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 사용설명서-693화 (684/1,590)

# 693

회귀자 사용설명서 693화

마지막을 준비하자 (2)

“힘내세요… 힘내세요. 명예추기경님.”

‘힘을 내기는 해야지. 아, 근데 시바, 진짜 무섭기는 무서워.’

이미 마음의 준비를 끝내기는 했지만 그래도 무섭기는 무섭다.

‘뒈질 때 아플까?’

솔직히 별로 생각하고 싶은 부분은 아니다. 일이 대충 어떻게 돌아갈지는 예상하고 있었고 확률이 높다고 판단하기는 했지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어떻게 알겠는가.

정말로 뒈지는 순간을 피하지 못하고 엔딩을 맞이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내던진 주사위를 다시 주워오고 싶은 심정이다.

이지혜는 어차피 진짜 죽는 것도 아닌데 감정 잡는다고 코웃음을 보내오기도 했지만, 지가 당사자였다면 절대로 그렇게 말하지 못할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아니, 이거 시바 진짜 죽는 거 아니야?’

하는 생각이 간헐적으로 찾아올 정도.

굳이 예를 들어보자면 이렇다. 마시면 죽을지도 모르는 독약을 마신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빠르지 않을까?

쓰러진 이후에 해독제를 넣어줄 사람이 있고, 마시기 직전에 말려줄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한들, 정말로 독약을 들이켤 수 있는 사람은 몇 명이나 있을까.

‘와, 진짜 생각해 보니까 진짜 그러네.’

이기영은 희생하기로 결정했고 독약을 삼켜 넘기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 누구보다도 대륙을 위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동요하면 안 돼. 기영아. 이번 것만 마무리하면 돼. 그렇잖아.’

이쯤 되면 대륙의 진짜 영웅이라고 해도 위화감이 없다는 생각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는 거다.

아무튼 모든 준비는 마쳤다.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정하얀의 벽 넘기만 제외하면 말이다.

오늘 하루 동안 소화해야 할 스케줄도 많다 보니 이 시간을 잘 마무리한 건 맞는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나쁘지는 않았다. 중간에 튀어나온 녀석에게 도움을 받기도 했고 전쟁피난민들의 동요를 조금은 낮출 수 있는 시간이었으니까.

모든 것을 내던지려는 책임감 있는 성자의 얼굴도 확실히 여신의 거울에 옮겼고, 내 안에 있는 빛 역시 한 번 더 마음을 다잡을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따로 배웅해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교황님.”

“하하, 괜찮네. 명예추기경. 이제 올라가는 겐가.”

“예. 아마 슬슬 도착할 겁니다.”

“오, 오, 오빠.”

아니나 다를까 마력의 유동과 함께 작은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꽤 힘차게 나를 부른 것 같았지만 옆에 바젤 교황이 있다는 사실에 점점 작아지는 목소리였다.

“저, 저, 저 왔어요.”

“그럼 나는 이만 비켜줘야겠군.”

“…….”

“그럼… 무운을 비네. 명예추기경.”

“예. 바젤 교황님 역시….”

뭔가 희망적인 분위기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바젤 교황 역시 내 눈에 깃든 정체불명의 책임감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나를 데리러 온 정하얀 역시 마찬가지. 무슨 일이 터질 것처럼 불안한 모습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모습은 괜스레 씁쓸한 얼굴을 하게 만들었다.

“그럼 갈까?”

“네. 이, 이제….”

“응. 곧이지. 하얀이는 조금 어때?”

“저는 괜찮아요. 컨, 컨디션도 괜찮고요. 잘… 잘해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렇다면 다행이네. 하얀이한테는 참 기대하는 부분이 많거든.”

“정, 정말인가요?”

“물론, 당연하지. 다른 누구보다도 하얀이에게 거는 기대가 커. 매뉴얼은 잘 숙지하고 있는 거지?”

“네. 물… 물론이죠. 네. 그, 그런데 조금… 뭐, 뭐가 잘못된 것 같아서요. 바뀐 것 같아서… 매뉴얼이… 제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것 같아서요.”

“응?”

“아!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 그럼 이동할게요.”

“항상 고마워.”

잠깐 동안 몸이 이동되는 느낌이 든 이후에는 다시 한번 시야가 뒤바뀐다.

익숙한 공간, 중앙에 도착한 것이다. 잠깐 몸을 점검하고 있는 와중에도 자꾸만 뭔가 하고 싶다는 말이 있다는 듯 나를 바라보는 정하얀이 시야에 비쳤다.

‘얘도 슬슬 말해오겠는데.’

계속해서 빛 모드를 유지하고 싶었지만 저 얼굴을 보니 정신이 번쩍 든 것은 당연지사. 자꾸만 찝찝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보였기 때문이다.

