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7
회귀자 사용설명서 687화
이기영 이 개 쓰레기 같은 사기꾼아 (1)
물론 속단하기는 이르다. 나는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내가 이 블러핑이 함정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처럼, 기억을 지우기 전의 이기영 역시 내가 여기까지 도달한다는 것을 가정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한 번 더 꼬았을 가능성이 아예 없다고 볼 수 없다는 거다.
물론 현재로서 가장 가능성이 큰 추측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파고들어야 할 노선을 분명히 해야 했고 앞으로 일어날 모든 변수에도 대응해야 했다.
‘흔들리지 마. 흔들리면 안 돼.’
중간에 뭘 보게 되고, 뭘 깨닫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흔들리지 않는 게 중요한 시점.
이것 외에도 다른 굴을 파놓았을 것 역시 명백할 테니 첫 번째로는 가장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 장소를 조사해 보는 것이 옳다.
‘카스가노 유노.’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은 카스가노 유노부터 확인하는 것이 맞다.
최소 하나, 아니면 두 개 정도의 굴을 확인해 볼 수 있을 정도의 시간.
만약 카스가노 유노 역시 이기영 이 개자식이 파놓은 함정이라면 나로서도 다른 방법을 찾을 수가 없다.
정말로 바깥 녀석이 코앞까지 들이닥친 시점이 아니었던가.
시간이 조금 더 있었다면 여러 가지 힌트들을 전부 추적하는 것도 가능했겠지만, 모든 던전에 들어가 보물이 숨어 있을지 확인하기에는 압도적으로 시간이 부족했다.
이것 말고도 할 일이 있었으니까. 지금 당장 카스가노 유노에게 발걸음을 돌리지 못하는 이유 역시 그런 연유였다. 기억을 지우기 전의 이기영과 싸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당장 코앞에 닥친 종말을 막아내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마음 같아서는 종말이고 길드 모임이고 나발이고 때려치운 이후 곧바로 카스가노 유노에게 뛰어가고 싶은 심정.
하지만 여기서도 해결해야 하는 일들이 많다. 길드원들의 멘탈을 잡아준다든가, 목적성을 심어준다든가.
최종병기 김현성도 다시 한번 잡아줘야 했고, 아직 해결되지 않은 정하얀과 한소라도 신경을 써줘야 했다. 아직 정하얀은 벽을 넘지 못했으니까.
‘진짜 이 쓰레기 새끼.’
본인은 신나게 주사위를 던졌으면서 뒷감당은 이쪽에 넘기는 듯한 모양새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은 당연지사.
내일의 나! 부탁해! 같은 느낌으로 똥을 투척했다고 생각하니 심사가 뒤틀린다.
전부 뒤집어버리고 싶었지만 누구를 원망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거울을 보고 나 자신의 뺨을 연달아 날릴 수는 없지 않은가.
‘이 개새끼.’
욕을 해도 결국 나 자신에게 침 뱉기밖에 되지 않는다는 게 허무했다.
그 어떤 선택도 할 수 없는 지옥의 가불기…. 이 모든 게 대륙을 지키고 루시퍼를 이기기 위한 퍼즐이라는 것 정도가 그나마 나를 안심하게 할 수 있는 부분….
물론 이것 역시 함부로 도장을 찍을 수 없었으니 불안해 미칠 것만 같았다.
“…….”
“…….”
“형님, 이제 조금 괜찮은 거요?”
“처음부터 괜찮았어. 조금씩 진정되는 것 같은 느낌이니까. 하는 일은 잘되고 있는 거지?”
“거, 내가 누구요. 형님 동생 아니요. 걱정 안 해도 된다니까.”
“…….”
“그 말씀이 맞아요. 이기영 님. 덕구 씨도 정말로 열심히 해주시고 계셔서….”
“거, 엘레나 님도 이렇게 말하고 있으니까. 뭐 여기서까지 이런 이야기 하기는 조금 그런데…. 큼, 아무튼 기대하쇼. 전술 공부도 하다 보니까 재미 붙어 가지고…. 최근에는 내가 천재가 아닌지 생각하고 있다니까. 형님이 준 거로도 모자라서 다음 진도까지 예습했다는 거 아니요. 형님이 할 수 있으면 나는 더 잘할 수 있다! 이 말이 참이었다니까.”
