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5화 소울 메이트(4) >
“오이오이! 진짜냐구.”
-꿇어.
“지혜 누나! 내가 믿고 있었다구! 젠장!”
-내 말이 안 들리는 모양이네.
“도대체 로노베랑은 언제 계약한 거야?”
어떻게 계약했는지도 모르겠지만 어느 정도 개연성은 충족된다고 생각했다. 로노베는 꿈속으로 이지혜를 만나러 갈 수 있었을 테니까.
아마 베니고어와 벨리알이 드잡이질을 하고 있는 도중이 아니었을까.
이전에는 27군단의 만인장이었지만 지금은 당당히 악마 72군주의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서큐버스 로노베.
아무리 이지혜가 편법을 썼다고 한들 지금의 로노베와 계약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마 로노베가 군단장의 지위를 얻기 전에 계약했다고 생각하는 편이 더 설득력 있다.
‘누나가 고민 많이 했겠는데.’
물론 당시 로노베도 충분히 강력하다고 할 수 있는 존재였겠지만 아무래도 어떤 패널티를 안고 로노베와 계약했다는 사실이 그리 달갑지는 않았을 것이다.
로노베는 어떤 비전을 내세우며 이지혜를 설득했을 테고… 이지혜는 주사위를 던졌다. 결과적으로는 완벽하게 이득을 보는 계약을 한 셈이다.
누나가 뭘 보고 그녀와 계약을 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로노베는 자신의 가치를 증명했으니까. 군단장의 자리에 자신의 이름을 박아 넣은 것으로 모자라 루시퍼의 총애까지 받고 있지 않은가.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주식을 산 이후 몇 년이 채 지나지 않아 열 배 이상으로 돌려받은 셈이다.
‘얼마나 좋아했겠어?’
이지혜가 역겹고 구역질 나는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건 이미 만인이 알고 있는 사실이라는 걸 떠올려보면 더욱더 그렇다.
의문점은 어떻게 계약에 필요한 마력을 공급받고 있냐는 것.
이런 상상을 하기는 싫지만 아마 대륙 어느 한구석에 이지혜의 계약을 유지시켜 주는 흑마법 공장이라도 운영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별로 파고들고 싶지도 않다. 과정이 뭐가 중요하겠는가. 여기서 중요한 것은 현재 이지혜가 그녀와 계약했다는 사실이고 그게 천장을 뚫을 정도로 떡상했다는 사실 뿐이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하는 소리와 함께 좁은 실내에서는 이미 전투가 진행되고 있다.
하연수가 사막을 처음 본 바다거북 같은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지만 그녀도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잘 이해하고 있다.
이지혜의 옆에 나타난 서큐버스 로노베는 웃으며 팔을 휘둘렀고 이윽고 거대한 검은색의 마력이 도미니온스를 덮친다.
-악마와 계약한 것도 놀랍지만, 정상적으로 계약한 것 또한 아니로군요. 당신 대신 고통받는 인간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어머. 말이 심하네. 누가 보면 내가 강제로 흑마법사 공장이라도 돌리고 있는 건 아닌지 오해하겠어.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나는 노동자들한테는 좋은 대우를 해주는 사장님이거든. 복지도 괜찮고, 편한 삶을 선물해 주고 있으니 따로 걱정하지 않아도… 우리 직원들 업무 환경은 항상 최상으로 유지시켜 주고 있으니까.
-구역질 나는 인간.
-당신 때문에 우리 직원들 전부 야근하게 생겼는데… 야근 수당도 나가게 생겼잖아. 저기 자기는 야근 수당 받으면서 일하는 거 맞아? 내 쪽으로 와보는 것도 생각해 봐. 당신 윗대가리보다는 더 잘해줄 자신 있거든. 여러 가지 의미로.
