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 사용설명서-595화 (586/1,590)

# 595

회귀자 사용설명서 595화

내 머릿속의 지우개(2)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만….”

“…….”

그냥 둘러대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뜬금없이 나타나서 언제부터 기억을 잃기 시작했냐는 말을 중얼거리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저도 모르게 표정관리를 하지 못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아주 잠깐이기는 했지만, 온갖 당황스러움이 뒤섞인 감정을 담아 조혜진을 바라보자, 한층 더 진지해지는 눈빛이 시야에 들어왔다.

‘뭐가 이렇게 진지해?’

혹시 내가 모르는 게임을 진행 중인 건가. 아니면 몰래카메라라도 찍고 있나. 하는 의구심이 생겨났다.

하지만 싸구려 농담에 정색하는 저 성격에 그런 종류의 장난에 발을 담글 리가 만무했다. 무엇보다 진심을 담은 표정이 굉장히 신경 쓰인다.

연기하거나 장난을 치는 것이 아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걱정이 담긴 표정이라는 걸 어떻게 눈치채지 못할 수가 있을까.

뭔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순식간.

황당함에 잠깐 말을 잇지 못하자, 자신의 생각이 맞았다는 걸 확신했는지 기세등등해진 것이 눈에 띄었다.

“숨기실 필요 없습니다, 부길드마스터.”

“아니….”

‘시바, 진짜로 모르겠는데.’

“정확히 언제부터 증상이 시작된 겁니까.”

“정말로 뭔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를 못하겠는데… 혜진 씨가 뭔가 오해하고 계신 것 같은데… 별일 아니니 그냥 넘어갑시다. 뭐, 몇 번 깜빡 한 거 가지고 기억을 잃느니, 정신을 잃느니 하는 게… 우습지 않습니까. 여기서 이러지 말고 파티원들이랑 합류해서 볼일이나 보세요. 갑자기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부길드마스터. 그 연구일지, 조금 전에도 부길드마스터가 읽고 계셨던 겁니다. 알고 계신 겁니까?”

‘아니, 알고 있는데… 그러니까 그게 뭔 소리냐고.’

“아니… 다시 한번 보려는 건데.”

손을 휙휙 저으며 나가라는 제스처를 취했지만, 조혜진은 묵묵부답.

오히려 진실을 이야기해 주기 전까지는 절대로 이곳을 나가지 않겠다는 듯한 태도를 고수하고 있었다.

‘시바… 도대체 뭐야. 아니, 이거 둠기화 때문에 그런 건 맞지?’

둠기화를 오래 진행하면 진행할수록 정신적 부담이 심해진다는 것 정도가 길드원들이 알고 있었던 내용이었다.

단기 기억 상실증이 있을 수 있다는 것도 예상하던 사안이었고….

애초에 처음 둠기화에 대해 컨셉을 잡을 때 그런 기믹을 넣어두지 않았던가.

무의식 세계의 일이나 둠기화되었을 당시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그런 기믹의 한 종류였다.

하지만 단언컨대 이후에 티를 낸 적은 없다.

여신의 축복을 받아 페널티를 최대한 줄일 수 있다는 컨셉을 잡고, 둠기화가 결국에는 득이 될 것이라는 걸 어필했다.

파티원들도 베니고어의 찬란한 빛에 커다란 의심은 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무엇보다 약속의 1년간 별다른 사고가 없었으니 안심한 것이 당연.

최근에 둠기화가 한 번 있기는 했지만, 이렇게 취조당하는 느낌으로 압박받을 정도의 일을 만든 기억은 없다.

물론 머리가 아프다는 듯 인상을 찡그리고 머리를 부여잡거나, 둘러대기 어려운 상황에 대해서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둘러대기는 했다.

솔직히 말하면 조금 많이 써먹기는 했지만, 갑자기 머릿속에 지우개를 가지고 다니는 놈이 되어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길드마스터에게 대충 전해 들었습니다.”

‘현성아, 너 왜 그래. 뭐야, 왜 이렇게 혼자 심각해. 아니, 도대체 무슨 망상을 하는 거야, 얘는.’

조혜진이 김현성에게 다녀온 직후 보였던 슬픈 표정이 이제야 이해가 간다.

슬쩍 조혜진을 바라보자 여전히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나를 바라보는 중이다.

