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0
회귀자 사용설명서 600화
극복하는 방법(1)
분위기가 어두워도 너무 어두운 상황, 누가 보면 내가 죽었다고 생각할 정도의 반응이었다.
그녀답지 않게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이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얘가 너무 오버하는 건 아닌가 하는 못된 생각을 해봤지만… 생각해 보니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게 당연했다.
‘그래, 얘 입장에서는 얼마나 놀랐겠어.’
기억을 잃는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들은 지 불과 몇 분도 채 지나지 않은 상황이지 않았던가.
안 그래도 몸도 허약한 양반이 멍 때리는 걸 지속적으로 반복하다 기절해 버렸으니 얼마나 당황했을까.
기절해 있었던 상황을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뭐라고 말로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패닉 상태에 빠졌어도 이상하지 않다.
모르긴 몰라도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으리라.
그녀의 몰골을 보자 괜스레 고개가 수그러든다.
정신적으로 커다란 충격을 받은 저쪽과는 다르게 이쪽은 아직도 루시퍼에게 대접받았던 호화로운 만찬의 기억이 사라지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더욱더 그랬다.
‘진짜 맛있었는데….’
가히 거울 연어급이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는 식사였다.
신화 등급의 검을 받은 것과는 별개로, 저도 모르게 미안한 마음이 샘솟아 올라왔다.
“괜찮습니다.”
“자꾸만 괜찮다고만 말씀하시는데 제가 어떻게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제발… 몸 좀 챙기세요.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고 힘들면 힘들다고 내색하셔도 됩니다. 도와줄 수 있는 사람도 많은데 어째서… 이럴 게 아니라 솔직하게 말씀드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길드마스터에게도….”
“네?”
“모두 말씀드리고 다 같이 방법을 찾아야 됩니다. 그것밖에 방법이 없을 것 같아요. 정말로… 정말로 전부 다 잊어버리면 어떻게… 합니까. 정말로… 다 잊어버리면 어떻게 해요. 이러다가… 흐윽….”
“이러니까 제가 말씀을 안 드린다는 겁니다. 지금 당장 혜진 씨만 해도 이러는데, 다른 사람들은 오죽하겠어요. 말씀드렸지만 일에는 순서가 있게 마련이에요. 저는 제 기억보다 제 목숨을 우선순위로 놨으니 괜히 알릴 생각하지 마세요. 다들 해야 될 일이 있고 준비해야 될 일이 있습니다. 이상한 일에 휘말려 거기에 시간 허비할 시간 없어요.”
“이게 어떻게 이상한 일입니까. 시간을 허비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이건 어디까지나….”
“그게 시간을 허비하는 게 아니면 뭐가 시간을 허비하는 걸 것 같아요? 현시점에서 치료방법을 알아내겠다고 발버둥 치는 건 손으로 연기를 잡는다는 말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래도….”
“그러니까 아픈 게 아니라고 말했잖아요. 정말로 괴로웠다면 제가 먼저 나서서 아프다고 생난리를 쳤을 겁니다. 내 성격 아는 분이 왜 이러실까. 그러니 괜히 상황 심각하게 만드시지 마시고… 일단 다른 파티원들이랑 합류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너무 자리를 오래 비우는 것도 좋지 않으니….”
“…….”
“평소처럼 행동해 주세요. 얼굴도 좀 닦으시고 진정 좀 하세요. 이러다가 뭔 일 터진 거 아닌지 의심받겠습니다.”
“…….”
“빨리 나가요. 빨리.”
“…….”
“…….”
“멍청한 새끼….”
작게 중얼거리는 모습에는 오만 걱정이 묻어나왔다.
순식간에 욕을 얻었지만, 기분이 안 좋을 리가 없다.
일단 무한의 가방에 보관되어 있는 신화 등급의 마검만으로도 춤을 추고 싶을 정도로 기분이 좋다.
저도 모르게 발걸음이 가벼워지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보다 더 좋은 걸 얻어왔는데….
조혜진이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는 것 역시 충분히 엄지를 치켜세울 만한 소식이다.
