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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641화 (632/1,590)

# 641

회귀자 사용설명서 641화

지지 마(3)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CF에서나 나올 것 같은 명대사를 저도 모르게 지껄이게 된다.

그만큼 이게 무모한 도전이라는 걸 알기에 나온 자기세뇌의 주문이었지만, 영 설득력이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라파엘 파티를 믿는 것이 아니다.

물론 녀석들의 능력을 아예 배제하는 건 아니었지만, 이게 가능하다고 믿는 것은 어디까지나 내가 김현성을 가장 잘 알고 있다는 자신감 때문이었다.

전투 중 보이는 사소한 습관, 성향과 공격 루트, 27군단 소환 사태 때의 경험, 그리고 전술 김현성을 통해 축적된 데이터.

녀석이 어느 정도의 출력을 낼 수 있는지, 마력과 체력이 어느 정도 인지, 전쟁터에서 뭘 할 수 있는지, 난전에서, 대인전에서, 또 이런 상황에서 뭘 할 수 있는지는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아마 녀석보다 내가 녀석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지 않을까.

아무리 우리 사랑스러운 회귀자가 훈련광이라고 한들, 자신에 대해 심도 있게 분석한 적은 없었을 테니까.

서서히 지끈거리기 시작하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할 수 있어.’

기본적으로 라파엘 파티는 강하다. 아직 완성되지 않았지만….

‘내가 완성시킬 수 있어.’

이기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버티는 거라면 가능하다.

“제 목소리 들리는 거 티 내지 마세요. 모른 척하고, 당연하지만 대답하지도 않습니다.”

‘…….’

“단기전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장기전으로 끌고 가야 해요. 기본적으로 보호 마법 3개를 캐스팅하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지금부터 이걸 파티의 목숨이라고 생각합니다. 절대로 쓸데없이 사용해서도 안 되고, 제 허락 없이 남발해서도 안 됩니다. 검이 지척에 다가와도 지시가 없으면 사용하지 않습니다.”

-…….

“마법사는 보호 마법 외에 다른 주문은 외우지 않습니다. 마법의 쿨타임에는 라파엘의 회색빛으로 세이브 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대충 이해되실 거예요. 기본적인 스킬 사이클은 보호 마법 3번, 회색빛의 보호 1번, 그사이 다시 보호 마법 3번, 다시 회색빛의 보호 1번, 이게 기본적인 사이클입니다. 주문을 외우는 타이밍도 지시해 드릴 테니 그냥 제 지시 없이는 움직이지 않는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어디 있어.

“전투가 재시작되자마자 한 곳으로 뭉쳐서 사제님 버프 받고 시작하겠습니다. 스펙이 안 된다는 건 파티원분들이 가장 잘 알고 계실 거예요. 끊임없이 버프를 유지하는 게 중요해요, 끊임없이요. 그래야 제 지시에 반응이라도 하실 수 있을 겁니다. 추가로, 보이지 않는다고 당황하실 필요 없습니다. 제가 보고 있으니까요. 다른 눈이 달려 있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현재 현성 씨가 있는 방향을 12시로 하겠습니다. 말이 조금 빠르지만, 다 알아들으리라 믿겠습니다. 세부 지시는 전투가 시작되면 곧바로 드리겠습니다.”

-…….

“마지막으로 한 가지,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죽습니다. 실수하지 마세요.”

-…….

“궁수 화살 준비. 아까처럼 당황해서 날리지 말고 제대로 노려. 라파엘은 날개 하나 버리면서 빠져나오는 거로… 불가능하면 두 장. 지원은 해줄 테니까, 알아서 나와요.”

-…….

“발사.”

내 말과 동시에 화살을 장전하는 궁수가 시야에 비쳤다. 곧바로 반응한 김현성이 검을 들어 올렸지만.

“기사 방패 들고 전진. 사제, 기사 대상으로 회복 주문 외운 후에 버프, 마법사도 주문 외워.”

중무장한 기사가 커다란 방패를 들고 돌진해 오는 중이다.

갑작스럽게 회복 주문을 외우라는 개소리에 의문을 품는 사제의 얼굴이 보였지만, 이내 피를 흘리고 쓰러지는 기사의 모습을 보고는 얼떨떨한 표정이 감돌았다.

대미지가 들어오자마자 회복 주문의 영향을 받은 기사 역시 당황한 기색이 역력, 얘도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나쁘지는 않아.’

박덕구처럼 방어력에 몰빵한 것이 아니기에 버틸 수 있을지 걱정되기는 했지만, 아이템빨과 최소한의 내구로 힘이 들어가지 않은 한 발 정도는 버틸 수 있는 모양이다.

급소를 보호해 즉사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녀석은 자신의 역할을 다한 것이다.

그사이 라파엘은 날개를 펴고 김현성의 범위 내에서 벗어나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김현성의 얼굴에 의아함이 깃든다.

그 과정에서 날개 한쪽이 잘려 나가기는 했지만, 첫 번째 위기를 넘겼다는 게 중요했다.

