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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622화 (613/1,590)

# 622

회귀자 사용설명서 622화

거짓 없는 진실(4)

뒤에서 느껴지는 차희라의 시선이 신경 쓰였지만, 왠지 모르게 뒤를 돌아보기가 꺼려지는 시점.

일단은 라파엘 녀석에게 다가가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다.

녀석이 바깥으로 뛰쳐나간 이후 대화다운 대화를 해본 적이 없지 않은가.

한동안 가만히 내버려 둬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런 상태가 길어지는 게 달가울 리가 없었다.

물론 그동안 다가가지 못했던 개연성도 충분하다 할 만했다.

라파엘이 악마 계약자의 끄나풀이라는 걸 모르는 척하다 보니, 나 역시 현재 상황에 대응하기 위한 캐릭터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

대외적으로 이기영은 라파엘을 걱정하는 포지션에 있다.

카스가노 유노를 통해 함께 본 미래에 녀석이 겁을 집어먹고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전형적인 클리셰네.’

성장형 모험물의 주인공이 자신의 운명 앞에 겁을 집어먹고 나아가지 못하는 장면은 여기저기서 많이 봐왔다.

사실 현재의 라파엘이 이런저런 부분까지 생각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디테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만큼 먼발치에서 녀석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영웅이 스스로 극복해 내기를 바라는 조연의 포지션에서 말이다.

물론 실상은 다르기는 하지만….

‘라파엘이 그렇게 생각하게 되면 뭐 나야 상관없지.’

어째서 이기영 명예추기경이 자신을 걱정하고 있는지 깨닫는 게 중요했다.

걱정을 가득 담은 얼굴로 슬그머니 자리를 옮기자 혼이 빠져나간 것 같은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차희라가 지시한 기초 체력 훈련도 하지 않고, 멍하니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은 가관.

둠기영 사태 때의 김현성만큼은 아니었지만, 고민에 빠진 듯한 모습이었다.

‘아니, 그때랑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무리수인가.’

직접 머릿속에 들어가야 해결이 가능했던 그때와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맞다.

“저….”

살짝 인기척을 내봤지만, 이쪽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다.

“라파엘 님.”

다시 한번 불러보니 슬쩍 나를 돌아본다.

‘이거 뭐라고 운을 떼야 하나.’

그나마 괜찮았던 것은 나를 바라보는 눈에 커다란 적의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

하지만 약간의 의심이 자리 잡은 것 같기도 했다.

“조금 괜찮으십니까.”

“아… 형.”

“몸이 좋지 않으시면 조금 쉬셔도 괜찮습니다.”

“아니요. 그런 건….”

“무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차희라와의 훈련으로 인해 넝마가 된 몸에 신성력을 쏟아내자, 뭔가 꺼림칙해하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온다.

이쪽이 신성력을 사용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겠지만, 직접 몸이 회복되는 느낌이 들 테니 얼마나 당황스러울까.

느껴지는 것은 평범한 신성력이 아닐 것이 분명하다. 맑고 투명하고 깨끗한 것으로 모자라, 순도까지 높은 100% 베니고어산이었으니까.

물론 그 양이 미약하기는 했지만, 이 정도 상처를 치료하는 것에는 문제가 없다.

나를 바라보는 얼굴에 슬슬 표정관리에 들어간 것은 당연지사.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 판단하는 것 역시 순식간이다. 여기서는 복잡한 표정을 짓는 것이 맞다.

이를테면, 도망치고 싶은 마음도 이해할 수 있다는 듯한 표정.

성인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청년을 전쟁터로 내몰고 싶지 않다는 얼굴.

하지만 그 책임을 떠안길 수밖에 없다는 듯한 태도.

여러 가지 복합적인 감정이 드러나 있는 얼굴이 필요했다.

물론 이런 여러 가지 감정이 실린 표정을 어떻게 보여줘야 할지는 나 역시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녀석의 처지에 진심으로 마주한 순간 자연스럽게 비스무리한 표정이 지어지는 것 같았다.

이 땅 위를 살아가는 모든 이를 위해, 싸움에서 도망치고 싶어 하는 청년마저 전쟁터로 내몰 수밖에 없는 현실.

성검에게 선택받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모든 짐을 끌어안고 공포와 싸워 이겨내야 하는 라파엘을 향한 순수한 동정이었다.

