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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599화 (590/1,590)

# 599

회귀자 사용설명서 599화

루시퍼(2)

[대륙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일에는 상당한 힘이 소모됩니다. 빛 쪽에 몸을 담그고 있는 자들은 물론이거니와 저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부담을 드리기 위한 말은 아니지만, 언젠가 이번 일에 대한 보답이 있을 거라 믿고 있겠습니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루시퍼 님.’

[몇 가지 물건이 있으니 살펴보시지요.]

고개를 끄덕이기가 무섭게 콧수염 집사들이 몇 가지 물건을 가져오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아마도 악마 측에서 마검이라고 부르는 물건임이 분명하리라.

본래부터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준비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마음의 눈으로 보지 않아도 저 물건들이 신화급 물건들이라는 건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몇 가지 문제가 있다면….

‘너무 마검스럽잖아.’

징그러운 디자인이 문제였다.

살아 있는 것처럼 손잡이에 달린 수백 개의 눈알을 굴리며 여기저기를 바라보는 녀석도 있었고, 검신이 짐승에 입처럼 디자인된 녀석도 있었다.

이쪽을 본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짐승의 입에서 게걸스럽게 튀어나온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침을 뚝뚝 흘리고 있는 모습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게 된다.

왜 자꾸 저 거대한 혀가 나를 향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저 아이가 이기영 군단장이 마음에 든 모양이군요.]

별로 마음에 들고 싶지 않다.

[위쪽에 있는 무구 중에서는 조금 특별한 취향을 가지고 있는 이들을 위한 무구도 있습니다. 저 아이 같은 경우에는 6개의 혀를 가지고 있는데. 아마 군단장님과 취향만 맞는다면 재미있는 놀이 상대가 되어줄 거라고 생각합니다. 어떠신지요. 개인적으로는 이기영 님이 저 아이를 가지고 노는 장면을 보고 싶은데.]

‘하하… 괜찮습니다만… 일신의 무력이 미천해 제가 직접 마검을 다루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검의 형태를 하고는 있지만, 마력을 증폭시켜 주는 기능을 가지고 있는 마검도 존재합니다. 사용자의 혈액을 매개체로 한다는 것이 사소한 문제이기는 하지만….]

응, 아니야. 그것도 안 돼.

[영혼을 천천히 먹힌다는 단점이 존재하지만, 사용자를 최상위의 검사로 만들어주는 마검 역시 존재합니다.]

보석 안에 있는 유령 할아버지가 곡성을 내지르고 있는 저거? 절대로 안 집을 거야. 집어 드는 순간 저주받을 것 같아.

보기만 해도 지옥으로 떨어질 것만 같이 생긴 검들은 모조리 아웃이다.

저런 종류의 검을 들고 성검이라 선동하는 것 자체가 무리수가 아닌가. 적어도 겉모습은 신성해 보여야 하는 게 맞다.

성검에게 선택받은 용사를 대체할 수 있는 건 성검에게 선택받은 용사뿐이다.

누가 봐도 저주받은 것처럼 보이는 검을 가지고 성검이라 우길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루시퍼가 가지고 온 마검들은 전부 논외. 정말 이런 것밖에 없는지 탓하고 싶어질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물론 정 없다면 뭐라도 써야 하는 게 맞지만, 어떻게 생각해도 빛의 군대의 아이덴티티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저런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고….

[마음에 드는 게 없는 모양이군요. 제법 괜찮은 것들로 선별했다고 생각했는데. 당신을 간절히 원하는 저 아이라도 가지고 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그건 조오금….

‘지고의 대악마이시며, 이 세상 모든 아름다움을 관장하고 계시는 루시퍼 님. 이런 말씀을 드리기 정말로 죄송스럽습니다만, 조금 더 투박한 모양의 검은 없는지… 예상하고 계시겠지만, 대륙에서의 제 위치상….’

[그럴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가지고 있는 무구는 대부분 이런 면이 있는 터라….]

‘…….’

제길

아쉬운 대로 저거 중에 하나라도 가져가야 하나?

보석에 갇혀서 곡성을 내지르는 할배검이 그나마 괜찮을 것 같은데….

수 세기 전에 세상을 구한 용사가 후대를 위해 스스로를 봉인하고 있다는 설정으로 밀어붙이면 되잖아.

