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3
회귀자 사용설명서 623화
거짓말이야(1)
‘친절에 익숙해지지 말자.’
“의심해야 돼.”
‘그는 독이야.’
“끝까지 의심하는 게 맞아.”
‘절대로 믿으면 안 돼. 그렇게 배웠잖아.’
“모든 게 연기고 전부 계산된 행동이야.”
‘괜히 동요할 필요 없어. 동요하지 말자. 동요하지 마.’
천천히 거울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중얼거려 봤지만, 머릿속이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정확히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릴 수 없었던 탓이다.
이곳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이기영이라는 사람과 마주할수록 진실이 뭔지에 대해 고민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천사의 탈을 쓴 악마들….”
거짓이라고 생각했던 베니고어의 예언.
그저 사람들을 선동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했었던 그 예언을 눈으로 직접 목도한 순간,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물론 자신이 본 것이 진실이 아닐 가능성은 차고도 넘친다.
실리아의 무녀가 미래를 볼 수 있다는 소문은 들은 적이 있지만 자신이 본 것이 확정된 미래라는 증거는 그 어디에도 없었으니까.
피부로 느껴지는 현실감 때문에 진실처럼 받아들여지는 것뿐이다.
이것 역시 조작된 것이며 성검에게 선택받은 용사를 컨트롤하기 위한 수단일 것이다.
사용하기 좋은 장기 말로 이용하기 위해 조작된 내용일 것이다.
하지만….
“하지만….”
다른 정황들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어떻게 된 거지?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이 정말 사실이 맞는 건가?’
그런 의문이 자연스럽게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대륙을 손안에 쥐려는 악마의 일상은, 권력자들과 함께 잔을 기울이고 온갖 만찬에 둘러싸여 방탕한 생활을 하는 나날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신의 거울에서 보여지는 홍보용 영상이 끝난 이후에는 자신이 구축해 놓은 권력과 명예, 부를 누릴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많은 시간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자신이 보기에는 그렇지 않았다.
이기영은 권력과 명예 그리고 그 자신이 쌓아 올린 부를 누리지 않는 종류의 사람이었다.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누리지 않는 거지?”
그 모든 걸 누리기 위해서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었던가.
인간이 이런 종류의 욕구를 원하는 것은 누리기 위해서라고 생각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그의 생활은 정 반대다.
그는 가장 높은 위치에 있으면서 가장 낮은 위치에서 일하고 있다.
소외된 자들과 어울리며 그들에게 열과 성을 다하는 데 시간을 사용하고 있다.
만약 정말로 이기영 명예추기경이라는 인간이 권력에 미친 독재자라면 할 수 없는 행동이지 않은가.
‘보여주기식일 거야.’
그렇게 생각해 봤지만 그 어떤 인간이 단순히 보여주기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할까.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의 일도 마찬가지이지 않은가.
그는 권력을 휘두르지 않는다.
그저 희생할 뿐이다.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을 오롯이 천사의 탈을 쓴 악마들을 막기 위해서만 사용한다.
그가 이 자리에서 올라오기 전에 벌어들인 수많은 재화가 성벽의 공사와 병사들의 보급을 위해서 사용된다.
그의 권력은 타인의 자유와 권리를 빼앗는 데 사용되는 게 아니라 그들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쓰인다.
그의 명예는 자기 자신을 드높이는 데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낮은 이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쓰인다.
그 어떤 병사나 대륙인들의 일상보다 그의 일상이 더 가혹하다. 최소한 눈으로 보이는 게 그러했다.
하루에 소화해 내는 스케줄 자체가 일반인의 시점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수준이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마치 정말로… 정말로 대륙의 멸망을 막으려고 발버둥 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은가.
‘그럴 리가 없어.’
라파엘이라는 개인에게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진 작위적인 장면이 아닐까.
‘어째서 내게 이런 걸 보여주려는 거지?’
아니… 주변인들의 반응으로 미루어 보건대 그가 살인적인 스케줄을 감당하고 있다는 건 사실이었다.
