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1
회귀자 사용설명서 651화
이질적인 빛(2)
“일어나자마자 움직인다는 걸 알면 또 난리 날 것 같기는 한데… 뭐 막을 수 있나요. 오빠가 그렇게 하고 싶다면 그렇게 하는 거지. 그럼 저는 혜진 씨나 불러올게요.”
“근데 왜 혜진이가….”
‘누나 방에 있어?’
“조금 위로해 주느라 그렇게 됐네요. 여기서 혜진 씨가 오빠네 길드마스터 좋아하는 거 모르는 사람 있어요? 그 꼴 보고 어떻게 그냥 보내요. 술이라도 좀 먹여야지. 걔 은근 잘 취하더라. 아, 오빠는 정하얀한테 도착했다고 메시지라도 보내요. 이쪽으로 온다는 걸 말리느라 여기서도 진땀 뺐으니까. 잘 있다고 안심은 시켜줘야 하잖아요? 언론에서 여러 가지로 떠들어대고 있다 보니 점점 불안해하는 것 같았는데….”
“아, 그래야겠네. 누나가 잘 수습했나 봐.”
“당연히 수습해야죠. 사실 정말로 고생한 건 다른 쪽인 같지만… 파란 길드에는 언론 플레이의 일환이라고 걱정할 필요 없다고 못 박아뒀어요. 오빠는 처리할 일 때문에 바쁘다고 하니까 수긍하더라고요. 혜진 씨나 김현성, 그리고 박리안 씨를 포함해서… 딱 몇몇 정도가 이번 사건을 아는 전부일 걸요.”
“아, 덕구는? 덕구는 뭐 해?”
“당연히 한발 빠르게 북부로 향했죠. 엘레나, 선희영, 황정연, 파란 길드는 죄다 북부에 자리 잡고 있고… 붉은 용병, 그러니까 차희라, 그 여자랑 우리 연주 언니. 일단은 기존 매뉴얼에 적힌 대로 병력 배치 완료시켰어요. 근데 이건 수정할 거죠?”
“물론, 그건 전부 준비가 됐다는 가정하에 만든 거고, 지금은 또 다르지.”
“그럴 줄 알고 대충 제가 손봤네요. 아직 준비되지 않은 상태라는 걸 가정해서 만들어봤어요. 아직 기본적인 가이드라인만 잡아놓은 상태니까 확인해 보세요. 위험 부담 높은 지역에 우리 정적들 밸런스 좋게 밀어 넣었는데… 어느 정도로 넣어야 적당히 버티면서 같이 뒈져줄 수 있을지 나는 모르겠더라. 그런 건 오빠 전문이잖아, 그치?”
“…….”
“…….”
‘진짜… 누나 너무 유능하다. 진짜 왜 이렇게 멋있어.’
뭐라고 말이 필요 없다. 그사이에 그건 또 언제 해놨을까.
이지혜가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는 건 당연히 예상한 부분이었으니까, 언론을 진정시키고 여론을 잠재우는 과정에서도 이런 가이드라인을 잡아줬다는 건….
“누나….”
“왜요?”
“진짜 사랑해.”
“저도 사랑해요. 특히나 지금처럼 야비하게 웃을 때 더. 항상 보는 표정이지만 너무 섹시한 거 같더라니까.”
“…….”
“큼, 아무튼, 린델 내에 남아 있는 길드가 얼마 없다니까요. 그러고 보니 카스가노 유노가 오빠한테 꼭 말할 게 있다고 했으니까, 이번 회의 끝나면 곧바로 연락해 보시고…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정하얀한테는 지금 메시지 보내고.”
“응.”
“갈아입을 옷이랑 가방은 준비해 놨으니까. 알아서 입고 나오시면 될 것 같고. 저는 혜진 씨 데리고 그리폰 이륙장에 가 있을 테니… 아니면 준비하는 것 좀 도와줄까요?”