-당신의 말에는 답변하지 않겠습니다. 역시 당신은 사라져야 하는 인간입니다. 악마를 이 대륙에 불러들인다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내 눈에는 비둘기나 악마나 똑같아. 무기는 어떻게 쓰게 마련이야. 아, 그런 표정 짓지 마. 로노베 너를 무기로 표현한 게 아니라. 굳이 예를 들자면 그렇다는 거야. 잠깐 동안 혹하기는 했지만…. 도미니온스, 너희들 사상이 말도 안 되는 거라는 건 인지하고 있는 거지? 모든 인간은 자신의 자유의지를 가지고 살아갈 자격이 있다 이거야.
‘이 누나 태세전환 봐.’
-정의의 편에 선 입장에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사상이라 이거지. 하하하하하하! 인간의 존엄성! 네놈들은 그걸 배재하고 있는 거라고. 우리가 정의고 너희들이 악이야. 아니, 내가 정의야. 더 위에 선 자가 정의지. 너도 그걸 알고 있기 때문에 여기 온 거잖아.
-저를 당신처럼 역겨운 인간과 엮지….
-누구나 다 생각은 다른 법 아니겠어?
-당신을 죽이고 고통받는 모든 인간들을 해방시키겠습니다.
-우리 직원들 복지 괜찮다니까 그러네. 진짜 악마가 여기 있었어. 나 죽으면 우리 직원들 전부 실업자 되는데.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는 싸울 수밖에 없나 봐.
초월자들의 싸움이다.
이제 막 1티어에 들어선 하연수는 감히 끼어들 수도 없는 싸움이었다. 어떻게든 이지혜를 지키는 것이 그녀의 임무다.
도미니온스는 로노베를 배제한 채로 이지혜를 죽이려고 하고 있었지만 그게 뜻대로 될 리 만무했다.
아무리 로노베가 특기가 전투가 아니고, 소환 상태로 내려와 패널티를 안고 있다고 한들, 그녀는 72군단장 중에 하나다.
하위 서열이었지만 등급만 놓고 본다면 신이나 다름이 없다.
‘직원들 능력이 부족해. 다운그레이드된 것 같기는 하지만….’
도미니온스를 상대하기에는 충분하다. 어느 쪽이 우세한지는 대충 봐도 보인다.
로노베는 끊임없이 손톱을 휘두르거나 권능을 사용하며 도미니온스를 몰아붙이고 있었고, 그녀는 막아내는 데 여념이 없다.
잠깐잠깐 퓨즈가 걸린 것처럼 멈칫하는 것도 전투를 방해하는 요소 중 하나다. 그 쿨타임이 굉장히 짧기는 했지만 로노베가 그녀의 정신 속으로 침투하고 있다는 걸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더러운 것들을 보인다고 하더라도 저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건 두고 봐야 아는 거지. 비둘기.
-그 더러운 입 다물어라. 이 악마야.
‘심지어 얘네는 감정도 실린 것 같네.’
싸우는 모습이 꽤나 살벌하다. 여러 가지로 묘사하기 힘들 만큼 살벌하게 싸우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계속 저 싸움을 구경하고 싶기는 했지만 현재의 상황에서 그런 선택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이쪽에도 들어오고 있는 것 같은데. 오빠가 잘할 수 있죠?
상황실 하나가 완전히 망가져 버리며 이쪽이 지게 된 부담이 늘어난 것이다.
‘이거… 조금 꼬였는데.’
차희라는 참지 못했는지 다시 한번 케루빔과 드잡이질을 하고 있었고, 수성전도 원활한 방향으로 진행되는 도중이기는 했다.
문제가 있다면 도미니온스와 로노베가 싸우고 있는 지역으로 병력이 집중되고 있다는 것이다.
역겨운 영혼을 가진 인간과 악마가 튀어나왔다는 소식에 비둘기들이 단체로 몰려들고 있는 것만 같다.
원래부터 지리적으로 중요한 거점이었기 때문에 더욱더 내버려 둘 수가 없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이 있다면 붉은 용병이 메인으로 자리한 거점이라는 것. 심지어 이지혜 사단도 몇 명 포진되어 있다.
‘전부 다 아는 얼굴들이군.’
아마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현재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대처할 수 있지 않을까. 때마침 붉은용병의 최영기가 시야에 비치기 시작했다.