마치 바보가 된 기분이지 않은가.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는 사실과 현재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야기가 완전히 상반되어 있다.
‘거짓말이었다고? 단장님들과 단원들이 믿고 있었던 게 정말로 거짓말이었다고?’
인정할 수 없는 부분.
끝까지 의심의 끈을 놓을 수 없는 이유였다.
‘살아남아라, 라파엘. 너만은 살아남는 거야.’
“거짓말이 아닐 거야.”
‘단 한 명이라도 우리를 응원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단장님이 거짓말을 했을 리 없어.”
‘우리의 목적은 대륙의 해방이야. 그가 지배하고 있는 대륙의 해방.’
“그게 전부 다 연기였다고? 말도 안 돼.”
‘너는 검을 들 필요가 없다, 라파엘. 싸우는 건 우리만으로 충분해.’
“연기일 리가 없어. 분명히 연기가 아니었을 거야. 단원들과 함께 보낸 시간이… 전부….”
‘너도 우리를 믿지 않는 거냐. 네가 알고 있는 세상은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 찬 세상이다, 꼬마야.’
“나를 속일 이유가 없잖아. 단장님이 나를 구해주실 이유도 없었어.”
‘위험한 시기지만… 이놈은 데려가는 게 맞는 것 같다. 저대로 두고 볼 수는 없어. 위험한 일이 될 수도 있겠지만, 도의마저 저버릴 수는 없어.’
“내 말이 맞아.”
‘이름은 이후에 차차 알려주도록 하마. 만나서 반갑다, 꼬마야.’
“그 만남이 전부 다 거짓말… 거짓말일 리가 없어!”
‘아저씨라고 불러도 돼. 지금은 말이다.’
“거짓말일 리가… 없다고!!!”
콰직!
유리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눈앞의 거울이 산산조각이 나서 떨어졌다.
갈라진 거울 틈 사이로 비치는 자신의 여러 모습이 우스웠다.
그동안 단련된 신체 때문인지 거울을 내려친 손에서 고통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아프다. 아파서 참을 수가 없다.
“흐으으윽… 뭐가… 뭐가 진실인 거야. 말해줘요, 단장님. 보고 있으면 제발 말해주세요. 제가 미친 건가요? 저도 단장님 말씀처럼 세뇌당하고 있는 건가요? 이기영이 정말로 단장님이 말한 그런 사람이 맞는 거예요? 제발… 제발 말해주세요.”
대답을 바라고 지껄인 말이 아니다.
“제가 뭘 믿어야 하는지… 알려주세요. 단장님이 거짓말을 한 게 아니었다고 말해주세요.”
대답이 들려올 리가 없다.
“맞죠? 단장님이 해준 말이 맞는 거죠? 그렇게… 그렇게 생각해도 되는 거죠?”
흘러나오는 눈물을 쓱쓱 닦고 거울을 바라보자 다시 한번 자신의 얼굴이 시야에 비친다.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스스로도 판단을 내릴 수 없다.
하지만 눈물을 닦아낼 수밖에 없었다. 곧 그와 만나기로 한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 소속으로서 전반적인 업무에 대해 알아보고 배우는 시간, 현재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의문을 해소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다시 한번 마음을 가다듬고 방을 나서니 시야에 비치는 것은 눈웃음을 보내고 있는 그자였다.
평소대로의 모습.
언제나 환한 웃음을 보이며 여유를 잃지 않으려고 하는, 친절함과 따뜻함, 걱정스러움으로 둘러싸인 얼굴이었다.
여느 때와 같은 얼굴이지 않은가. 가식적으로 지을 수 있는 표정이 아니라는 게 느껴진다.
그는 현재 자신을 걱정스러워하고 있다.
훈련에 제대로 집중할 수 없게 된 그때부터. 나에게 동정을 보내고 있었다.
성검에게 선택받아 일상을 잃은 이에 대한 동정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겨우 그런 것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니야.’