당연하지만 믿음이 가지는 않는다. 조금 취했는지 옆에서 좋다고 떠들어대고 있는 모습, 안기모가 귀신같이 호응해 주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저도 처음에는 조금 의아하기는 했지만 확실히 첫 느낌부터 나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신뢰할 수 있을 정도고요. 팀의 사기 자체도 한참 올라온 상태여서….”
“기모. 아저씨. 말이 맞아.”
“매번 말하지만 첫 번째는 수성전이야.”
“그건 그렇지만….”
“애초 일이 잘 풀리는 상황이면 쓸 일이 없으니까.”
“말씀이 맞습니다. 변수는 줄이면 줄어들수록 좋으니 말입니다.”
선희영이 불쑥 말을 이어왔다.
“거, 나도 알고 있다니까. 명절에 모인 어른들도 아니고…. 큼, 무슨 말을 꺼내지를 못하겠다니까. 형님이 믿는다고 해줬으니 잘해낼 거요. 아, 그러고 보니 우리 아영 후배가 만들고 있다는 건….”
이 이야기가 계속되는 것 자체가 본인에게 손해라는 걸 알고 있는지 슬쩍 유아영에게 바통을 넘기는 모습이다.
“아마 내일 즈음에 완성될 것 같아요. 계획대로라면 오늘 드릴 수 있었겠지만 마무리 과정이 가장 중요하니까요. 아직 어떤 등급을 받게 될지도 감이 안 잡혀서…. 소재를 제대로 살렸을지가 가장 관건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덕구 선배한테 드릴 방패랑 창렬 오빠한테 드릴 단검, 그리고 소라가 사용할 지팡이도….”
“지팡이 같은 것도 만들 수 있는 겁니까?”
“네. 길드에는 조금 죄송한 말이지만 사용할 수 있는 소재 대부분이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것들이니까요.”
“…….”
“만약 저의 성장치가 더 높았더라면 충분히 준 신화 등급의 무구들을 만들어낼 수 있었을 거예요. 파란길드에서 현재 보유하고 있는 소재들을 생각해 보면 그게 맞아요. 몇 년만 더 지나면 재료들을 잘 살릴 수 있을 것도 같지만….”
“죄송할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정말로 죄송할 일은 아니에요. 전설 등급의 아이템 역시 대륙을 기준으로 흔한 아이템들이 아니라는 걸 생각해 보세요. 상위 모험가 중에서도 전설 등급 아이템을 보유하고 있는 이들이 흔치 않습니다. 굳이 소재들을 아까워하실 필요는 없어요. 아영 씨는 지금 누구보다도 잘 해주시고 계시니 너무 그렇게 자책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길드 재산을 까먹고 있다는 생각이 계속 들어서….”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었던 김현성이 불쑥 말을 이어왔다.
“기영 씨 말이 맞습니다.”
“…….”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 말고는 다른 것들은 신경 쓰지 마세요. 아영 씨는 충분히 길드에 도움이 되고 있고, 분명히 여러 가지로 크게 기여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도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자재의 가치나 길드의 재산 같은 것들은 정말로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길드 마스터….”
“우리가 무엇을 위해 싸우고 있는지, 무엇을 위해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인지 그것만 생각하시면 됩니다. 무엇을 지켜야 할지 깨닫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선을 다해주세요.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우리 현성이 오랜만에 말 한번 잘했네.’
“아영 씨뿐만이 아닙니다.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무거운 소리일 수도 있습니다만, 그저 여러분들이 한 번 더 생각해 주셨으면 했습니다. 오늘 이후로는 이런 기회가 생기지 않을 테니까요. 우리가 뭘 지켜야 할지 다시 한번 생각해 주세요. 만약 최악의 상황이 다가오더라도 말입니다.”
‘길드마스터 같다. 현성아. 비장한 모습 좋아.’
“무엇을… 지켜야 할지….”
