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2
회귀자 사용설명서 662화
승리할 확률(4)
“무슨 일이라도 있나 봐? 이렇게 직접 찾아온 걸 보면.”
“보고 싶어서 왔어.”
“듣기 좋은 소리 하는 데는 선수라니까. 거기 앉아. 너도 거기 앉으면 되고, 그러니까….”
“이지혜라고 합니다. 용병 여왕님.”
“알고 있었어. 밖에 차 좀 내와. 아니, 술이 더 좋을까? 너도 술 좋아하지?”
차희라의 목소리에, 문이 벌컥 열리며 몇몇 이가 주섬주섬 뭔가를 가져왔다.
박덕구보다는 덜하지만 그래도 한 떡대 하는 놈들이 조신하게 주안상을 세팅하는 모습은 언제 봐도 적응이 되지 않는다.
심지어 한 놈은 귀가 없고, 한 놈은 얼굴이 칼자국으로 도배되어 있다.
저런 얼굴로 영광이라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으니 무슨 표현이 더 필요하겠는가.
본인들이 영광이라고 생각하니 별 상관은 없었지만, 대륙에서도 보기 쉬운 장면은 아니었다.
오직 붉은 용병에서만 볼 수 있는 광경이지 않을까.
평소답지 않게 이지혜도 그녀의 눈치를 보는 편, 본래 그녀의 이미지를 생각하면 결코 어울리는 행동이 아니다.
겉으로야 눈치 보는 듯한 얼굴을 자주 보여줬지만, 진심으로 그렇게 행동하는 걸 본 적은 별로 없었으니까.
본인도 뭔가 이상하다는 걸 감지하고 있을 것이다. 당연하지만 이지혜의 심정도 얼추 이해가 가고….
왠지 모르게 차희라는….
‘괜히 눈치 보게 만드는 사람이었지.’
그 말 그대로였다.
대륙에서의 경험과 그녀의 강함이 그녀를 그렇게 만드는 것일 수도, 아니면 본래 차희라가 그런 성격일 수도 있지만, 단언하컨대 후자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타고나길 왕으로 태어났고, 본래부터 위에 있어야 마땅한 사람으로 태어났다.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없다지만 그 누가 그녀의 모습을 보고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최소한 내가 보기에는 그렇다.
차희라가 무릎을 꿇는 모습은 상상할 수 없었고, 그녀가 누군가에게 손바닥을 비비는 모습은 더욱더 상상할 수가 없다.
그녀가 누군가에게 패배한다는 모습 역시 상상이 가지 않는다. 그렇기에 이곳에 온 것이다.
‘할 수 있을 거야.’
강자라는 말을 떠올렸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김현성도 정하얀도 아니었으니까.
‘누나, 할 수 있는 거 맞지? 그렇지?’
“그래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해봐, 자기.”
“그러니까… 으음….”
“꽤 뜸을 들이네.”
작은 문제가 있다면 그녀의 정확한 무력을 측정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종종 마음의 눈으로 봤던 그녀의 상태창만 봐도 답이 나온다.
많은 무기를 다룰 수 있다는 것을 장점으로 꼽는 용병 클래스를 선택했음에도 불구하고 무기를 든 모습을 본 적이 손에 꼽는다.
아니, 거의 없다.
고급 쌍수 무기 지식 습득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선호하는 것은 맨손뿐이었고, 사실 그것만으로도 그녀는 대륙의 정점에 서 있다.
‘광전사 세트가 있기는 했었지.’
차희라가 그걸 입고 전선에 나섰을 때는 공화국과의 분쟁 지역 전체를 마비 상태로 만들었을 정도였다.
27군단 소환 사태 때는 지휘관의 입장이었기에 제대로 된 무장을 착용할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강했던 것은 마찬가지다.
솔직히 있는 그대로 물어보는 게 맞지 않을까. 조금은 조심스러운 질문. 하지만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누나, 얼마나 강해?”
“흐음….”
“…….”
“…….”
‘아이, 시바. 괜히 물어봤나?’
“…….”
“…….”
옆에 있는 이지혜가 너무 빌드업 없이 들어간 게 아닌가 하는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뭐하러 그런 질문을 대놓고 하냐고 추궁하는 듯한 표정, 너는 아무래도 상관없겠지만, 괜히 나만 불편한 분위기에 휘말리는 것은 아니냐고 말하는 것 같다.
계속해서 침묵이 흐른 것은 당연했다. 차희라가 웃으며 입을 연 것은 약 2분여가 지난 이후였다.
“글쎄, 아마 꽤 강하지 않을까.”
“어느 정도.”
“누구와 싸워도 딱히 질 것 같지는 않은데… 저번에 내가 했던 말 기억해?”
기억하다마다.
‘내가 진짜로 강해질 방법이 뭔지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는 거야. 샌님처럼 훈련하는 건 별로 의미가 없다고.’
그렇게 말했었나.