그리 말하고 싶은 심정.
하지만 그런 말을 내뱉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일이 어찌 됐든 현재 상황이 내게 유리하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는 사실이었으니까.
그가 정말로 나를 동정하고 아끼고 있다면 쾌재를 불러야 함이 옳다.
나 자신이 고민하는 모습을 감출 수 있을뿐더러… 이기영 위원장의 신뢰를 얻는 것은 대의를 도모하는 데 필요한 가장 큰 일 중 하나였으니까.
“오늘은 조금 괜찮으십니까?”
평소와 같이 안부를 물어오는 모습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피곤하신 것 같아서 일정을 조금 축소시켰습니다. 아마 다음 주 즈음부터는 위문차 병사들을 방문하게 될 것 같습니다. 저와 함께 직접 전진기지들을 둘러보기도 할 거고요.”
“네….”
“전진기지에 있는 병력에게 무엇이 가장 필요하고 어떤 게 가장 도움이 될지도 한번 알아봐야 하는 부분이니… 물론 책임자들이 보내오는 건의사항들은 전부 알고 있지만, 현장에서 체감되는 느낌은 조금 다를 겁니다. 병력들이 정말로 필요로 하는 게 무엇인지 느낄 수 있을뿐더러.”
“네, 형.”
“아마 라파엘 님께서 방문하신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에게 커다란 힘이 될 겁니다. 합동 훈련소에 있는 이들도 마찬가지고 말입니다.”
“…….”
“…….”
“이제는 조금 괜찮아지신 겁니까?”
“네, 조금은… 극복해 낸 것 같아요. 조금은요.”
“항상 드리는 말씀이지만 무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괜찮아요, 형. 저보다는… 형이 더 무리하고 계신 것 같은데….”
대충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피곤에 찌들어 있는 얼굴이었다.
괜찮은 척했지만 가혹한 일정을 겨우 견뎌내고 있는 이의 얼굴이 저러할까.
아마 나에게 신경 쓰고 있는 것 또한 그의 건강에 영향을 주고 있는 게 분명해 보였다.
이전에 차희라와 함께하는 훈련장에 그가 방문했을 때부터 건강이 급속도로 안 좋아지는 것 같았으니까.
‘신경 쓰지 말자.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니야.’
육체적, 정신적으로 한계에 내몰려 있다면 오히려 고개를 끄덕여야 함이 옳다.
“다행이군요.”
“네?”
“조금이나마 평소 같은 모습을 찾으신 것 같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날 이후로 제대로 식사도 하지 않으시는 것 같아서… 걱정 많이 했는데….”
“형이… 계속… 신경 써주셨으니까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었다.
내가 혼란스러워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한 이후, 이기영 위원장은 억지로라도 시간을 내서 나와 함께했다.
뭔가 거창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짧은 휴식시간을 함께 보내기 위해서였다.
함께 차를 마시거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거나 하는 나날.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했지만, 기운을 차리게 됐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거짓이건 진실이건 간에 그가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능력을 지녔다는 것만은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입가에 미소를 띠게 된다. 이 사람에게는 그런 종류의 힘이 있다.
익숙해져서는 안 된다고, 이건 독이라고 끊임없이 생각하면서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독약일 거라고 마음을 먹지만 그 달콤함을 받아 마시게 된다.
괜스레 표정을 굳히며 다시 한번 이기영을 바라봤을 때였다.
‘뭐 하고 있는 거지?’
어떤지 그의 상태가 이상해 보인 것.
‘지금 뭘 하는 거지?’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표정이다. 어딘가에 혼을 빼앗긴 듯한 모습.
정확히 뭐라고 설명할 수는 없지만 잠깐 정신을 잃은 것처럼 느껴졌다.
심지어 표정을 찡그리며 머리를 부여잡는 모습은 누가 봐도 정상으로 보이지 않는다.
‘당신 뭐야… 어디 아픈 거야?’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