“뭐 어린애도 아닌데. 먼저 가 있어, 누나. 누나 말대로 하얀이한테 먼저 연락해야 할 것 같아. 천천히 준비해.”
“네, 아! 그리고 한소라, 그 여자 연봉 좀 올려줘야겠더라.”
그렇게 말하며 손을 흔들고 문밖으로 나가는 이지혜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래, 걔는 솔직히 연봉 좀 올려줄 만해.’
정하얀이 그동안 버틸 수 있는 이유가 한소라 억제기 때문이라는 걸 깨달은 순간이었다.
‘이지혜가 대충 말했다고 들을 리가 없지.’
아마 한소라의 피나는 노력이 정하얀을 진정시키지 않았을까.
슬그머니 고개를 숙이자 계속해서 진동하는 손거울을 시야에 담을 수 있었다.
당연하지만 몇천 개가 넘는 메시지가 쌓여 있지 않을까.
[아직도 바쁘신가 봐요? 보고 싶어요. 진짜 보고 싶다.]
[일은 언제 끝나요? 그래도 잠깐은 연락 주셨으면 좋겠는데.]
[보고 싶어요.]
[보고 싶다.]
[지금 혹시 다른 사람 만나고 있는 건 아니죠?]
[오빠가 그럴 리가 없으니까. 정말로 보고 싶어요. 답장 좀 보내주세요. 지금 뭐 하고 있어요?]
[왜 계속 한 자리에 누워서 안 움직여요?]
[누구랑 같이 있는 거 아니죠? 일하고 계신 거죠?]
[지금 뭐 하고 있어요? 연락 좀 해주세요.]
아니나 다를까 무척이나 많이 쌓인 메시지들이 눈에 띈다. 약 2,500개 정도….
‘생각보다 안 되네.’
예상한 것보다는 적다. 확실히 한소라가 필사적으로 막았다는 걸 실감한 순간이기도 했다.
조만간 들를 거라는 말을 최대한 성의 있게 작성한 후, 전송 버튼을 누르자 곧바로 튀어나온 정하얀의 답장이 메시지를 위로 밀어버렸다.
[미안해, 하얀아. 갑자기 일 여러 개가 터져서 정신이 너무 없네. 최대한 빨리 정리하고 곧바로 갈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네, 네.]
[빨리 오세요.]
[너무 보고 싶었어요, 진짜.]
[진짜 너무 보고 싶어요, 진짜. 잠깐 통화 괜찮죠? 얼굴 좀 보고 싶은데.]
[바쁘신가요?]
‘얘, 온종일 이거 쳐다보고 있었나 보네.’
시킨 일은 제대로 하고 있었는지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한소라야 최대한 작업실에 붙어 있었겠지만 정하얀은 하염없이 손거울이나 창문만 바라보고 있지 않았을까.
망원경을 시험할 겸, 정하얀이 잘 지내고 있었나 하는 마음 때문에 작업실 쪽을 바라봤다.
아니나 다를까 침대에 누워 손거울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정하얀의 모습이 눈에 비쳤다.
작은 문제가 있다면 그녀가 위치한 곳이 그녀의 방이 아닌 내 방이었다는 것.
‘뭐야….’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물건들이 어떤 용도로 사용되었을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내가 오지 않을 동안 저 방에서 계속 지낸 흔적들이 자꾸만 눈에 띈다.
적절한 표현은 아니지만, 강아지가 주인을 기다리기에 지쳐 방을 개판으로 만들어 버린 것처럼 보이는 장내.
‘칫솔은 왜 저기에 있어?’
차이점이 있다면 내가 방에 도착하기 전에 원상복귀가 되어 있다는 것이겠지만 오히려 그 부분이 더 무섭다.
약속의 1년 때문인지, 기다림에 익숙해졌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름대로 잘 참고 있는 것 같은 분위기는 조금 놀랍다.
