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5
회귀자 사용설명서 655화
회의(1)
물론 시국이 시국이니만큼 곧바로 일을 시행할 수는 없겠지만, 빌드업 정도는 쌓을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마음 같아서는 곧바로 조혜진 아바타를 출동시키고 싶은 심정.
하지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 그런 프로젝트를 시행시킬 수는 없다.
당장은 자리를 만들고 이야기를 해보는 것 정도가 최선이지 않을까.
“그렇게 계속 사양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자리를 만드는 정도는 쉬우니까요. 계속해서 서로 어색해하는 것보다는 한 번 풀고 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마 현성 씨도 속으로는 많이 미안해하고 있을 겁니다. 분명히 그럴 거예요. 제가 이런 자리를 만드는 걸 속으로 환영하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제 잘못이 크다는 건….”
“혜진 씨 잘못이 아닙니다.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죠. 그냥 오해와 실수가 쌓이고 쌓여서… 그게 터진 거라고만 생각합시다. 마음의 짐을 더셔도 돼요. 미안해하는 것은 이해하지만… 계속 이러시면 제가 더 불편해진다니까요. 제가 뭐 험한 일을 당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이렇게 멀쩡히 돌아왔잖아요? 상처 하나 없는데… 뭘 사람이 그렇게 딱딱하게….”
“…….”
‘조금 아팠으면 원망했을지도 모르겠는데 그런 건 아니었잖아? 결과적으로 대성공이었다고, 혜진아. 나 날개도 달았어. 시바, 날개도 달았다고. 시바, 날개도 달았다니까! 너도 보면 놀라서 자빠질 텐데….’
“전부 다 잘 풀렸어요.”
‘날개도 달았고요.’
말을 내뱉으며 살짝 미소를 보내자. 힘들지 않았다는 걸 보여줘야 했으니까.
노린 것은 아니었지만, 조혜진이 나를 바라보는 표정이 달라진 것 같다.
이기영이라는 인간에게 진심으로 감동한 것만 같은 얼굴은 괜스레 나를 뿌듯하게 만들었다.
물론 옆에서 나를 쓰레기 보듯 바라보는 이지혜의 눈빛이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사실….
‘고마워해야 맞지. 아암, 그렇고말고.’
조혜진의 잘못도 일부 있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었으니까.
‘지혜 누나 자꾸 사람 그렇게 보지 마.’
“큼, 그나저나 출발 안 할 거예요?”
“아, 그럼 출발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회의장 쪽에는 미리 연락 넣어놨어요. 마차로 갈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열리니까 회의 내용과 관련된 브리핑은 마차 안에서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뭐, 감사할 게 있나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
“정말로 괜찮으시겠습니까? 부길드마스터?”
“물론 괜찮습니다. 앉아서 대화 몇 마디 주고받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고, 최대한 빠르게 공식 입장을 발표해야 하는 상황에서, 저 편하자고 시기를 늦출 수는 없으니… 아마 도착할 때 즈음이면 교황청에서도 발표할 거리가 있을 겁니다.”
대충 내뱉기는 했지만, 사실 딱히 괜찮은 상황은 아니다.
‘너무 갑작스러웠어.’
앞서 한 번 언급했던 것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회의 내용이 문제.
물론 대부분의 인사가 사적으로는 깊은 관계에 얽혀 있지만, 이런 이들이 공적으로도 무조건적인 호의를 보내는 것이 아니다.
아예 안면이 없는 것보다는 내 말에 잘 따라주겠지만, 정치적 입장이라는 게 언제 어디서 어떻게 변할지 누가 알겠는가.
이를테면 사망률이 높을지도 모르는 7전선에 다완의 주요 길드들을 배치한다고 생각해 보라.
안개 소환사, 궁수와는 그리 나쁘지 않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만 녀석들이 곧장 7전선으로 향하겠다고 고개를 끄덕여 줄 리 없다.
최소한의 강제성을 부여하기 위해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를 만들어 작전권을 가지고 왔지만, 대륙은 하나의 통일된 국가가 아니라 여러 무력집단이 모인 곳이다.
중립국 라이오스와 신성교국 그리고 교황청, 엘프들 정도가 무한한 지지를 보내고 있을 뿐이다.
왕국 연합 중에서는 아직도 신성교국과 이기영을 견제하는 놈들도 있었고, 연방의 생존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랫동안 교국과 으르렁거렸던 공화국도 완전히 신뢰를 주고받고 있는 상태가 아니지 않은가.
물론 각 집단에 이름난 권력자들이야 최대한 포섭하기는 했지만….
‘이건 어려울 수밖에 없지.’
심지어 그전에 있던 매뉴얼을 완전히 뒤집어야 하는 회의였으니까. 기존 계획을 자리 잡게 하는데도 조금 스트레스가 느껴질 정도였으니 오죽할까. 심지어….