‘자기는 맹수가 훈련하는 걸 본 적 있어? 앞발 휘두르기나 물어뜯는 방법을 연습하는 걸 본 적이 있냐고. 머릿속에 꽉 들어가 있는 욕구를 해소해 주는 식으로 방법을 바꿨다고. 잘 처먹고 잘 싸고. 짐승처럼 사는 거로 방법을 바꿨다, 이거야.’
그렇게 말하기도 했지.
“기억해. 성과가 있었나 보네.”
훈련법이라고 할 수 없는 훈련법이었지만 효과가 있기는 있었는지 상승한 스텟들이 눈에 띄었다.
근력 스텟이야 원래부터 규격 외였고 다소 낮다고 할 수 있었던 민첩이나 마력 스텟 역시 성장한 모습.
“사실 그렇게 큰 성과가 있는 건 아니야. 자기 덕분에 쌓인 욕구는 시원하게 풀고 있고, 간혹 부족할 때는 숲으로 들어가서 다 때려 부수고 나오기도 하거든. 자기가 뭣 때문에 사람 존심 긁는 질문을 던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것 하나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
“나는 강해.”
“…….”
“그리고.”
“응.”
“더 강해질 수 있고.”
“…….”
뭐라 할 말이 없다.
‘누나, 시바, X나 왜 이렇게 멋있어.’
이런 말밖에는.
어떻게 보면 내가 기다렸던 말을 해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애초 그녀 말고는 다른 선택지가 없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아주 약간이나마 들어차 있던 모든 의심이 한순간 날아가 버린 듯한 느낌.
어째서 린델의 내놓으라고 하는 전위들이 전부 붉은 용병에 들어가 있는지 이해가 가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이유가 뭔데?”
“누나가 해줬으면 하는 일이 있어서.”
슬쩍 이지혜를 바라보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크게 별건 아니다. 저 빛 안쪽에 있는 바깥 놈의 존재부터, 강한 무력을 가진 사천왕을 상대해 달라는 이야기, 붉은 용병과 같이 움직일 수는 없으니, 따로 대기하고 있어야 할 것 같다는 이야기였다.
조금 길어진 이야기에 차희라는 고개를 끄덕이는 중이었다. 맞는 말이니 일단은 듣고 있는다는 의지의 표현이지 않을까 싶다. 그녀에게도 이 전쟁은 중요했으니까.
“파란 길드마스터가 한 명, 그리고 용병 여왕님께서 한 명을 상대하게 될 것 같아요. 무대는 저희가 만들어 드릴 테니 다른 부분은 걱정하실 필요 없고요. 불편하시겠지만 남은 35일 시간 동안은…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 소속으로 활동하시는 걸 추천해 드리고 싶네요. 컨디션 체크부터 그림을 그리기까지 신경 써야 할 부분이 조금 많을 것 같아서 이 부분은 양해 부탁드릴게요. 용병 여왕님이 강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당연히 부정할 마음도 없지만 정확한 데이터를 얻어야 하거든요.”
“흐음….”
“지휘부에서는 약 23.4% 정도로 생각하고 있어요. 현재 대륙이 가지고 있는 전략과 적들이 가지고 있는 전력의 데이터를 분석해 시뮬레이션해 나오고 있는 결과고요. 용병 여왕님이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의 계획을 따라주신다고 가정했을 때는 확률은 조금 더 높일 수 있을 것 같아요. 현재 보이시는 자료를 참고하시고 판단해 주시면 감사할 것 같아요.”
‘잘하고 있어.’
“35일여간의 정확한 훈련 스케줄이에요. 개인적인 훈련이라기보다는 전술 훈련이 주가 될 것 같아요.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분석했고 아마 충분히 만족하실 거라고 생각해요. 이 밖에도….”
“뭐 하나 빠뜨린 게 있는 것 같은데.”
“네?”
‘아니야, 지혜 누나. 방금 말 취소. 우리 잘못하고 있는 것 같아.’
조금씩, 조금씩이지만 분위기가 바뀌는 게 느껴진다. 정확히 말하면 이 커다란 방을 둘러싸고 있는 공기가 무거워진 것 같다.
‘우리가 뭐 하나 빼먹은 것 같아. 어떻게 해?’
생각해 보면 최근에는 본 적이 없는 표정이다. 얼굴 속에 서서히 짜증이 들어서는 것만 같다.
도대체 뭘 놓쳤는지 떠올려 봤다. 솔직히 조금 안일하게 생각하고 온 것이 맞다.
차희라라면 당연히 부탁을 들어줄 거라고, 별생각 없이 OK를 외치고 이쪽에 합류해 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걸 새삼스레 깨닫게 된다. 차희라는 그럴지 몰라도 린델의 제1 길드로 불리는 붉은 용병의 용병 여왕은 그렇지 않다.
갑작스럽게 찾아와 강하냐고 물어본 직후 자기들 하고 싶은 말만 떠들어대는 이들을 저 용병 여왕이 뭐라고 생각할까.
