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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669화 (660/1,590)

# 669

회귀자 사용설명서 669화

벽 넘기(5)

절뚝이면서도 힘차게 달려오는 한소라의 모습이 왠지 모르게 불쌍해 보인다.

최선을 다해 달리다 돌부리에 걸려 철퍼덕 쓰러지는 장면은 영화 속에서나 볼 수 있는 가슴 아픈 장면이었다.

사실 버리고 갈 생각은 없었지만, 저도 모르게 그리폰의 등을 두드린 것이 문제, 반사적으로 나온 행동이었다.

하늘의 맹세코 말하건대 절대로 버리려고 해서 버리는 것이 아니다.

아니, 솔직히 내가 등을 두드리기 전에 화이트 폴, 이 새끼가 한소라를 버리고 튀려고 했다.

심지어 나까지 버리고 튀려고 했었던 것 같았다.

“버리지 마! 버리지 마!!”

‘미안해, 소라야. 늦은 것 같아. 살아남을 수 있지? 그렇지?’

서서히 그리폰이 떠오르고 있는 걸 두 눈으로 직접 확인했기 때문일까.

한소라는 더욱더 커다란 목소리로 힘차게 자신의 생존권을 주장하고 있다.

어떻게든 한소라를 함께 데려가야 한다고, 그녀를 이대로 저버리면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겁먹은 화이트 폴은 이미 공중으로 도망갈 준비를 마쳤다.

야생동물들이 괜히 숲 밖으로 도망친 것이 아니지 않은가.

화이트 폴은 훈련을 받았지만 엄연히 동물이었으니 녀석을 마냥 비난할 수는 없다.

튀는 타이밍을 놓친다면 모든 일을 그르치는 것은 물론 정체불명의 야 한 냄새를 맡은 희라 누나가 이쪽으로 향할지도 모른다.

순수했던 모의전이 개싸움으로 변모하며 감당하기 힘든 상황이 일어날 것이다.

당연하지만 처음 취지와는 다른 방향으로 진행될 거라 장담할 수 있다.

한소라가 아예 무능력자도 아니고 아마 몇 시간 정도는 버틸 수 있지 않을까?

“하아… 하아… 버리지 말라고! 이 개새끼야!! 흐어어엉….”

그녀가 손을 뻗으며 주문을 외운 것은 바로 그때.

‘아, 시바.’

금방이라도 창공으로 날아갈 것만 같았던 화이트 폴이 허우적거리며 앓는 소리를 냈다.

‘저주 걸었자너. 와, 진짜 인성… 괜히 흑마법사가 아니다, 한소라는 진짜.’

“빨리 오세요! 소라 씨.”

“허억, 허억, 허억, 기다려… 기다려… 흐어엉….”

일단은 손을 최대한 뻗는 모션을 취해주자. 이왕 이렇게 된 거 애초부터 버릴 생각은 없었다는 걸 어필해야지.

필사적으로 손을 뻗으며 달려오는 한소라의 손이 아슬아슬하게 잡힌 것은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였다.

화이트 폴에게 걸려 있던 디버프들이 일순간 해제되며 순식간에 하늘로 날갯짓하는 녀석의 모습이 눈에 보였다.

콰아아아아아아앙!!!

엄청난 소리와 함께 정체불명의 충격파가 화이트 폴을 덮친 것은 바로 그때.

“꺄아아아아아악!”

“으기윽!”

정신은 없지만 지금이 무슨 상황인지는 알겠다.

공중에서 충격파를 처맞고 튕겨 나간 화이트 폴이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중이지 않을까.

도대체 뭘 하고 있길래 벌써부터 저런 충격파가 나오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대로 이 새끼가 땅바닥으로 떨어지면 어떻게 하지’ 같은 생각이 머릿속에 들어와 꽂힌다.

힘없이 떨어지던 녀석이 갑작스레 중심을 잡은 것은 지면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였다.

‘뭐야, 이 새끼. 어떻게 했어?’

꿀 빠는 걸 좋아해서 힘든 일은 김현성의 그리폰에게 맡겨 버리고, 훈련을 게을리하는 화이트 폴의 개인 능력이 아니다.

시야에 비친 것은 녀석의 안장에 장식된 여러 가지 아티팩트였다.

그리폰이 중심을 잃어버렸을 때 도움을 주고 안정적인 라이딩을 즐길 수 있게 마련된 각종 안전장치.

애초 이 파동에 휩쓸린 이후에 밖으로 튕겨 나가지 않은 것도 안전벨트의 힘이다.

그리폰 마니아가 셋팅해 놓은 것들이 정말로 효과가 있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이래서 안전벨트, 안전벨트 하는 구나.’

