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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683화 (674/1,590)

# 683

회귀자 사용설명서 683화

준비하십시오(3)

“덕구 늦는다고?”

“훈, 훈련 끝나고 오신다는 것 같은데요? 듣, 듣기로는 모자란 인원을 보충한다고… 방금 도착했데요.”

‘이 새끼는 지가 먼저 다 같이 모이자고 했으면서.’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으면 되겠네. 하얀이는 어때? 괜찮겠어?”

“네? 아… 네, 괜찮아요, 네.”

정하얀이 자신은 아무 문제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는 이야기였다. 정하얀의 상태는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었으니까.

정신상태 자체는 조금은 불안정하다고 진단했지만 그나마 이쪽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길어졌다는 것 때문인지 궁지에 몰린 반응을 보여주지는 않고 있었다.

물론 그것 역시 내가 함께 있을 때의 이야기다.

온종일 함께 있던 한소라의 빈자리가 사라질 리가 없지 않은가.

본인은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별로 상관없는 척, 이제 한소라는 절교했으니 안중에도 없는 척을 하기는 했지만 지금도 굉장히 마음을 굳게 먹고 있는 것이 눈에 보인다.

‘내가 다 불편할 것 같은데.’

솔직히 조금 불편하기는 하다.

길드원들이 모두 모이는 건 좋았지만 알다시피 정하얀과 한소라는 절교한 상태였으니까.

저번에 있었던 큰 싸움 이후로 둘은 완전히 갈라선 상태였다.

물론 한소라가 간혹 정하얀의 상태를 묻는 메시지를 보내온다든가, 정하얀이 한소라에게 사과의 메시지를 썼다 지웠다 한다든가 하는 일은 있었지만 표면적으로는 냉전 상태라는 거다.

사이좋은 그룹이 함께 자리를 가지는 장소에서 두 명이 서로 눈도 마주치지 않는 상황을 상상해 보자. 내가 다 민망해지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정하얀도 꽤나 긴장한 듯한 모양새.

“소, 소라도 온대요?”

“당연히 오겠지. 소라도 같은 길드원인데. 이럴 게 아니라 이번 기회에 제대로 대화라도 해보는 게 어때?”

“안, 안, 안 할 거예요.”

“…….”

“하, 하나도 신경 안 쓰여요. 아무렇지도 않고… 어차피 이제는 모, 모르는 사람이니까. 정말로 신경 안 쓰여요.”

‘아니야. 너 신경 쓰고 있는 것 같아.’

최소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해 보인다.

박미진과 얼마나 친해졌는지도 정하얀의 주요 관심사 중에 하나겠지.

이런 상태라면 오늘 길드 모임이 끝난 이후에 터뜨려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그렇게 별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정하얀과 함께 들어가려고 하던 찰나였다.

“부길드마스터.”

어디에선가 목소리가 들려온 것. 곧바로 고개를 돌리자 조금 애매한 표정의 인형이 시야에 비쳤다.

정하얀 역시 함께 뒤를 돌아보자, 슬쩍 고개를 꾸벅인다.

“김미영 팀장님. 오랜만이군요.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네, 덕분에… 그보다 잠깐 드릴 말씀이 있는데….”

“아… 바쁘지 않으시면 자리가 끝난 이후에 괜찮을까요?”

“중요한 이야기라서… 이런 말씀 드리기도 굉장히 죄송하지만 아주 잠깐만 시간을 내주시면….”

“네, 뭐, 그렇다면….”

슬쩍 정하얀을 바라봤다. 본인은 괜찮다는 듯, 어른스럽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내가 괜찮지 않다.

혹시나 내가 없는데, 정하얀과 한소라가 마주치는 상황이 걱정됐기 때문이다.

우리 역시 약속 시각보다 일찍 도착했기 때문에 저 안에 한소라가 혼자 기다리고 있지는 않을지 신경 쓰였다.

“안에는….”

“길드마스터가 일찍부터 기다리고 계셨어요.”

“아, 네. 그럼 뭐, 잠깐 가시죠. 하얀이는 먼저 들어가 있어. 얼마 안 걸릴 거야.”

“네… 네.”

“그래서, 무슨 문제라도 생긴 겁니까?”

“생각하시는 것처럼 큰 문제는 아니지만, 꼭 알고 있으셔야 할 것 같아서… 다시 한번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오랜만에 가지시는 휴가인데….”

“아니요. 급한 일인데 어쩔 수 없죠.”

“별일 아닐 수도 있지만… 저… 잠깐.”

조금 긴장한 것 같은 모습이다. 정말로 무슨 일이라도 터진 건 아닌지 걱정됐지만… 뜻밖에도 눈에 보인 것은 베니고어 넷의 채팅 로그였다.

