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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681화 (672/1,590)

# 681

회귀자 사용설명서 681화

준비하십시오(1)

하늘을 뒤덮은 거대한 그림자들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제노지르아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또 그 외침이 뭘 의미하는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드래곤들이 이쪽 일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보기로 마음먹었다는 것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한 은색 머리 빌런의 표정과 제노지르아의 대사로 미루어보면 아마 내 생각이 맞지 않을까.

‘긴 회의가 될 것 같네만… 긍정적인 답을 가지고 올 수 있도록 노력해 보겠네. 로드가 돌아가신 이후 이게 얼마 만인지… 우리에게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해 줘서 고마울 뿐이네.’

그녀의 말 그대로일 것이다.

‘좋은 대답을 가져오겠지? 무조건 그렇게 돼야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떠올리며 툭툭 허벅지를 두드리자, 눈을 가늘게 뜬 이지혜가 말을 걸어왔다.

손거울로 계속해서 연락을 주고받기는 했지만, 얼굴을 보는 건 무척 오랜만이다. 평소보다 더욱더 피로에 찌든 얼굴이 눈에 띄었다.

“벌써 1주일이네요.”

“그러게.”

“그래서….”

“…….”

“튼튼하고 맛 좋은 용 고기방패들이 투입된다는 건 확실한 거죠? 승률이 조금을 올라갈 것 같은데….”

“아직 확정된 사안은 아니니까. 디아루기아의 말을 들어보면 분위기는 나쁘지 않다만 분탕질을 칠 것 같은 놈이 눈에 밟혀서.”

“작업 칠 거예요?”

“그럴 시간 없어. 디아루기아가 잘해주기를 빌어야지.”

“손 놓고 구경하고 있겠다는 거 아니죠? 그 은발, 이번 기회에 악마에게 영혼을 판 용으로 만들어 버리고 쓱싹 해버려요. 나쁘지 않잖아요. 드래곤 중에서 악마와 내통하던 녀석이 있었다는 거, 아예 말이 안 되는 소리도 아니고… 조금 귀찮기야 하겠지만 확실하게 하는 게 낫죠. 장비 같은 것도 드래곤 본이나 심장으로 만들 수 있을 테고 일석이조 아니에요?”

“그게 하루아침에 되면 그렇게 하겠는데. 그런 게 아니니까. 이제 7일밖에 안 남았는데 거기까지 신경 쓸 시간이 어디 있어? 다른 드래곤들이 이쪽 말에 귀를 기울여야 가능한 일이야. 드래곤 로드 대리가 나를 철석같이 믿어주고 있기는 한데, 여론을 잡았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지. 엄연히 종족의 법도나 문화 같은 게 있으니까. 그걸 파악하는 데도 시간이 걸리는데, 괜히 발 들였다가 소강상태로 들어가면 아깝게 얻은 고기방패들 묶이는 거라고.”

“일리는 있네요.”

“만약 작업을 치려면 전쟁 중에 치는 게 가장 좋을걸. 건수가 잡히면 그대로 밀어붙이면 되는 거고, 그게 안 되면 캐슬락의 작은 바위 길드처럼 처리해야지, 뭐. 나중에 동상 세워주면 돼. 이른바 명예로운 죽음이라는 거지.”

“진짜 악랄하네요.”

‘누나한테는 그런 소리 듣기 싫어.’

“그래서 확률은 어느 정도인데요.”

정확히 데이터로 측정된 것이 아니라 제대로 감이 잡히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전보다는 높아질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정하얀은 아직 존버 중이지만 일단 차희라가 벽을 뛰어넘었다는 것에서 플러스 점수, 드래곤들이 합류한다고 가정하면 10% 정도는 더 높일 수 있지 않을까.

그 외에도 자잘한 문제들이 많이 해결된 상황이었다.

이미 인류는 싸울 준비를 마쳤다는 거다.

전 병력을 전부 원하는 곳으로 집어넣었고, 터져 나올 것만 같았던 불만들도 금세 가라앉았다.

다소 강압적으로 밀어붙인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감도 있었지만, 적폐 측 대형 길드의 길드마스터가 의문사를 당하면서 그런 불안감도 확실히 사라졌다.

로비를 위해 찾아가기로 했던 바로 전날이라 다소 황당하기도 했고, 혹시나 김현성이 저지른 짓은 아닐까 의심하기도 했지만, 뜻밖에도 범인은 부길드마스터.

악마들 쪽에 붙으려고 했기 때문에 직접 배신자를 처단했다는 비보가 날아들어 왔다.

아마 진짜 원인은 길드 내의 알력다툼이었을 거다. 불 보듯 뻔한 일이었지만 일단은 눈을 감아줄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이쪽에는 호재라고 부를 만한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잠깐 조금 뒤숭숭한 분위기가 유지되기는 했지만 이런 사소한 사건들을 제외하면 무척 스무스하게 진행되고 있는 편이다.