뭐 그리 비싼 돈 들여서 마력벨트 아티팩트나 여러 가지 보조도구를 설치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었는데 이제야 좀 이해가 간다.

나도 이런 거 달아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해 봤을 정도, 날개를 꺼낸다고 한들 아직 날개를 펼치는 게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바로 우리 소중한 길드원에게 말을 건넸다.

혹시나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지는 않았을까 진심 어린 걱정의 마음이 가슴속에서 우러나왔다.

“좀 괜찮으십니까, 소라 씨?”

“흐윽… 괜, 괜찮….”

“다행이군요. 이럴 게 아니라 빨리 이동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

“그리고….”

“…….”

“오늘 돌아가시면 특별 수당으로 인센티브 넉넉하게….”

“…….”

“아무튼 빨리 시작하죠.”

“흐으으윽….”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제대로 확인하고 싶었지만, 일단은 사건이 일어난 장소에서 멀리 떨어지는 것이 먼저다.

‘이길 수 있을까.’

아니, 이길 수 있을까가 아니라 이겨야 한다.

만약 차희라가 져버린다면 정하얀이 다른 의미로 폭주할 가능성도 충분했으니 말이다.

어느 정도 거리를 벌린 이후에는 천천히 상황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망원경을 곧바로 발동시키자 정하얀과 대치하고 있는 차희라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까의 충격파는 단순한 워밍업 이었던 모양, 대화 소리는 들려오지 않는다.

입술을 꽉 깨문 채 극노 상태로 접어든 정하얀과 미치기 일보 직전의 얼굴을 한 차희라만 시야에 들어올 뿐이었다.

“아직 제대로 시작한 건 아니네요. 소라 씨, 데이터 확실하게 확보해 놓으셔야 합니다.”

“네.”

“오늘 얻은 데이터로 계속해서 시뮬레이션 돌려볼 거니까요.”

“…….”

‘진짜 버리려고 한 거 아니야, 소라야. 진짜라고. 그런 눈으로 보지마.’

“크흠… 저, 아까는 죄송합니다. 화이트 폴이 그만 놀란 것 같아서….”

“…….”

‘그렇게까지 쓰레기는 아닌데, 진짜.’

“어찌 됐든 간에 일합시다, 일. 소라 씨, 전출 가셔야죠. 전출 안 가실 거예요?”

“갈, 갈게요.”

“그럼 빨리 여신의 거울 켜주세요. 아, 그러고 보니 소라 씨는 누가 이길 것 같아요?”

“글… 쎄요… 솔직히 저는 잘… 보고서로도 제대로 측정하기 어렵다고 이미 말씀드렸고….”

“그냥 시덥지 않은 질문이니까 대충 대답하셔도 됩니다.”

“솔직히 정하얀 님이 지시는 건 상상하기 힘들지만… 왠지 모르게… 지실 것 같네요.”

“근거는 있어요?”

“멘탈의 차이로 생각해요. 조금 겁먹으신 것 같기도 했고, 항상 지는 상황을 염두에 두셨던 것 같아서.”

‘일리 있네.’

당연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한마디였다.

애초 패배를 생각하는 사람과 자신이 질 거라고는 생각지 않는 사람의 차이는 확실하다.

단순히 그것뿐이라면 상관없지만, 차희라와 정하얀은 겁을 집어먹은 쪽과 전혀 겁먹지 않은 쪽의 차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맞다.

차희라는 웃고 있지만 정하얀은 울상을 짓고 있다.

다른 말은 필요가 없다. 딱 저 차이, 저 차이가 승패를 결정지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물론 항상 초월적인 모습을 보여줬던 정하얀이 개인 능력으로 이걸 극복할 수 있을지가 관전 포인트.

정하얀이 주문을 외운 것은 바로 그때였다.

-……!!

쏟아져 나간 마법의 개수는 정확히….

‘8개?’

“뭐야, 어떻게 저래. 뭐야? 어떻게 주문을 한꺼번에 8개를 외워.”

큰 마법이 아닌, 기초 마법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8개의 마법을 동시에 외울 수 있다는 건 이해하기 어려웠다.

‘뭐야, 이거. 생각보다 어려운 거 아니야?’

그런 생각이 드는 것도 당연하리라.

본래 마법사가 전사를 상대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가 바로 한꺼번에 몇 개의 마법을 캐스팅할 수 있는지였으니까.

2개의 마법을 메모라이징해 놓으면 목숨이 2개이고, 한 번에 3개의 마법을 외울 수 있다면 3개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다.

상장 폐지 직전에 있는 라파엘 파티의 마법사가 그랬다.

녀석은 한꺼번에 3개를 외울 수 있었고, 김현성을 상대로 각각 1초씩, 총 3초를 버는 것에 성공했다.