-저… 저주할 테다… 빌어먹을… 이이이인가아아안… 놈들… 죽이고 또… 주욱이고오오… 죽여주마아아아… 나르으으을… 가아아암히이….

알았어요. 안 가져갈게요. 할아버지.

다시 보니까 저 눈깔검도 괜찮을 것 같은데, 조금 징그럽기는 하지만….

-끼릭! 끼릭! 끼릭! 끼리리리리리익!

저것도 패스.

-울어라, 지옥참마도.

저건 뭔지도 잘 모르겠지만, 저 녀석 역시 패스다.

도대체 정상적인 검이 있기는 한 건지 궁금할 지경. 그렇다고 해서 혓바닥을 가져갈 수는 없다.

기능은 확실할 것 같지만 매일 매일 마력충전 당할 것 같은 느낌이고… 무엇보다 6개의 혓바닥을 날름거리는 겉모습 자체가 그로테스크하다.

저건 베니고어의 혓바닥이라고 밀어붙일 수도 없다.

그렇게 머리를 쥐어뜯으며 한참이나 괴로운 고민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그렇다면 이건 어떻습니까?]

살짝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던 루시퍼가 그나마 정상처럼 보이는 검을 내밀었던 것.

아무래도 이 전까지의 검은 그저 내 반응을 보고 즐기기 위한 연막이었나 보다.

머릿속으로는 너무 악취미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오기는 했지만, 금방 고개를 흔들고 녀석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타락한 천사의 666번째 성마검-신화 등급]

저도 모르게 커다랗게 입을 벌리게 되는 영롱한 자태. 회색빛의 검신이 인상적이다.

아주 고전적인 형태의 신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는 장식은 왠지 모를 신성함까지 느끼게 한다.

물론 풍겨오는 기운 자체는 인상을 찌푸릴 만했지만, 마음의 눈으로 보지 않으면 눈치챌 수 없을 정도로 억눌려져 있다.

어떻게 생각해도 조건에 딱 부합하게 만들어진 녀석이었다. 루시퍼라서 건넬 수 있는 무구.

자꾸만 올라가려고 하는 입꼬리를 애써 내리는 것도 일처럼 느껴졌다.

물론 마검이니만큼 부작용이나 페널티가 존재하기야 하겠지만, 어차피 내가 쓸 검도 아니니 별로 상관없지 않은가.

기쁨을 감출 수 없는 내 반응을 봤는지 싱긋 웃어오는 루시퍼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정말로… 제가 이런 물건을 받아도 괜찮은 건지….’

[네, 이후에 돌아올 게 있다는 걸 믿고 있습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어떤 형태로든 이 무구에 상응하는 보답을 드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기대하겠습니다, 이기영 군단장. 마음 같아서는 조금 더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지만, 이만 헤어질 시간이로군요. 제가 너무 시간을 뺏은 것은 아닌지….]

‘아이고오! 당치도 않습니다요. 어떻게 제가 그런 불경한 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저에게도 유익하며 천금과도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이대로 헤어지기가 너무 아쉬울 정도로 말입니다. 만약 시간이 조금 더 남으신다면 함께 와인 한 잔 더 하시는 게 어떠실지….’

[저 역시 그대와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더 이상 주어진 시간이 없습니다. 주변의 눈도 신경 쓰이기 시작하는 타이밍이고… 저도 할 일이 없는 것이 아니니까요. 아무튼, 작별인사는 해야겠군요. 지루하고 무기력한 일상에 힘을 불어넣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루시퍼 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이 천한 것이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요.’

[마지막으로 이런 말씀을 드리기가 부끄럽지만,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사인을 좀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물론이고 말고요.’

둠기영이 지옥에서 핫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루시퍼 역시 이런 부탁을 해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난생처음 보는, 이제껏 본 적도 없는 악마어로 쓰인 서적들.

역병 어쩌고가 쓰여 있는 걸 보니 강연 내용이라도 적혀 있는 것이 아닐까.

수십 권이 넘는 서적들이 다 어디에서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아직도 콧수염을 달고 있는 집사들은 정체불명의 서적을 이쪽으로 옮겨오느라 정신이 없다.

슬슬 팔이 아파오는 시점.

하지만 이 정도라면 기쁜 마음으로 응해줄 수 있다.

겨우 이런 걸로 환심을 살 수 있다니 얼마나 남는 장사인지 모르겠다.