물론 여기저기 찢긴 마법 서적들이나 다른 물건들은 이 건으로 인해 스트레스가 쌓였다는 걸 보여주고 있었지만, 본래였다면 폭발한 직후 곧바로 이곳에 달려올 만한 상황이 아니었던가.
‘소라야, 고맙다, 진짜.’
생각하기가 무섭게 한소라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정하얀 님, 식사 드실 시간이에요.
-아!
침대 위에서 벌떡 일어나는 정하얀. 한소라는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지만 등은 이미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다.
연락이 안 되는 시간 동안 생사를 오가는 모험을 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아닐까.
한소라가 조금 안쓰럽기는 했지만 축축하게 젖은 그녀의 등보다 더 눈에 띄는 것은 그녀가 가져온 식사.
‘뭐야, 저거 뭔데, 저거 뭐야.’
내 얼굴을 베이스로 만든 것만 같은 캐릭터가 한소라가 가지고 온 접시에 자리해 있었다.
차마 숟가락으로 뜨기 아까울 정도의 작품, 천사를 조립하다 새로운 재능에 눈을 뜬 것은 아닌지 의심될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정하얀 역시 입을 벌리고 그 결과물을 바라보는 중이다. 그러다 손거울을 바라보며 자랑하듯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오빠한테 방금 연락 왔었는데.
-그, 그렇구나. 다행이다, 정말로 다행이네요, 정말로 다행이다. 하, 하하, 흐하, 정말로 다행이네요. 그러게 제가 뭐라고 했어요. 곧 연락을 주실 거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이, 이것 보세요. 아직도 외부와의 연락을 전부 차단하고 있는 상태라고 하시는데… 이렇게 정하얀 님한테 먼저 연락을 주셨잖아요? 두 분 진짜 참사랑이다. 하, 하하. 너무 참사랑이에요.
-사, 사랑. 그렇지?
-네, 사랑이요, 사랑. 아직 조금 처리해야 할 일이 많으실 테니 여기까지 오시기 전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릴 수도 있겠네요.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바쁠 수밖에 없으니까. 이 와중에도 정하얀 님을 잊지 않았다는 거겠죠? 진짜 참사랑이다. 진짜 참사랑이야. 으응, 이게 참사랑이지.
-헤헤, 그런가?
-물론이죠. 이제 슬슬 방도 정리해야 하지 않을까요? 물론 금방 오시지는 않으실 테니까. 며칠 뒤에 제가 원 상태로 싹 정리해 드릴게요. 아 이럴 게 아니라 답장 보내셔야죠. 그리고 오늘은 주무시기 전에 제가 준비한 영상 보시면서… 아! 그전에 어제 만든 스크랩북부터 보여 드려야 하는 구나? 베니고어 넷에서 떠도는 자료들이 있어서요. 전부 긁어서 스크랩해 왔거든요. 오늘은 이것 보시면서 기분전환 좀 하시는 게 어떨까요?
-보, 보, 보고 싶어.
-식사하고 계세요. 지금 가져오는 게 좋겠네요.
-그것도 같이.
-아! 저번에 보여드렸던 웨딩 잡지 말씀하시는 거구나. 덕구 님이 모아놓은 거 말씀하시는 거 맞죠? 그것도 같이 가져올게요. 그럼 식사하고 계세요.
그 말과 다급히 방을 나가는 한소라의 모습은 솔직히 존경스러울 정도였다. 기립박수라도 보내고 싶을 심정.
그러고 보니 방 안 곳곳에서 정체불명의 굿즈가 눈에 띈다. 이 방 안에서 부족함 없이 행복하게 지내고 있었던 것 같아 마음이 놓이기는 했지만….
‘예정된 훈련 스케줄은 따라가고 있는 건가?’
마법 서적이 몇 권 보이기는 했지만, 적당히 읽다가 던져 버린 것 같지 않은가.