내 눈에 깃든 희생의 기운을 느낀 것은 아니다. 애초에 그 눈빛은 정하얀과 만난 시점부터 안쪽으로 집어넣고 있었으니까.

정하얀이 의구심을 가지고 있는 부분은 내가 아닌 한소라의 상태이지 않을까.

‘아… 이거 불안하네.’

스위치를 누르기가 슬쩍 무서워지기 시작한다.

‘진짜 필요하기는 필요한데.’

이번에도 내가 예상하지 못하는 방향으로 튀어나갈지 걱정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대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죽어.’

항상 생각하듯 정하얀이 벽을 넘지 못하는 전투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사고가 날 것까지 예상하고 하루 전날까지 정하얀을 피해 다닌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떤 일을 벌일지 모르니 모든 준비를 끝마친 이후에 대비해야 하지 않겠는가.

만약 정하얀이 지금 당장 일을 터뜨린다고 해도 인류는 대비할 준비가 되어 있다.

자꾸만 물어오고 싶은 걸 물어오지 못하고 있는 얼굴. 기왕이면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버티고 싶은 만큼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려고 했을 때였다. 용기를 낸 정하얀이 천천히 입을 열어온 것.

“저… 저, 오빠.”

최근에 자신에게 일어난 이상한 일에 대해 물을 심산인 것 같았다. 당연히 현재 그녀가 의구심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한소라.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를 생성합니다.]

[소라 씨. 준비해요. (0/1)]

[한소라에게 일반 등급의 퀘스트를 전달합니다. 퀘스트 클리어 보상을 등록하지 않았습니다. 플레이어 한소라는 보상을 받으실 수 없습니다.]

‘아니, 그냥… 조금만 더 시간 끌까? 지금 터지면 연설할 시간이 없을지도 모르는데?’

“오빠….”

‘아 시바. 아직 마음의 준비도 안 끝난 것 같은데… 지금 시작해도 될까?’

“그러니까요.”

‘아… 시바. 나 진짜 죽어야 될지도 모르는데… 조금 더 생각해 볼까?’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리에 들어오는 것이 당연하리라.

정하얀에게 입을 여는 시점부터가 예언의 날의 시작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만약 감춰진 진실이 드러난다면 분명히 액션이 있을 것이다. 분명히. 정하얀은 항상 그래왔으니까.

내 일은 아니었지만 현재 한소라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에 과격한 반응을 보여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그, 그러니까. 소라에 대해서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응.”

“저, 저번에 그… 모, 모임에서 봤을 때 이,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져서….”

주사위는 던져졌다.

“이질적인 기운?”

“뭐라고… 설, 설명드릴 수 없는 기운이어서… 그러니까… 사, 사실 소, 소라랑 싸웠을 때도 비, 비슷한 게 느껴지기는 했었거… 거든요.”

“…….”

“그…그때는 진짜 눈치채기 힘들 정도로 작아서… 확, 확신도 할 수 없었는데… 사… 사실 오빠 몸에서도 느… 느껴져서 제가 지… 지운 적도 있었어요.”

“그게… 그게 지금 무슨 소리야?”

“딱히 몸에 이상은 없는 것 같았는데….”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해 줄 수 있어?”

정말로 심각한 상황이라는 듯 분위기를 잡자. 본인의 불안감이 현실화가 됐다는 걸 인지했는지 조금 혼란스러워하는 정하얀의 얼굴이 시야에 비쳐왔다.

단순히 웃어넘기고 별것 아니라고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는 걸 깨닫는 중이지 않을까.

조금만 조심스럽게 일을 되짚어 보면 이게 평범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정하얀 역시 알고 있을 게 분명했다.

어느 날 갑자기 한소라에게 찾아온 이질적인 기운, 그리고 하루하루 날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이질적인 마력이 커지는 걸 바라보고 있는 상황.

이제는 절대로 자신을 배신한 친구는 신경 써주지 않겠다고 다짐하기는 했겠지만, 어떻게 정하얀이 한소라를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있을까.

정체를 알 수 없는 적과의 전투를 준비 중이라면 한 번쯤은 이번 일을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이 맞다.

원래대로였다면 한참 전에 물어봐야 정상이었을 테지만, 이런 말을 한소라가 아니라 나한테 해온다는 것부터가 정하얀의 부족한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잘 보여주고 있는 사례가 아니겠는가.

정하얀은 현재 의심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애써 눈을 감고 있었지만….

‘오늘도 훔쳐본 건가?’

한소라가 현재 달고 있는 커다란 암 덩어리가 무엇인지, 도대체 저게 뭔데 자꾸만 커지고 있는 건지, 정하얀은 궁금해하고 있다.