확실히 그때 강연이 온건파들의 가슴속에 제대로 틀어박힌 모양이다.

‘책이 제법 많군요. 평소에 독서를 즐기시는지요.’

[지옥에서 열린 행사… 아니, 전시회에서 나온 서적들입니다. 자세한 건….]

‘아, 제가 건방졌군요.’

말없이 싱긋 웃고 있는 모습.

급하다고 말했던 건 잊어버렸는지는 모르겠지만 꽤나 여유 있게 할 일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무의식 세계와 현세의 시간 축이 다르다는 건 알고 있지만, 이 정도면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은 느낌.

아무 생각 없이 기계적으로 팔을 움직이자 현세에서 조혜진이 어떻게 반응할까에 대한 것 역시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다.

아까와는 다르게 조금은 초조해지는 것 같은 느낌.

곧 끝날까 싶었지만, 도저히 끝이 안 보이는 서적의 행렬.

결국 몇 시간이 더 지난 이후에야 그녀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아닙니다. 저야말로 만나 뵙게 돼서 영광이었습니다요.’

[시간을 너무 많이 지체한 것 같아 걱정되는군요.]

‘하하하, 괜찮습니다.’

사실 괜찮지 않다.

현재 이 상태가 유지되고 있는 걸 보면 5현장을 빠져나간 것 같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정신을 잃은 상태가 오래 지속되고 있다는 건 반가운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받을 것도 받았고, 할 일도 다 마쳤겠다.

슬슬 보내줬으면 싶었지만, 계속되는 작별인사를 어떻게 끝내야 할지 모르겠다.

다행히 루시퍼 역시 슬슬 마무리를 지을 시간이 다가왔다고 생각하는 모양.

[즐거웠습니다, 이기영 군단장.]

그녀가 살짝 손을 흔드는 순간 심연으로 몸이 떨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며 시야가 뒤바뀌기 시작했다.

“제발… 제발….”

‘뭐야.’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장면은 조혜진의 얼굴.

‘왜 이렇게 가까워.’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는 걸 본인이 자각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계속해서 내 얼굴로 그녀의 눈물이 떨어져 내리는 중이다.

이 상태가 얼마나 지속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다행히 많은 시간이 지난 것 같지는 않았다.

길어봐야 30분도 안 되는 시간이 아닐까.

피곤함이 몰려와 한숨 때리고 싶은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오기는 했지만….

“흐으윽….”

계속되는 목소리에 인기척을 낼 수밖에 없었다.

“아….”

당연히 곧바로 목소리가 들려온다.

“괜, 괜찮… 괜찮으십니까? 괜찮으신 거 맞아요?”

“여기가….”

“기억나시는 겁니까? 저는 조… 조혜진이고… 이곳은 5현장입니다. 당, 당신은 파란 길드의 이기영이고… 저, 저와는 친구 사이였습니다.”

“그걸 물어본 게 아닙니다, 혜진 씨. 별거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

“전부 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렇게 일일이 설명해 주실 필요 없어요.”

“…….”

“치매 걸린 노인 취급하지 않으셔도 된다는 겁니다. 아직 그 정도는 아니니까. 전부 다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아까도 펑펑 울고 있더니 지금도 펑펑 울고 있네요.”

“누가… 흐윽… 누가 울었다고 그러시는 겁니까.”

“부탁…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10분만 더 늦게 일어났어도 길드로 데려갔을 겁니다. 아니…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데려가고 싶어요.”

“그래 봤자 달라지는 게 없을 거라는 거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뭐… 아무튼 감사합니다.”

“…….”

“정확히 얼마나 지났습니까?”

“15분 정도….”

“조금 오래 누워 있었군요.”

“정말로, 정말로 괜찮으신 겁니까. 정말로….”

“네, 가끔 있는 일이니까… 안심하셔도 됩니다. 몇 번이나 말씀드리는 거지만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돼요.”

“힘드시면… 힘들다고 말하셔도 됩니다.”

‘힘들긴… 혜진아, 하나도 안 힘들아. 우리 대박 났어. 떡상 각 날카롭게 섰다니까.’

마음 같아서는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너무 숙연한데, 이거.’

사태의 심각성을 직접 눈으로 목도한 조혜진의 얼굴이 괜스레 눈에 밟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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