‘너무 급하게 열려서 로비도 제대로 못 했고….’
적폐친구들과의 우정을 돈독히 하는 시간도 부족했다.
이지혜가 기존에 준비한 것들이 없었더라면 내가 생각하고 있는 시간의 배 이상을 잡아먹지 않았을까.
‘이 누나 쉴 시간은 있는 건가.’
이런 생각을 해볼 정도의 퀄리티. 항상 그랬지만 마차 안에서 이루어진 브리핑은 만족스럽다.
‘뭐, 쉴 시간은 있었겠지. 혜진이랑 체스도 두면서 좋은 시간 보내셨는데.’
소리를 막기 위해 만들어진 차단벽의 뒤로 보이는 조혜진 역시 이지혜에게 호의적인 표정을 짓는 것을 보니 제법 유대감을 쌓은 모양이다.
“왕국 연합 쪽 귀족들 일부는 포섭해 놨어요. 공화국하고도 이야기하고 있고요. 다만 전쟁 이후에 챙겨줘야 할 게 조금 많네요. 희생한 만큼 챙겨달라 이거죠.”
“…….”
“몇몇 대형 길드는 보상으로 튜토리얼 던전을 관리할 수 있게 해달라는 걸 요구하더라고요. 이 건은 일단 보류하기로 했죠. 전쟁 이후를 생각하는 집단들이 대부분이에요. 피해가 나는 건 어쩔 수 없으니 끝난 이후에 받아갈 수 있는 걸 받아가고 싶다 이거겠죠. 문제가 있다면 모든 이들이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거고… 오빠가 한번 만나서 이야기해 봐야 할 거예요. 물론 저도 접선할 거고요. 회의 중간중간, 쉬는 시간에 인사들이랑 만나는 스케줄 잡아놨으니까. 확인해 보세요.”
“쉬는 시간도 쉬는 게 아니네. 빼곡하기도 하고. 한 사람당 10분이면 너무 시간이 촉박한데….”
“오빠 사람 기분 맞춰주고 샤바샤바 하는 거 잘하잖아요. 사람 하나 구워삶아서 바보 만드는 게 주특기니까. 잘해주실 거라고 믿어요. 이번 회의를 어떤 분위기로 끝내느냐는 오빠한테 달려 있다고요.”
“…….”
“아! 아까 말씀 못 드렸는데 보급로도 바꿀 수밖에 없었어요. 기존에 계획했던 게 전부 무위로 돌아간 상황이니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아쉽네요. 시간만 조금 더 있었으면 터널을 만들든지, 아니면 다른 수송로를 찾아보든지 해볼 텐데….”
“여기 공사 들어간 거 아니었어?”
“이미 철수시켰죠. 어차피 완성도 못 할 텐데… 정하얀이 움직인다면 도움이 될 것 같은데… 보급품 옮기는 거야 쉽잖아요.”
“지금은 못 움직여.”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요. 텔레포트 마법이 있으면 뭐 하나… 이런 쪽으로는 도움이 안 되는 데.”
“탑들에는 이상 없는지 확인해 봤지?”
“시범 운행까지 마쳤고 문제없어요. 곧바로 사용해도 될 정도로 관리하고 있으니까, 그 부분은 안심하셔도 돼요.”
‘누나, 진짜 왜 이렇게 능력 있어.’
확실히 검은 백조에서도 목을 맬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에서 일하는 중에도 길드 내에 그녀를 따르는 이들은 여전히 많다.
1티어에 가까운 무력을 갖춘 하연수, 심지어 검은 백조의 길드마스터 인 박연주마저 그녀에게 계속해서 러브콜을 보내오고 있다.
일이 끝난 후에는 꼭 이지혜를 돌려달라는 요청이 있었을 정도였으니 오죽할까.
나 역시 그녀를 계속해서 내 옆에 두고 싶다.
기본적으로 유능함이 탑재되어 있기도 했고, 그녀는 자기 자신을 가꾸는 데 끊임없이 노력하는 스타일이었으니까.
외관을 가꾸는 데 집착하는 것 이상으로 능력을 가꾼다. 그게 그녀가 빌런들과 함께 대륙 하나를 말아먹을 수 있었던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이번 회차에서는 동료라서 다행이야.’
“그나저나… 이번에는 조금은 세게 나가셔야 할 것 같네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반발이 예상되기는 하지만….”
“어쩔 수가 없어요. 평소처럼 여러 가지 사정 봐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니까. 힘으로 찍어 누를 수 있는 애들은 힘으로 찍어 누르는 게 가장 합리적이에요. 부작용은 이후에 수습할 수밖에 없어요.”
“차라리 독재할 걸 그랬나.”
“사실 따지고 들어가 보면 비슷한 것 같기는 한데… 역사가 주는 교훈을 잊지 말자고요. 우리 아직 그 정도로 타락하지는 않았잖아.”
