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7
회귀자 사용설명서 617화
부정적인 여론(3)
‘라파엘이 꼬리를 잡히지는 않았을 테고….’
뭔가 꼬리를 잡힐 만한 행동을 한 것 같지도 않다.
애초에 등장 시기를 생각해 보면 벌써부터 꼬리를 잡혔을 리가 없다.
과거도 훌륭하게 정리한 것처럼 보였고… 5현장 안에서도 녀석이 활동했다는 증거나 흔적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애초에 그 정도로 멍청하게 행동했다면 이렇게 대담한 짓을 벌여올 수 있었을까.
다른 건 몰라도 신분 세탁은 완전히 끝나놨다고 생각하는 게 맞다.
단언컨대 나 역시 마음의 눈이 아니었다면 녀석의 정체를 곧바로 캐치해 내지 못했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현성의 얼굴은 뭔가 복잡한 표정, 확실하게 경계하고 있다는 느낌이 전해져 온다.
뭐라고 딱 설명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저건….
‘감이라는 건가?’
여러 가지 경험을 가진 회귀자의 촉이 발동된 것은 아닐까.
경지에 올라본 적이 없는 내가 알 수는 없지만, 박덕구처럼 위험한 냄새를 맡았다고 생각하는 게 맞을 것 같았다.
경험에 의해 만들어진 마음의 눈?
아니면 위험감지 센서처럼 불이 들어온 건가?
어떤 종류의 촉을 받았다고 예상하지만 내가 김현성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떻게 알겠는가.
‘김현성 같은 종류의 인간이 되어본 적이 없는데….’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르면 느껴지는 게 있기는 있는 모양이다.
‘이걸 어쩌면 좋지….’
하는 고민이 잠깐 스쳐 지나가기는 했지만 딱히 나쁠 게 없다고 여겨진다.
물론 지나치게 밀어내고 배척하는 행동은 자제해야겠지만 저런 식의 견제는 없는 것보다 있는 게 낫다.
라파엘을 우리 편으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의 정리를 마치기는 했지만, 아직 녀석이 내 사람이 된 것은 아니지 않은가.
뒤에서 성검으로 뚫리고 싶은 상황이 있을 수도 있는 만큼 녀석을 견제해 줄 수 있는 인선도 필요하다.
무엇보다….
‘내가 직접 녀석을 견제할 수는 없는 상황이니까.’
김현성이 그 역할을 대신해 준다면 환영하는 게 당연했다.
조금 의외였던 것은 정하얀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러나저러나 자기 자신은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게 확정되어 있으니, 이상한 놈이 합류해도 별 상관없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완벽한 무관심이라고 표현하는 게 좋지 않을까.
이렇듯 누구는 적의를, 누구는 무관심을 표현하고 있다 보니, 라파엘은 굉장히 당황한 듯한 반응.
격한 환영을 받는 상황을 생각하지는 않았겠지만, 이런 종류의 반응은 더욱더 예상하지 못했던 것 같았다.
지금쯤 행선지를 위원회로 잡았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있지 않을까.
‘얘는 뭔 생각을 하고 있으려나.’
표정에 당황스러움이 드러나기는 했지만,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분위기를 어떻게 판단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일단 만나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파란 길드 마스터 김현성이라고 합니다.”
“크흠… 박덕구요. 인물이 훤하구만.”
“안녕하십니까, 안기모라고 합니다.”
“김예리.”
“파란 길드에 몸을 담고 있는 엘레나라고 합니다. 이렇게 만나게 돼서 영광이에요.”
“선희영입니다. 그렇게만 알아두시면 될 것 같습니다.”
“만나서 반, 반, 반가워요. 정하얀이라고 합니다.”
천천히 인사를 주고받는 모습.
“저야말로 영광입니다. 항상 여신의 거울을 통해서만 보던 분들을 실제로 보니, 제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지 헷갈릴 지경이네요. 기영이 형을 처음 봤을 때도… 그런 느낌이었지만 이렇게 파란 길드원분들이 전부 다 모인 모습을 보니 뭐라고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감격스러워요.”
“붙임성이 좋으신 것 같군요.”
“네?”
“붙임성이 좋으신 것 같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왜 가만히 있는 얘한테 무안을 주고 그래….’
“혹시나 대접이 미흡하더라도 양해 부탁드립니다, 라파엘 님. 길드 정기모임에 외부인이 들어온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 다른 걸 준비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왜 길드 모임에 네가 끼게 됐냐고 추궁하는 것 같은 말투였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저… 도… 너무 갑작스레 찾아뵙는 것 같아서… 죄송한 마음이, 실례를 범한 것 같아서… 괜히 민망하네요.”