혹시나 얘가 일이 너무 많아서 정신이 없나 싶은 생각으로 로그를 읽어 내려가자, 그녀가 어째서 나를 따로 불렀는지 이해가 됐다.

‘뭐야, 이거.’

오히려 보고하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까지 든다. 아마 직접 이 방에 있던 사람들이라면 누구나가 다 깜짝 놀라지 않았을까.

기겁하고 조사했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물론 이런 걸 보고서로 올리는 입장에서는 베니고어 넷 똥글에 낚여 반응하는 멍청이가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할 만도 하지만….

‘그래서 긴장한 거구나.’

세세한 변수 하나라도 민감하게 반응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기에 불안함을 무릅쓰고 보고를 올린 것 이리라.

아마 그녀의 이목을 첫 번째로 잡아끈 것은 회색 아이라는 단어일 터.

라파엘이 생명 유지 장치로 간신히 명을 유지하고 있다는 건 대외적으로 알려진 사실이 아니다.

심지어….

‘대륙의 수호자를 운운한 것도 그렇지.’

“단순한 오류라면 좋겠지만… 아무래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요. 혹시나 싶어 베니고어 넷에 직접 문의해 봤지만, 서버 내에 없는 아이디라고 뜨는 것은 물론 추적망에 잡히지도 않고, 정황상 외부에서 서버를 뚫고 들어온 게 확실한데, 어디에도 흔적 같은 건 없었어요.”

“막스를 통해서 확인해 본 거예요?”

“네.”

“이건 누가 발견한 겁니까?”

“익명으로 제보가 들어와서… 찾아보려고 하지는 않았지만 원하신다면….”

“아니요. 뭐, 거기까지 갈 필요는 없습니다. 대충 무슨 상황인지 알 것 같기도 하니… 팀장님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되는 문제 같네요. 현 시간부로 이 보고서는 폐기해 주시고, 베니고어 넷에 있는 기록도 전부 치워 버리세요. 같은 방에 있던 인원들이랑 이거 보고서 올린 직원분도 입단속 시켜주시고요.”

“네.”

“그 정도로만 처리해 주시면 됩니다. 내일 안으로만 처리하면 되니, 팀장님도 오늘은 조금 쉬시는 게 좋겠네요.”

“아니요. 명령하신 일은 처리한 이후에 합류할게요.”

“네, 그게 편하시다면 그렇게 해주시면 되고요. 그럼 저는 잠깐.”

“네.”

“…….”

“…….”

별것 아니라는 소식에 안심됐는지 김미영 팀장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괜찮다는 듯 미소를 보내며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지만 보고받은 입장에서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이거….’

“…….”

‘이거 루시퍼 같은데….’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마 가장 확률이 높다고 생각했다.

‘거의 확실해….’

물론 다른 이들일 확률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게 인간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다.

베니고어 넷을 뚫고 들어오는 게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 않은가.

막스가 모르게 일을 처리했다면 더욱더 그렇다.

일단 인간은 논외, 위쪽 두 진영 중에 한쪽 진영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빛 쪽 같지도 않다.

그렇다면 용의 선상에 선 것은 악마 놈들 쪽, 그중에서도 빛 쪽의 눈을 피해 이런 장난칠 수 있는 악마를 꼽아보라면 당연히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어디에서 뭐 하고 있나 했는데.’

이런 곳에서 놀고 있었어?

본인 취미생활 열심히 즐기기도 하고, 사고 쳐놓고 지켜보기 좋아하는 성격이기도 하니, 위화감이 들지는 않지만… 어처구니없기는 마찬가지다.

이런 식으로 한 번 존재감을 드러내는 이유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물론 단순한 유희일 수도 있다. 솔직히 그게 확률이 높다.

생각할 가치도 없는 일이고, 본인 나름대로 베니고어 넷에 떡밥을 투척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주인공이 루시퍼라고 생각하니, 괜스레 기분이 묘해지기 시작했다.

가면쓰레기 진청이 나와 보드게임을 했을 당시에 이런 기분이었을까.

‘이딴 거에 의미부여 안 해도 되는데, 시바. 그냥 지 놀고 싶어서 논 거라고.’

심지어 평가도 아주 좋지 않은가.

정하얀이 벽을 뛰어넘는 건 이미 예정된 이야기고, 이기영이 그리고 있는 큰 그림에는 이상이 없단다.

‘신경 쓰지 말자. 그래.’

“아니, 어떻게 신경을 안 써? 시바, 그렇게 뒤통수를 맞았는데.”

지난 로그에서 이상이 없었다는 걸 보면 이번에는 대놓고 본인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었다는 이야기이지 않은가.

