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6화 알프스(1) >
인류는 패배했다.
물론 완전한 패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일시적으로 휴전 상태에 돌입했다는 게 어울리는 표현이리라.
그 말 그대로 일시적인 휴전이었다. 어째서 천사의 탈을 쓴 악마들의 공세가 천천히 줄어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북쪽 너머에 있는 자들은 조용히 자신들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대륙 보호 관리위원회에서는 병사들의 사기를 위해 우리들의 끈질긴 저항이 대륙을 지켜냈다고 대외적으로 발표했지만, 그 발표가 진실이 아니라는 건 알 만한 사람은 모두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부길드마스터는 행방불명, 길드마스터는 타락한 채로 숨을 거뒀다.
직접 그 모습을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길드마스터의 마지막 모습이 얼마나 참혹했는지는 다른 길드 선배들의 반응을 통해 유추할 수 있었다.
길드의 분위기는 어두웠고 뭐라고 말하기 힘든 이상한 감정에 휩싸여 있었다.
몇몇의 길드원들에게도 이 사실은 비밀이었다.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은 자신과 조혜진 길드마스터 대리님. 김미영 팀장님, 창렬 선배님과 아영 선배님, 그리고 박리안 님이 전부였다.
어째서 모든 길드원들에게 사실을 알리지 않았는지는 대충 예상이 간다.
자신이 이 비밀을 공유하는 이들 사이에 끼어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아 있었지만 아마 일손이 부족해서일 거라고 생각했다.
짧은 전투였지만 모두가 피로가 누적되어 있는 것이 한눈에 보일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믿음직스럽지 못한 신입 길드원의 손이라도 빌리고 싶어진 것이다.
특히나 심각한 것은 정하얀 님 쪽이었다.
‘그럴 만도 해.’
북쪽 전체에 건 마법을 며칠이나 유지시켰다.
일반인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무한한 마력과 초인적인 마력회복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탈진 현상을 겪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
자신 역시 마력 탈진 현상을 겪어본 적이 있다.
상상할 수도 없는 상실감과 무기력함, 영혼을 스스로 찢는 것 같은 고통, 다시는 겪기 싫은 경험이었다.
계속해서 그런 현상을 겪고 있다고 생각하니 자신도 모르게 몸이 떨려온다.
“끼잉….”
“나는 괜찮아. 그러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왕! 왕!”
“빨리 가 봐야 될 것 같다고? 으응. 그렇지. 오늘은 할 일이 좀 많으니까. 정하얀 님 기다리시겠네.”
떨리는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계속해서 방 안에 틀어박혀 있는 정하얀 님의 상태를 체크하고 챙겨주는 것이 신입 길드원인 자신에게 주어진 퀘스트였다.
벌써 몇 번이나 다녀왔는데도 불구하고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가장 처음 길드에 가입했을 때는 친절하게 맞아주신 분이기도 했지만….
‘겁먹을 필요 없어.’
정신적으로 한계에 몰려 있는 게 당연하실 테니까.
조금은 긴장한 마음으로 방문을 똑똑 두드리자 칠판을 손톱으로 긁는 것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
“오, 오, 오빠?”
“네… 네… 아, 아니요. 정하얀 님. 알프스예요.”
정면을 똑바로 쳐다보기가 무섭다.
약간의 침묵이 들려온 이후에는 문 밑으로 손이 스윽 하고 튀어나왔다. 마치 미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수분을 다 빼앗겨 버린 손이다.
마력 탈진 현상을 한계까지 겪었을 때 일어나는 현상 중 하나였다.
“잠, 잠깐 들어가도 될까요?”
“…….”
“…….”
“어, 어떻게 해? 아… 응. 알, 알겠어, 소라야. 응. 들, 들, 들어와. 조심히. 조심히 들어와. 소라 밟, 밟지 말고.”
“네.”
천천히 문을 열고 들어가자 가장 먼저 눈에 비치는 것은 나무가 된 채로 굳어 있는 한소라 선배님의 모습이었다.
이전에도 본 적이 있었지만 무척 참혹한 광경이다.
그 옆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정하얀 님의 모습은 제대로 확인할 수가 없다.
몸 전체를 가리는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었으니 어떻게 확인할 방도가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정상적인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는 것.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머리가 빠졌는지 하얀색으로 변한 머리카락이 바닥에 뭉텅이로 떨어져 있었고 체격도 전보다 더 왜소해진 것 같았다. 심지어 허리가 굽어 있기까지 한 모습이었다.