얘가 융통성이 없어서 문제이기는 하지만 이번에는 그게 호재로 작용한 모양이다.
지금은 살짝 불안한 모습을 보여주고는 있었지만 결국에는 내 뜻에 따르지 않을까.
남의 숨기고 싶은 비밀을 떠벌리고 다닐 성격은 아니었으니까.
장담하건대 꼭 비밀로 해달라는 말을 지금도 염두에 두고 있을 것이다.
‘아이고… 사려까지 깊네. 우리 혜진이가….’
약간의 걱정거리가 남아 있기는 했지만, 현시점에서 중요해진 것은 루시퍼 님이 내리신 성검의 주인을 결정하는 일.
정 쓸 사람이 없다면 내가 써도 상관없을 것 같기는 하지만, 이런 종류의 검은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사용하는 게 낫다.
애초 선택받은 용사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시작한 프로젝트가 아니었던가.
도착지만 같다면 어디로 가든, 뭘 타고 가든 별 상관없다.
간단히 말해 베니고어 측에서 용사를 선택하든, 내가 용사를 선택하든 결과에는 문제가 없으니 그다지 켕길 게 없다는 거다.
오히려 문제는 과연 선택받은 용사를 찾을 수 있느냐에 대한 것 그리고 그 선택받은 용사가 내가 가지고 있는 성검에 적합할지에 대한 것, 마지막으로 이 성검의 성스러운 힘을 감당할 수 있느냐에 대한 것이다.
일반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들어온 성검이니만큼 부작용을 떠안을 수밖에 없다.
이걸 파란 길드의 다른 이들에게 떠넘기지 못하는 이유 역시 그런 연유고….
그 이전에 파란 길드원들 같은 경우에는 이 성검에게 선택받을 수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기껏해야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내가 끝이 아닐까.
“저 부길드마스터.”
“네?”
“아니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름대로 진지한 고민을 하면서 발걸음을 옮기는 와중에도 조혜진이 입을 여는 모습, 아마 다시 한번 멍 때리는 모습을 보고 걱정스러운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았다.
“다시 한번 말하는 거지만, 뭐 알려야 된다는 말은 듣지 않겠습니다.”
“그것 때문에 말을 건 게 아닙니다. 그냥… 다른 파티원들한테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또 길드마스터한테는 어떻게 말씀을 드려야 할지….”
“평소처럼 대하세요. 조금 위험하다고 생각할 때만 한 번쯤 나서서 도와주시고 그전에는 그냥 평범하게 행동하시면 됩니다. 방금 같은 일이 또 생기면 같이 수습하는 걸 도와주셔도 되고요. 갑자기 또 정신을 잃을 수도 있으니까.”
“네.”
“현성 씨한테는 최근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신 것 같다. 정도로만 말씀해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믿지 않으실 겁니다.”
“아니요, 믿을 걸요. 장담컨대 제가 직접 말하는 것보다 혜진 씨가 직접 말하는 게 도움이 될 겁니다.”
“네?”
“현성 씨가 혜진 씨를 얼마나 신뢰하고 있는지 알면 아마 놀랄 거예요. 혜진 씨가 생각하시는 것보다 훨씬 더 믿고 있거든요. 그냥 그런 것 같다고 보고만 해도 크게 뭐라고 말하지는 않을 겁니다.”
‘내 말이 맞다, 혜진아. 왜 네가 김현성 1픽이겠어.’
“그게 정말입니까.”
“네.”
‘그러니까 괜히 나중에라도 말해야겠다 싶어서 입 열면 안 돼.’
그 와중에 기쁜지 슬그머니 미소 짓는 모습이 눈에 띈다.
“그러니까 그 신뢰, 저버리기 싫으면 잘 숨기고 계세요. 사실 별말 안 할 것 같기는 한데… 그래도 조심하는 게 맞잖아요. 현성 씨한테는 사태가 조금 더 심각해진다 싶으면 제가 직접 말씀드릴 테니까요. 운이 좋으면 그 이전에 상태가 호전될 수도 있고요. 베니고어 님은 힘들다고 말씀하시기는 했지만, 혹시 압니까. 기적이 일어날지. 대륙이 원래 그렇지 않습니까.”
