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9
회귀자 사용설명서 699화
대륙을 지키자 성스러운 빛의 군대여(2)
‘할 수 있을까.’
“후우… 후우….”
‘살아남을 수 있을까.’
“전투 준비. 전투 준비한다!”
‘지킬 수 있을까. 할 수 있는 건가. 이거 정말로 이길 수 있는 건가.’
안 좋은 생각을 하면 안 된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다. 이길 수 있다고, 별일 없을 거라고, 인류는 틀림없이 승리할 거라고 믿어야 했다.
하지만 천천히 열리고 있는 하늘을 바라보며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종말의 날, 예언의 날, 여러 가지로 이야기를 듣기도 했고, 오래전부터 마음의 준비도 마친 상태였지만 굳건히 쌓아온 마음의 벽이 허물어지는 게 느껴진다.
삼류모험가에 불과하지만 자신은 바보가 아니다. 저 이질적인 빛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무엇이 오고 있는 건지, 아마 알 만한 사람들은 전부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신과 천사의 탈을 쓴 고대의 악마가 대륙의 전역을 불태우고 이 땅 위에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를 울부짖게 하리라….”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친우의 모습이 시야에 비쳐왔다.
린델의 난봉꾼 캐넌 그리고 그 옆에 자리한 것은 통칭 삼류도박사 조지. 악마군단 소환사태 당시에도 함께 싸운 전우들이었다.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캐넌.”
“그냥 나도 모르게 말이 나왔을 뿐이야. 지금부터 우리가 어떤 것과 싸워야 하는지, 인류의 적이 뭔지… 다시 한번 되새겨야 할 것 같았거든. 어때, 우리 이번에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
“…….”
“…….”
“살아남을 수가 있을까가 아니야. 지켜야 하는 거야. 우리 뒤에 가족, 형제들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 그리고… 그리고 어떻게든… 이번에도 어떻게든 버텨낼 수 있을 거다. 명예추기경님이 함께하시니까.”
“빛의 성자. 베니고어의 아들. 신에게 선택받은 인류의 빛.”
“그래.”
“하지만….”
“…….”
“하지만 그도 인간이야. 알렉스.”
“캐넌.”
“나답지 않은 말이기는 하지만 최근의 그를 보면서 느끼는 게 많아. 우리 같은 놈들이 상상이나 할 수 있겠어? 신의 선택을 받았다느니, 대륙의 위기를 구해야 한다느니… 그런 중압감을 견뎌낼 수 있겠냐고. 일반인이었다면 진작에 정신이 망가져 버렸을 거다. 아니… 이미 망가져 있을 수도 있지. 단지 버티고 있는 것뿐이야. 책임감 때문에… 그래. 놓을 수 없기 때문에 견디고 있는 것뿐이라고….”
무의식적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자 명예추기경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인류의 기둥.’
인류가 유일하게 믿고 있는 인간.
‘신의 아들.’
베니고어를 비롯한 많은 신이 선택한 인간.
그 난봉꾼 캐넌이 저런 말을 했다는 게 믿어지지는 않았지만 그의 말이 맞다. 그 역시 인간이었다. 지금 자신 역시 몸이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을 지경인데 그는 오죽할까.
등에 짊어지고 있는 것이 다르다. 무게감이 다르다. 내가 책임져야 할 것은 뒤에 있는 가족뿐이었지만 그는 전 대륙과 전쟁터에 나가 있는 병사들을 책임져야 한다.
만약 나였다면 어땠을까.
“정신이 나가버렸겠지.”
절대 일어날 리가 없는 가정을 하면서도 몸이 떨려오는 게 느껴졌다. 그는 그런 중압감을 등에 지고 싸우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어떤 것들을 겪어왔는지, 무엇을 위해 지금까지 이 자리에 있는 것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십시오. 마지막이 다가왔습니다. 결실을 맺어야 할 때입니다. 마음속에 있는 아픔을 극복하고 승리의 종을 울릴 때가 찾아왔습니다.
