.
“물론 아직 조심해야 할 시기라는 것에는 입장 변화가 없지만 최소한 이제는 허무맹랑하다는 말로 공격받을 일은 없겠습니다.”
“방금 표정 보셨습니까? 많이 어두워진 것이 보입니다. 이럴 게 아니라 투자해야지요. 아암, 그래야지요.”
“정말로 가능할 거라고 보는 것인가! 저건 단순한 프로그램이지 인류가 아니다.”
“무려 500만 가지입니다. 최소한 여러 가지 변수에 대항할 수 있다고 판단하는 것이 옳습니다.”
“옳습니다. 옳고 말고요.”
“하지만!”
“예의를 지켜주십시오! 회의를 하러 온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반대의견을 말하고 싶은 거라면 후에 마련된 자리에서 하세요!”
“말 다했습니까!”
“그래요! 말 다했습니다!”
‘개판 좋죠.’
“아직 발표가 전부 끝나지도 않았는데 이 무슨 추태입니까! 사과하세요!”
“사과하셔야 합니다!”
“어떻게 지금 이 상황에!”
“사과하세요!”
“지금은 전시상태입니다! 그런 와중에 이런 말 같지도 않은 장난에 휘둘리다니!”
“전시상태라니! 하핫! 전시상태라니요. 상대는 인간입니다. 어디 전시상태라는 말이 가당키나 한 말입니까!”
‘그래 너 말 잘한다. 기분 나쁘기는 한데 그런 자세 좋다구. 너는 편하게 죽여줄게.’
“그 인간에게 병력을 잃었습니다! 예산에 여유가 있는 상황이 아니란 말입니다!”
“정 그렇게 불안하면 원로가 비자금으로 숨겨놓은 자금을 가지고 오면 되는 거 아닙니까!”
“그런 이야기가 아니지 않습니까!”
“투자하지 않겠다면 나가세요! 나가세요!”
‘시바 진짜 개판 되는 거 한순간이네.’
“인류는 동의하지 않을 겁니다! 우리뿐만이 아니라 인류 역시 저 미친 계획에는 동의하지 않을 거라고!”
‘그래 맞지. 하지만 너네 계획에도 동의하지는 않을 거야.’
이쯤이 정리하기가 괜찮은 타이밍이 아닐까.
다시 한번 박수를 짝짝 치려고 하는 타이밍이었다.
“그만.”
하는 소리가 들려온 것. 세라핌이 아니다.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익숙한 파란 머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케루빔.’
언제부터 보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두워진 표정이 눈에 띈다. 이쪽이 내놓은 혁신기술을 보고 깜짝 놀랐다기보다는 현재의 상황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인 것 같았다.
당연히 마음에 들지 않을 만도 했다. 이 개판을 보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놈이 얼마나 있을까.
‘이건 아쉬운데.’
물론 놈은 파벌을 만든 주요인물이기는 했지만 갈등의 골이 이 정도까지 깊어졌다는 것에 대해서는 심란함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본인이 안에 들어와 있을 때는 몰랐겠지만 한 발자국 뒤에서 지켜보니 조금 더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시간이 생긴 것이다. 물론 내 추측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는 들어맞으리라 생각했다. 녀석은 그나마 정상적인 비둘기였으니까.
“이 무슨 추태인가.”
“…….”
“…….”
‘아 이 새끼 눈치 깠나?’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은 눈빛이다.
‘이거였구나.’
녀석이 노린 게 이거였구나.
‘착각은 아니지?’
새삼스레 깨달은 듯한 얼굴이었다.
맞든 아니든 상관없지만 최소한 이성을 찾은 것만 같다. 무척 흥분한 전과는 반대로 호흡을 가다듬고 있는 게 보인다.
내가 너무 힌트를 준건가? 아무래도 이건 너무 티 났지? 어디서 들킨 걸까. 조금 적당히 할 걸 그랬나? 너무 갈등을 조장하는 데 집중한 건가? 뭐 사실 별로 상관은 없지만…….
최근에 녀석의 상태를 살피지 않았다는 게 조금 후회되기는 했지만 이미 대세의 흐름은 막을 수 없다.
‘네가 어떻게 할 건데?’
도미니온스는 내 편이고 세라핌 역시 내 편인데. 심지어 보여? 내 지지자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네가 어떻게 할 건데?
장담하건대 분열을 보장시키는 것이 저 이기영이라는 발언을 한다면 쥐 잡듯이 잡아 비둘기 사회에서 매장시켜 줄 자신이 있다. 그렇게 멍청한 정치적 발언을 할 리가 없지.
대충 봐도 머리를 쓰는 것 같은 타입이 아닌 것 같이 보여 괜스레 기대하게 된다. 사대천사의 머리는 도미니온스와 세라핌이다. 쓰로누스는 그냥 무능력한 새끼고 케루빔은 그저 겉절이에 불과하다.
