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8
회귀자 사용설명서 608화
천사 만들기(2)
“그래?”
“정말 아무 생각도 안 했어요. 그런 생각은 절대로 안 했어요. 믿어주세요. 제발….”
‘아니, 넌 그만 좀 해….’
“지, 지, 지금 시작 10분 전이래요. 빨리 보러 가요, 빨리.”
“그럼 조금만 쉴까. 소라 씨도 같이 보러 가시죠.”
“아? 아… 네, 네….”
매일 매일 공방에 처박혀 있는 3인의 연구원들의 유일한 휴식 시간이었다.
다 함께 모여 팝콘을 뜯으며 방송을 보는 것이 유일한 낙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사실 정하얀이 이 프로그램에 빠질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내가 좋아하니 좋아하는 척하는 건지, 아니면 이 휴식 시간에 비교적 오래 붙어 있을 수 있기 때문인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흥미 있어 하는 것 같다.
이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한소라 역시 마찬가지.
우울하고 칙칙한 장소에서 온종일 바깥 공기도 마시지 못하고 작업만 하고 있으니, 이런 종류의 휴식 시간이 달가운 것이 당연하리라.
잠깐 쉬어도 된다는 주문이 들어온 이후에는 곧바로 손을 탁탁 쳐 내고 대충 뒷정리하기 시작했다.
정하얀 역시 준비하러 간다는 말을 남기고 휴게실로 뛰어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이쪽 역시 돌아왔을 때 곧바로 작업에 들어갈 수 있게 세팅해 놓고 나서야 비로소 나갈 준비가 끝났다.
전에 있었던 작은 해프닝 때문인지 한소라는 아직까지 눈치를 보고 있었지만… 별다른 일이 일어날 리가 없다.
‘하얀이가 너를 얼마나 아끼는데, 이제 그만 좀 걱정해.’
만약 정하얀이 한소라를 적대했었다면 그녀는 한참 전에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을 것이다.
정하얀의 입장에서 한소라는 2명이 함께 지내는 보금자리에 끼어든 불청객이었을 테니까.
확실히 친구라는 인식이 박혀 있으니 나조차도 놀라울 정도의 변화였다.
물론 한소라가 나와 함께 대화하거나 같은 공간으로 들어갈 때는 아네모네의 눈 같은 수단을 쓰며 경계했지만 비교적 너그러워졌다.
지난 시간 동안 동고동락한 효과였고, 한소라가 보여준 처세술의 성과였다.
본인은 아직도 외줄 타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저한테… 너무 가까이 오시면 안 돼요… 부길드마스터.”
“네?”
“며칠 전에 정하얀 님이 아픈 곳이 없냐고 물어보셨… 제발… 제발….”
“…….”
“같이 연구하실 때도 위험한 일만 시키고 계세요. 제가 다치는 걸 바라는 사람처럼….”
“…….”
‘…….’
아직도 외줄 타기를 하고 있기는 한가 보다.
하지만 적어도 생명을 위협하지는 않으니 커다란 변화라고 할 만했다.
괜찮을 거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입이 잘 떨어지지는 않는 상황.
더 이상 해줄 말이 없다는 듯 침묵을 유지하며 자리로 발걸음을 옮기자, 정하얀의 옆자리가 비어 있는 모습이 보였다.
탁탁 자리를 치는 모습을 보고는 자연스럽게 착석했고, 거기서 약간 떨어진 자리에 팝콘이 놓여 있는 게 보였다.
매일 앉던 자리에 앉아 있을 뿐이었지만, 오늘따라 이 포지션이 기묘해 보이는 것은 한소라의 발언 때문일까.
멀리 떨어져 팝콘을 먹고 있는 한소라의 모양새가 애완동물과 같은 포지션 같지 않은가.
“…….”
‘에이, 이건 너무 갔다.’
너무 지나친 생각이다.
정하얀은 확실히 한소라를 소중한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다.
분명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더 이상 생각하면 머리 아파질 것 같은 느낌에 일단은 고개를 흔들며 여신의 거울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일단은 방송에나 집중하자. 기다리고 기다려 왔던 시간이었으니까.
‘테이머, 알프스.’
이기영 베스트 픽 TOP 100위 안에 랭크되어 있는 인재.
무려 14위에 랭크되어 있었으니 다른 말이 필요 없다.
순위가 깎여 나간 이유는 역시나 직업적인 한계가 뚜렷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검술에도 남부럽지 않은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그게 단점이 되지도 않는다.
아마 메인 클래스를 검사로 한다면 순위가 10계단 정도는 상승하지 않았을까.
무엇보다 산골에서 양치기 소녀로 살던 본인은 자신의 재능을 깨닫지 못하고 있던 상태였다는 것이 가산점이다.
