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0
회귀자 사용설명서 680화
드래곤(5)
“이제 그만해야 할 것 같구나, 마르세린. 디아루기아의 표정이 안 좋아 지고 있으니….”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디아루기아 님. 저 역시 배우자를 선택해야 할 날이 온다면 이런 이를 선택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을 뿐이니까요.”
“아, 아닙니다, 마르세린 님.”
“…….”
“…….”
“마르세린이 네 짝을 탐한 것이 아니니, 그런 표정을 짓지 않아도 된단다, 디아루기아.”
왠지 모르게 계속해서 찝찝한 표정을 짓고 있는 디아루기아가 신경 쓰였던 모양이다.
‘그런 것 때문이 아닌데.’
마르세린의 대사 때문이 아니다.
다른 용들은 디아루기아의 상태에 위화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지만 나는 알 수 있다.
아마 예전 이야기를 하다 보니, 과거에 있었던 아픈 기억을 떠올리게 되는 모양이다.
정확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녀에게는 트라우마로 남을 정도로 괴로운 기억이 아니었던가.
손을 잡아주자 떨리는 몸이 천천히 잦아드는 것이 느껴졌다.
그 모습을 본 제노지르아가 천천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 역시 대충 어떤 상황인지 눈치챈 것이 아닐까.
디아루기아가 곧바로 말을 돌리며 입을 여는 것을 보니, 역시나 내 생각이 맞았다는 걸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조금 갑작스러운 태세전환이 아닌가 하는 생각해 봤지만 그다지 위화감은 없다. 어떻게 보면 여기 자리한 이들이 제일 기대하던 이벤트였으니까.
“디아루리아도 함께 인사드려야 했는데… 지금 불러오도록 하겠습니다, 제노지르아 님.”
“그렇지. 여기에 온 목적도 깜빡 잊을 뻔했구나. 아직 채 10년도 지나지 않은 용이라니….”
“조금 떨리네요.”
“나도 그렇다.”
“기대되는군요.”
장내가 곧바로 복작복작해진다. 두 명 정도는 디아루리아를 보기 위해서 찾아온 게 아닌가 생각했지만, 정말로 본 목적이 디아루리아인 것 같은 이들이 눈에 비쳤다.
‘진짜 특이한 종족이네.’
인간의 기준으로는 잘 이해되지 않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아이를 가지기 싫어해 개체 수도 얼마 남지 않은 종족이 이토록 아이를 좋아할 줄 누가 알았을까.
이들의 유전자에 새겨진 행동 같은 것일 수도 있고, 용들의 문화와 사고방식이 완전히 이쪽과 달라서일지도 모른다.
크게 상관은 없지만 이후 용들의 생태에 관해 논문이라도 쓰면 잘 팔리지 않을까.
드래곤들은 기대되는지 모두 디아루리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종족의 미래….”라거나 “이게 얼마 만인 줄 모르겠습니다.” 같은 대사들을 내뱉고 있는 이들의 얼굴에는 기본적으로 설렘이 장착되어 있었다.
똘똘이가 응접실로 발을 들인 것은 바로 그때였다.
“안녕하십니까, 디아루리아입니다.”
꾸벅 인사하는 모습은 평소의 디아루리아의 모습과는 무척 다르다.
‘뭐야, 왜 이렇게 얌전해.’
물론 평소에도 얌전한 모습을 보이기는 했지만, 이번에는 작정하고 얌전한 태도를 보여야겠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따로 코멘트나 코칭을 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포지션을 잘 이해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오오.”
“제노지르아라고 한단다. 만나서 반갑구나, 디아루리아.”
“마르세린 이모라고 부르면 된단다.”
“만나서 반갑다, 디아루리아.”
“정말 작네요. 아직 10살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이런 모습으로 변할 수 있다니 굉장히 영특한 아이로군요.”
“너무 귀엽구나.”
곧바로 달려들어 껴안고 싶은 걸 필사적으로 참고 있는 모양새.
여러 가지 칭찬들이 곧바로 들이닥치자 디아루기아의 입가는 벌써부터 흐뭇해지는 중이었다.
매일 자신의 입으로 똘똘이 자랑을 하던 그녀였으니, 저런 칭찬들이 얼마나 듣기 좋을까.
대충 봐도 수다쟁이처럼 입을 열고 싶어 하는 것이 느껴진다. 결국에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기 시작했다.
“심성도 곱고 또 새로운 환경에도 잘 적응하고 있습니다. 반에서도 매번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고… 짧은 수면기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진도를 따라갈 정도로 똑똑합니다.”
“반이라니….”
“아, 네, 디아루리아는 인간들 그리고 이종족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습니다, 제노지르아 님.”
“여신의 거울이라고 불리는 물건으로 본 것이 정말이었구나.”