“네. 덕구 씨. 지금은 그 생각만 하시면 됩니다.”
“형씨가 무슨 말을 하는지 대충 알 것 같다니까.”
“…….”
“거, 이럴 게 아니라 다 같이 한 번 더 짠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지켜야 할 것을 위하여’로!”
“…….”
“지켜야 할 것을.”
“위하여!”
“위, 위하여.”
“위하여.”
잔을 살짝 들어 올리는 길드원들의 모습을 보니 나름대로 안심이 되기도 한다.
‘멘탈 자체는 괜찮네.’
저마다 약간은 불안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겠지만 모두 훌훌 털어버린 것 같은 모습들이 눈에 띈다.
‘현성이도 생각보다 괜찮은데?’
둠 되기는 했지만 대륙을 지키려고 발버둥 쳤던 1회차의 본성이 어디로 도망가지는 않았던 것 같았다.
어째서 녀석이 커다란 짐을 짊어지고 회귀를 했는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
그의 눈빛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대륙을 지켜야겠다는 열망이 담겨 있는 영웅의 눈빛이 아닌가. 아마 길드원들의 불안감을 날려 버린 것은 흔들림 없는 녀석의 눈빛이리라.
‘하얀이 상태도 나쁜 것 같지는 않고….’
누가 봐도 한소라를 의식하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은 너 없이도 나는 잘살 수 있다는 걸 과시하는 것만 같다. 한소라도 그런 정하얀을 신경 쓰지 않는 역할을 잘 수행해 주고 있었고….
식사가 시작되고 쓸데없는 잡담을 계속해서 나누고 있었지만 단 한마디도 주고받지 않는 둘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힐끔힐끔 눈이 마주쳐도 고개를 홱 돌려 서로를 없는 사람 취급하고 있었다.
‘이것도 계획대로 진행하면 되겠네.’
마지막 점검 차 주위를 둘러봤지만 딱히 모난 곳은 없다. 나 개인의 문제만 빼면 말이다.
그렇게 길드원들은 저마다의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 대화 주제는 다양했다.
“일이 끝나면 뭘 하실 생각인가요?”
“무조건 여행이지. 저번 거울 호수로 놀러 갔을 때는 이상한 사건에 휘말렸으니까. 이번에는 거, 제대로 한번 다 같이 놀러 가야 되는 거 아니요.”
“뒤처리 때문에 바쁘겠지만 여행은 찬성이에요. 로맨틱한 곳으로요.”
일이 끝난 이후에 뭘 할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든가.
“최근 봉사활동을 쉰 지가 너무 오래된 것 같아서….”
“같이 가요. 희영 씨.”
“네. 그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엘레나 님. 그러고 보니 엘리오스 님은 잘 지내십니까?”
“아… 네. 오라버님도 여러 가지로 준비할 게 많아서 바쁘시기는 하지만….”
잠깐 잊혀졌던 인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든가.
“그때 예리 씨가 외쳤습니다. 매혹의 춤… 이라고 말입니다.”
“기모, 아저씨는 뭐라 그랬는지 알아? 뽑으면. 죽는다.”
서로의 흑역사를 꺼내 배틀을 벌인다든가.
“예, 예전에 오빠 기억나세요? 그러니까 우, 우리 튜토리얼 던전에서….”
“물론.”
“그, 그랬었죠? 헤헤.”
함께 한 추억을 꺼낸다든가 하는 것들 말이다. 대화의 주제는 많았다. 다들 취하면 그렇듯 했던 이야기를 또 하기도 했고, 쓸데없는 이야기로 입이 아플 정도로 웃기도 했다.
정하얀도 조금 취했는지 계속해서 입을 열고 있었고 선희영도 이쪽에게 입을 열어오고 있었다.
엘레나는 유아영과 함께 이종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박덕구와 황정연은 여행 이야기에 한참이다.
튜토리얼 동기였던 한소라와 김창렬은 당시 다른 파티원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가 주요 화두인 모양. 정하얀이 갑작스레 튜토리얼 이야기를 꺼내온 게 이해가 간다.
