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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685화 (676/1,590)

# 685

회귀자 사용설명서 685화

기억을 지웠다(2)

“갑자기 왜….”

‘나도 몰라, 시바. 모르겠다고, 시바.’

“괜찮으십니까? 혹시 두통이….”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박덕구의 얼굴이 흐릿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옆에서는 조혜진이 난리 법석 호들갑을 떨고 있다.

나조차 지금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이해되지 않았으니, 박덕구와 조혜진이야 오죽할까.

다시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는 상황이었다.

저도 모르게 꾸역꾸역 튀어나오는 눈물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

조금이라도 수습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감정이 제대로 조절되지 않는다.

시야가 점점 흐려지는 것은 물론, 서서히 목소리도 제대로 들려오지 않는다.

내 몸이 말을 듣지 않는 상황은 당황을 넘어 무섭기까지 하다.

“뭐, 뭐 어디 아픈 거요? 어디 아픈 데 있는 거요? 두통은 또 무슨 소리요? 뭐, 병이라도 걸린 거요?”

“지금 희영 씨나 엘레나 님을 불러오겠… 아니, 안에 있을 테니.”

‘아냐, 시바. 그러지 마. 그런 것 때문에 그런 거 아니야.’

좀처럼 진정이 되지 않는다.

끄윽 끄윽거리는 소리가 새어 나갈까 억지로 입술을 깨물고 있지만 여전히 울음이 멈추지 않았다.

박덕구가 허겁지겁 뛰어와 어깨를 잡고 얼굴을 확인하는 중에도 쏟아지는 눈물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잠깐, 눈에 뭐가….”

말도 안 되는 변명이라는 건 알지만 이런 개소리를 지껄일 정도로 당혹스러웠다.

“들어가기는 뭐가 들어갔다는 거요? 아니, 왜 이러는지 이야기를 해야지.”

‘형님이… 하면….’

“…….”

“…….”

‘나는 더 잘할 수 있다.’

“누님, 우리 형님 괜찮은 거요? 갑자기 왜….”

‘허풍이 아니라… 진짜라니까.’

“머리, 머리가 아픈 거요? 아니, 왜 또 나만 모르고 있는 거냐니까.”

‘형님은 내가 살릴 거요. 거, 기억은 나는 거요?’

“우리 형님, 진짜 어디 아픈 거 아니냐, 이 말이오. 멀쩡하던 양반이 갑자기 왜 이래?”

‘형님이 내 목숨을 얼마나 많이 구해줬는지, 기억하냔 말이오.’

“아, 아니면 뭐 무슨 일 있었소? 힘든 일이라도 있는….”

‘꼭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소. 형님이 뭐라든 간에 형님이 나를 구한 건 달라지지 않으니까. 정신적인 부분에서도 그렇고, 육체적인 부분에서도 마찬가지요. 못난 동생 때문에 몇 번이나 칼을 대신 맞아줘서 고마웠소.’

“거… 우, 울지 마쇼. 왜 자꾸 눈물… 형님이 우니까, 나도….”

‘던전에 갔을 때도 변호해 줘서 고마웠고, 나를 선택해 줘서 고마웠소.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봐도 나는 형님한테 구해지기만 한 것 같다니까. 정말로 그런 기억밖에는 없소. 신세진 것밖에 없다, 이 말이요. 그러니까 이번에는 내 차례요.’

“아니… 아니, 좀 울지 말라니까. 왜 그렇게 자꾸… 거, 무슨 말이라도 해보쇼.”

‘내가 형님은 살릴 거라고 분명히 이야기했소. 잊지 마쇼, 형님.’

“진정 좀 하라니까.”

‘형님이 할 수 있으면… 나는 더 잘할 수 있소.’

“진정, 진정 좀… 괜찮을 거요.”

‘형님이 할 수 있는 건 나는 더… 잘할 수 있소.’

“다 잘될 거라니까. 그러니까… 뭐, 뭣 때문에 그러는지는 모르겠는데…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 없다니까.”

‘형님이… 할 수 있으면… 나는 더….’

“…….”

‘더… 잘할 수 있소….’

“…….”

‘형님이… 할 수 있으면….’

“…….”

‘할 수… 있… 소….’

“…….”

‘있… 소….’

“이….”

‘…….’

“이 미친 돼지 새끼. 이 개 같은 놈. 쓸모도 없는 새끼.”

“…….”

“갑자기 그러면 좀… 좀 상처받는데….”

“떨어져, 돼지 새끼야.”

“…….”

“땀 냄새나니까 떨어지라고, 빨리.”

“시, 시간이 없어서 급하게 오느라… 그리고… 그리고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갑자기 왜 그런 거요? 아니, 무슨….”

“신경 쓰지 마.”

“어떻게 신경을 안 쓸 수 있….”

“…….”

“…….”

