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8
회귀자 사용설명서 658화
회의(4)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하고 싶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은근슬쩍 넘어가려는 듯한 느낌이다. 물어보고 싶기는 했지만….
‘무리해서 물을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그런 생각도 든다. 이지혜의 말처럼 좋은 쪽이냐, 나쁜 쪽이냐를 묻는다면 좋은 쪽으로 분류할 수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어차피 회의에 3일 정도 쏟을 생각이었으니, 이 3일을 권력자들을 달래는 시간으로 사용하면 된다.
제대로 꿰매지지 않은 부분을 다시 한번 봉합하고 소독약까지 뿌리면 대충은 수습한 것 같은 모양이 될 것 같았다.
‘맞아….’
날치기든 뭐든 일단은 의제를 통과시킨 것이 아닌가.
조금 불안정한 토지기는 했지만, 일단은 뼈대를 세웠다. 이제 단단히 고정하고 시멘트도 뿌려주고 벽돌도 쌓고 해야지, 뭐.
“식사….”
“네!”
“아, 네, 안 그래도 식사하려고 했었습니다. 혜진 씨와 지혜 씨도 함께 왔으니 같이 가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잠시 교국 진영 분들에게 잠시 인사하고 와도 되겠습니까?”
“혜진 씨도 말입니까.”
“네, 제 호위로 함께 와주셨습니다.”
“…….”
“…….”
“그렇군요.”
‘현성아, 표정 안 좋아. 표정 좀 풀어.’
“아, 그리고 제가 들은 게 있어서 그러는데….”
“네?”
“혜진 씨에게는 따로 사과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형 말 들어야 돼.’
녀석은 조금 당황한 것 같은 얼굴이었다. 내가 이걸 알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모양, 아니, 그것보다는 이렇게 갑작스럽게 훅 들어올지 예상하지 못했다는 표정이었다.
혹시나 조혜진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게 말한 것이 아닐까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나 역시 돌려 말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기도 했지만 잘못한 것은 곧바로 잘못했다고 말해주는 것이 맞다.
‘혜진이랑 너랑 어디 보통 사이야? 사소한 실수 하나 했다고 밀어내고 그러면 안 되는 거야.’
“혜진 씨도 나름대로 사정이 있기도 했고, 말하지 말라고 부탁드린 것도 저예요. 제가 라파엘에게 붙잡혔을 때는….”
“…….”
“저 대신 자신을 인질로 삼아달라고 말하기도 했고요.”
‘뭐 기억나는 거 없어? 뭐 기억나는 거 있잖아.’
당연히 기억나는 게 있을 것이라 믿는다.
1회 차의 조혜진이 자신을 대신해 죽었다는 사실을 잊지는 않았을 테니… 아니, 어쩌면 잠깐은 잊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보이다시피 둠현성의 영향이 있기도 했고, 1회 차를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쩌면 괴로웠던 기억을 굳이 하나하나 떠올리기 싫었던 것은 아닐까.
그 와중에 감정이 크게 흔들렸고 자신도 모르게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소리를 내뱉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나 다를까 슬그머니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
괜스레….
‘와, 이거 혹시 내가 둠현성 억제기인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될 정도였다. 그 정도로 방금의 말을 무겁게 받아들이는 느낌.
단순한 가설일 뿐이지만 왠지 내가 있을 때만 이성적으로 생각할 여유를 가지는 것 같았다.
멍멍이에 비교하는 게 조금 미안하기는 했지만, 현재의 김현성을 맹견과 비교해도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집 안도 개판으로 만들고 밖으로 뛰쳐나가는 것은 물론 동네 주민들을 위협하고 물기까지 하는 맹견.
오직 주인 앞에서만 마음의 안정과 심적 여유를 찾는 댕댕이.
이성적이지 못한 행동들을 하고 다녔던 것과는 다르게 현재 김현성의 눈빛은 그 누구보다도 이성적이다.
솔직히 둠현성이 되기 전과도 별반 다르지 않은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굳이 비유하자면 리트리버 종류로 분류할 수 있었던 녀석이 어쩌다 이렇게 포악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 보여주는 모습이 연기로 보이지는 않았다.
‘확실해.’
김현성은 연기 못 하니까. 장담하건대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게 확실했다.
“누구나 실수하게 마련이지 않습니까. 누구나 완벽하지 않잖아요. 적어도 제 기준에서는 혜진 씨는 자신이 맡은 일을 완수하려고 최선을 다한 것으로 보여요. 몸이 지쳐 쓰러질 때까지 뛰어서 린델로 향한 것만 봐도 그렇습니다.”