기분 탓일까. 불안해 보이는 얼굴이 보인다.
-또 다른 아픔을 겪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겨내는 법을 배웠습니다. 상처를 치유하고 견디는 방법을 지난날들을 통해 배웠습니다.
인류는 상처를 치유하고 견디는 방법을 배웠다. 하지만 그는 어떨까. 그의 상처를 치료되어 있을까.
가혹한 삶을 살아가는 빛의 몸에 새겨진 아픔의 기억들은 완전히 아물었을까.
-두려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상처가 아문 자리는 더욱더 단단해지고 강해질 것입니다.
그의 연설에는 무게감이 있다. 마음을 좀먹고 있는 두려움이 천천히 사라지는 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는 어떨까. 우리가 가지고 있는 두려움은 그가 해결해 주지만 그가 가지고 있는 두려움을 해결해 줄 이는 어디에 있나.
“제기랄….”
감상적인 성격은 아니다. 하지만 자꾸만 입에서는 험한 말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제기랄….”
-우리는 승리할 것입니다. 제가 먼저 앞장서겠습니다.
책임을 지고 앞장선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모두 안심하시고 전투에 임해주시기 바랍니다. 제 눈에는 승리 이외에는 다른 글자가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를 안심시키기 위해 그는 무엇을 걸고 있을까.
-지켜야 할 것이 있을 때. 인류가 얼마나 강해질 수 있는지 보여줘야 합니다.
마치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 같지 않은가. 스스로 위로받고 싶어 하는 말처럼 들리지 않는가.
그는 지금 자기최면을 걸고 있는 도중이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느껴진다. 강해져야 한다고, 지켜야 한다고, 끊임없이 세뇌하며 되새김질하는 것만 같다.
-불가능한 싸움은 없습니다. 저를 믿고 무기를 들어주세요. 제가 여러분과 함께하겠습니다. 제가 먼저 여러분들보다 쓰러지겠습니다.
그라면 정말로 그럴 것이다. 그가 아끼는 인간들과 함께 쓰러지고 먼저 희생할 것이다.
저 눈빛은 죽기를 각오한 이의 눈빛이다. 거짓 한 점 없이 투명한… 투명한 눈빛이었다.
어째서인지는 알 수 없다. 감정 과잉이라는 사실 역시 알고 있다. 하지만 저 얼굴을 보고 있자니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이게… 도대체….”
그가 가지고 있는 무게감이, 중압감이, 슬픔이, 두려움이 전해진다.
애써 괜찮다고 말하는 저 단호한 얼굴의 이면에는 너무나도 작디작은, 너무나도 여린 너무나도 안쓰러운 나약한 인간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가 먼 곳을 응시한다. 마침내 하늘이 열리고 대륙의 종말을 울리는 천사의 탈을 쓴 악마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두렵다. 저 멀리서도 그들이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주변에서는 탄성이 들려온다. 아마 무의식적인 행동일 것이다.
저 멀리 있는 적들의 강함을 측정할 수 있는 이들의 얼굴은 이미 구겨져 있다. 무기를 쥔 손은 떨려오고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강해 보이는군. 악마군단 소환사태. 그때보다 더…. 어때 조지. 네 감이 구리다는 건 알고 있지만… 이번에는 어떻게 될 것 같아?”
“저번에 균열랜드에서 왕창 잃은 다음에는 내게 이런 건 묻지 않기로 하지 않았나.”
“빛의 성좌가 걸린 일이라면 조금 다르니까. 네가 삼류도박사라고 불린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여기에 없어, 조지. 하지만 저번에는 잘 때려 맞추지 않았어? 왜? 노을빛의 검사와 타락한 성자의 싸움에서….”
“글쎄… 뭘 듣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네.”
천사의 탈을 쓴 악마들이 천천히 가까워지는 것이 보인다. 조각으로 빚어낸 것 같은 외관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점점 더 빠르게 날아오고 있다.