‘제기랄….’

이 얼마나 비정한 현실이란 말인가. 저도 모르게 눈에 눈물이 고이고 있다. 억지로 입술을 꽉 깨물어 봤지만, 눈물이 흘러나오지 않게 막는 것 정도가 한계.

“괜찮을 거라고… 싸우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형….”

“두려우실 거라는 거 압니다.”

“…….”

“얼마 전까지는 평범하게 살아오셨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

“라파엘 님께서 검을 겨누어야 할 이들은 그런 자들입니다. 잔인하고, 독선적이며 인류를 자신들의 발아래에 두고자 하는 이들입니다. 인류의 위협으로 다가올 이들은 이런 이들이에요. 라파엘 님이 보셨던 그대로입니다.”

“…….”

“누군가 먼저 움직이지 않는다면 많은 이들이 죽을 겁니다. 마지막 전쟁에서 싸우고 있었던 수많은 영웅과 병사가 죽은 이후에는, 대륙 위에서 살아가고 있는 평범한 이들이 다음이 될 거예요. 평범한 노인과 미래를 꿈꾸는 가족, 어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어린아이들과 날개를 펼치지 못하는 청년, 모두가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르며 악마들이 내지른 창에 목숨을 잃을 겁니다.”

잠깐 말을 끊고 녀석을 바라보자 어떤 포지션을 취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 게 시야에 비친다.

잠깐 걷자는 듯 먼발치를 바라보자 고개를 끄덕이는 라파엘.

당신이 걱정하고 있는 그것 때문이 아니라고… 내가 고민하고 있는 것은 그것 때문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듯한 느낌.

이기영이라는 인간이 어떤 인간인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뭘 그렇게 고민하고 그래. 보이는 그대로인데. 그냥 고민하지 말고 시키는 대로만 하면 알아서 해결해 준다니까 그러네.’

정말로 당신은 어떤 인간이냐고 묻는 것만 같다.

대답하고 싶어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어쭙잖은 자료로 만들어진 선동과 날조보다는….’

직접 눈으로 보고 있는 팩트를 더 신뢰해야 하는 거 아니야?

‘이래서 선동이 무서운 거라고, 시바.’

왜 그런 명언도 있지 않았던가.

선동은 한마디 말로 충분하지만,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까지에는 수백 가지가 넘는 증거가 필요하다고 말이다.

딱 그 짝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수차례나 나는 그런 나쁜 놈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초조해하지 말자. 시간이 조금 걸리겠지만, 진실은 승리하는 법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책임감을… 가지라고 말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

“우리 앞에 서달라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에요.”

“…….”

“처음에 제가 했던 말 기억하고 계십니까?”

“네… 형.”

“…….”

“기억하고 있어요. 끝까지… 함께 싸워달라고… 검을 놓지 말아달라고.”

“무섭고 두려운 게 당연할 겁니다. 전쟁이, 싸움이, 갈등이 두렵지 않은 사람은 이 세상에 없어요.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갈등이 무섭고 그로 인해 상처받을 이들이 무섭습니다. 제 손으로 누군가를 해하게 될까 무섭고, 혹시나 목숨을 잃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

“저뿐만이 아닐 거예요. 모든 이가 두려워할 겁니다. 수많은 현장에서 보이지 않는 적을 바라보고 있는 영웅들도, 아직 훈련소에서 훈련하고 있는 이들도 무서울 겁니다. 맡은 책임은 다를 수 있지만, 그들 역시 두려운 것은 마찬가지일 겁니다.”

“네….”

“그 두려움에 빠져 실수하는 이들도 있지만….”

‘예를 들면 악마 관계자 같은 놈들 있잖아.’

“병사들 대부분이 이 두려움을 똑바로 직시하고 있을 겁니다. 형체가 없는 적을 정확히 마주 보고 검을 들어 올릴 준비를 하고 있을 거예요. 그들은 예전부터 그래왔으니까요.”

“…….”

“네, 아주 오래 전부터요. 제가 이 대륙이 오기 전부터 그들은 그렇게 싸워왔을 겁니다. 욕심에 눈이 먼 권력자들의 전쟁에 휩쓸리기도 하고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내몰리는 경우도 많았겠지만, 개개인은 분명히… 분명히 자신들이 지키고 싶어 하는 것을 위해 검을 들어 올렸을 겁니다.”

