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0
회귀자 사용설명서 640화
지지 마(2)
꽤 멀던 거리가 좁혀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눈 깜빡할 사이에 지척에 다가왔다는 표현이 이렇게까지 잘 어울리는 상황이 어디 있을까.
이 자리에 있는 녀석 중 김현성의 모습을 캐치한 녀석은 없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놈들의 눈에는 김현성이 일순간 사라진 것처럼 보였을 터.
브레이크를 밟지 않고 달리던 레이싱카가 일순간 시야에서 사라졌다고 상상해 보라, 그 누구도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할 것이다.
머릿속으로 수없이 시뮬레이션했겠지만, 계획이 틀어지는 것은 이미 예정된 이야기, 김현성이 노린 것은 그 찰나의 순간이었다.
‘진정해, 시바…. 현성아, 우리 현성아.’
발에 마력을 머금고 땅을 박찬 녀석이 모습을 드러낸 곳은 기적의 사제 뒤.
다수를 상대할 때는 사제를 노려야 한다는 것은 칼밥을 오래 먹고 지낸 이들에게는 기본적인 상식이었지만, 김현성이 그런 생각을 하고 그녀를 노렸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아마 이성적으로 생각했다기보다는 몸에 새겨진 기억이나 습관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완벽한 대형을 유지하고 있던 파티의 균형이 무너진 것은 당연하다.
당황한 마법사는 주문을 외우지 못했고, 생각보다 더 빠른 속도에 사제를 전담 마크하고 있던 기사 역시 반응하지 못했다.
아마 내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마리엔의 머리는 땅바닥에 굴러떨어져 있었으리라.
기적의 사제, 쟤는 본인이 방금 전에 죽을 뻔했다는 걸 알고는 있는지 모르겠다.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김현성을 바라보는 사냥개 이주혁의 얼굴이 괜스레 클로즈업된다.
그 앞으로 보이는 것은 입술을 꽉 깨문 채 분노를 드러내는 라파엘의 표정.
식은땀을 흘리는 생매장 듀오, 일순간 파티가 정지한 듯한 느낌이었지만, 김현성은 검을 휘두르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처음에 고개를 숙인 것은 어디까지나 우연, 두 번째부터 우연은 없다.
“보호 마법, 보호 마법!”
아까부터 외워두었던 마법사의 보호막이 일순간 파티를 뒤덮는다.
기적의 사제에게 내리꽂히던 검이 멈칫한 순간, 성검 용사 파티가 안심하는 것이 보인다.
‘지랄하지 마, 이 새끼들아. 겨우 저 보호막이 니네 목숨을 지켜줄 것 같아?’
“곧바로 대응해! 대응! 대응!”
채 0.5초도 버티지 못하는 보호막. 저건 공격을 막아주는 용도가 아니다. 공격을 늦춰주는 용도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다.
내 목소리를 들었는지 기사가 넋 놓고 있던 사제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움직였다. 문제가 있다면 그 방법이 잘못됐다는 것.
“막지 마! 막지 마! 피해!”
방패째로 갈라져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소원인지, 마리엔의 앞을 막아서려고 했다.
내 말을 듣고는 한 손으로 사제복을 붙잡고 뒤로 집어 던졌다.
생매장 듀오가 뒤로 밀려나는 사제를 붙잡는 사이, 기사가 옆으로 몸을 움직이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어떻게든 김현성의 공격 범위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는 것 같았지만, 이미 앞을 막아서려고 했던 역동작에서 벗어날 수 없다.
어떻게 생각해도 김현성의 공격 범위 안.
“마법!”
파티가 위기에 빠졌을 때 녀석들을 구해준 것은 찰나의 시간을 벌어주는 보호막.
쾅!
폭음과 함께 보호막이 박살 난 이후에도 검은 멈추지 않는다.
곧 기사의 목이 떨어질 거라고 생각했을 때, 그녀의 목숨을 구한 것은 파티의 사냥개였다.
기사에게 몸통 박치기를 해, 그녀를 범위에서 떨어뜨려 놓은 것이다.
꼴사납게 땅바닥을 구르며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한 기사가 곧바로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그 자리에 김현성은 없다.
그녀가 볼 수 있었던 유일한 장면은 피를 토하며 쓰러지고 있는 사냥개일 터.
“커헉….”
“신성력으로 밀어! 신성력으로 밀라고!!”
숨이 끊어지고 있다. 어깨부터 가슴까지 완전히 베였다.