“죄송하실 필요 없습니다, 기영 씨의 손님이라면 대접해 드리는 게 당연하니까요.”
이기영의 손님이기는 하지만 내 손님은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다.
“식사밖에 준비된 것이 없어서 죄송할 뿐입니다.”
밥만 먹고 가라는 말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 아닐까.
정말로 오랜만에 김현성이 옛날 모습을 보는 것 같은 느낌.
아직도 타인을 대할 때는 저런 표정을 장착하긴 하지만, 오늘따라 말에 가시가 달려 있는 것 같았다.
아무리 눈치가 없는 사람이라도 곧바로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노골적이다.
라파엘이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본인이 환영받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느낄 거라고 생각했다.
어떤 처세술로 지금 이 상황을 벗어날지 기대가 되는 것은 당연, 안기모가 쓸데없는 농담을 집어던지며 싸해진 분위기를 수습하려고 시도하고 있지만 이미 주워 담을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다.
‘김현성도 김현성이다, 진짜. 너는 나 없었으면 진짜 어떻게 할 뻔했어?’
만약 내가 김현성이었다면 저런 식으로 행동하지 않았으리라.
조금 의심되는 점이 있다고 해서 대놓고 경계하는 꼴을 보이면….
‘득보다는 실이 많지.’
대놓고 라파엘을 수상하게 여기고 있는 것 같이 행동하고 있지 않은가.
괜히 녀석의 경계심만 심어주는 꼴이 된다는 거다.
내 입장에서는 라파엘의 움직임을 제한할 수 있으니, 환영할 만한 행동이지만 우리 회귀자가 원하는 건 얻기 힘들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예상한 것처럼 라파엘이 당황하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파란 길드원들에게 호의를 얻고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겠다는 계획이 시작부터 박살 나버린 셈.
비빌 곳이 이쪽밖에 없다는 걸 깨닫기까지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으리라.
예상했던 대로 나에게 많이 의지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
딱히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행동이었지만 대화에 진입하거나 한마디 보탤 때 이쪽을 언급한다든지, 내 의견을 물어본다는 식의 화술을 펼치고 있었다.
‘그렇게 경계하지 않아도 돼요. 당신네 부길드마스터, 기영이 형과 제가 이렇게 친하잖아요. 이것 봐요.’
라며 필사적으로 외치고 있는 듯한 느낌.
나쁘지 않은 방법인 것 같았지만, 효과가 크지는 않았다.
오히려 테이머 알프스에게 더 시선이 쏠린다.
선생님으로 있었던 김예리와 박덕구가 많이 챙겨주기도 했고, 아주 오랜만에 새로 들어온 길드원인 만큼 나 역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으니까.
“거, 양치기 양은 잘 적응하고 있는 것 같구만. 어떻소?”
“왈! 왈!”
“네? 어떤….”
“파란 길드로 들어온 감상.”
“그저… 모든 게 신기하죠. 정말로 제가 파란 길드에 들어오게 될 줄은 정말로 몰라서… 명예추기경님을 직접 뵙게 될지도 몰랐고… 무엇보다 김예리 선생님이나 박덕구 선생님과 같은 길드에 들어와 있는 것도 신기하고요….”
“이제는 자주 볼 얼굴이지! 그렇게 신기해하지 않아도 된다니까. 아, 그러고 보니 알프스도 성검의 시험을 받았었나? 아쉽게 떨어지기는 했지만… 나는 정말로 그때 우리 알프스가 용사로 선택되는지 알았다니까.”
“나도. 그런 줄 알고 있었는데….”
“지금에서야 물어보는 건데… 정확히 어떤 느낌이었습니까?”
“글쎄요. 정확히 무슨 느낌이라고 표현하지 못하겠어서… 조금 말하기 부끄러운 내용이기는 하지만 구역질을 참아내기가 정말로 힘들었어요. 악의라고 부르기에는 애매하고… 그냥 더러운 쓰레기나 징그러운… 그… 구더기… 같은 것들을 맨손으로 잡는 것 같아서요. 잡는 순간 알았어요. 아, 나는 이 검의 주인이 아니구나… 오기로 버티기는 했지만 알고 계신 것처럼 결과가 그리 좋지는 않았죠.”
“…….”
“고향 어르신들에게 죄송하기도 했고… 믿어주신 대륙민 여러분들, 무엇보다 선생님들의 기대를 저버린 것 같아 가슴이 아프기는 했지만… 다행이죠. 이렇게 선택받은 용사님이 나타나 줬으니까요. 용사님은 조금 어떠셨나요?”