사전시험 역시 양치기 개와 함께 등장하며 세간의 시선을 사로잡지 않았던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가뿐하게 어두운 기운을 뿌리쳤고, 그 이후에 시작된 팀별 과제에서도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무엇보다 테이머로서의 재능을 아낌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강아지 한 마리가 무대를 박살내 버렸지.’
그녀의 모자란 검술을 보조해 주는 것은 그녀가 데려온 강아지였다.
물론 고난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기초가 아예 잡히지 않다 보니 사전 시험에서 여러 가지 논란이 될 모습을 자주 보여줬고, 실제로 용사가 될 수 있겠느냐는 여론의 뭇매를 많이 맞았다.
개인적으로 응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최대한 실드를 쳐주려고 했지만, 본인도 심적 부담이 컸는지 점점 더 자신을 내려놓은 상태.
특별 심사 위원, 우리 꼬맹이 김예리가 내질렀던 한마디는 이후에 그녀를 완전히 바꿔놓게 된다.
-알프스야, 용사가 하고 싶어?
-네.
-열심히 좀 해 봐. 힘줘서 해봐.
-네… 흐윽… 네.
때마침 여신의 거울에서는 모두를 울렸던 명장면을 다시 보여주고 있는 중.
꼬맹이 주제에 빡센 화장을 하고, 카리스마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김예리의 모습에는 빵 터질 뻔했다.
하지만 그 옆에 자리한 박덕구가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니 박수를 치고 싶어 몸이 움찔거렸다.
이미 한 번 봤던 장면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가슴을 간질거리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
‘혁명 삼 남매 쟤들 진짜 저런 쪽으로 너무 재능 있는 것 같은데….’
미디어에 자주 노출시켜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너무… 죄송하고… 너무 민망했어요.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왔는데… 흐윽… 너무 실망하셨을 것 같아요.
이후에 따로 따낸 인터뷰마저 감동적이다.
슬쩍 옆을 보니 한소라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고, 정하얀은 소소하세 웃고 있었다.
과거의 활약상과 인터뷰를 계속 보여주며 점점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편집이 인상적이었지만, 이미 지나간 걸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다.
이윽고 양치기 개와 함께 등장해 조용히 웃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기영 씨, 지금 시작하고 있습니다.]
우웅거리는 소리와 함께 진동이 살짝 울려 여신의 손거울을 꺼내보자 역시나 김현성이 보낸 메시지.
“누, 누구예요?”
“현성 씨, 지금 시작한다고 메시지가 왔네.”
[저도 지금 보고 있습니다. 재미있게 보세요. ^^]
정말로 김현성이 맞는지 확인하려는 듯 정하얀이 고개를 거북이처럼 쭉 뺐지만, 위에 나열된 로그를 보여주기는 힘들다.
1회 차에 대한 이야기가 나열되어 있었으니까.
실제로 잠금까지 걸어놓은 상태였으니 오죽할까.
티 안 나게 슬쩍 손거울의 각도를 뒤집으며 바지춤에 집어넣으니 정하얀의 눈빛에 조금 짜증이 묻어나왔지만, 딱히 되물어 오지는 않았다.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
“길드마스터도 재미있게 보고 있으신 것 같더라고요.”
처세술의 극에 달한 한소라가 자연스럽게 물타기를 시도한 것이다.
분위기가 안 좋아질 것이라는 걸 눈치챘는지, 베니고어 톡의 상대를 김현성으로 확정 짓는 뉘앙스의 대사였다.
‘와… 얘, 진짜 기가 막힌다.’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물타기에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을 정도. 간단한 한마디였지만 타이밍이 절묘했다.
내게 이후의 말을 요구하는 듯한 눈빛도 완벽하다.
솔직히 이렇게까지 해명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완벽하게 들어온 킬 패스에는 저도 모르게 발을 뻗게 된다.
미리미리 예방해서 좋은 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으니까.
“네. 본래는 바빠서 볼 시간이 없었는데… 다들 보고 있다고 하니 조금씩 보는 것 같더군요.”
“아….”
아마 김현성은 이런 프로그램이 하고 있는지도 모르지 않았을까.
뒤늦게 안 이후에는 녀석 역시 궁금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나보다 더 관심을 가지고 있을 게 분명했다.
나야 전장으로 밀어 넣으면 그만이었지만 김현성의 입장에서는 함께 합을 맞춰야 하는 상대였으니까.
대륙의 문물을 잘 다루지 못하는 녀석이 이렇게 찾아보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실제로 김현성답지 않게 ‘누가 됐으면 좋겠다’, ‘누구였으면 좋겠다’라는 메시지를 보내올 정도였다. 구체적인 이유와 함께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녀석의 이런 모습이 제법 재미있게 느껴지기는 했다.