“네….”
“현성 씨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혜진 씨도 많이 힘들었을 겁니다. 절대로 비난받아야 할 사람은 아니에요.”
“네….”
‘이거 생각보다 쉬울 것 같은데….’
얘네 둘 화해시키려고 또 말도 안 되는 개수작을 부려야 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했지만, 확실히 반성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띈다.
딱 봐도 ‘내가 실수했구나, 내가 경솔했어.’ 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는 표정이 아닌가.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은 실수할 수 있다는 표정으로 김현성을 쳐다보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실수한 것 같군요.”
‘그래, 실수한 거 맞아.’
“사과해야겠습니다.”
‘그럼, 그럼. 착하네, 착해, 우리 현성이. 오이구, 착해라.’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현성 씨. 오스칼 님에게 인사드리고 곧바로 합류하겠습니다.”
“네.”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는 생각이 든다.
괜스레 훈훈한 미소를 지으며 잠깐 자리를 옮기자, 오랜만에 보는 오스칼과 교국 의원들이 눈에 띄었다.
이 외에도 인사를 기다리는 이들이 많았지만 아무래도 메인은 이쪽.
나를 발견하고는 환한 웃음을 띠며 다가오는 얼굴들을 보니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위원장님.”
“오스칼 님, 오랜만입니다.”
“정말 오랜만에 뵙네요, 이기영 님.”
“하하하, 네, 이게 몇 개월 만인지 모르겠습니다. 자주 연락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카트린 의원님.”
“저희야말로 연락드리지 못해 죄송해요. 아무래도 위원장님이 너무 바쁘실까 메시지를 보내기가 죄송스러워서….”
“엘리제 의원의 메시지라면 언제든지 괜찮습니다. 아직도 마를린 영애와는 간혹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으니,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마시고 연락 주셔도 됩니다. 아! 그러고 보니 마를린 영애가 최근에 의원직에 출마한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걔도 메시지를 너무 많이 보내서 문제야.’
“아쉽지만, 아마 다음이 될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이런 뒤숭숭한 분위기에서는 총선을 진행하기에 무리가 있어서….”
“그렇겠군요. 고생이 많으시겠습니다.”
“위원장님만큼은 아닙니다. 불철주야 대륙을 위해 노력하시니… 자기 건강까지 제대로 챙기지 못하실 정도로… 후우….”
“언제나 그렇죠, 이기영 님은…. 다른 분들도 이기영 님께서 이렇게 대륙을 위해 희생하는 걸 알고 있어야 할 텐데… 오늘 보니까 꼭 그렇지도 않더라고요.”
“네?”
“쓰러진 게 확실한 거냐는 말부터 시작해서 어째서 이기영 님께서 회의실에 나타나지 않는지, 제대로 할 생각은 있는 건지, 대륙 보호 관리 위원장이라는 사람이 사태가 터진 지 7시간이 지난 시점에 뭘 하고 있는 건지, 본격적으로 회의를 시작하기 전에 많은 말이 나왔었거든요.”
“엘리제 의원!”
오스칼의 목소리에 깜짝 놀란 것 같은 엘리제가 눈에 띈다.
대충 봐도 실수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 얼굴, 대충 여기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예상이 간다.
“너무 상처받지 마세요, 위원장님.”
“걱정해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스칼 님. 충분히 할 수 있는 생각이니까요. 이 모든 게 제가 부족한 탓 아니겠습니까.”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개인이 가진 생각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이 잘못된 일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이번만큼은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들은 다른 게 아니라 틀렸어요. 네, 몇몇 이들이 가진 생각은 확실하게 틀렸습니다.”
“조금 마찰이 있었던 모양이로군요.”
“마찰이라고 할 것도 없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그런 목소리가 조금 나오기는 했지만 다들 납득해 주셔서…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군요. 조금 더 오래 대화를 나누고 싶었는데… 아쉽네요.”
“아….”
“저희는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위원장님. 그리고….”
“네.”
“머지않은 시일 내에 꼭 차 한잔 대접해 드리고 싶은데….”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오스칼 님.”
잠깐이지만 아리스 시녀의 얼굴로 활짝 웃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조금 더 대화를 나누면 좋을 텐데’라고 생각하는 것만 같다.