“부길드마스터답지 않게 생각하시는 게 희망차시네요.”
“그런 뜻으로 말씀드린 게 아니잖아요. 딱 말 그대로의 이야기예요. 어떤 방식으로는 분명히 방법이 생길 거라는 겁니다. 이런 장소에서 돌파구를 찾아낼 수도 있고… 뭐… 쓸데없는 이야기는 그만하고 아무튼 간에 평소대로 대해주시는 겁니다.”
“돌파구라… 돌파구….”
다시 한번 발걸음을 옮기기가 무섭게 박덕구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거, 뭐 하다가 그렇게 늦은 거요?”
“이것 것 보고 챙길 게 있어서. 많이 늦었나 보네. 조금 어때?”
“나야 뭐 알 리가 있나. 그런 건 무녀님이랑 누님이랑 소라 후배한테 물어보쇼. 그나저나 혜진이 누님 안색이 안 좋은 것 같은데….”
“…….”
“…….”
“무슨 일 있었소?”
‘이 새끼 눈치 빠른 거 봐.’
안심하고는 있지만 불안하기는 하다. 혹시나 ‘얘, 기억상실일지도 모른대요! 치매 왔다니까?’라고 중얼거리지는 않을까 걱정한 찰나 그녀의 입이 열리기 시작했다.
“설마요. 그런 게 아닙니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생각보다 생체실험실의 데이터를 정리하는 게 오래 걸려서 도움을 드렸을 뿐입니다. 네, 그렇죠? 부길드마스터? 맞다고 하지 않습니까. 도움을 드렸을 뿐입니다. 덕구 씨가 생각하시는 그런 일은 없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으음….”
“그러지 말고 어서 들어가시죠.”
다행히 예상했던 대로의 반응. 문제는 형편없는 연기력에 있었다. 열심히 해주는 것 같은 사실 자체는 고마웠지만, 누가 봐도 평소 같은 모습은 아니다.
무척 당황한 듯한 모습이었고 억지로 되지도 않는 걸 수습하려고 하는 것 같은 느낌이 강했다.
괜스레 먼 곳을 바라보게 된다. 아니, 이 정도면 뭔 일이 있다고 광고하는 거나 다름이 없지 않은가.
‘아… 얘 이거 위험한데.’
생각했던 것보다 더 형편없는 연기에 저절로 한숨이 나오는 상황, 절대로 몰래카메라 같은 걸 하지 못하는 타입일 거라고 느끼기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구릴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차라리 그냥 입 다물고 있는 게 더 나을 거라고 생각할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박덕구 역시 독촉하는 듯한 조혜진의 말에 상당히 당황하는 것 같은 눈치, 괜스레 이쪽을 의심스러워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아니, 그냥 한 번 던졌는데 뭐 그렇게까지… 정말로 아무 일도 없는 거요?”
“여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겠어?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
“뭐 형님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만… 혜진이 누님 상태가 조금 이상한 것 같은데… 기분 탓인지 뭔지 모르겠네.”
“최근에 스트레스받는 일이 많았던 것 같더라고… 기분 탓 맞아. 그리고 계속 거기 있을 거야?”
“같이 가쇼. 지금 갈라니까. 안 그래도 배고파서 죽는 줄 알았다니까. 조금만 더 늦게 왔으면 밥 언제 먹냐고 물어보러 갔을 거요.”
“먼저 먹지 그랬어?”
“당연히 같이 먹어야 하는 거 아니요? 아암… 그렇고말고… 한 식구인데 당연히 같이 먹어야지. 형님도 배고플 때 아니요?”
“글쎄… 나는 아까….”
무의식적으로 입을 열다 저도 모르게 입을 닫은 것은 당연지사. 한 발자국 앞서갔던 조혜진이 등을 돌려 입을 열어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아까 배고프다고 하셔서 간단히 요기할 수 있는 간식을 드렸습니다.”
“아, 그런 거요?”