이질적이다. 어울리는 표현은 아닐 수도 있겠지만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몸에 깃들어 있는 힘. 인간을 아득히 초월한 힘이다.
마력이라고 부르는 게 맞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한 개체 한 개체가 상위에 오른 모험가에 필적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당장 네임드라고 부를 수 있는 놈들이 하나도 아니라 하늘을 빼곡 메울 정도이지 않은가.
‘이런 상황에서 농담 따먹기라니.’
원래 실없는 녀석들이니 이해할 수 있다. 애써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그냥 몇 마디 주고받는 것이 전부겠지.
하지만 놈들이 점점 가까워질수록 자신도 모르게 삼류도박사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캐넌의 말이 맞다. 그는 저번에도 한 번 맞춘 적이 있었으니까. 빛의 검사와 타락한 성자의 싸움. 어쩌면 녀석의 인생에서 최초로 승리한 배팅인지도 모르겠다.
제발 자신이 원하는 말을 해주길 바라며 녀석을 바라보자. 조금은 어두운 얼굴로 입을 여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는 얼마든지 해줄 수 있지만….”
“…….”
“이번에는 감이 좋지 않아.”
“…….”
“…….”
“전투 준비! 전투 준비! 궁수들은 신호를 기다리고 마법사들은 주문을 외운다. 전군 대기. 전군은 대기! 긴장할 필요 없다. 빛의 성자와 베니고어 여신이 우리 곁에 있음을 항상 기억해라.”
“이길 수 있다!”
“이길 수 있어. 이길 수 있을 거다. 전우들아. 살아서 보자.”
“죽지 마라. 이 새끼들아! 죽지 마!”
“명예추기경님이 우리의 넋을 위로해 주실 거다. 빛의 성자의 품 안에서 죽을 수 있다는 걸 영광으로 알고 싸우자.”
“베니고어시여! 이겨낼 수 있는 힘을 내려 주시옵소서.”
“빛의 성자를 위하여! 대륙을 위하여!”
여기저기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콰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하는 지면을 울리는 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뭐… 뭐야.”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비둘기들이 지면으로 처박히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우와… 우와….”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광경. 하늘 위에서 떨어진 정체불명의 중력은 전진기지 앞에 있는 물체들을 땅으로 꺼지게 하고 있다.
“우와… 우와아아아아아아아!!!”
환호성이 들려온다.
“베니고어 님이다! 베니고어 님이야!”
아니, 이건 신성력이 아니다. 거대한 마력의 유동이 느껴지는 곳은 그렇게 멀지 않다. 아마 술자는….
‘대마법사 정하얀?’
시야에 담겨 있는 모든 것이 지면 아래로 처박히는 것은 상상하는 것보다 더 비현실적.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캐넌이 삼류 도박사 조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집어치워, 조지. 너한테 물어본 내가 병신이지… 하… 하하. 저걸 봐. 저걸… 저걸 보라고! 하하하하하하!!”
“뭐. 그렇지.”
“공격… 공격하라! 마법을 퍼부어! 지켜야 할 것이 있을 때 인류가 얼마나 강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줘라.”
“정하얀 님이다! 정하얀 님의 마법이야! 하하하하하핫! 정하얀 님이다!”
“마법을 퍼부어! 단 한 놈도 살려 두지 마!”
“죽어라! 이 더러운 악마 놈들.”
“손을 쉬지 마! 계속 화살을 날려! 계속!”
콰아아아앙!!
콰드드드드드드득!!!
콰직!! 콰아아아아아앙!!
전방이 순식간에 화려한 색채로 물든다. 그 누구라도 소리를 지르지 못하고서는 참을 수 없는 광경이라고 설명하는 것이 맞다. 자신 역시 마찬가지.
-대륙을 지키자! 성스러운 빛의 군대여!