솔직히 저럴 때가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다. 약속의 1년이 지난 이후 엄청난 성장을 이룩하기는 했지만….
‘아직 조금 모자라는 거 아닌가.’
예정보다 일정이 빨라지면서 안 그래도 부족한 시간이 더 부족해졌다.
전체적인 흐름에 정하얀 완전체가 꼭 필요한 만큼 그녀가 현재 어디까지 치고 올라왔는지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다.
[훈련은 열심히 하고 있었지?]
손거울을 꾹꾹 누르자 벌떡 일어나서 찢어진 책을 집어 드는 모양새는 가관.
[네, 하고 있었어요!]
답장은 더욱더 가관이다. 어처구니가 없어 기가 찬다. 아마 본인은 거짓말은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메시지를 보낼 때 책을 읽고 있었다는 건 사실이라 생각하고 있을 테니까.
혹시나 했지만 스텟의 변화도 빈약하기 그지없다.
‘정하얀, 이대로 괜찮은가.’
그런 타이틀이 머리를 꽉 채운다.
저 빛무리에서 언제, 어느 타이밍에 천사의 탈을 쓴 악마 놈들이 튀어나올지, 누가 알겠는가.
아무래도 훈련을 부추기기에는 한소라 역시 역부족이었던 모양이다.
아마 본인의 생존을 최우선 순위로 둬 최대한 정하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것이 한계가 아니었을까.
현상 유지도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괜스레 입안이 쓰다.
새어 나오는 빛의 물줄기가 계속해서 눈을 거슬리게 했기 때문이다.
사실 현재 유일하게 나를 만족시켜 주는 것은 김현성뿐이다.
내키지는 않지만, 루시퍼에게 힘을 받아 격이 올라간 만큼 1회 차 김현성 이상의 힘을 손에 넣지 않았을까.
당연하지만 김현성 외에 다른 이들은 1회 차 최종 스펙에 미치지 못한다.
엄청나게 오랜 시간 동안 지속된 대전쟁이 아니었던가.
아무리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에서 모든 지원을 때려 박고 개난리를 친다고 해도 진짜 사선을 넘어서 만들어진 전사들에 비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심지어 1회 차의 전사들은 가면쓰레기에 의해 이미 담금질이 되어 있던 상태였다.
대륙의 전체적인 수준이 더 높아지기를 기대하며 여러 가지 이벤트를 꽂아 넣어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짜 위기를 경험했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당연하지만 정하얀 역시 그 카테고리 안에 포함되어 있다. 2회 차의 정하얀은 아직 1회 차의 정하얀에 미치지 못한다. 김현성 오피셜이었으니 의심할 것도 없이 확실했다.
사실 본래 계획대로였다면 크게 문제가 없었겠지만, 현재 시국에서는 충분히….
‘문제지.’
아직 준비가 미흡하고 또 미흡한 상황, 쏟아져 내리고 있는 빛줄기가 1년 후에 뻥 하고 터져주면 고맙겠지만 그렇게 될 리가 없다.
어쩌면 카스가노 유노의 미래가 이 상황을 예견한 것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허벅지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리다가 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오래 쉬었지.’
슬슬 조일 타이밍, 조금 미안하기는 했지만… 선택지가 그리 많지 않다. 지금은 한시가 급한 상황이었으니까.
[미진아, 훈련 열심히 하고 있지? 내가 이번 일에서 널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거 알아줬으면 좋겠다. 너에게도 많이 의지하고 있고, 특히나 네 마법에 무척 기대하고 있어. 네가 계획의 중심이야. 이번 일이 끝난 뒤에 우리….]
[…….]
[네?]
[오빠?]
[미진이는 누구예요?]
[아, 아무것도 아니야, 하얀아. 신경 쓰지 마. 메시지를 잘못 보낸 거 같네.]
[…….]
[해킹당했나 보다.]
정하얀도 정하얀이지만… 특히 한소라에게 미안해질 것 같았다.
[해킹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