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1
회귀자 사용설명서 601화
극복하는 방법(2)
“그게 무슨 뜻이요? 혹시 형님 말하는 거요?”
타이밍 좋게 날아 들어온 덩치 큰 돼지의 어시스트. 본인은 전부 다 알고 있으니 어서 썰을 풀어보라는 듯한 말투였다.
“나는 건강하다니까. 이제는 별로 아무렇지도 않아.”
녀석의 말에 괜스레 조혜진의 반응을 살피게 된다.
“거, 아무렇지도 않다는 건 형님 생각 아니요. 이번에도 4일 동안 기절해 있었으니까, 말 다 한 거지 뭐… 분명히 후유증이 남아 있을 거라니까. 말로는 아니라고 해도 형님 몸은 솔직한 거 아니요. 계속해서 기절해 있던 게 바로 그 증거가 아니면 뭐가 증거겠소. 그동안 말할 기회가 없어서 말을 못 했는데… 형님은 조금 더 자기 건강에 신경 쓸 필요가 있다니까.”
“기절이라면 예전부터도 했었고… 계속 말하지만, 그 힘과는 별로 관련이 없어. 오히려 최근에는 조금 더 건강해진 것 같은 느낌도 들고… 아무래도 체력적으로 조금 지치고 힘든 느낌이 있어서 그렇지. 다른 종류의 부작용 같은 신호를 느낀 지는 제법 오래됐는데….”
“그러니까 형님 머리는 그렇게 느낄지 몰라도 몸은 그렇지 않다는 거요. 원래 사람 몸이라는 게 그럽디다. 옛날에 우리 옆집에 살던 어떤 아재 한 명도 그렇게 건강했었는데 갑자기 무슨 병에 걸렸다고 하더니 3개월 만에 요단강 건넜다는 거 아니요.”
“…….”
“지금 내 말 듣고 있는 다른 사람들한테도 모두 들으라고 하는 소리요. 미리미리 건강에 신경들 좀 쓰는 게 좋을 거요. 벽에 똥칠 할 때까지 살아야 하지 않나. 안 그래도 허약한 우리 형님은 더더욱 걱정이고… 말이 나와서 하는 소린데… 정말로 괜찮기는 괜찮은 거요?”
“엘레나 님이랑 희영 씨가 몸에 다른 이상이 없다고 했는데 왜 자꾸….”
“거,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서 하는 소리지 뭐. 다른 뜻이 있나. 이렇게 과민반응하는 것도 이상한데… 정말로 뭐 숨기는 게 있는 건 아니요?”
‘아니, 그런 거 없다고 이 새끼야.’
별다른 증거도 없는 억지 주장으로 밀어붙이고 있는 꼴은 가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반박할 수 없다고 느껴지는 것은 기분 탓일까.
슬쩍 주변을 둘러보자 모두 박덕구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정하얀은 안 좋은 생각을 하는 건지 이미 눈물을 일발 장전하고 있는 중.
카스가노 유노도 혹시나 하는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고 한소라는 입술을 꽉 깨물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내 몸이 잘못됐을 때의 여파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게 틀림없으리라.
만약 뭔가 이상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가장 피해를 보는 건 다름 아닌 그녀일 테니…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
그 와중에 조혜진의 흔들리는 동공이 시야에 들어왔다.
‘쟤, 고민하고 있네.’
처음부터 말을 꺼낼지 고민하고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한순간의 유혹에 넘어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박덕구로 인해 형성된 분위기에 탑승하려는 모습에는 저절로 식은땀이 나올 지경이다.
사실 카스가노 유노나 박덕구, 혹은 한소라가 아는 것은 문제가 없지만 정하얀이 이 말을 들었을 때 보여줄 반응이 무섭다.
병아리 흑마법사는 벌써 두 손을 모으며 기도를 드리고 있었고, 정하얀은 이해할 수 없는 악력으로 내 팔을 쥐어뜯을 것처럼 부여잡고 있다.
‘혜진아… 그러지 마.’
그 옛날 내게 운명을 맡겼던 이토 소우타와 진청의 심정이 이러했을까.
슬픔을 가득 담은 눈으로 조혜진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말하지 말라는 듯이, 파란 길드원들에게 폐를 끼치고 않다는 듯이, 나 혼자 견뎌 낼 수 있다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가 내 시선을 피하는 게 눈에 띄었다.
설마 이대로 짧은 단꿈이 끝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을 때, 조혜진의 입술이 천천히 열려오기 시작했다.