잘되던 차단이 풀려 버리기도 했고, 심지어 아이디도 찾을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대놓고 ‘이것 좀 봐줘’라고 외치는 것만 같다.

모르긴 몰라도 이 역천사홍보위원장은 내가 이걸 봐주기를 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여러 가지로 재미있는 부분이 많았지만, 특히나 내 시선을 잡아끄는 부분은 여기.

[그래도 가장 궁금한 건 김현성이 어떤 선택을 할지예요. 뭐가 어찌 됐든 나한테는 나쁘지 않은 내기지만 이기영 님이 주사위를 던진 것 역시 상당히 의외고….]

뭘 말하는 건지 모르겠다.

‘김현성이 어떤 선택을 할지?’

빛 아니면 어둠, 대륙 아니면 빛기영인가.

‘루시퍼 본인한테는 나쁘지 않은 내기?’

그냥 상투적인 표현일 수도 있지만 그녀와 나는 내기를 한 적이 없다. 결과적으로 나는 주사위를 던진 적도 없다.

“대륙에 올인하고 있다는 걸 주사위를 던졌다고 표현한 거야? 아니면 현성이를 유지시키는 걸 선택했다는 걸 도박했다고 표현한 거야?”

꼭 그녀와 내기가 있었고 내가 주사위를 던졌다고 말하는 것 같지 않은가.

정하얀과 한소라의 관계처럼 나와 루시퍼의 우정도 냉전 상태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상황이다.

둠현성 사건 이후로 나는 따로 루시퍼와 대화를 나눈 적도 없다.

그녀가 먼저 내게 접근한 적도 없고, 내가 그녀에게 먼저 다가선 적도 없다.

이 미친 까마귀가 어째서 갑작스레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뭔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아이, 시바. 이거 그냥 별것 아닌 거에 크게 낚인 거 아니야?’

수없이 가면쓰레기에게 뒤통수를 맞아온 김현성의 심정이 이러했을까. 한번 뒤통수를 맞았더니 모든 게 의심이 간다.

‘PTSD 생길 만하네.’

이제야 김현성의 의심병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지 간에….]

‘무슨 결과를 이야기하는 거지?’

뭘 이야기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있는 그대로 생각해 보면 대륙의 명운이겠지만, 그녀가 전에 던진 김현성과 내기라는 단어가 신경 쓰여서 참을 수가 없다.

“시바.”

‘위화감이 있어.’

이유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히 나 자신에게 위화감이 있다.

이렇게 예를 드는 게 맞는지 모르겠지만 마치 안개가 껴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일반적인 단어를, 일반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PTSD가 생겼기 때문은 아닌 것 같다.

원인은 분명히 나에게 있다. 분명히 나와 루시퍼가 내기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만 같다.

지금까지는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이걸 보니 알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조금 더 파볼까?

무슨 일인지 한번 확인해 보는 게 좋지 않을까.

‘아니, 하지 마.’

뭐?

‘하지 마.’

잠깐 머리를 붙잡고 있었을 때였다.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서둘러 고개를 돌리자 멍하니 나를 바라보는 조혜진이 시야에 비쳤다.

아직 기억 상실 떡밥이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다는 걸 깨닫는 것은 순식간.

이제는 질리는 떡밥이 될 것 같아 머리를 손에서 떼어냈을 때, 조혜진이 슬픈 표정으로 내게 다가왔다.

“이거….”

“뭐… 뭐예요? 지금 아픈 거 아닙니다.”

“이거 받으세요.”

“혜진 씨? 뭡니까, 이건.”

‘뭐야 너, 표정이 왜 그렇게 슬퍼. 눈에 눈물 고이고 있어, 시바.’

“저도 모릅니다.”

“근데 이걸 왜.”

“저도 몰라요. 부길드마스터 본인이 직접 전해준 물건입니다.”

“제가 언제요.”

“이야기하지 말라고 했었습니다.”

“뭔 소리예요? 약 먹었어, 혜진아?”

“그런 게 아니라 정말로 부길드마스터가 이야기하지 말라고 했었습니다.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말고 가지고 있으라고요. 머리를 붙잡는 모습을 보거나 초조해 보이면 꼭 전해달라고 말했습니다.”

“아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조혜진이 내민 것은 편지 한 장.

반신반의하며 편지를 뜯어내자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익숙한 필체. 모를 리가 없다. 누가 봐도 나 자신의 필체이지 않은가.

-기억하려고 하지 마. 그대로만 가면 이기는 내기니까.

여전히 기억은 나지 않았지만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개시바….”

나는 루시퍼와 다시 한번 만났고.

“하….”

스스로 그 기억을 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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