최소한 나에게는 그렇지 않더라도, 이지혜에게는 다소 불편한 반응을 보이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
‘바보 같았네.’
이지혜 역시 서서히 분위기가 안 좋아지는 걸 느끼는지 나를 바라봤다.
‘지금 분위기 왜 이래, 오빠. 이거 아니었잖아.’
그렇게 말하는 것만 같다.
“계속 말해봐. 어디까지 말할 수 있나 한번 보게.”
“보상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거라면.”
“내가 그런 게 필요한 사람으로 보여? 보상? 네가 뭘 해줄 수 있는데.”
“그럼….”
“네가 뭘 빠뜨린 것 같아? 그리고 자기, 자기는 또 뭘 잊어버린 것 같고?”
“저… 용병 여왕님, 필요하신 게 있으시다면….”
“그건 네가 생각해야 할 거야. 지금 내가 그걸 일일이 설명해 줘야 할 정도로 기분이 좋지 못하거든.”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는 이지혜.
네가 제안한 건데, 왜 꾸지람은 내가 들어야 하는지, 그 원망이 나를 향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이럴 때는 나는 상관없다는 듯이 슬쩍 눈을 피해주는 것이 맞다.
나중에 이지혜를 보낸 이후, 희라 누나랑 같이 얘 욕해주면 기분은 풀 수 있지 않을까.
손절의 기운을 느낀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지혜는 더욱더 절박한 표정으로 나를 압박하는 중이다.
방 한쪽에 걸린 붉은 용병의 길드 패가 시야에 비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이거였구나.’
그런 생각이 곧바로 들어와 꽂힌다.
너무 쉬워서 굳이 캐치하지 못했던 부분, 마침 용병 여왕의 짜증이 슬슬 한계점을 맞이하고 있는 시점.
사람 하나 구하는 셈 치고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일단은 용병 여왕을 내보내고 차희라를 불러오는 것이 먼저다.
마치 권력자에게 아양을 떠는 모양새로 전환하며 가까이 다가붙자 갑자기 왜 이러냐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굳이 거부하지 않는 것을 보니, 그렇게까지 화난 상황은 아닌 모양이다.
오히려 조금은 만족하는 것 같은 모습, 애교와 교태에 용병 여왕이 떠나가고 차희라가 등판했다.
“누나, 기분 풀어. 우리가 그걸 놓쳤겠어?”
평소와 같지만, 최대한 꿀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를 내뱉도록 하자.
이지혜가 구역질 나온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뭐 어떻게 하겠는가.
이쪽이 잘못한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데. 우리 희라 누나 빡치면 기분 풀어주기 힘들단 말야.
“내가 따로 이야기해 주려고 한 거니까 화 풀어, 누나. 붉은 용병은 괜찮을 거야. 누나가 허락만 해준다면 붉은 용병은 따로 배려하려고. 길드마스터가 자리를 비운 길드라니 그런 걸 상상이나 할 수 있겠어?”
“…….”
“제1 작전권을 관리 위원회가 가지고 오는 의제가 통과되기도 했으니까. 사실 말 안 해도 붉은 용병은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 하에 작전에 참가하는 거잖아. 그래서 우리가 깜빡 말을 못 한 거야. 너무 당연한 거라서 그랬지. 위원회가 붉은 용병을 내버려 두는 게 말이나 돼? 누나, 정말 우리가 그럴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지? 그렇지? 응? 그렇잖아, 그지이?”
“뭐, 그렇지.”
은근슬쩍 어깨를 주무르고 있는 게 느껴진다.
“누나가 없는 붉은 용병이 걱정되는 거 맞지? 당연히 우리가 그런 걸 생각 안 했겠어. 붉은 용병은 따로 배려해야지. 그렇고말고.”
“흠, 어떻게?”
확실히 아까보다 분위기가 많이 부드러워졌다.
용병 여왕이 가진 궁금증을 입 밖으로 내뱉기도 했고, 점점 나를 품에 끌어들이는 걸 보니 꿀 떨어지는 목소리가 먹히기는 하는 모양이다.
이지혜도 ‘그거였구나.’ 하는 듯한 얼굴, 정답이 너무 눈에 보이다 보니 그녀도 놓치고 있었던 것 같다.
어제 조혜진이랑 쇼핑만 하지 않았어도 이 건에 대해 준비할 시간이 있지 않았을까.
‘저 쓰레기가 어떻게든 수습하고 있구나.’ 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이쪽이 마지막 말을 내뱉은 직후, 이지혜의 얼굴이 천천히 일그러졌다.
“누나, 눈앞에 있는 지혜 씨가 직접 맡게 될 거야. 붉은 용병 지휘 본부에서 상정하는 피해 규모에서 정확히 15% 더 줄이도록 할게.”
그게 말이 되냐는 이지혜의 얼굴, 그런 그녀를 위아래를 훑어보는 차희라의 얼굴이 눈에 띄었다.
‘할 수 있지? 지혜 누나? 그렇지? 할 수 있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