그제야 정신 차린 사제가 서둘러 기도를 올렸지만, HP가 회복되는 속도보다 떨어지는 속도가 더 빠르다.
입술을 꽉 깨문 그녀가 하늘 위에 손을 뻗자, 일순간 천사의 형상이 나타났다. 그제야 사냥개는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기적.’
일주일에 한 번밖에 사용할 수 없는 마리엔의 각성기가 전투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털려 버렸다.
사냥개가 다시 일어설 거라고 직감했는지 김현성이 다시 검을 휘둘러 왔지만, 녀석의 검을 라파엘의 성검이 가로막았다.
“으아아아아아아!”
괴성을 내지르며, 검을 휘둘러 오는 모습에서는 그 옛날 어리숙했던 놈의 모습을 찾을 수가 없다.
대신 자리한 것은 독기를 품은 얼굴, 김현성 역시 입술을 꽉 깨물고 검을 휘두른다.
‘죽을 거야.’
라파엘은 저 검에 반응하지 못한다. 절대로 반응할 수 없다. 처음 내지르는 검은 페인트, 이후에 휘두르는 검이 진짜.
“첫 번째는 페인트.”
그렇게 경고했지만 내 말보다 김현성의 손이 더 빠르다. 다시 한번 0.5초 보호막이 라파엘의 앞을 가로막았지만, 날개 하나가 잘려 나가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제길!”
어떻게든 시간을 끌기 위해 궁수가 화살을 날렸지만,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한쪽 손으로 화살을 잡아낸다. 심지어 눈길 한 번 주지 않는다.
‘시바, 저건… 진짜 멋있네.’
“괴, 괴물.”
궁수의 목소리에 화답하듯 김현성이 라파엘의 목을 향해 검을 뻗었다.
남은 7개의 날개 중 하나가 다시 라파엘의 앞을 가로막았지만, 김현성은 귀찮다는 듯이 날개를 손으로 잡아 찢으며 검을 밀어 넣으려고 했다.
“아아악!”
애처로운 비명에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는 기사와 김현성의 뒤를 노리는 도적은, 김현성의 목소리에 몸이 딱딱하게 굳어 움직이지 못했다.
“어디 있지?”
“…….”
“말해, 어디 있어.”
‘진짜 X 됐다. 진짜로 X 됐다. 이 새끼들아, 니네 망했어. 난 몰라.’
이미 승부는 낫다. 아니, 처음부터 싸움이 성립되지 않았다.
애초에 내가 녀석들에게 따로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면, 대부분이 뒈졌을 거라는 것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사제도 그렇고, 사냥개도 그렇다. 그나마 녀석들이 발끝이라도 비빌 수 있었던 이유는, 어디까지나 내가 녀석들의 눈을 대신해 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현성 레이드 팟은 개뿔.’
녀석들이 마른침을 삼켰다.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자신들을 응시하는 김현성에게 공포를 느끼고 있는 것이리라. 아마 속으로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이게 인간인가?’
혹은….
‘악마.’
지금 내 눈에도 김현성의 모습은 정의의 용사라기보다는 어둠의 군주처럼 보인다.
어둠의 군주 둠현성도 제법 멋있어 보였지만 현시점에서는 반갑지 않다.
미묘하게 어두운 조명 때문에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라파엘의 날개 한 짝을 손으로 잡아 뜯어 피가 튄 모습은 왠지 모르게 오싹하다.
우리 현성이의 별별 모습을 다 봐왔던 나도 이렇게 느끼는데 다른 녀석들이야 오죽할까.
라파엘 파티 역시 칼밥을 먹고사는 처지인 이상 저 눈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대충 눈치채고 있을 것이다.
‘전부 다 죽을 거야.’
그 말 그대로. 김현성은 이곳에 있는 이들을 살려둘 생각이 없다.
1회 차에서 함께했던 영웅들과의 추억이고 나발이고, 내가 쏟은 주식이고 나발이고 신경 쓰지 않을 심산이다.
물론 김현성이 저들과 그렇게 친하지는 않았다고 해도….
‘그래도 동료였다며, 현성아. 쟤들 말도 들어는 봐야지.’
“시발….”