하지만 저 새끼는 그렇게 멍청하지는 않았던 것 같았다. 혹시 맛탱이가 나가 목을 치려고 할까 긴장하고 있었던 타이밍이었지만…….
“질문을 하고 싶군.”
놈은 다른 선택지에 주사위를 던졌다.
“네. 마침 질문을 받으려고 하던 차였습니다. 케루빔 님.”
내 입장에서는 최선의 선택이지 않을까.
“계획을 어떻게 진행할 것인지 묻고 싶다. 나는 이 계획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만약 정말로 가능성이 있다면 어떤 식으로 진행하게 될 것인지 묻고 싶군. 아마 인간들 역시 이 계획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
“…….”
“케루빔 님의 말이 맞습니다. 인간들은 신인류 계획에 동의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그들의 동의 여부가 중요합니까? 애초에 첫 번째 계획 역시 그들의 동의를 구하고 한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인간들은 대륙이 변화하는 것도 눈치채지 못할 것입니다. 시스템에 접근권한 따위도 없는 그들이 뭘 알겠습니까.”
“하지만 그들이 우리를 적대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한번 꼬인 실타래를 풀기는 어렵겠지만……. 우리는 인간들에게 화친을 제안할 생각입니다. 사과의 의미를 포함해, 그들이 입은 피해를 보상해 줄 계획이라고 하면…….”
“바로 전까지 서로 창과 칼을 맞대던 사이끼리 말인가?”
“인간은 멍청이가 아닙니다. 케루빔. 우리는 오랜 시간 동안 그들을 지켜봐 왔습니다. 이해관계를 통해 그들은 적도 될 수 있고 친구도 될 수 있어요. 물론 우리를 적대시하는 이들이야 존재할 겁니다. 하지만 더 이상 전쟁을 이어나가기 힘들다고 판단한 이들 역시 존재할 겁니다. 문이 열리지 않는다면 조금씩 두드리면 되겠죠.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습니다. 아주 많아요.”
“…….”
“…….”
‘이 새끼 어울리지 않게 생각하네.’
녀석이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이거 사정거리 맞지?’
손을 뻗어 새하얀 목을 꺾어 버리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하기는 했지만 이미 녀석은 무리수를 던지지 않기로 결심했다. 괜히 쫄 필요는 없다. 당당해지자 기영아. 시바. 꿋꿋해져야 하는 거야.
한참이나 이쪽을 바라보던 녀석이 천천히 손을 뻗는 것이 보였다. 악수를 하자는 제스처처럼 보이지 않은가.
‘이 새끼 왜 이렇게 무례해?’
이미 분위기가 개판이 되었다지만 발표 중간에 뚜벅뚜벅 걸어 나와 무대 위로 올라오는 행동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결벽증을 가지고 있는 것도 그렇고, 약간 주인공 병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원하는 게 이런 거라면 들어 줘야지.
나는 살짝 손을 뻗어 녀석의 손을 맞잡았다. 다른 이야기는 없겠지만 일단은 이쪽에 손을 들어준다는 제스처라고 판단해도 되지 않을까.
사방에서는 박수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어차피 무능력 쓰로누스는 대세의 흐름에 따라올 것이고 반대여론이야 점차 정리될 것이다. 물론 녀석이 원하는 게 그런 흐름일 리는 없지.
‘내부에서 파내려고 하는 거구나?’
일차적으로는 내 정체를 밝혀내겠다는 생각일 것이고, 이차적으로는 이 계획을 더 파고들겠다는 생각이 아닐까.
외부에서 어슬렁 거리는 것보다는 확실히 내부에 들어와 뒤집는 게 나을 테니 말이다. 그래. 나처럼. 녀석은 나 같은 선택을 했다. 기회를 확실히 노리고 들어와 가장 중요한 순간에 검을 꽂을 것이다. 곧바로 손을 맞잡기는 아쉬우니 조금만 더 깐죽거려주자.
“동의하시는 겁니까?”
“…….”
오랜만에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놈을 바라보는 게 좋을 것 같다.
“제 말에 동의하셨군요.”
“…….”
히죽히죽거리면 표정이 어떻게 변하려나.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드디어 깨달으셨군요.”
“…….”
하지만 좀처럼 흥분하지 않는 얼굴이 눈에 띈다.
조용히 입꼬리를 올려도 놈은 동요하지 않는다.
녀석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마 다른 이들에게는 들리지 않겠지.
“나는 인간을 사랑한다.”
“그것 영광입니다.”
“하지만 네놈을 보면 구역질을 참을 수가 없구나. 대륙의 기생충아.”
오랜만에 느껴보는 느낌이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해 다시 한번 녀석을 살펴봤지만 특유의 그 느낌은 사라지지 않는다.
틀림없다.
내 안에 깃들어 있는 성스러운 빛은,
녀석을 악마로 규정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