“…….”

“사랑하는 가족, 내 조국, 내 사람들을 위해서요. 각자 다른 이념과 가치를 지니고 있지만… 지금 이 장소에 있는 이들은 그런 이들이에요.”

“…….”

“힘든 과정을 겪게 되겠지만, 종국에는 일어나게 될 겁니다. 항상 그랬던 것처럼 일어서 승리의 함성을 내지를 거라고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렵지 않은 거예요. 저와 함께 싸우게 될 이들을 믿고 있기 때문에 무섭지 않은 겁니다.”

지껄일 수 있는 대로 입을 털었지만, 전쟁터에서 싸우는 게 두렵지 않은 이유가 신념을 가지고 싸우는 병사들 때문일 리가 없다.

김현성이나 정하얀, 희라 누나 같은 뒷배들이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을 거라는 확고한 믿음이 있기 때문에 전쟁터에 설 수 있지 않을까.

‘이런 믿음이 있어야지.’

“라파엘 님도….”

“…….”

“제가 드린 말을 이해해 주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

“분명히 이겨내실 거라고, 회색빛의 성검과 함께 일어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베니고어 님께서 내리신 검이… 라파엘 님을 선택한 이유가…. 분명히 있을 거라고…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

잠시 내려앉은 침묵.

너는 이겨낼 수 있다고 열심히 독려하기는 했지만 이런 말이 제대로 들어올 리가 없다.

애초 녀석의 의문을 해결해 줄 수 없을뿐더러… 겉은 번지르르했지만 결국 알맹이는 전쟁터로 나가 싸우라는 말이나 진배없었으니 말이다.

당연하지만 이렇게 말을 끝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빛기영이라는 캐릭터는 집단을 위해 개인을 희생시키는 사람이 아니다. 눈앞에 이득이나 실리를 위해 움직이는 사람도 아니다.

최대한 이성적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대의를 위해서라면 포기해야 하는 것도 있는 거라고 생각하지만 어쩔 수 없이 감정에 흔들리고야 마는… 그런 여린 사람이다.

아주 작은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연 것은 당연지사.

“하지만….”

“…….”

“하지만 라파엘 님이 정말로 싸우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면.”

“…….”

“일상으로….”

“형.”

“일상으로 돌아가셔도…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라파엘 님은 라파엘 님을 위한 삶을 살아갈 자격이 있으니까요.”

‘싸우기 싫으면 그냥 가도 돼. 당연히 너 없으면 우리 다 뒈질 것 같기는 한데… 내가 너 같이 유망한 애가 고통받는 걸 견딜 수가 없네. 무슨 말 하는지 알겠지? 여기서 그냥 가면 갑자기 분위기 싸해지는 거 알지?’

당연하지만 놈 역시 떠날 생각은 없을 것이다.

이대로 떠난다는 것은 풀어야 할 숙원에서 등을 돌린다는 것과 같았으니까.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지금 내가 지껄인 말이 꽤나 마음속에 틀어박히지 않았을까.

‘결정타치고는 약하기는 한데.’

개연성을 생각해 보면 나쁘지 않은 발언이었다고 본다.

당연하지만 씁쓸한 미소까지 함께 전달하는 서비스 정신도 잊지 않는다.

마치 동상처럼 굳어 움직이지 못하는 모습에 천천히 어깨에 손을 올리고 녀석의 눈을 바라보자.

‘…….’

이쪽의 눈을 슬그머니 피하는 녀석이 시야에 들어왔다.

‘뭐?’

어깨에 올려진 팔이 불편하다는 듯 어깨를 움찔거리는 모습은 뭘 뜻하는 건지 모르겠다.

‘너, 이 새끼….’

“…….”

‘너, 이 새끼가 나를 거부해?’

왠지 모르게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긁힌 것 같은 느낌.

‘감히 빛을 거부해?’

그동안 내가 너무 물렁하게 이 게임에 임한 건가 하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애써 참아낸다.

그냥 다 필요 없으니 목을 날려 버리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마음마저 생겨난다.

티가 나지 않게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여러 가지 생각 때문에 머리가 복잡했지만, 머릿속에 가장 먼저 들어온 생각은 이것 하나였다.

‘누가 이기나 해보자. 그래, 이 악마계약자 새끼들.’

이 문제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로 합의를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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