실제로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마치 반 친구들 모두가 함께 시청하는 방송을 무리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파란 단체 연락망으로도 종종 이야기를 나눌 때 갑툭튀 하며 등장해 한마디 하는 모습은 초반의 김현성과는 완전히 다르다.
본인이 이걸 인지하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작은 부분부터 천천히 변하고 있었다.
‘좋은 변화지, 좋은 변화야.’
동료를 잃었을 때의 충격이 무서워 무의식적으로 거리를 뒀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 아니었던가.
이제는 거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려고 하고 있는 게 눈에 보인다.
‘그래, 동료는 소중히 해야지. 현성아. 그중에서도 형을 제일 소중히 해야 하고.’
본래 우리 현성이 같은 종류의 인간은 지킬 게 있어야 더 강해지는 법이 아니겠는가.
혼자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번 화면을 바라보자 테이머 알프스가 길고 길었던 인터뷰를 마무리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저를 믿어준 모든 분의 성원에 보답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겉으로는 차가우셨지만, 끝까지 저를 지지해주셨던 김예리 선생님 그리고 남몰래 할 수 있다며 응원해 주셨던 박덕구 선생님. 마지막으로 이런 기회를 주신 베니고어 님과 저를 응원해 주신 대륙민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그래, 가라. 슬슬 저것도 뽑힐 때 됐다.’
-제가 성검에게 선택받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지만…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노력하는 거로 끝나면 안 돼.’
말은 ‘노력하겠습니다.’였지만 눈빛은 무조건 뽑고야 말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이고 있었다.
고조되는 분위기와 응원을 보내는 갤러리들의 목소리가 여신의 거울을 통해 들려온다.
-힘내라! 알프스!
-선택받은 용사는 너밖에 없다.
-언니, 너무 예뻐요!
입술을 꽉 깨물고 손을 움켜쥐며 당당히 발걸음을 옮기는 모습을 보니, 정말로 오늘 일을 치러도 제대로 치를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때마침 태양빛이 반사되어 그녀를 비추는 모습. 함께하는 강아지 역시 왕왕 짖으며 용사 후보에게 힘을 보내준다.
‘가라, 시바… 가즈아!’
“될, 될, 될 것 같아요. 이번에는 진짜로….”
“나도 왠지… 느낌이 좋은데.”
“나오는 건가요.”
마침내 성검에 앞에 선 알프스가 무겁게 발걸음을 옮긴다.
웬만한 녀석들은 저 시점에서 아웃이다. 베니고어가 시험을 위해 준비한 마기의 반발력을 이기지 못하고 튕겨 나가는 놈들이 대다수.
하지만 알프스는 그것마저 버텨낸다. 힘들기는 하지만 분명히 한 걸음, 한 걸음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왕! 왕!
멈추려고 하는 순간 어디선가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 당연하지만 개 짖는 소리 좀 안 나게 하라고 외치는 사람은 없다.
모두가 한마음 한뜻이 되어 응원을 보내고 있다. 마침내 그녀가 성검에 손을 뻗었을 때, 조용한 침묵이 장내에 감돌기 시작했다.
‘이거 진짜 되겠는데… 진짜 될 것 같은데!’
곧바로 튕겨 나가지 않는다. 부들부들 떨면서도 틀림없이 버텨내고 있다.
팔과 손이 회색으로 변하고 있는 상황, 그 반발력을 견디고 성검과 대화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라고 여겨졌다.
‘가자! 가즈아!!’
하지만 기대가 너무 컸던 것일까.
-우웨에에에엑!
하는 소리와 함께 헛구역질하며 괴로워하는 알프스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마치 이 세상 모든 더러운 것들을 한꺼번에 경험한 것과 같은 얼굴.
그녀 역시 성검의 시련을 이겨내지 못한 것이다.
‘아….’
응원을 보내고 있었던 한소라와 정하얀이 동시에 조용해졌다.
“…….”
“…….”
‘시바.’
“천사나 만들러 갑시다.”
“네.”
“희영 씨한테 저거 영입 준비해 달라고 전해주시고요.”
“아… 네, 부길드마스터.”
“하얀이도 할 일 해야지.”
“네, 오, 오빠.”
아쉬움이 없다면 당연히 거짓말이리라.
하지만 아직 괜찮다. 그녀는 고작 랭크 14위에 불과했으니까. 이쪽에게는 아직 13위의 베스트 픽이 남아 있다.
‘조금만 더 참을성 있게 기다리면 돼. 어차피 금방 끝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 안 했잖아, 그렇지?’
이후에 연달아 13위와 12위, 믿고 있었던 5위와 8위까지. 모두가 광탈했을 때에도 그다지 초조하지는 않았다.
아직 도전할 도전자들이 많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초조해하면 지는 거다.
‘시바… 될 거야. 성검코인… 존버하다 보면 무조건 떡상할 거야. 무조건 떡상할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