뇌를 뒤흔드는 것같이 들려오는 그분의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몸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온몸이 빛에 휩싸이는 기분, 인류는 승리한다. 이곳에서 분명히 인류는 승리할 것이다. 분명히 승리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우리는 빛의 군대다! 저 어둠에게 빛의 성자의 대륙을 침범한 것이 어떤 의미인지 보여줘라!”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게 해라! 더러운 악마 놈들을 정화하자!”
“적들의 겉모습에 현혹되지 마! 이길 수 있다! 빛의 성자께서 대륙을 지키자고 말씀하고 계신다! 물러서지 말고 절대로 성벽 위로 올라오게 하지 마! 계속해서 땅바닥을 기게 만들어라! 하늘로 날아오르려고 하는 놈들을 최우선적으로 노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빛의 심판을!!”
“더러운 악마들에게 뜨거운 빛을!”
“빛의 성자를 위하여!”
화려한 마법들이 쏘아져 나간 이후에는 곧바로 땅바닥으로 고꾸라진다. 아마 계속해서 북쪽을 짓누르고 있는 중력의 영향을 받고 있음이 틀림없으리라.
파괴력이 배가 된 것 같은 느낌. 단점은 저 멀리 있는 적에게는 마법이 닿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지만 성벽 아래에 적에게는 틀림없이 치명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아니, 심지어는….
‘어떻게 닿고 있는 거지?’
일부 네임드들이 보내고 있는 마법과 화살은 마치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처럼 멀리까지 날아가고 있었다. 이건….
‘길을 열어준 건가? 저 공간에만 길을 열도록 의도한 건가?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한 거지?’
지금 와서 의문을 느끼는 것도 이상하다. 아군의 대마법사가 사용하는 마법 자체가 믿을 수 없는 수준이었으니까.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고 주변을 둘러본다. 아마 모두가 나와 같은 생각이겠지.
“우리는 악마가 아니다. 필멸자들이여.”
‘어?’
“오히려 너희들을 구원해 주러 온 존재라고 하는 것이 옳다.”
‘언제….’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에게 적개심을 가지지 말라. 우리는 어둠이 아니라 빛이며 진짜 어둠은 그대들의 안에 있다.”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다.
‘도대체 뭐야… 언제 온 거지?’
성벽 위에, 병사들의 한 가운데 자리 잡은 인형.
푸른색의 긴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는 남자. 커다란 날개를 수장 가지고 있는 천사. 아무 감정도 들어가 있지 않은 것 같은 눈과 표정. 그리고 이곳에 자리한 모든 이들을 피식자로 만들어버리는 위압감.
“하지만 그대들이 저항할 생각이라면.”
‘죽는다… 죽을 거야. 이곳에 있는 병사들 전원 죽을 거야.’
“나 역시 손을 쓸 수밖에.”
‘죽는다… 전부. 전부….’
녀석이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린다. 이질적인 푸른 빛이 손에 모이기 시작한다. 곧 그것은 거대한 낫의 형태를 만든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없다. 여전히 몸이 움직이지 않았으니까.
“내 이름은 케루빔. 나를 원망하거라. 필멸자들이여.”
‘끝인가?’
낫이 천천히 휘둘러진다. 곧 목이 달아날 거라는 생각에 공포에 질린다.
어디에선가 거대한 마력이 느껴진 것은 바로 그때. 마치 화면이 천천히 움직이는 것처럼 푸른색 긴 머리를 가지고 있는 천사의 얼굴이 땅바닥으로 처박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다만 정체불명의 형태가 눈 앞을 가리고 있는 것이 보인다.
붉은색. 마치 붉은색 갈기를 가지고 있는 것만 같은 전사의 등.
“너구나.”
“…….”
“너였어! 하하하하하핫! 내 상대가 너였다고!! 하하하하하하하핫!”
붉은색 갑주를 입은 용병은 정신이 나간 것처럼 웃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그녀의 별칭을 중얼거리는 것이 들려왔다.
“용병여왕.”
아니.
전쟁터 위에 강림한 것은 여왕이 아닌 전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