“…….”
“…….”
“아니요. 그런 뜻으로 말씀드린 건 아닙니다.”
“…….”
‘그래, 혜진아. 나는 너를 믿었다. 믿음 하면 조혜진이고 조혜진 하면 믿음이지. 우리 믿음으로 가자, 진짜.’
“물론 부길드마스터의 건강이 걱정되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급한 불은 껐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엘레나 님에게 말씀을 들은 것처럼 차도가 좋아지고 계시고 있고 또 계속해서 좋아지실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저는 27군단 사태 이후에 생긴 일로 후유증을 겪고 있는 다른 이들을 말씀드린 겁니다.”
“후유증을 아직도 겪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모양이구만….”
“신전 측에서 지원하고는 있지만 인력이 턱없이 부족하니까. 정신계통을 담당하는 사제들은 사제 중에서도 희귀한 편이고….”
“아, 그런 거요?”
“적게는 오백 명, 많게는 천 명 정도가 사제 하나가 감당해야 하는 환자의 숫자라면 이해가 돼? 일반적인 치료처럼 신성력 한 번 외워주고 끝이 아니야. 나 같은 경우는 그나마 엘레나 님 때문에 빠르게 안정을 되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맞지. 하지만 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좋은 환경에 있는 건 아니니까.”
“…….”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부터, 악마의 기운에 노출된 이들이나 저주에 걸린 이들까지… 이제 겨우 1년이 지났을 뿐이라는 걸 잊지 마.”
“겉으로는 말끔히 복구된 것처럼 보여도… 아직 상처가 아문 건 아니었구만. 무녀님 실리아도 비슷한 상황이요?”
“실리아는 그나마 다른 지역보다는 상황이 나을 겁니다.”
“…….”
박덕구에게 해준 말은 대충 지어낸 말은 아니다.
실제로 최근에는 이런 문제들이 더욱더 커다랗게 대두되고 있었다.
물론 마이너스 감정을 먹고 사는 군단이야 소리를 지를 만하다.
애초에 그 악마 녀석들이 노리고 있었던 것이 바로 대륙에 깊이 있는 상처를 남기는 것이 아니었던가.
벨리알의 ‘벨’ 자만 나와도 자다가도 벌떡 몸을 일으키는 이들이 즐비할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았다.
27군단의 대륙 내 인지도는 다른 모든 군단의 인지도를 합쳐도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탄탄해졌다.
그만큼 군단 쓰레기 녀석들이 인류의 영혼 깊숙한 곳에 대미지를 건넨 상황.
정신 계통의 사제를 데려와도 확실하게 치료할 수 있다고 말할 수가 없을 정도였으니 다른 표현이 필요할 리 만무하지 않은가.
결국에는 세월이 해결해 주는 걸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부길드마스터의 말이 맞습니다. 어쩌면 이 장소에 있는 것들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치료할 수 있는 수단을 만들어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인 거요?”
가능성이 있다마다. 심지어 너무 원하고 있었던 전개였다. 애초 이렇게 조혜진이 먼저 다리를 놔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글쎄… 솔직히 확신할 수는 없지만…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아직 이곳도 전부 다 둘러보지 못한 상황이니 뭐라고 속단을 내리기는 어렵지. 정신적인 부분 같은 경우에는 특히나 너 다루기 힘들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마기에 노출된 피해자들은 치료할 방법이 있을지도 몰라.”
“뭐긴 몰라도 이득이라고 볼 수 있다는 거구만.”
“아마도.”
살짝 주변을 바라보자 한소라가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보였다.
운이 좋으면 여기로 전출 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정하얀도 이곳에 함께 지내게 되지 않을까.
‘나도 여기서 지낼 테니까.’
“음… 뭐 좋은 일이라니 다행이기는 한데… 그나저나 형님은 안 드시는 거요?”
“다 먹었어.”
“무슨 개미 똥구멍만큼 먹어놓고서 다 먹었다고 그러는 거요. 건강에 안 좋으니까 빨리 좀 드쇼.”
“아니, 잘 안 들어가서 하는 소리야.”
“그게 다 건강 버리는 거요.”
“어서 드시죠.”
“혜진이 누님도 빨리 먹으라고 하지 않소.”
“어서 드세요.”
“아니, 진짜.”
“어서 전부 드세요.”
“아… 네.”
대충 넘기려고 했건만 이쪽을 노려보며 또박또박 말하는 목소리가 신경 쓰였다.