김현성은 또 어쩌다가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된 건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나마 마음에 걸렸던 것은 가장 최근에 나눴던 대화.

‘기영 씨.’

‘네.’

‘괜찮으신 겁니까? 갑… 갑자기.’

‘아, 괜찮습니다. 잠깐 다른 생각을 좀 하느라…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디까지 이야기했었죠?’

‘따로 방법이 있는지 알아보신다는 것까지….’

‘…….’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아, 네. 그랬었죠. 네, 죄송합니다.’

분명히 이런 느낌의 대화가 있었던 것 같기는 했다.

어쩌면 중간중간 베니고어와 대화하느라 멍 때리는 시간이 길어진 것도 원인 중 하나일지 모른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지만, 김현성의 머릿속에서는 무의식 세계의 기억을 잃었다는 사실이 굉장히 크게 다가온 것이 아닐까.

기억을 떠올려 보니, 자신을 기억하냐는 말에 ‘아니요’라고 대충 말했던 것도 한쪽에서 맴돈다.

전부 다 내 망상에 불과하다는 건 알지만, 그럴듯하게 느껴지는 추론이다.

이미 추억 하나를 잊었다는 사실 자체가 기벽과 맞물려 셰익스피어 뺨치는 소설을 만들어낸 건 아닐까.

조심하지 않은 내 잘못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김현성이 이런 말 같지도 않은 생각을 가슴속에 품고 있었을지 내가 어떻게 예상할 수 있었을까.

녀석도 확신하지는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조혜진에게 한번 떠봐 달라고 주문을 넣은 것일 수도 있다.

조혜진 나름대로도 찝찝한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말을 걸어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정신을 자주 잃는다거나, 기억력이 감퇴했다거나, 최근 들어 자주 깜빡깜빡한다는 걸 떠올리고서는 더욱더 고개를 끄덕였으리라.

두 명의 대화를 직접 들어보고 싶은 심정이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와, 진짜 소설을 쓰네, 소설을 써. 너네가 작가 해라, 작가 해.’

아무래도 두 사람이 비극적인 클리셰의 소설을 너무 많이 본 것 같다.

충격적인 사건이 많았다는 건 인정하지만, 정말로 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계속 이상이 없다고 몇 번이나 말씀드렸는데 뭐, 이제 와서 갑자기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십니까. 정말로 별일 없으니까. 할 일이나 해요.”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최근 들어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었지만….”

‘내가 무슨 이상한 짓을 했는데그래. 그리고 알긴 또 뭘 알아.’

이 오해를 풀고 싶었지만, 이미 지들끼리 북 치고, 장구 치며 결론을 내려놓은 상태가 아닌가.

확 마, 진행되고 있다고 말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떠올리게 될 정도였다.

‘이점이 뭐가 있지?’

무작정 보호하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마이너스 감정이 둠기화에 영향을 미친다는 걸 알고 있는 만큼 육체의 안전뿐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건강도 신경 써줄 테니까.

아예 일을 시키지 않으려 감싸 돌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이것 역시 별문제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해결 방안도 있었고, 두 번째 둠기화가 감금의 영향이었다는 걸 생각해 보면 그런 선택을 할 리가 없다.

‘그냥 더 이상 남은 시간이 없다고 해버려?’

조금 무리수 같기는 했지만, 효과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방향으로 일이 꼬일지 모르는 만큼 조금 더 고민해 볼 여지가 있다.

‘아니, 그렇다고 무작정 아니라고 해서 믿어줄 분위기가 아닌데.’

그냥 시원하게 인정하는 게 좋지 않을까.

어떤 선택을 하든지 간에 최선은 아니기에 뭐라고 판단을 내릴 수가 없지만….

아예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지금보다 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할 수 있다.

계속해서 문 앞에서 나를 바라보는 조혜진을 힐끔 바라보기 시작.

여전히 의심 따위는 하지 않는 것 같은 얼굴, 완벽히 내 머릿속에 무슨 일이 생기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부길드마스터.”

“…….”

“…….”

이미 분위기는 잡혀 있다. 침묵과 불안한 공기가 장내를 감싸고 처연한 표정의 조혜진이 괜스레 침을 삼켜 넘기고 있다.

“믿어주세요. 최소한 저희 파란 길드원은 부길드마스터의 머리에 무슨 이상이 생기고 있는지 알 자격이 있습니다.”

“…….”