뒤늦게 합류한 박중기 팀장과 김미영 팀장을 비롯한 길드 간부 직원들도 합세하니 분위기가 순식간에 떠들썩해졌다.
그 와중에 박리안 역시 잠깐이나마 긴장을 놓고 신입 길드원 알프스와 담소를 나누고 있다.
조혜진 쟤는 누구랑 연락을 주고받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신의 손거울을 들고 피식피식 웃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너 그거 이지혜 아니지?
어울리지는 않지만 나 역시 잠깐 이나마 복잡한 머릿속을 날려버릴 수 있을 정도. 솔직히 즐겁다고 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김현성이 슬쩍 말을 걸어온 것은 분위기가 한참 무르익어 갈 때 즈음이었다.
“기영 씨 잠깐… 바람 좀 쐬고 오시죠.”
전체적으로 나쁘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함께 거대한 운명에 맞서기로 한 소울 메이트와의 담소가 필요한 모양. 솔직히 바깥이 추워 별로 나가고 싶지는 않았지만….
“…….”
“…….”
‘그래. 형이 서비스해 준다.’
애초에 당장 카스가노에게 달려가지 않은 이유 중 하나였으니 말이다.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발코니로 슬쩍 나오자 찬 바람이 불어온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어둠을 비추고 있는 거대한 빛 때문에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도 제대로 구분이 되지 않는다.
“…….”
‘으. 시바 춥네.’
“…….”
“피곤하지는 않으십니까?”
“네. 오랜만에 다들 모이니까 오히려 피곤함이 가시는 느낌이네요.”
“상태는 조금….”
“괜찮습니다. 예상하고 있었던 것보다는 더디네요. 어쩌면 자신도 모르는 새에 전부 다 나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정말로…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슬픈 웃음을 짓는 모습. 무리하지 말라는 얼굴이었기 때문에 양심이 찔려오기는 했다.
이제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서 힘내라고 용기도 주고, 우린 할 수 있다고, 이겨낼 수 있다고 이빨을 털면 이 새끼 멘탈도 더 안정되겠지.
그렇게 슬슬 빌드업을 하려고 했을 때였다.
‘이건 또 뭐야.’
어떤 전조도 없이 내 눈에 비치고 있던 대륙의 모습이 순식간에 전환 된 것.
이게 뭔데.
‘이것도… 암시야?’
완전히 뒤바뀌어 버렸다.
내 뇌로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동전을 뒤집듯 세상이 반전되어 버렸다.
시야에 비친 대륙의 모습은 어딘가 익숙한 풍경이다. 노을이 비칠 리가 없는 시간에 검붉은 색의 하늘. 당연히 기억에 있다. 김현성의 무의식 세계에서 봤었던 대륙.
완전히 폐허가 되어버려 개미 새끼 한 마리 남지 않은 대륙의 모습이었다.
그 안에 익숙한 인형이 보인다. 김현성이 아니다.
검은 망토를 두르고 있는 내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인다.
김현성이 매일 노을 진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처럼.
나 역시 같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조작된 것인지, 아니면 실제로 카스가노 유노를 통해 본 것인지 확신할 수 없다. 1회 차의 내가 최후에는 어떻게 됐는지 본 적이 없었으니, 지금 보이는 모습이 생소한 것이 당연하리라.
해가 뜨지도 않고, 지지도 않는 하늘을 바라보며 손을 뻗는 모습.
김현성 혼자만 남은 게 아니었나.
나는 도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거지?
‘아니, 시바, 이것도 그냥 개구라 아니야?’
한참 동안 폐허의 가운데에서 하늘을 바라보던 녀석이 담담하게 손을 꽉 쥐는 순간, 또다시 동전을 뒤집듯, 다시 한번 세상이 전환되는 것이 느껴졌다.
“기영 씨, 기영 씨! 기영… 기영 씨!”
“…….”
“기영 씨… 기영….”
이것도 블러핑이야?
“…….”
“…….”
-고맙다.
이것도 블러핑이냐고 시바.
-알타누스.
이기영 이 쓰레기 같은 사기꾼 새끼야. 진짜 구라 좀 작작 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