‘예언의 날이 다가올 것이다’라는 분위기가 퍼져 있는 것 역시 나쁘지만은 않다고 생각했다. 공식적인 발표를 한 것은 아니었지만, 분위기 자체가 그랬다.

병력은 전부 전선과 전진기지에 자리 잡았고, 근처 도시의 민간인들은 전부 후방으로 이송 조치되는 상황.

커다란 빛이 계속해서 북부를 가득 메우고 있으니, 뭔가 벌어질 것이라는 걸 눈치채지 못하는 게 이상하다.

며칠 안에 전투가 벌어질 것이라는 소문을 의도적으로 퍼뜨리는 와중에 대륙의 용들까지 울부짖었단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아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혹시 부정적인 여론이나 패배주의, ‘의문의 적을 향한 공포가 고개를 내밀면 어떡하지.’ 같은 고민을 하기는 했지만 의외로 병사들은 침착했다.

의문을 느낄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이들에게 침착함을 심어준 계기가 뭔지 아주 잘 알 수 있었으니까.

‘우리 아이들의 미래.’

드래곤을 위해 만들어놓은 공익광고가 인간과 이종족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것이다. 순수한 어린아이의 미소를 지키고 싶었던 것은 드래곤뿐만이 아니었다.

물론 감성팔이라는 여론도 슬그머니 대두되기는 했지만 본래 이런 절망적인 상황일수록 인간들은 이상적인 그림을 그리는 법이 아니겠는가.

그들은 공포를 이겨낼 방법으로 희망찬 미래를 그리는 것을 선택했고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에서는 그들이 바라는 이상적인 미래를 완벽하게 그려 넣었다.

대륙 전반에서 우리의 것은 우리의 손으로 지켜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고 있었다는 거다.

굳이 강제징집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매일 같이 군에 지원하는 이들이 늘어났고 결과적으로 군의 사기가 올라가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희생하기 좋아하는 이들은 ‘우리 것은 우리가 지켜야 한다고’, ‘우리의 미래는 우리의 손으로 불을 지펴야 한다고’, ‘작은 힘이라도 모인다면 어둠을 밝히는 등불이 될 수 있다고’, ‘자신에게도 쥐어진 역할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하며, 각지에서 모여들어 저마다의 각오와 신념을 걸고 대륙을 위해 목숨을 바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굳이 데이터로 환산하자면….

‘3%? 아니, 5% 정도는 올라갔다고 판단해도 되려나.’

어쩌면 조금 더 평가를 좋게 내려야 할지도 모르겠다.

분위기와 사기라는 건, 수치화하기에는 애매하고 민감한 문제이기도 했고… 경우에 따라서는 상정하고 있는 것보다 더 커다란 힘을 내기도 하니 말이다.

“…….”

“…….”

“그렇게 안 좋아요? 빨리 좀 대답해 줘요.”

“글쎄, 수치화하기 애매한 부분이 많아서 개인적인 견해로는 45% 정도까지는 왔다고 생각해.”

“거기에 정하얀까지 벽을 넘으면… 어때요?”

“50% 훌쩍 넘겠지, 아마.”

“걔 하나로 확실히 많이 달라지기는 하네요. 그래서 그렇게 버티고 있는 거예요?”

“기왕이면 극적일 때 터뜨리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서. 최소 사흘 전, 아니면 하루 전.”

“너무 오래 버티는 게 아닌가 싶은데, 나만 불안한 게 아닌가 봐. 혹시나 잘못되면 어떻게 하려고요. 그동안 걔가 저지른 일이 몇 개인지 생각해 보면, 이번에도 상황 다 꼬아버리고 개판으로 만들 수도 있어요. 솔직히 나도 정하얀이 벽을 넘을 거라고는 생각하지만, 불안요소가 없는 건 아니잖아요. 그걸 생각해야 돼요.”

“어차피 정하얀이 벽을 못 넘으면 다 뒈져. 바로 드래곤들 앞세운 다음에 노아의 방주 계획 실행이라고. 그래서 그렇게 보고 있는 거야, 누나. 벽을 못 두드리느니, 상황을 꼬아버리는 게 나아. 도망칠 수 있는 시간도 벌 수 있고 좋지, 뭐.”

“걔가 그 정도예요?”

정하얀의 가치가 엄청나다는 건 이미 이지혜 역시 알고 있었지만 지금의 질문은 조금 더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다.

“누나가 상상하는 거 이상일 거야. 장담할 수 있어.”

‘상황이 그렇게 안 좋은 건 아니니까.’

“뭐, 오빠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아. 라파엘 쪽은….”

“일단 유지장치는 계속 꽂고는 있는데… 혹시나 일어나면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까. 정 안 되면 어쩔 수 없지. 누나는 좀 어때?”