“제 책임입니다.”

“아니요.”

“네?”

“혜진 씨 책임이 아닙니다. 최근에 있었던 사건으로 인해서 달라진 건 없어요.”

“정말로….”

“…….”

“…….”

“혜진 씨만 알고 계셔야 합니다.”

“…….”

역시 뭔가가 있었다고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현성 씨, 하얀이, 덕구, 파란 길드원들이나 제 지인들에게도 이야기하지 말아주세요. 아직 알리고 싶지 않습니다. 중요한 시기인 만큼 괜한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습니다. 저 역시 할 일이 아직… 남아 있고요. 네. 꼭 필요한 일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 입니까.”

“시간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 그게 무슨 소리냐고요.”

“예상하시는 그대로일 겁니다.”

“…….”

“정확히 언제부터 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지만, 조금씩 머릿속이 흐릿해지는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방금처럼 단기적인 기억상실을 겪을 때도 있었고요. 이유는 아마… 네. 그 일 때문일 겁니다. 저도 제 나름대로 방법을 찾아보려고 했었지만, 다른 방법이 없다고 말씀하시더군요.”

“누가….”

“베니고어.”

“그게 사실입니까?”

“네, 신력을 사용해도 복구가 불가능한 종류의 저주라고 언질 받았습니다.”

“그… 그게 뭐예요. 그게….”

“뭐 별건 아닙니다. 죽는 것도 아니고. 천천히 기억을 잃어갈 뿐입니다. 짧으면 3년 길면 5년 정도.”

“그게 뭐야.”

“아직 아무것도 잊지 않았으니 그런 표정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생각해도 놀라울 정도로 잘 버텨주고 있어요. 지력 수치가 높은 게 이럴 때 도움이 되는 모양입니다. 자주 멍 때리게 되거나 정신을 잃기는 하지만, 예전의 일들까지 잊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직은 그 정도까지 차도가 진행되지 않았어요.”

“…….”

“다른 사람들한테는 말하지 마요.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언제 어떻게 사태가 악화될지 모르는 만큼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전부 다 끝내놓고 싶어요. 이 5현장의 일은 물론이거니와 파란, 더 나아가서는 우리 삶의 터전을 위해 해야 하는 일이 많아요. 뭐 귀찮기는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나더러 신에게 선택받은 사람이라는데. 저도 원래 뭘 위해 희생하는 성격은 아니기는 하지만, 일단은 대륙이 안전해져야 저도 살아남지 않겠습니까.”

“…….”

“제가 하기에는 조금 낯간지러운 말이라는 건 압니다. 하지만 저는 저와 관계된 사람들이 전부 살았으면 좋겠어요. 그렇기에 괜한 걱정 끼치기 싫다는 겁니다. 이래 봬도 제법 능력이 있는 사람이지 않습니까. 상상하는 것보다 이 주어진 시간 내에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을 겁니다. 쓸데없는 거로 걱정 받으며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요.”

“당신 정말….”

“당분간은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세요. 그냥 별일 없다고. 건강하다고. 그렇게 계속 보고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제 마지막 부탁이에요.”

‘하는 김에 내 편의도 좀 봐주고. 응? 좋잖아. 괜찮게 된 것 같네. 이거.’

조혜진이라면 아마 내 뜻에 따르지 않을까 싶다.

당분간 이곳에 틀어박혀야 할 테니 편의를 봐주는 것은 물론, 다른 사람들의 걱정을 덜어주는 역할을 해주게 될 것이 분명했다.

일이 끝난 다음에 ‘짜잔! 그런데 절대라는 건 없더군요. 저주가 전부 다 나았습니다!’라고 둘러대면 되는 거고, 파란 길드의 입장에서도 조혜진이 내게 붙어주면 안심 또 안심이니 다른 호위를 달고 다닐 필요도 없다.

이곳 연구소에 탄력이 붙는다는 것도 너무나 당연한 것이 아닌가.

한 2년 정도만 이 기믹을 유지해도 내게 있어서는 아쉬울 게 없는 장사라는 거다.

괜스레 입꼬리를 올린 것은 당연지사. 조금 심상치 않은 조혜진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

‘뭐야. 얘 왜 울어?’

“…….”

‘아니, 너 왜 울어. 갑자기 왜 울고 난리야. 미안해지게 왜 그래, 진짜. 울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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