“영기 씨. 제 말 들려요?”
-네, 들립니다. 이기영 님.
“알고 계시겠지만 현재 그쪽 상황실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지혜 누나한테 따로 지시를 받을 수 없으니 당분간 전장은 영기 씨가 통제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별다른 특이사항이 없을 때까지는 매뉴얼대로 진행합니다. 적 병력이 몰리고 있으니 따로 지원도 보내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일단은 버티면서 소모전으로.”
-네. 이해했습니다. 이기영 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혹시 용병여왕님의 상태는 어떤지에 대해 물어도 되겠습니까?
‘아, 그거?’
-너라면 이해할 줄 알았다. 붉은 짐승아.
-지랄.
잘하고 있다고 쉽게 이야기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서로 치고받고 싸우고 있는 도중, 붉은색과 파란색이 뒤엉키며 전장 자체를 마비시키고 있는 모습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양산형 비둘기들도, 아군 진영의 인간들도 이미 자리를 벗어난 지 오래였다.
“현재 케루빔이라는 천사와 전투 중입니다. 상태는 나쁜 것처럼 보이지는 않네요. 전장은 마비 상태가 됐습니다. 제가 잘 체크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부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저야말로요. 특이 사항 있으면 곧바로 연락하셔야 합니다. 제가 지금 눈이 조금 바빠서요.”
-네, 너무 무리하지는 않으셨으면 합니다. 건강이….
“네, 네.”
차희라 대 케루빔.
이지혜 대 도미니온스.
‘일단 두 마리는 묶어둔 건가?’
이동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되는 도미니온스를 완전히 묶었다고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최소한 케루빔은 묶어놨다고 판단해도 될 것 같았다.
어떻게든 녀석과 싸우고 싶어 하는 차희라에게 걸렸으니 당장은 빠져나가기가 힘들다. 전체적으로 상황을 평가해 보자면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상황이었다.
‘아니, 이건 나쁘다고 해야 하는 건가.’
예상외의 전력이 사대천사 중 하나를 묶어놓고 있다는 건 환영할 만한 이야기이기는 했지만 냉정하게 말하면 이지혜는 저 천사에게 묶이는 것보다 전장을 컨트롤 할 때 빛을 발한다.
사대천사를 막을 패들은 어떻게든 만들 수 있지만 이지혜의 컨트롤 능력을 대체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물론 붉은용병의 최영기가 잠깐은 그 역할을 해줄 수 있다고 한들, 그래 봤자 본인이 맡은 작은 구역들에서만 영향력을 발휘하는 수준이 아니던가.
무엇보다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은 이쪽과 함께할 수 있는 파트너를 잠깐이나마 잃어버렸다는 것.
‘이게 커.’
이지혜의 부재는 크다.
이기영은 완벽하지 않다. 대가리 하나보다 대가리 두 개가 더 쓸모 있다는 건 기본적인 상식이다.
어떤 결정을 내릴 때 이지혜가 없다는 건 내게는 크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내 이해자였고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게 뭔지 알고 있었으니까. 전술적인 측면에서 의견을 나눠야 했고 여러 가지 커다란 선택에 대해 짧은 회의를 나눠야 했다.
‘지혜 누나 코멘트 없이 가 봐야 한다는 거네.’
우리가 녀석을 묶어둔 것이 아니다. 녀석들이 우리를 묶어둔 것일 수도 있다. 갑작스레 그런 가정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 새끼들한테 컨트롤 타워가 있다는 가정은 사실이고.”
‘이 새끼들이 1회차를 기억하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지.’
녀석들이 정말로 가면쓰레기들에게 뒤통수를 후드려 맞았다면 그 듀오가 가장 커다란 걸림돌이라고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일단 두 명을 떼어놓는 것이 최우선 과제라고 결정을 내리는 것도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두 가면쓰레기를 따로 떨어뜨려 놓겠다는 수작인가.’
가면쓰레기 진청의 업보 때문에 내가 고생하는 형국이 된 것 같기는 했지만….
‘이거 상대 얼굴 한번 보고 싶네.’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병력을 운용하고 있는 타워의 수준이 높다.