“네, 사실은 제 배우자의 추천으로….”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물어도 되겠나.”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그저 또래의 아이들과 함께 어울리며 지내기를 바랐을 뿐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그게 정상적인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타인과 원만하게 능력이나 다양한 사람과 긍정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것들을 배웠으면 했습니다.”
“어째서입니까?”
“그런 것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감히 말씀드리건대 이것이야말로 용에게 꼭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재미있군. 아무리 여신의 선택을 받고 용의 짝이라고 한들, 그대가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에 대해 말할 줄이야.”
공격적인 어투로 말을 이어온 것은 아까부터 입술을 내밀고 있던 은색 머리였다.
‘쟤는 아까부터 표정이 안 좋더라니. 저 새끼, 저럴 줄 알았어.’
굳이 표현하자면 건수 하나 잡았다는 느낌이다. 한낱 인간이 자신들에 대해 정의 내리려고 하는 것을 아니꼬워하는 모양새.
‘하….’
극단적이지는 않지만 종족 우월주의가 깃들어 있는 모습인 것 같았다.
전술 김현성에게 날개와 꼬리가 잘리지 않았기 때문에 저런 말을 내뱉을 수 있는 거겠지만, 굳이 자신의 무력함을 깨닫게 해줄 필요는 없다.
일단 지금은 비위를 맞춰주는 게 먼저였으니 말이다.
“물론 기분 나쁘실 수도 있습니다… 대륙을 수호하는 역할을 맡은 여러분에게 인간이나 이종족들은 함께 걸어가야 하는 대상이 아닌 보호해야 할 이들로 느껴지시는 것도 무리는 아니니까요. 여러분은 긴 세월을 살아가고 또, 그에 걸맞은 커다란 힘을 가지고 계십니다. 저 역시 용의 배우자가 되지 않았다면 여러분과 같은 생각을 했을 겁니다.”
“…….”
“대륙 위에 있는 신들처럼 드래곤 여러분 역시 우상화되어야 마땅한 종족이라 그런 생각을 했을 겁니다.”
“그럼 그렇지 않다는 말인가?”
“죄송스럽지만 그렇습니다.”
덜컹하면서 곧바로 몸을 일으키는 성질 급한 놈.
“드래곤들이 맡은 책무와 그 능력과는 별개로 용들은 조화롭게 살아야 하는 종족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다른 이들과 부대끼며 소통하고 화합하며 살아가야 하는 종족이라고요. 누군가의 위에 서지 않고 같은 선상에서 살아가야 하는 종족이라고 느꼈습니다.”
“네 말에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인간.”
‘난 책임 안 져도 돼. 나 때리면 전술 김현성 달려온다.’
“그렇기 때문에 여신님께서 여러분들을 그렇게 만드신 거라고 생각합니다.”
“무슨 말인가.”
“들을 가치가 없는 궤변입니다, 제노지르아 님.”
“제가 여신님의 뜻을 왜곡하는 것은 아닐지 무섭지만, 평생의 배우자를 선택하고, 그 배우자와 영혼과 마음을 공유하며, 그 배우자와 함께 눈을 감는 여러분의 능력은 그것을 위해 있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그게 무슨.”
“어째서 종족의 구분 없이 배우자를 선택할 수 있는지, 고민해 본 적 있으십니까.”
“…….”
“어째서 여러분이 하등하다고 생각하는 이와 평생을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떠올려 본 적이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여신님이 진정으로 여러분들에게 원한 것은… 어쩌면 타 종족들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위에 서는 것이 아니라, 함께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최소한 저는 그렇게 생각하기에 디아루리아에게 그런 것들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여러 문화와 여러 유형의 생활, 각기 다른 방식으로 대륙을 살아가는 이들의 모든 것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기가 차는군.”
“카셀리아나!”
“제노지르아 님… 이 인간은 지금 우리를 무시하는 말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그런 것이 아니다, 카셀리아나.”
“무슨….”
“이 인간의 말이 맞다. 이 인간의 말이 맞아.”
솔직히 맞는지는 잘 모르겠다. 되는대로 지껄인 것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미 빛에 취해 버린 제노지르아에게 다른 목소리가 들어올 리 없다. 내가 한 말이었지만 그럴듯하기는 하다.
솔직히 이 대륙에 드래곤들을 설계한 양반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용에게 그런 능력을 내렸는지는 모르겠지만, 귀에 걸면 귀걸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가 아니겠는가.
경우에 따라서는 충분히 생각해 봄직한 이야기였다.
“여신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던가, 디아루기아의 배우자여.”
“그런 것은 아닙니다.”
“어째서 우리 종족이 실패한 것인지… 이제야 알 것 같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제노지르아 님.”