“마, 마, 마력 회복 물약 가지고 왔어?”
“아니요. 부길드마스터님이 마… 마력 회복 물약은 하루에 한 병만 마셔야 한다고 하셨어요. 너무 많이 섭취하시면 건강에 좋지 않으시다고요. 오늘은 아침에 한 병 드셨으니까요. 지금은… 방도 정리해 드리고 여러 가지로 챙겨드릴 것도 조금 있어서요.”
“여, 여, 여기로 온데?”
“정하얀 님은 많이 피곤하시다고… 제가 전해드렸어요. 계속 주무시고 계시는 도중이라고요.”
“그… 그래? 다행이다.”
“일단 흰, 흰둥이부터… 맡아주시겠어요?”
“…….”
흰둥이가 은근슬쩍 정하얀 님의 옆 자리에 자리를 잡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도움이 될 거야.’
체력 회복과 마력 회복은 물론이거니와 심리적인 부분에서도 안정감을 주는 특성을 가지고 있으니 분명히 도움이 될 것이라고 여겨졌다.
거리가 가까울수록 도움이 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정하얀 님은 반응하지 않는 것 같았다.
‘괜찮으시겠지?’
녀석이 필사적으로 꼬리를 흔들자 그제야 천천히 손을 머리 위로 가져다 대는 모습이 보였다.
“오, 오, 오빠는 뭐 하고 있는데?”
“여전하세요. 많이 바쁘시고… 네. 회의하시느라 피곤해하시기도 하고… 네.”
“그, 그렇지… 전, 전쟁은 다시 언제 한대?”
“기밀이라 말씀드릴 수 없다고 하셨어요. 곧 다시 시작될 것 같다고 말씀하시기는 했는데… 아군 측에서 다른 방법을 생각하고 있다고도 하시고… 선제공격도 고려해 보고 있다고 하거든요. 일… 일단 정하얀 님은 다른 부분은 신경 쓰지 마시고 푹 휴식을 취하는 게 좋겠다고 하셨어요. 그게 가장 중요하다고….”
“으… 응. 소라도 내가 조금 쉬어야 한데.”
“두 분 사이가 참 좋으시네요.”
“그… 그렇지?”
“네. 소라 선배님이 정하얀 님을 바라보시는 것만 봐도 알 수 있거든요. 지금도 그렇고요.”
“그래?”
“네.”
“다, 다행이다. 헤헤.”
“저도 고향에는 그런 친구들이 있어요.”
“아아… 그, 그래?”
“네. 지금은 멀리 떨어져 지내고 있지만 예전에는 정말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같이 붙어 다녔던 사이였거든요. 자매처럼 지낸 친구들이에요. 참 많이 싸우기도 하고 서로 감정이 상한 적도 많았지만 그래도 무척 오래된 친구들이죠. 정하얀 님과 한소라 님을 보고 있으면 저도 그 친구들이 생각나요. 아, 식사하셔야죠.”
“먹, 먹, 먹기 싫은데….”
“그래도 드셔야 해요. 한소라 선배님도 좀 드셔야 된다고 하시잖아요.”
“아… 으… 으응. 그렇지. 뭐라도 좀 먹어야지.”
“…….”
“바, 바, 바깥은 조금 어때?”
“안개소환사님이 깔아두신 안개 때문에 쉽사리 악마들이 접근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요. 정확히 어떤 상황인지는 저도 아직 전해들은 바가 없어서요. 한번 여쭈어 보고 올까요? 아, 용병여왕님은 어제 일어나셨대요. 상처가 커서 많이 위독하실 줄 알았는데 금방 몸을 움직이실 수 있으실 정도라고 하더라고요. 박덕구 선배님도 이번 수성전에서는 많이 다치지 않으신 것 같고… 이전 그대로예요.”
“다, 다, 다행이다.”
“네. 피해를 입은 부분도 크지 않고… 무너진 곳은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악마들이 선을 넘지 못했으니 첫 번째 전투는 승리했다고 판단하고 있거든요. 아마 악마들도 접근하기 힘들 거예요. 그러니까 안심하시고 컨디션을 회복하는 데 집중하셔야죠.”
“으, 응… 소, 소라도 내가 너무 피곤한 것 같다고….”