“회색빛.”

거대한 회색빛이 파티 전체와 감싸며 김현성을 밀어내지만, 겨우 저걸로 밀어낼 수 있을 리 없다.

4개의 라이프 포인트를 가졌다는 표현이 4번을 버틸 수 있게 해준다는 뜻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안정적으로, 한 턴을 넘길 수 있게 해준다고 설명하는 것이 적절하다.

자세한 설명을 하지는 않았지만, 녀석들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을 터.

대열을 재정비하고 사제의 버프를 받은 시점에, 마법사의 주문이 완성됐다.

‘보호 마법 충전했고.’

진짜 시작은 여기서부터.

“라파엘은 중심, 메인은 사냥개.”

라파엘을 직접 조정하는 것보다는 사냥개를 이용하는 것을 선택, 애초에 라파엘은 파티의 밸런스를 잡아주는 역할이 더 잘 어울린다.

물론 개인의 능력은 라파엘이 더 뛰어나지만, 라파엘을 메인으로 내세우면 파티의 밸런스가 무너진다.

본인 역시 자신의 역할을 알고 있는지 검을 땅으로 내리꽂았다.

‘회색 영역.’

아군에게는 버프를, 적군에게는 디버프를 주는 스킬이었다.

물론 김현성이 저깟 디버프에 영향을 받을 리 없지만, 파티 전체의 방어력과 전반적인 능력치가 오른다는 게 중요했다.

엄연히 파티와 개인은 다르다. 개인이 상대할 수 없는 재앙급 몬스터를 인간이 막아내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유기적인 팀플레이와 밸런스, 약속된 행동과 정확한 판단이 아니었던가.

“이주혁 님은 역할은 평소대로, 다만 스스로 판단하지 말고 제 지시대로만 움직여요.”

볼 수 있는 화면이 많지는 않았지만, 망원경에 최대한 마력을 때려 부어 김현성의 신체 곳곳을 살폈다.

어디에 마력이 들어가고 어떤 근육을 사용하는지, 또 어떻게 움직이는지 자세하게 분석한다. 전술 사냥개는 효율이 낮지만….

‘발목만 붙잡으면 돼.’

상처 입히는 건 애초에 불가능하다.

“몸 사리지 마요.”

본인이 죽는 걸 각오하고서라고 어떻게든 발목만 물어뜯겠다는 일념으로.

물론 속도는 부족하다. 힘도 부족하고, 마력은 두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김현성이 움직이는 곳, 김현성이 위치를 옮기는 곳에 한 발자국 늦게 녀석이 등장한다.

개인의 입장에서 이것보다 더 거슬리는 일이 어디 있을까. 아마 김현성에게는 녀석이 어그로를 끄는 탱커처럼 느껴질 것이다.

“왼쪽.”

-허억….

“머리 조심.”

-허억, 허억….

“발에 마력 모아요. 사라집니다. 다음 오른쪽.”

-하아, 허억….

“끝까지 달라붙어요. 늦으면 다 죽어. 팔에 마력 모을 시간 주지 마. 거리 벌어지면 한꺼번에 다 죽습니다. 검이 빛날 시간을 줘도 다 죽고, 안정적인 자세에서 검을 휘둘러도 다 죽는 거예요. 축이 되는 발만 거슬리게 합니다. 검에 힘이 안 실리면 적어도 피할 시간은 벌 수 있으니까.”

-하아, 허억, 허억….

‘아, 이 새끼 금방 퍼지겠는데.’

문제는 녀석의 체력으로 김현성을 따라잡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 김현성 역시 그걸 알고 있다.

‘싸울 때는 확실히 똑똑해.’

사냥개가 어떤 역할을 부여받았는지 이해하고 있다. 그렇기에 오히려 녀석을 내버려 두는 것이리라.

일부러 움직임을 더 크게 가져가고, 일부러 동선을 먼 곳으로 잡는다.

스펙상 본인이 월등한 우위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사냥개에게 집착하지 않는다. 일단은 체력을 빼놓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다.

사냥개에게 어그로를 끌리는 순간, 정황이 더 복잡해진다는 걸 이해하고 있다.

여기까지 오는 내내 사용한 마력과 체력이 영향을 주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닌 모양이다.

조혜진을 퍼지게 한 거리도 김현성에게는 별 영향을 준 것 같지 않다.

물론 아예 영향이 없지는 않겠지만, 고작 라파엘 파티를 상대하는 데는 무리가 없을 거라 판단한 것 같았다.

‘체력이 많이 늘었어.’

아마 우리 사랑스러운 회귀자 역시 전술 김현성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닐까.

당시 녀석도 체력이 아슬아슬하다는 걸 깨달았을 것이다.

더 안정적으로, 더 오래 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체력의 상승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한 게 분명하리라.

‘안 좋은데.’