“몸… 몸에 이상이 있는 건 아닌데… 그냥 이, 이상해서요. 그냥… 이상해서… 그… 박미진이 준 버프… 버프 같은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계속… 계속 이상해서.”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점점 더 정하얀의 호흡이 거칠어지는 것이 눈에 보인다. 상상하기 싫은 것을 상상하는 사람의 얼굴, 둠기영을 처음 봤을 때의 얼굴과 유사했다.

눈은 계속하게 흔들리고 있었고 손톱을 까득까득 깨물기 시작한다. 내 표정이 그만큼 심각해 보였던 걸까. 어느덧 눈에서는 눈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나 역시 한번 숨을 가다듬는다. 정하얀이 패닉 상태에 빠질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 건 내 예상을 뛰어넘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소, 소라한테… 문제가… 박미진이… 버프를… 박미진이… 소, 소, 소라한테 뭔가….”

그리고, 정하얀의 눈물이 눈에 가득 찬 순간, 나는 호흡을 멈추고 천천히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박미진이… 누구야?”

“…….”

“…….”

“네?”

“박미진이… 누구야… 소라 씨는… 계속 하얀이랑… 같이 있었던 거 아니었어?”

“어…? 네? 박, 박, 박미진… 마… 마법사… 그…러니까 오빠가… 분명히 박미진… 어?”

“박미진이… 도대체… 누군데….”

“차, 차희라… 도 이긴… 이겨서… 저… 저 대신 임무에 들어가는….”

“희라 누나는 또 왜… 하얀아. 매뉴얼 못 받았어? 너 대신 임무에 들어가는 사람은 없어. 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는데… 아무튼 소라는… 소라는 괜찮은 거야?”

“박미진… 어? 어? 박… 박미진… 분명히 있었는데… 박미진이라는 애 분명히… 분명히 있었는데? 어? 분명히… 분명히 있었는데…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럴 리가….”

정하얀이 혼란스러워하는 게 눈에 보인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궁금해하는 것 같은 얼굴. 자꾸만 머리를 부여잡고 있는 게 보인다.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눈에 보인다. 뭐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고 어째서 박미진이라는 이가 사라진 것인지 그 의문에 대한 답을 찾아 나서는 것처럼 느껴진다.

박미진은 없는 사람이 아니다. 분명히 박미진은 존재했었다. 소수였지만 오빠를 비롯한 몇몇 이들이 분명히 박미진이라는 이름을 입에 담았고, 그녀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말했었다.

박미진 덕분에 1순위 마법사에서 2순위로 내려오지 않았던가. 정하얀은 확실히 박미진을 기억하고 있다.

1차원적으로 생각하면 금방 따라잡을 수 있는 이야기. 내가 기억상실 증상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으니 정하얀이 닿을 수 있는 결론은 한 가지였다.

‘박미진이… 오빠 기억을 지웠어.’

목적은?

‘오빠에게 해를 끼치는 것.’

하지만 최악이라고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정하얀은 이기영을 지켜냈으니까. 오빠의 몸에 심어져 있던 이상한 기운은 눈에 보였을 때 곧바로 처리했으니까. 그 이질적인 기운에 대해서도 설명이 가능하지 않은가.

‘외신의 끄나풀.’

정하얀의 머릿속에서 흩어져 있던 퍼즐 조각들이 천천히 모이기까지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본인 역시 자기 자신이 진실에 다가가고 있다는 걸 인지하고 있는지 몸이 덜덜 떨리고 있다.

이미 결론은 지어졌다. 정하얀은 이기영의 몸에 붙어 있는 암 덩어리를 제거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

한소라의 몸에 붙어 있는 암 덩어리들은 제거하지 못했다.

“아… 아아… 아아아… 끄윽… 으아아아….”

몸을 부들부들 떨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 모습.

“아으… 아으… 오, …오빠. 오, 오빠… 오빠….”

“무슨 일이야.”

“소, 소, 소라… 소라….”

“소라가….”

“아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하얀이에게 정이 많이 들기는 들었나 보다.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정하얀에게 평소답지 않은 죄스러움이 밀려들어 왔지만 이쯤 되면 이기영 역시 깨달았다는 모습을 보여줄 수밖에 없다.

전쟁은 훨씬 더 이전부터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인류가 준비하며 방심하고 있었던 사이, 외신의 끄나풀들은 이미 일찍이 인류를 갉아먹을 준비를 마쳤다.

‘조금 더 조심스럽게 행동했어야 했어.’

이기영은 운 좋게 화를 피할 수 있었지만 한소라는….

한소라는 화를 피하지 못했다.

‘이… 더러운 외신쓰레기… 이 더러운 개자식들.’

일찍부터 전쟁이 시작됐다는 걸 깨닫지 못했다. 두 손을 쓸 새도 없이 완벽하게 농락당했다. 두말할 필요도 없는… 이기영의 완패였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허물어지는 정하얀의 두 손을 꽉 붙잡을 수밖에 없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