“네. 저도 들었어요. 모두가 정하얀 님 건강을 걱정하고 있네요. 저도 정하얀 님이 건강하셨으면 좋겠거든요.”
“고마….”
“흰둥이도 그렇다고 말하는 것 같네요.”
“왕!”
“으… 응. 고마워.”
‘상태가 많이 좋아지신 것 같아.’
지난 며칠간의 노력이 빛나는 순간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대화를 진행할 수도 없을 정도로 궁지에 몰려 있지 않았던가.
계속해서 전쟁터로 향하려고 하는 것을 말리느라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 모른다. 지금 이렇게 정상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수확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엉망이 된 방을 정리하고 식사를 하는 모습을 계속해서 지켜보는 와중에도 끊임없이 말을 걸자 고개를 끄덕이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대화의 주제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굳이 먼저 말하지 않아도 정하얀 님께서 말을 걸어주시고 계셨으니 말이다.
“그, 그, 그래서… 같, 같이 살기로 했어. 오… 오빠도 괜찮다고 했고.”
“대단하시네요.”
“으… 응. 나, 나는 조금 오빠한테 미, 미안한데… 소, 소, 소라가 고집을… 부려서….”
“만약 정말로 그렇게 되면 저도 꼭 초대해 주세요.”
“응. 초대해… 줘야지. 같, 같은 길드원이니까.”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정말로 기쁘네요.”
“왕!”
이윽고 시간이 지나자 꾸벅꾸벅 조는 정하얀 님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아직 한낮이었지만 전혀 이상하지 않다. 회복을 위해 몸이 수면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주무시겠어요?”
“으응….”
“침대 준비해 드릴까요?”
“아니, 여… 여기서… 잘… 잘래.”
“그럼 담요만 덮어드릴게요.”
“으… 응.”
“…….”
나무에 반쯤 기대 잠을 청하는 정하얀님의 몸을 담요로 덮은 이후에는 조심스레 바깥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눈치를 보던 흰둥이 역시 슬슬 몸을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살짝 머리를 쓰다듬어 준 이후에는….
‘조혜진 님.’
“보고하러 가야지?”
“왕.”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집무실의 문을 두드리자 ‘잠깐만 기다리세요’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벌컥 열려왔다. 창문이 열려 있는 것을 보니 먼저 온 손님이 있었던 모양인 것 같았다.
당연하지만 자신이 신경 쓸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일도 아니다. 저건 내 영역이 아니었으니까.
“…….”
“…….”
평소와 변함이 없는 모습. 항상 똑같이 머리를 묶고 있는 그녀가 눈에 보였다.
이쪽이 긴장했다는 걸 눈치챘는지 작게 미소를 지어준 이후에는 곧바로 입을 여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진중하고 부드러운 목소리, 나를 배려해 주는 것만 같은 목소리였다.
“어떻습니까?”
“많이 회복하신 것 같아요. 아직 마력은 회복되신 것 같지 않았지만… 이전보다는 훨씬 안정되어 있으신 것 같아서… 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아요. 마력 회복 속도도 무척 빠르시니 아마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서 회복하실 거로 보이고… 특히나 많이 안정되셨거든요.”
“고생하셨습니다.”
“아니요. 그… 그나마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니….”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그렇게 자신을 낮추지 않으셔도 되요. 당신은 능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아… 네.”
“오늘 스케줄은….”
“네.”
흔들림이 없는 자세였다.
‘괜찮으신 건가.’
한 자루의 창 같은 사람이었다. 부러지지 않고 신념이 확고한 사람, 멀리서 봐왔던 조혜진은 그런 사람이었다.
‘정말로… 정말로 괜찮으신 건가?’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는 모습은 놀랍다. 자신을 짓누르는 압박감과 감정을 일과 연결시키려고 하지 않는 모습이 눈에 보인다.
어째서 대륙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파란 길드에서도 중요 요직에 앉아 있는지 이해가 가는 모습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쉽게 무너져 내릴 것 같은 모습이기도 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정하얀 님보다 더 상태가 안 좋아 보인다.
‘도움이 필요해.’
어떤 도움을 줘야 할지 알 수가 없으니 마음이 답답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
“네. 특이 사항이 있으면 다시 보고드리겠습니다.”
“네.”
집무실의 문이 닫힌 이후에도 괜스레 발길이 잘 떨어지지 않는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안에서는 계속해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절규에 가까운.
너무나도 서럽게 느껴지는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