“정말로 별거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그리고 빨리 떨어지라고.”

그제야 슬쩍 눈치를 보면서 녀석이 한 발자국 멀어졌다.

계속해서 목소리가 떨려왔지만, 시간이 지나자 조금씩 안정되는 걸 스스로 느낄 수 있었다.

조금씩 조금씩 세상이 원래대로 돌아오기 시작한다.

1회 차 죽어가던 박덕구의 모습이 현재의 모습으로 되돌아온다. 당연하지만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 역시 들려오지 않았다.

‘뭐 이딴 게 다 있어.’

저도 모르게 1회 차의 그 장면을 떠올리자 머리가 지끈거렸다.

다시 한번 눈물이 일발장전 되는 느낌에 황급히 머리를 털자, 아직도 떨떠름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박덕구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돼지 새끼.’

이 새끼까지 왜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눈에 눈물이 고인 모습이 당혹스럽다.

나보다 본인이 더 패닉이 온 모양새, 조혜진 역시 마찬가지였다.

예상치 못한 행동에 당황했는지 얼굴이 시뻘겋게 변한 게 보였다.

잠깐 호흡을 가다듬고 천천히 숨을 내쉬자, 방금의 감각이 완전히 사라진 게 느껴졌다.

조금 아슬아슬한 상태이기는 했지만 커다란 문제는 없다.

아마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또 다른 문제가 머릿속을 꽉 채웠기 때문이 아닐까.

‘뭐지? 시바, 뭐지? 갑자기 그건 왜 보였고, 애초에 왜 눈물이 난 거지?’

상상하기는 싫었지만 1차원적으로 생각하자, 금방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말도 안 되는 가정이다. 확률이 희박하기도 하고, 굳이 할 필요가 없는 가정이었다.

당연하지만 증거도 없다. 내 가설을 뒷받침해 주는 이해관계가 있을 뿐이다.

1회 차의 기억.

검은색 세계의 기억을 되찾은 것이 아닐까. 기억이라기보다는 당시의 감정들이 모조리 이쪽에 쏟아진 게 아닐까.

‘뭐 이런 개 같은 상황이 다 있냐고.’

어떻게 되찾았는지는 오리무중이었지만, 루시퍼가 도움을 줬다고 생각하면 영 설득력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1회 차의 기억을 되찾은 것과 루시퍼와 내가 한 내기가 연관이 있고, 게임에서 이기기 위해 스스로 기억을 삭제했다고 가정한다면 나름대로 들어맞는다.

완벽하게 퍼즐이 맞춰진 것은 아니지만, 퍼즐 위에 그려진 그림은 이어진다고 볼 수 있으리라.

시기상으로도 맞아떨어진다. 이전에 박덕구를 봤을 때는 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으니까.

박덕구를 만나 상륙작전에 대해 이빨을 털었을 때와 오늘 사이에 있었던 일이라고 생각하면 고개가 끄덕여질 만도 하다.

물론 이쪽이 단서를 찾았기 때문에 억눌러 왔던 게 터졌다고 가정할 수도 있겠지만,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가정은 전자다.

솔직히 1회 차의 기억을 깨달았다고 해서 내가 달라질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기가 김현성과 연관이 되어 있다고 생각해 보면….

‘변수가 존재하겠지.’

김현성을 사랑스러운 회귀자라고 부르는 나와는 다르게, 1회 차의 이기영은 김현성을 증오한 것으로 보였으니 말이다.

만약 내가 1회 차의 기억을 받아들인 게 맞다면 내가 어떤 식으로든 김현성에게 악영향을 끼칠 거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 악영향은 곧 루시퍼와의 내기에서 진다는 걸 의미할 것이고, 결국 이기영은 애써 받아들인 1회 차의 기억을 지웠다는 이야기가 된다.

어쩌면 애초에 1회 차를 받아들이는 게 마음에 안 들었을 수도 있고….

‘안에 남아 있기는 하다는 건가?’

개인적으로는 이 가설이 들어맞았으면 했다.

아직 확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내 안에 있던 1회 차 이기영의 자아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는 것보다는 훨씬 더 희망적이었으니까.

한 몸을 두고 두 개의 자아가 서로 싸우며, ‘내 몸에서 나가! 이 가면쓰레기 새끼야!’라고 외치는 클리셰는 주작으로는 즐겁지만 실제로는 전혀 즐겁지 않다.

1기영과 2기영이 같은 사람인지에 대한 개똥철학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싶지는 않다는 거다.

‘언젠가는 네 거짓에 대한 대가를 꼭 치를 거다, 역겨운 쓰레기 자식. 내 말을 잘 기억해. 너는 분명히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

그렇게 말했던 가면쓰레기 진청의 명대사가 괜스레 머릿속에 맴돌았지만, 애써 고개를 저었다.

‘문제 될 여지는 있겠는데….’