파티의 지원을 받고 있는데도 사냥개는 벌써 퍼지기 직전, 독기가 어디로 간 것은 아닌지 헐떡거리며 어떻게 주문에 맞춰주고는 있지만 반응이 늦다.

간혹 자신에게 들어오는 공격 루트를 전달해도 힘에 부치는지 제대로 반응하지 못한다.

‘겨우 1분 40초? 아니, 이제 2분인가.’

지금까지는 어떻게든 버티고 있지만 여기서 몇 분이 더 추가되면 곧바로 균형이 무너진다.

현시점에서도 파티를 위해 사용되어야 할 보호 마법이 점점 사냥개 개인을 위해 사용되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이 균형을 유지해 주는 것은 중요하다.

라파엘을 투입하면 곧바로 누구 하나가 뒈져 나가는 상황이 펼쳐지게 되리라.

‘이거 큰일 난 것 같은데… 진짜.’

그따위 생각을 하며 커다란 문을 바라봤지만, 박리안은 아직도 뾰족한 수를 찾지 못한 것 같았다.

굳게 잠긴 문을 열기 위해 본인의 쌍검이라도 찾으러 간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현성아… 시바, 현성아.’

그 와중에 조금 이상하게 느껴진 것은 김현성에게서 별다른 액션이 없었다는 것.

내가 균형을 유지시키고 있다기보다는 녀석이 수를 던지지 않는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기 시작했다.

내 생각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치 라파엘 파티를 살펴보는 것만 같은 느낌.

‘현성아, 눈치챈 거 아니지?’

그런 생각이 갑작스럽게 들어와 꽂힌다. 이런 생각을 해볼 만도 하다.

김현성도 바보는 아니다. 애초에 처음, 마리엔이 자신의 공격을 피했다는 것부터가 의아하게 느껴질 터다.

곧바로 찢어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던 벌레들이 의외의 저항을 하고 있다.

파티의 완성도가 본인이 상정하고 있던 것보다 훨씬 높게 느껴질 것이다. 어쩌면 생각하기도 싫은 상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혹시나 이 새끼들이 기영 씨의 지시를 받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합리적 의심 말이다.

움직이는 게 마치 시험하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이 파티가 어디까지 자신을 따라올 수 있는지, 본인이 생각하는 게 맞는지 하나하나 짚어보는 듯한 느낌이다.

내가 김현성을 잘 알고 있는 만큼, 녀석 역시 나를 잘 알고 있다.

내가 파티와 개인을 어떤 식으로 굴리는지는 녀석이 먼저 경험해 보지 않았던가.

아니나 다를까 점점 표정이 어두워지는 게 시야에 비친다.

혹시라도 녀석들을 죽이면 안 된다는 내 마음이 전해진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디까지나 희망 사항에 불과하다.

‘아….’

반대로 라파엘의 얼굴은 더욱더 밝아지는 중.

‘너, 이기고 있는 거 아니야. 언제, 어떻게 목이 날아가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인데, 뭐가 좋다고 그렇게 웃고 있어, 시바.’

아마 형이 드디어 자신을 알아줬다고 판단한 것은 아닐지 모르겠다.

당연하지만 저 모든 행동이 김현성에게는 거슬릴 것이다.

만약 이기영이 정말로 눈앞에 있는 파티원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다면 결코 정상적인 방법이 아닐 거라고 생각할 테니까.

어쩌면 세뇌 같은 종류의 정신적인 압박을 받고 있다고 추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본인이 하기 싫은 잃을 억지로 하게 하거나, ‘이제는 용사 파티가 없이는 살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어.’ 따위의 대사를 듣게 되는 상황을 상정하고 있을 수도 있다.

김현성의 표정이 점점 더 어두워질수록 내 안색도 괜스레 어두워지고 있는 시점, 사랑스러운 회귀자가 제자리에 우뚝 멈춘 것은 바로 그때였다.

-죽여 버리겠어.

‘원래 죽이려고 했잖아.

-살아 있는 걸 후회하도록… 이 쓰레기 같은 놈들.

‘안 돼, 그런 거 하지 마. 악당 같은 대사 날리면 안 돼. 우리 정의의 편이야, 알지?’

“가까이 가지 마. 가까이 가지 마!! 움직이면 죽어. 움직이면….”

아니, 이미 한 놈 죽을 것 같다.

-아아아아악!

비명과 함께 생매장 듀오 중 한 놈의 팔이 날아가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난 몰라.’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르며 땅바닥을 나뒹구는 놈의 모습은 가관.

-아악!! 아아아악!!!

고향으로 돌아가 청혼한다는 녀석의 계획은 여기서 끝이 아닐까.

목숨을 건지더라도 무릎은 꿇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방금 다리 한쪽이 날아갔으니까.

-아아아악!!

‘사, 사랑했다. 라파엘. 시바.’

그런 말이 절로 튀어나오는 순간.

대륙의 빛을 납치한 악마 놈들의 최후를 직접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내려와 꽂혔다.

“힘내라. 힘내, 현성아…. 지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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