“힘들죠. 이렇게 수다 떨 시간이 있나 싶을 정도로요. 그래도 나쁘게 진행되고 있는 건 아니에요. 붉은 용병도 꽤 괜찮은 길드고, 차희라가 요구한 선까지는 가까스로 맞출 수 있을 것 같아요. 가다듬을 부분이 아직 많기는 하지만… 너무 거기에만 매달릴 수는 없잖아요. 특히 오늘 같은 날에는.”

이지혜가 슬쩍 고갯짓하는 것이 보인다. 시선이 따라간 곳에 위치한 것은 여신의 거울, 화면에 비치는 인물은 교국의 지도자 오스칼이었다.

강단에 서서 기자들에게 발표하는 건 그녀에게 익숙한 일이었지만 오늘따라 다소 긴장한 것 같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이내 그 긴장감도 서서히 사라진다.

“의외이긴 해요. 솔직히 발표는 오빠가 할 줄 알았는데.”

“나는 전투 직전에 들어가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서. 무엇보다 오스칼도….”

“네, 뭐… 인정해요. 고유능력으로 스피치 능력이라도 달고 있는 건 아닌가 했다니까요. 말도 잘하고 전달력도 좋아요. 이런 일을 전하는 것도 어울리고요.”

이지혜의 말이 맞다.

솔직히 오스칼에게 달변가라는 말은 어울리지는 않는다. 조리 있게 말하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어투나 행동에서 신뢰감을 주는 타입이라 할 수 있으리라.

같은 말을 하더라도 그녀가 입을 열면 조금 더 신뢰감이 생기는 느낌이랄까.

신성제국을 혁명으로 바꾼 그녀야말로 이번 일에 대해 발표하는 데 적절한 인물이었다.

예상했던 대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을 이어나가는 모습. 시작할 때는 조금 뜸을 들였지만, 이내 거침없이 입을 열고 있었다.

별다른 내용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찌 보면 단순한 발언들, 모두 예상하고 쉬쉬하고 있었던 이야기를 입 밖으로 꺼내는 것에 불과했다.

-북부에서….

북부에서 쏟아지는 빛의 원인.

-베니고어를 비롯한 대륙의 신들께서는….

예언에 대한 발언,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와 교황청을 비롯한 여러 대형 길드들과 단체들의 조사 과정, 또 그 과정으로 얻어낸 결론까지.

길면 길다고 할 수 있는 시간 동안, 그녀는 공식적인 입장을 발표한 이후 끝까지 말을 이어갔다.

-이에 예언의 날이 정확히 일주일이 남았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전하게 되었습니다.

“말했네요.”

“응.”

-…….

“생각보다 더 조용한 반응이기도 하고요.”

“예상은 하고 있었겠지만, 씁쓸하겠지. 아니었으면 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을 거야.”

-마지막으로, 대륙에 살아가는 모든 분께 감히 말씀 올리겠습니다.

“…….”

-준비하십시오.

“…….”

-여신이 세우고 여신의 아들이 가꾼 이 땅을 지킬 준비를 하십시오.

“여신의 아들은 오빠 말하는 거죠?”

“글쎄.”

-충분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힘을 하나로 모은 인류라면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일입니다. 물론 커다란 희생이 따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는 그 누구의 희생 없이는 쟁취할 수 없는 과업입니다. 여러분에게, 여러분이 희생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준비하라고 말한 것은 희생이 아닌 승리입니다.

“…….”

-제가 먼저 희생하겠습니다. 우리가 승리를 쟁취할 수 있도록 제가 희생하겠습니다. 그 누구보다 앞장서 여신의 아들이 가꾼 이 땅을 지킬 것입니다. 그 누구보다 먼저 희생해 앞장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의 후대에 온전한 미래와 꿈을 전하기 위해 검과 방패를 들 것입니다.

“…….”

-준비하십시오

“…….”

-싸움을 준비하십시오. 승리할 준비를 하십시오. 우리는 이겨낼 수 있습니다. 인류는 항상 위기를 맞아왔고 그렇게 이겨내 왔습니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선대는 이미 수많은 싸움을 통해 이 땅을 지켜왔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이념의 싸움, 자연과의 싸움, 갈등과 종족 간의 싸움, 권력과의 싸움, 보이지 않는 적과의 싸움, 이미 우리들의 몸에 새겨진 것들입니다. 우리의 선대들이 우리에게 전한 것은 패배하는 법이 아니라 승리하는 법입니다.

“…….”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이 모든 싸움에서 승리했기에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언제나 그렇듯, 우리의 역사가 증명하듯 우리는 승리를 손안에 넣을 것입니다.

“…….”

-준비하십시오.

“…….”

-대륙을 지키기 위한 싸움을.

“…….”

-승리를.

“기사 헤드라인이 기대되네.”

이지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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