“…….”
“그나저나 우리 얼마나 남은 거예요? 오빠 표정도 생각보다 안 좋은 것 같은데.”
“36일.”
“네?”
“36일 남았어.”
“…….”
“…….”
곧바로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은 강연하다. 역시나 예상했던 그대로의 반응을 보인다. 시간이 빠듯하다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는 표정이었다.
“될 것 같아요? 겨우 36일? 너무… 너무 빠른데?”
‘나도 인정해, 누나.’
“아직 병력 배치도 전부 안 끝났어요. 이 넓은 땅덩어리에 병력 전부 자리 잡게 하는 것만 해도 30일은 걸릴 걸요? 정하얀도 못 쓴다면서 다른 방법도 없잖아요? 보급은 또 어떻게 할 거야? 병사들 피로도는 어떻게 하고? 텔레포트 사용 가능한 마법사 또 어디 없데요?”
‘나도 있으면 쓰고 싶지, 누나. 없는데 어떻게 해.’
“되게 해야지. 다른 방법이 없어.”
“…….”
“…….”
“오빠.”
“응?”
“이거 손절 매뉴얼 있죠? 탈출 루트도 만들어놔야 하는 거 아니에요?”
“물론 만들어놨지.”
“…….”
“…….”
“와, 진짜… 진짜….”
“…….”
“상상하는 것보다 더 대단하고 더 쓰레기 같다니까. 일 터진다는 이야기 듣고 제일 먼저 만들어놓은 게 그거죠?”
“…….”
“…….”
“안 그래도 누나한테 슬슬 전해주려고 했어. 미리 말해주는 건데 노아의 방주에 탈 수 있는 사람은 몇 명 안 돼. 태울 인원 10명 정도만 적어놔. 탈출할 때 되면 재빠르게 챙겨서 다른 곳으로 튈 거니까.”
“기쁘기는 하지만, 10명은 너무 적은데….”
“많이 챙기면 챙길수록 복잡해지니까 어쩔 수가 없네. 망할 것 같다 싶으면 곧바로 손절하고 나를 거니까, 신호 잘 봐.”
“어련하겠어요?”
“튈 때는 속도가 생명이니까. 회의 끝난 후에는 미리 가방 좀 챙겨놓는 게 좋겠네.”
“막상 튀려고 하면 정말 아쉽겠네요. 여기서 이뤄놓은 게 제법 많은데… 먹음직스럽게 키운 과실을 다른 사람이 따먹는 것 같은 기분이겠어요.”
“그러니까 우리 거 안 뺏기게 잘하자는 거잖아. 어쨌든 내릴 준비 하자. 슬슬 도착한 것 같은데.”
“첫 단추, 잘 끼워야겠네요.”
“응.”
이 첫 단추가 중요하다는 것에는 그녀도 백번 공감하는 모양이다.
중요한 회의나 PT에 들어갈 때 간혹 보여주는 특유의 표정이 눈에 보인다. 그녀에게도 이번 회의가 무척 중요하게 다가오지 않을까.
지금까지 키운 과실을 먹느냐 뺏기느냐의 기로에 서 있는 회의였으니까.
제법 급하게 발걸음을 옮기자 여기저기서 고개를 숙여왔다.
사령 본부라고 불릴 정도로 권력자들이 많이 있는 곳이다 보니, 전 대륙의 권력자들과 함께 회의실을 찾은 모험가들, 전설 등급의 재능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흔하게 보인다.
심지어 내가 그동안 보지 못한 유형의 인재도 많다.
그만큼 이 안에 자리한 이들이 중요한 인물들이라는 증거가 아닐까. 말을 많이 하게 될 것 같아 입을 풀고 옷차림을 정리했다.
‘현성이도 안에 있겠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병풍처럼 앉아 있었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보통 회의에 들어갈 때의 김현성의 모습이 딱 그랬으니까.
이쪽의 호위 포지션으로 참가한 조혜진은 조금 긴장한 것 같은 눈치, 괜스레 다시 한번 자세를 잡고 한 발자국을 더 내디뎠을 때였다.
“…….”
‘뭐야, 이거… 분위기 왜 이래.’
고성방가와도 같은 소음이 들려올 거라고 생각헸디. 하지만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렇지 않다.
쥐 죽은 듯이 조용한 장내,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의 살기가 장내를 뒤덮었다는 것만 알겠다.
‘나, 이거 어디서 본 적 있는 것 같아.’
어딘가 북쪽에 있는 나라 위원장님께서 국정을 주관하실 때의 분위기가 이랬던 것 같았다.
하나같이 한 사람의 눈치를 살피는 모습은 가관, 저도 모르게 김현성이 있는 방향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기영 위원장님 입장하셨습니다.”
‘뭐야, 아니야… 나 그런 위원장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