정말로 아무것도 들어갈 것 같지가 않았지만, 그래도 몸은 꾸역꾸역 음식물을 받아들인다.
그렇게 짧은 식사가 마무리됐고 다시 한번 정체되어 있던 작업에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조혜진이 만들어준 그럴듯한 목표와 변명거리가 있다 보니 굳이 뭘 숨길 필요도 없이 차근차근 악마 계약자들이 남긴 흔적을 조사할 수 있었고, 애초 예상했던 것보다 더 커다란 것들을 성과로 얻을 수 있었다.
그 와중에 조혜진이 이쪽을 따로 불러 충고 아닌 충고를 하기는 했지만, 이미 조혜진에 대한 신뢰로 꽉 차 있는 머릿속은 고개를 끄덕이기에 여념이 없었다.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겠다는 걸 다시 한번 확인한 대신 그녀가 제시한 조건은 기간에 대한 것.
만약 일정 기간이 지나도 차도가 없거나, 증상이 심화될 경우에는 적극적으로 개입하겠다는 뜻을 내비친 것이다.
정말로 이 장소가 돌파구가 될지도 모른다는 조혜진의 희망 사항에는 웃음이 나왔지만, 나로서는 전혀 나쁠 게 없는 이야기였다.
‘일단 연구에 전념할 수 있으니까.’
나 자신을 치료한다는 걸 핑계로 이곳에 눌러앉을 수 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추가로 시간이 남아 호문클루스나 키메라를 연구하고 좌소라 우하얀과 함께 흑마법에 대한 심도 있는 탐구를 하는 시간을 가지게 될 것이다.
즉시 전력으로 써먹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연구의 차도를 지켜봐야 확인할 수 있겠지만, 인프라를 돌리는 인력 자체의 퀄리티가 다르다.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대륙 최고의 흑마법 권위자 한소라와 마법 그 자체의 화신이라고 불리는 정하얀이 아닌가.
내가 실패하더라도 얘네들이 뭔가 방법을 찾아줄 거라는 건 너무나도 당연했다.
‘아이고, 좋아요. 우리 혜진이 칭찬해, 진짜.’
계속해서 글썽거리던 눈이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찢어지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그녀의 아픔을 견뎌낼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잘해줄게, 혜진아. 아바타 한 번 더 해준다. 이번에는 진짜로 성공하자, 진짜.’
정확히 하루하고도 반나절을 이곳에서 지낸 시점, 대략적인 조사를 마치고 복귀할 준비를 하고 있었을 때 조혜진이 입을 열어왔다.
“그럼 지금부터 계속 여기에 계실 겁니까?”
“아니요. 사실 이 건 말고도 할 일이 많아서요. 일단 이곳은 소라 씨한테 맡기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으음….”
“잘해줄 겁니다. 혜진 씨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유능하거든요. 특히나 이번 분야에서는요. 전 주인들이 사용하던 연구 인프라가 복구되는 즉시 저도 합류할 거고…. 물론 중간중간에 다른 일도 하러 나가기도 할 테니… 다리 역할을 해주시면 됩니다. 주변 사람들이 안심할 수 있게 최대한 조치해 주세요.”
‘특히 김현성.’
“그건 문제없을 겁니다… 그러니 부길드마스터야말로 제가 한 말 똑똑히 기억하세요.”
‘암요, 잊을 리가 없지요.’
연구가 어느 정도 성과를 낸 시점에서 차도가 좋아지고 있다는 걸 표현하면 그만이다.
전부 다 나았다는 증거를 보여주는 것 정도야 일도 아니고….
“그럼 지금부터는….”
“아, 일단 저도 신전에 먼저 들러야 할 것 같습니다.”
“신전이요?”
“네, 베니고어 님께서 저를 강하게 부르시고 계신다는 느낌이 들어서 말입니다.”
“좋은 소식이면 좋겠군요. 부디… 좋은 소식이면 좋겠습니다.”
혹시나 이쪽에 이로운 이야기가 나올까 기대하고 있는 것 같은 뉘앙스였지만, 아쉽게도 더 중요한 이야기일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인류를 구하기 위해서 결단을 내리신 게 분명하지 않을까.
결과는 예상했던 그대로.
정확히 다음 날 아침, 하늘에서 내려온 커다란 빛과 함께 마검, 아니, 성검이 신성한 대지에 꽂혀 그 주인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마치 전설 속에 엑스칼리버 같은 고고한 자태를 내뿜으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