‘기적의 사제한테는 도움받은 적 있었다며, 생매장 듀오랑은 같이 술 마신 적도 있었고…. 여기사랑도 아는 사이라고 하지 않았어? 쟤들 잘못한 거 없어. 라파엘이 쟤네 다 꼬드긴 걸 수도 있잖아. 라파엘도 잠깐 마음이 아파서 그런 거일 수도 있고…. 원래 마음이 아픈 애들이 간혹 이상한 실수 저지르고는 하잖아. 그렇게 사람 쉽게 내치고 그러면 안 돼.’
“그러면 안 된다고….”
‘쟤네 키우는 게 얼마나 힘들었는데…. 너도 사실 죽이기 싫잖아.’
김현성도 녀석들을 그리워했었다. 내게 1회 차 영웅들에 대한 썰을 풀 때 조금은 즐거워 보이기도 했고, 추억에 젖은 것처럼 이야기하기도 했었다.
굳이 2회 차에서 새로운 인연을 만들 생각이 없다고는 했지만, 그치들을 지원하고 있었다는 것 자체가 명백한 증거가 아니던가.
하지만 지금의 모습에서 그런 그리움은 보이지 않는다. 증오와 분노 외에 다른 감정은 없다.
‘진짜 죽이려나 보다.’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법이다. 내가 나가서 말리지 않는 한, 라파엘을 비롯한 용사 파티는 처참한 모습으로 무지개다리를 건널 것이다.
비틀거리며 문을 열려고 해봤지만, 도저히 열리지 않는다. 그 와중에도 김현성은 녀석들에게 검을 겨누고 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 살려야 하지 않을까?’
‘어떻게?’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적어도 이 문을 열 방법을 찾을 때까지는 시간을 끌어야 했다.
다이렉트로 김현성에게 연락하는 방법이 좋지 않을까 싶어서 메시지를 넣어봤지만, 본인의 집무실에 놓고 온 모양인지 받지를 않는다.
누군가가 문을 두드린 것은 바로 그때.
‘누구야.’
“부길드마스터?”
‘아이고, 우리 리안이! 우리 리안이가 해냈구나.’
성검 용사 파티의 시선이 본인에게서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떻게 빠져나왔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일단은 쾌재를 불러야 함이 옳다.
“문을 열 방도를… 찾는 중입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아, 네.”
이제 곧 이곳을 빠져나가 피 터지게 싸우는 쟤네를 말릴 수 있을 테니까.
초조한 마음으로 허벅지를 툭툭 두드려 봤지만, 아직도 문이 열릴 기미는 없다.
그 와중에도 김현성과 성검 용사 파티는 미묘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었고.
‘일단은 살리자. 살려보자.’
쉬울 거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가능성 역시 낮지만, 시간을 끄는 거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마리엔 각성기는 끝났고….’
한 번 외울 때마다 세 번씩 차징 되는 마법사의 보호 마법 역시 끝.
물론 이쪽은 계속 충전이 가능하지만, 지금 당장은 주문을 외울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일단은 주문부터 외워야 해.’
형편없이 깨져 나가는 보호 마법이지만, 저 보호 마법 한 발이 성검 용사 파티의 목숨 하나라고 생각하는 게 옳다.
쉽게 말해 총 3개의 라이프 포인트를 세이브 하게 되는 셈이다.
찰나의 순간만을 버티게 해주는 수단에 불과하지만, 저 찰나의 순간이 없다면 파티의 전위들은 김현성의 검에 반응할 수 없다.
시간만 있으면 계속 충전할 수도 있으니, 그렇게 나쁜 상황도 아니다.
기적의 사제가 살짝 퍼지기는 했지만, 사냥개도 몸을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회복했고, 다른 파티원들의 몸도 비교적 멀쩡한 상태다.
맨 처음 기적의 사제가 물리고 시작했다면 아예 가능성조차 없었겠지만 사제가 유지하고 있는 파티는 그렇게 쉽게 리타이어 하지 않는다. 반쯤은 성기사로 분류할 수 있는 라파엘 역시 아직까지 싸울 수 있는 상황이니 이 곳에 나갈 때까지는 버틸 수 있다. 성검 용사 파티를 전술 김현성 다루듯 컨트롤한다면….
‘할 수 있어.’
30분? 30분은 버틸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10분? 10분 안에 나갈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을 하는 중에도 입은 자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는 상황, 최대한 빠르게 브리핑을 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제 목소리에 집중하세요.”
“…….”
아무리 세상일이 어떻게 돌아갈지 모른다지만.
“지금부터 제가 지시하겠습니다.”
김현성 레이드 팟을 지휘하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