“우리 종족은 항상 외부에서 원인을 찾아왔어. 그게 문제였던 게야. 디아루기아의 짝이 하는 말을 들어보니, 이제야 이해가 돼. 어째서 여신님께서 우리에게 그런 능력을 내린 것인지, 이 인간처럼 깊게 생각해 본 이가 있나? 어째서 종족의 구분 없이 짝을 선택할 수 있는지 그 누구도 진지하게 생각해 적이 없었을 게야. 쇠퇴하는 것도 당연해. 자신이 그 누구보다 위에 있다고 생각하며 그 누구와도 어울리지 않으니, 잊혀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야….”
“…….”
“인간의 욕심과 탐욕이 모든 것을 망친 것이 아니네. 우리가 잘못된 방법으로 살아왔던 게야. 그들의 위에 서려고 했고, 그들과 반목하려고 했지. 그들이 힘을 키우면 경계하고 인간들이 손을 뻗으면 손을 쳐 내면서 살아왔네. 다른 종족들에게도 비슷했지 않은가. 우리는 수많은 이종족의 삶의 방식을 바라볼 수 있는 긴 세월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못했어.”
“…….”
“일이 이렇게까지 된 모든 원인은 하등한 이들에게 있다고 떠넘기며 각자의 공간에서 숨어 사는 게 고작이었지. 우리의 책무를 내팽개쳐 버린 채 그 어떤 것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 말일세.”
“…….”
“우리가 가장 귀찮아하고, 거추장스러워하며, 쓸모없는 능력이라고 여겼던 이 능력이야말로, 우리 종족이 나아갈 길을 제시해 주는 등불이라네. 함께 어울리며 부대끼며 살아가야 해. 그게 진실로 여신님이 우리에게 원하는 삶의 방식이야.”
“…….”
“수호하는 것을 바라신 게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것을 원한 것이야.”
“하지만….”
심상치 않은 분위기, 은발 머리 드래곤이 입술을 꽉 깨무는 것을 보니, 어떻게 봐도 인정할 수 없다는 게 느껴진다.
다소 싸늘해진 분위기에서 애매한 포지션이 되어버린 디아루리아가 신경 쓰인다. 갑작스레 이상한 말들이 튀어나오고 있으니 많이 당황하지 않았을까.
역시나 슬쩍 눈치를 보고 있는 모습, 하지만 곧바로 입을 여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저도 친구들이 좋아요.”
“디아루리아.”
“함께 있는 게 좋고, 재미있어요. 물론 생각의 차이 같은 것들이 느껴질 때도 있지만, 그래도 제 친구들이 좋아요. 인간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도, 엘프 언니들이나 제 동생과 이야기를 하는 것도, 지금 제가 살아가고 있는 대륙이 좋아요.”
어린아이의 순수한 말이 괜스레 콕콕 들어와 박힌다.
“저는 이렇게 살아가고 싶어요. 아빠가 말씀한 것처럼 다른 이들과 함께 자라고 싶어요.”
“모든 이가 너보다 먼저 죽게 될 것이다, 디아루리아. 너의 친구들은 너를 이해하지 못하게 될 거야.”
‘이 새끼는 못하는 말이 없네.’
하지만 디아루리아는 거침이 없다.
“그건 제가 가지고 있는 힘, 제가 가지게 될 힘에 따라오는 책임이에요, 카셀리아나 님. 우리 종족은 슬픔을 감당할 수 있는 영혼을 가지고 있어요.”
‘키야아! 한 방 먹였죠. 우리 딸, 누구 딸인지 말 한번 잘한다.’
“염치없지만 부탁드리고 싶어요. 앞으로 다가올 종말에, 어머니와 아버지와 함께해 주시기를….”
심지어 슬쩍 고개를 숙여온다. 안 그래도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걱정스했는데, 그 문제가 해결된 셈.
디아루리아의 짧은 발언에 장내에는 침묵에 휩싸인다.
그 누구도 쉽사리 말을 내뱉지 못하고 있었지만 제노지르아는 조용히 디아루리아를 머리를 쓰다듬고 그녀의 손을 잡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갑작스러운 연출에 잠깐 할 말을 잃었지만, 나 역시 그녀의 뒤를 따라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윽고 공터로 나온 제노지르아의 몸이 찬란하게 빛나며 용의 형상으로 뒤바뀌기 시작한다.
디아루기아의 2배 정도는 될 것 같은 크기의 용, 고풍스럽다는 말이 어울릴지는 모르겠지만 제노지르아의 외형은 마치 잘 만들어진 조각상처럼 느껴졌다.
목을 길게 뺀 이후에는.
“워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엄청난 포효를 내뱉었다.
그 직후.
대륙 곳곳에서 비슷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크워어어어어어어어어어!!
-그워어어어어어어어어어!!!
-크워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정확히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긍정적인 것만은 확실하다.
내가 봐도 야비하게 입꼬리를 올리고 있는 똘똘이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기 때문이다.
‘우리 딸… 장하긴 한데….’
고기방패들이 생겼다고 좋아하는 모습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
아빠는 우리 딸 믿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