엘리제 의원의 수다 때문에 급하게 자리를 피하게 됐으니 아마 속으로는 살짝 그녀를 원망하고 있지 않을까.
당연하지만 이쪽은 그녀에게 감사하고 싶은 심정이다. 덕분에 내가 오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확실하게 유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의 이기영을 아니꼽게 보는 이들이 여러 차례 시비를 걸었을 것이 분명했다.
일이 터지고 7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니, 좋은 먹잇감이 등장했다고 생각했겠지. 딱 엘리제 의원이 말한 그대로였을 것이다.
‘대륙 보호 관리 위원장이라는 자가… 허… 참! 일이 터지고도 아직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있다니… 정말로 이기영 위원장 그자가 그 자리에 앉을 자격이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라거나.
‘정말로 건강이 안 좋은 건지 의심이 되기도 하거니와 만약 건강에 이상이 있다면, 그런 위원장이 이런 큰일을 해낼 수 있을지… 걱정이 됩니다. 걱정돼요.’
요 정도로. 어쩌면 조금 더 심한 말을 내뱉었을지도 모른다.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를 신설한 것부터가 실수였어요. 픽하면 쓰러지는 사람이 무슨… 차라리 기도라도 드리게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니, 어쩌면 이것보다 더 심하게.
‘악마에게 한번 영혼을 판 전적이 있는 사람입니다. 어쩌면… 저 이질적인 빛에 뭔가에 쓰여서 다시 한번 예전 모습으로 변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아직도 그 모습을 종종 사용한다고 들었습니다만, 물론 이기영 위원장이 잘못했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조심할 건 조심해야지요.’
당연하지만 교국 측에서도 가만히 있었을 리가 없다.
‘말 다 했습니까! 지금 그게 대륙을 구원한 영웅에게 하신 말씀이 맞아요? 당신 제정신이야?’
‘대륙을 위협한 악마이기도 하지요.’
‘이 미친놈이.’
‘여긴 신성한 회의장입니다! 사과하세요! 그 말 사과하세요!’
작정하고 이기영 위원장을 깎아내릴 생각으로 회의장에 왔었다면 정말로 저런 말들이 오갔을 가능성이 있다.
분위기는 금방 개판이 되었을 테고 결국에는 서로를 깎아내리기에 여념이 없는 분위기가 형성되지 않았을까.
아마 상대측에서는 가장 원하던 상황이었을 거다.
논점을 흐리고 회의 시간을 길게 가져갈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게 뻔했고, 실제로도 효과적이었을 게 분명했다. 계속해서 물타기를 하고 결국에는 지지부진하게 마무리.
아마 놈들이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김현성의 존재였겠지.
안 그래도 막 나가자고 마음먹은 김현성이 이런 개소리를 듣고 가만히 있을 리 만무, 아마 천천히 몸을 일으켜 걸어갔을 테고….
‘파란 길드마스터, 지금 뭐하는 겁니까, 지금 뭐하는 거예요.’
적폐 세력을 지키는 몇몇이 녀석의 앞을 가로막았을 것이다. 뭐, 전설 등급에 이른 놈들이었겠지만 살기 때문에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결국에 가장 열심히 입을 털고 있던 녀석의 앞에 선 이후 싸늘한 표정으로 놈을 바라보며 손을 올리고….
콰직.
‘시바, 깜짝이야.’
바로 옆에서 들리는 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눈에 들어온 것은 누군가가 떨어뜨리고 간 물건을 발로 밟고 있는 김현성.
‘시바, 진짜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네.’
자신이 나를 놀라게 했다는 걸 깨달았는지, 본인 역시 민망해 모습이었다.
“제가 놀라게 했군요. 죄송합니다, 기영 씨.”
“아니… 괜찮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아! 기영 씨 말대로 혜진 씨에게는 정식으로 사과를 드렸습니다. 제가 잘못하기도 했고… 네, 당시에는 감정적으로 조금 격해져 있는 상황이어서… 실수한 것 같더군요. 이렇게 따로 지적해 주시고, 좋은 조언 해주셔서 정말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아니요… 감사할 필요까지는….”
녀석은 순둥순둥한 얼굴로 사과했다고 말했다.
‘콰직은 아니겠지?’
“그럼, 어서 밖으로 나가시죠.”
‘에이, 아무리 그래도 콰직까지는 아닐 거야.’
“아마 마음에 드실 겁니다.”
콰직 사건을 벌인 것치고는 무척 밝은 얼굴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