녀석과 정하얀의 차이가 있다면, 녀석은 한 가지 마법을 3번 충전할 수 있었다는 것.

정하얀은 그렇지 않다. 그녀는 각기 다른 마법으로 8개 마법을 캐스팅할 수 있었고.

또.

“마법을 발동시키면서도… 캐스팅할 수 있네.”

수준이 높은 마법사는 상대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아주 잘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정하얀에게는 틈이 없다.

‘1회 차가 이것보다 더 세다고? 정말이야?’

1번 마법을 사용하고, 2번째 마법을 사용할 때까지의 쿨타임이 없다.

당장 아무 온라인 게임을 예로 들어 상상해 보라.

마법사가 쿨타임 없이 버튼을 누르는 것만으로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면, 다른 직업들이 난리가 날 거라고 확신할 수 있다.

지금 정하얀이 보여주는 모습은 누가 봐도 밸런스 파괴처럼 보이는 장면이었다.

그리고 이 장황한 설명이 사실이라는 것을 말해주듯이 차희라가 수세에 밀리고 있었다.

콰드드드드드드득!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죽, 죽, 죽어어어!!!

‘안 돼, 죽이지 마.’

콰드드드득!

콰아아아아아앙!!!

-쓰, 쓰러져! 쓰러져! 쓰러져!! 쓰러져어어!! 빨리 쓰러지라구!!

콰지지지지지지지직!

말 그대로 자연재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의 무력, 솔직히 여신의 거울로는 차희라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다.

곧바로 망원경을 발동시키자 차희라의 모습이 더 가까이 잡히기 시작했다.

폭발과 굉음, 불과 얼음, 폭풍과 뇌전의 가운데에서 버티는 모습은 입이 떡 벌어질 정도.

정하얀도 저 모습을 보고 있는지 모르겠다. 아마 아무것도 안 보이지 않을까.

장기전을 생각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네모네의 눈 역시 발동하지 않은 듯했다.

정하얀의 시점에서 본다면 아마 거대한 숲이 마법으로 가득 차 있는 것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정면으로 쏟아지는 마법은 도끼와 대검으로 쳐 내고 피할 수 있는 것들은 피한다.

내구도로 버텨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되는 미끼용 범위 마법은 갑옷의 마법 저항력으로 받아낸다.

그 가운데에서 쏟아지는 질 좋은 마력을 담은 것들은 모조리 쳐 내고 있다.

이전에 정하얀이 사용했던 마법을 손으로 튕겨내는 모습을 봤지만, 지금 보여주는 것과는 괴리감이 있다.

그녀를 집어삼킬 것처럼 다가오는 거대한 얼음덩이를 도끼로 깨부수고, 지름이 몇십 미터나 되는 싱크홀을 만들 수 있는 불덩이를 대검으로 쳐서 튕겨낸다.

쏟아지는 바람의 칼날은 어깨로 튕겨내고, 심지어 건틀릿을 낀 손으로 마력의 구체를 부숴 버린다.

김현성이 싸우는 장면을 보고 항상 멋있다고 생각해 왔지만, 그것과는 다르게 사람의 눈을 뗄 수 없게 만들고 있었다.

차희라가 보여주는 모습은 순수한 강함 그 자체. 검술이나 기술 따위에 의지하지 않는 힘.

‘압도적인 무력.’

콰드드드드드득!

콰아아아아아아아앙!!!

폭음이 끊임없이 들려오는 가운데, 다시 한번 터져 나온 것은 정하얀의 주문.

“뭐야, 뭔데. 저거 뭔데.”

하늘의 색깔이 바뀌고 거대한 그림자가 하늘에 드리운다.

구름이 열리고 거대한 풍압과 함께 모든 것을 집어삼킬 것 같은 운석이 떨어져 내린다.

앞에 사용한 마법들 모두가 이번 마법을 위한 연막, 과장 하나 보태지 않고 공화국의 마법사들이 만들어낸 운석 마법보다 규모가 크다.

아니, 라이오스를 불바다로 만들 뻔한 벨리알의 한 방보다 지금의 것이 더 크다.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광경에 나도 모르게 멍하니 그걸 바라봤다.

‘죽는 거 아니야?’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인간이 저 정도의 마법을 맞고 버틸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으니까.

뭔가 조치하는 게 맞을까? 내가 너무 정하얀을 과소평가하고 희라 누나를 과대평가한 것이 아닐까?

여러 불안한 생각을 하며 고개를 돌리자, 그 광경을 바라보며 재미있다고 웃고 있는 차희라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하하하하핫!

‘뭐야, 미쳤어. 뭐야.’

-하… 하하하하하하핫!

‘누나, 실성한 거 아니지? 그렇지?’

-X나 재미있네, 시발.

‘뭐가 재밌어.’

-하하하하하하하하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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