누가 이 병력을 운용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으니 답답해지기까지 한다. 적어도 얼굴이라도 마주 보고 있다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텐데.
망원경으로 적의 컨트롤 타워를 찾고는 있었지만 보이는 것이 없다. 이렇게 쉽게 위치를 발견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애초 상정하고 있는 것보다 더 진전이 없다.
게다가.
‘허투루 배운 것도 아니야….’
전장을 운용하는 걸 보면 느껴지는 것이 있다.
‘어디에서 병력을 더 빼 오지?’
붉은용병이 맡고 있는 전선은 지원이 필요하다. 추가 병력을 지원해야 한다는 걸 실감하고 있지만 어디에서 병력을 빼내야 할지는 온전히 내 선택이 달린 문제, 주변 전선에서 적 병력의 움직임이 보인 것은 바로 그때였다.
의도는 뻔하다. 추가 병력을 붉은용병 쪽에 밀어 넣는 순간 약해진 틈으로 추가 병력을 밀어 넣겠다는 거겠지.
이를테면 수 싸움이다. 유치한 비율 싸움을 해보자는 것처럼 느껴진다. 마치 지혜 누나가 생각날 정도로 깔끔한 운영이었다.
“재미있네. 애초에 너희들이 이런 걸 필요로 할 리가 없잖아.”
외신세력과 천사들이 수준 높은 병법을 구사하고 있다는 건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애초부터 중력의 영향을 받게 될 거라는 걸 생각했다면 모를까 이 새끼들이 병법과 친한 종족들도 아니었으니까.
1회차 놈들의 컨트롤 타워는 가면쓰레기 듀오가 아니었던가. 수박 겉핥기식으로 배워서 이런 전술을 운용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사대천사 중 하나.’
허벅지를 툭툭 내려치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거대한 책상에 펼쳐져 있는 전장의 모형이 눈에 들어왔다.
천천히 말을 움직이자 병력들이 움직이는 게 눈에 들어온다. 이쪽이 실시간으로 말을 움직이고 있다는 게 제대로 전달이 되기는 했나 보다.
한번 떠보는 식으로 병력을 던져보자 곧바로 적들의 움직임이 변하는 게 눈에 보였다.
‘반응 빠르네. 그리고… 무시해?’
아무 의미 없는 수라는 걸 알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니, 그것뿐만이 아니다.
“하….”
비둘기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게 보인다. 정말로 목적이 나와 이지혜를 떨어뜨려 놓는 것이었다는 듯 본격적으로 적 병력 전체가 한 발자국을 내디디고 있다.
적들의 목표물은 아군이 주요 거점들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던 14개의 거점이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중요한 위치라는 것을 누구라도 알 수 있겠지만 사방에 깔아놨던 모든 함정을 배제한 채, 비둘기들은 우리의 약점을 향해 창을 들이밀고 있었다.
“뭐야?”
몇 개의 말을 더 움직여봤지만… 아니, 움직이기 전에도 이미 막히고 있다. 적군의 컨트롤 타워는 마치 내 생각을 읽고 있는 것처럼 움직이고 있다. 자존심 상하지만 이쪽보다 수준이 높다.
‘완벽해.’
내가 이 전장을 공략하기로 마음먹었다면 녀석과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어쩌면 내가 이상향으로 그리고 있는 그림. 거기에 플러스 알파까지 되어 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어울리는 예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지만 마치 거울을 보고 체스를 두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 새끼… 누구야.”
저 멀리서부터 비둘기 하나가 다가오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녀석이 뭘 하려고 하는지 그 의도를 파악할 수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알 수 있을 것 같다.
나였다고 하더라도 똑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꽉 막힌 전장에 변수를 추가하기에는 이것보다 적절한 수가 없었으니까.
‘전술 김현성?’
“정말로 전술 김현성이야?”
적의 컨트롤 타워가 사대천사를 사용해 전술 김현성을 흉내 내고 있었다.
“이걸 따라 한다고?”
거의 완벽하게 운용하고 있다고 느껴질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