‘얘가 착하기도 착해 부러.’
저 병아리의 눈에도 점점 소외되고 있는 라파엘이 안쓰러워 보였나 보다.
“저 같은 경우는 그런 느낌을 받아보지 못한 것 같아서… 워낙 정신이 없고 긴장했던 상태라 뭐가 어떻게 돌아갔는지도 기억이 나지가 않네요. 그냥 거대한 충격이 들이닥친 것 같은 기분이었고, 정신을 차리니 검이 손에 들려 있었어요.”
“정말로 주인이 정해져 있었던 검이었군요….”
알프스 역시 성검을 목표로 열심히 해왔던 만큼 아쉬움이 남는 것 같았다.
아무튼 라파엘의 발언에 다들 고개를 끄덕이는 게 눈에 보였다.
아무도 뽑지 못한 성검을 뽑았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되새기게 된 것이리라.
‘충분히 용사라고 할 만한 상황이기는 하지.’
연출 자체가 그럴듯했으니까.
김현성이 갑작스레 입을 연 것은 바로 그때였다.
“글쎄요.”
“…….”
“본래 이런 종류의 검은 빛을 잃기도 하고 주인을 다시 선택하기도 합니다. 사용자가 본인이 원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판단되면 점점 힘을 잃어가기도 하고요. 성검에게 선택을 받았다고 해서 시험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부터 시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1회 차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고 들었던 것 같았다.
가면쓰레기 진청이 성검의 빛을 잃게 만들었다지, 아마.
지독하고 고약하고 비겁한 방법을 써서 용사를 궁지로 몰아붙인 악독함은 다시 떠올리기도 싫다.
“그건… 저 역시 실감하고 있어요, 파란 길드마스터님.”
“성검의 이름이나 정보가 전부 읽히십니까?”
“…….”
아마 한세월이 지나도 읽히지 않을 것이다.
이미 루시퍼가 손을 써놓은 아이템이었으니까.
하지만 김현성의 갑작스러운 발언이 라파엘에게는 충격적으로 다가온 모양이다.
보통 높은 등급에 있는 아이템들은 자격이 부족하거나 주인 의식을 끝내지 않으면 상태창으로 읽어볼 수 없다.
제한이 빡세게 걸린 경우는 마음의 눈으로도 읽히지 않는다.
오직 주인만이 모든 정보를 확인할 수 있고 그것을 활용할 수 있다.
김현성이 가지고 있는 듀렌달 역시 마찬가지다.
1회 차의 성검 역시 비슷했었던 것 같고….
“본인을 허락했다는 것에는 의의가 있지만 정말로 검에 대한 정보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 상태라면… 완전히 인정받았다고 하기에는 힘든 상태일 겁니다.”
“제가 여러 가지로 부족하기 때문일까요….”
라파엘의 표정이 달라진 게 눈에 보인다.
물론 겉보기에는 크게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았지만 무척 커다란 고민에 빠진 것 같다.
성검이 자신에게 진명과 기능을 알려주지 않는 사실을 떠올리는 모습.
아직 자격이 부족한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생각에 빠질 수밖에 없는 주제이리라.
거기에 김현성이 날카롭게 들어온 것이다.
“뭐 그렇게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습니다, 라파엘 님. 물론 현성 씨 말도 일리가 있지만 이제 막 성검에게 선택받은 참이 아닙니까. 부족한 게 많은 게 당연한 겁니다. 성에 차지 않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에요.”
“…….”
“여러 가지 부분에서 공부하고 차근차근히 배우며 단련한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회색빛의 성검의 진짜 이름을 볼 수 있는 날이 올 겁니다.”
물론 볼 수 있는 날은 평생이 지나도록 오지 않을 거다.
‘아니… 그건 아닌가?’
만약 라파엘이 진심으로 빛과 함께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현한다면 어쩌면 회색빛의 성검이 답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머릿속에 흉악한 마구니가 껴 있는데 성검이 정말로 힘을 빌려주겠어? 진정으로 빛을 따르면 뭔가 달라지는 게 있을지도 몰라. 모든 게 신의 뜻이라고.’
녀석이 성검을 활용하는 데 가장 중요한 조건은 참된 빛에 대해서 깨닫는 것.
라파엘의 머릿속에 들어가 있는 마구니를 하루라도 빨리 들어내야 했다.
그렇게 오늘의 식사가 유야무야 끝나가는 시점.
“오늘 즐거웠습니다. 조만간 다시 시간을 만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짧은 만남의 끝을 알린 것은 역시 김현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