이 건을 계속해서 조사해야 한다는 확신은 있었지만, 그 결과를 책임질 준비는 되지 않았다.

만약 정말로 내 가설이 맞다면… 모든 일이 틀어지는 것은 이미 확정된 이야기다.

사랑스러운 회귀자 김현성이 갑자기 천하의 개쌍놈으로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 자체가 우리 같이 망하자고 선언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녀석의 뒤통수를 후려갈기고 싶어서 근질근질해지지 않을까.

내 몸에 깃든 가면쓰레기의 영혼이 김현성의 뒤통수를 쌔려 버리라고 외칠 거라 단언할 수 있다.

“또, 또 뭘 그렇게 멍하니 서 있는 거요? 정말 문제 있는 거 아니요?”

솔직히 지금도 불안하다.

커다란 감정이 나를 뒤흔들고 있지 않은가.

박덕구를 봤을 때 일어났던 일이, 김현성을 봤을 때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지금 이 모임 장소 안으로 들어가는 게 정답인지조차 확신이 서지 않는다.

“역시 오늘은 그냥 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럴 게 아니라 일단 진료부터 받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니, 진료까지는 아니더라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확인해 보는 게 맞습니다. 오늘 정말 이상하다는 거 알고는 계십니까?”

“…….”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부길드마스터… 지금 미친 사람처럼 보인다, 이 말입니다.”

“거, 진료는 무슨 이야기고,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요? 아니, 왜 이렇게 나만 모르는 일이 많아? 제대로 말을 해줘야 내가 뭐라도 하지.”

‘넌 시바, 가만히 있는 게 돕는 거야.’

“그럴 필요 없습니다, 혜진 씨. 그리고 덕구 너는 좀 조용히 좀 있어. 별일 아니니까. 잠깐 생각할 거리가 있어서 그런 거지… 이럴 게 아니라 빨리 들어갑시다. 사람들 기다리겠네.”

“진짜 별일 아닌 거요?”

“베니고어 님의 이름을 걸고 말하건대 정말로 별거 아니야. 빨리 들어가기나 해. 혹시나 해서 말하는 데 방금 문제에 대해서 말하지 말고, 혜진 씨도 마찬가집니다. 분위기 개판 만들고 싶지 않으니까 알리더라도 오늘 이후에 알려요. 그냥 묻어두는 게 가장 베스트고요. 뭐 해요, 안 들어갑니까?”

“…….”

“…….”

“들어가라고요.”

그제야 둘은 서로 눈빛을 교환한 후에 슬그머니 문을 열었다. 당연하지만 곧바로 내부가 보였다.

전쟁을 앞둔 시점에서의 모임이라기에는 지나치게 화려하기는 했지만 나쁘지는 않다.

한창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직 시작하지 않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직접 확인하는 게 맞다는 생각에 호기롭게 문을 열기는 했지만,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게 된다.

정말로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될지 하나도 예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일단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것은 정하얀.

“여, 여기예요, 오빠.”

과장된 모습으로 손을 흔들며 자신이 있는 쪽으로 날 부른다.

정하얀에 대한 미안한 감정이 폭발하지는 않을까 걱정했지만 별다른 이상은 없는 것 같다.

그냥 한소라 때문에 과장되게 행동하는 것 같다는 것과 평소처럼 귀엽게 느껴지는 것 정도가 전부다.

‘이건 좋아해야 하는 거지?’

박덕구 때처럼 삐죽 튀어나오지는 않았다는 거니까.

그다음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선희영을 봤을 때 역시 마찬가지.

얘와도 함께 활동한 적이 있었던 만큼 뭔가 다른 걸 느끼게 되지 않을까 싶었지만 그런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김예리, 안기모, 김창렬, 유아영, 황정연까지는 애초에 1회 차에서 접점이 없던 인물이었을 테니 별로 상관이 없었고, 엘레나도 마찬가지였다.

신입 길드원 알프스도 당연한 거고, 다시 한번 뒤를 돌아봤지만, 조혜진을 봐도 박덕구 때 같은 반응이 나타나지는 않는다.

문제는 김현성.

내가 모습을 드러낸 직후, 곧바로 문 앞으로 나와 인사를 건네는 녀석.

“기영 씨.”

뭔가 할 말이 있다는 듯 입을 열어왔지만, 일단은 이 새끼를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오랜만입니다, 창렬 씨. 이게 얼마만입니까?”

“기영 씨… 그러니까.”

“볼 때마다 성장하시는 것 같습니다, 창렬 씨는요.”

“…….”

“…….”

‘이거 어떻게 하지. 눈을 못 쳐다보겠는데.’

“저….”

눈을 마주친 순간 뒤통수를 치고 싶을 것 같았다.

‘괜히 왔나? 아, 시바 왠지 뒤통수 치고 싶어질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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