“네. 그래도 제대로 된 영양분은 섭취하는 게 맞으니 식사준비를 하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아암, 그래야지. 원래 열심히 일하려면 열심히 먹어야 되는 거 아니요. 형님도 너무 불량식품 같은 것 좀 먹지 말고 골고루 팍팍 좀 먹어야 건강해진다니까.”
아까의 트롤 짓을 무마시킨 뜻밖의 1도움. 사실 그냥 웃으며 넘길 수 있는 상황이기는 했지만 저런 도움이 달갑지 않을 리가 없다.
슬쩍 조혜진의 얼굴을 바라보자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여러 가지로 도와주겠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렇게 실제로 케어해 주는 걸 보니 입꼬리가 절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최소한 먼저 나서서 일을 크게 만들지는 않겠네.’
뭔가 아슬아슬하게 외줄 타기를 하는 것 같은 느낌이 없지 않아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훌륭하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배가 많이 고프기는 했는지 박덕구가 허겁지겁 더 안쪽으로 뛰어들어가기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현장 조사에 몰두하고 있는 정하얀, 한소라, 카스가노 유노 역시 천천히 바깥쪽으로 나오고 있는 모습.
역시나 정하얀은 내 얼굴을 보자마자 환하게 미소 지으며 달라붙어 왔고 그런 우리의 모습을 보고 한소라가 희미하게 미소 지어왔다.
굳이 식사준비라는 걸 할 필요도 없이 미리 가져온 전투 식량을 대충 늘어놓으니 어느새 파티원들은 각자 자리를 잡고 숟가락을 든다.
그 와중에도 조혜진은 뭔가 조심스러운 표정이다. 머릿속으로는 오만가지 생각을 전부 다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단순히 기억을 잃는 증상이 전부가 아니라고 판단한 게 분명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정신적 착란을 일으키고 있을 가능성에 대해 떠올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단순히 실수로 치부할 수 있는 말이기는 했지만, 듣고 본 게 있으니 간단하게 넘길 수 없는 모양인 것 같았다.
‘그럴 만도 하지.’
1도움이 고맙기는 했지만 일이 더 커지기 전에 이 건은 해명하는 게 좋지 않을까.
내가 집어넣은 기믹은 기억을 잃는 것뿐이지 정신착란을 일으키는 종류는 아니다.
“가, 가서 본 일은 어떠셨어요? 오빠?”
“아, 조금 있다가 다시 한번 가보려고. 자료가 워낙 방대해서 순식간에 정리가 되지는 않네. 여기는 조금 어땠어? 성과라고 볼 수 있는 게 있었나?”
“아, 아, 아니요. 막… 엄청 신기하고 이런 건 별로 없었던 것 같았어요. 조금 흥미가 가는 건 있었지만… 거의 다 연구가 중단된 것뿐이었고….”
“소라 씨도 그래요?”
“네… 육체 강화에 대한 연구 자료가 있기는 했지만, 치명적인 부작용을 안고 있던 것뿐이라… 가지고 있는 부작용에 비해 능력치에 상승 폭이 크지도 않았고요. 악마계약자들이 사용한 수단은 아닌 것 같아서… 그래도 소환 자체에 대한 자료들은 많이 입수할 수 있었어요.”
“으음… 그렇군요.”
“카스가노 님도….”
“네, 송구하지만 저도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던 게 없었습니다.”
“그래도 이런 종류의 자료들이 많, 많, 많은 것 같아요. 깊이 있었던 연구가 그리 많지는 않지만, 연구의 범위 자체는 무척 넓으니까요. 물론 쓸모없는 게 대부분이지만… 위험해 보이기도 하고요….”
‘그거야 네 기준이지. 네가 보기에만 그런 거야.’
“그래도 조사해 볼 만하지 않을까 싶은데… 본래 바이러스를 알아야 백신을 개발할 수 있는 거니까. 잠깐 둘러보니까 흑마법에만 한정해서 연구한 것 같지도 않고…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것들도 분명히 있지 않을까.”
조혜진이 다소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어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이를테면 후유증이나 정신적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이들 역시 치료할 수 있다는 겁니까?”
불안해질 수밖에 없었던 대사였다.
‘혜진아, 그러지 마… 통수 치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