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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589화 (580/1,590)

# 589

회귀자 사용설명서 589화

모르는 미래(2)

카스가노 유노와 항상 봐왔던 검은색 세계가 아니다. 시야에 비치는 것은 머지않은 미래에 일어날 일.

비둘기 같은 천사들에게 둘러싸인 인간 병력. 창을 내뻗자 저항하지 못하고 쓰러지는 병력.

파괴된 도시, 계속해서 들려오는 비명, 피로 만들어진 강, 쌓여 있는 시체 더미, 검붉어진 하늘 아래에서 보여지는 시산혈해.

‘살려… 살려줘.’

‘아아아아아아악!’

‘신이시여… 진정으로 저희를 버리나이까.’

싸우고 있는 이들 역시 눈에 보인다.

성벽 위로 쏟아지고 있는 천사 병력과 그걸 막아서고 있는 인류 연합의 싸움은 눈대중으로 봐도 처절해 보인다.

여러 가지 목소리들이 뒤섞인 전장은 뭐라 말할 수가 없을 정도의 처참함이 감돈다.

팔 하나를 잃은 전사가 악에 받친 비명을 지르며 검을 계속해서 휘두르는 장면도 보였고, 두 다리가 잘린 병사가 고통을 참아내며 활시위를 당기는 모습도 시야에 비쳤다.

그동안 많은 전쟁을 겪어봤지만, 이 정도로 눈살 찌푸려지는 싸움이 있었을까.

‘어머니… 어머니.’

‘절대로 포기하지 마라. 대륙을 위한 싸움이다. 우리 뒤에 가족들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대륙의 빛들아.’

‘절대로 천사의 탈을 쓴 괴물들에게 대륙을 넘겨서는 안 된다.’

마력석으로 만들어진 성벽이 허무하게 무너지고, 바깥 신의 군대로 보이는 이들이 왕국 연합을 뒤덮는다.

공포에 휩싸인 대륙인들은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고, 무릎을 꿇고 살려달라고 비는 이들의 얼굴이 두 눈에 톡톡히 들어온다.

자식을 지키기 위해 천사를 가로막았던 어미는 천사의 창에 심장이 찔리고, 그 모습에 분노해 달려든 아비는 목이 잘린다.

지옥을 그대로 현세로 옮겨 놓은 듯한 풍경이 아닌가.

여러모로 입술을 깨물게 되는 장면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민간인들이 보여주고 있는 가슴 아픈 그림에 대한 분노가 아니다.

문제가 된 장소는 최근 사건 사고가 많았던 5구역. 무너진 성벽을 제대로 보수하지 않았을 때의 미래라고도 볼 수 있었을 것 같았다.

‘이제는 이런 것도 볼 수 있나 보네.’

카스가노 유노의 능력 역시 폭발적으로 성장했다는 걸 새삼스레 깨닫는다.

내 기억이 맞다면 분명히 저번에는 보이지 않았던 장면이다. 아니, 시기는 같지만, 그 결과가 다르다.

분명히 조금 더 팽팽한 국면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 데 반해, 전진기지가 무너지며 형편없이 밀리고 있는 모습들이지 않은가.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생각을 떠올리는 와중에도 눈 앞을 흘러가는 미래는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다.

처절하게 싸우고 있는 파란 길드원들과 김현성, 천사들에게 둘러싸인 디아루기아와 빛 폭탄 물약을 던지는 나, 교국 8좌의 모습과 연신 마법을 터뜨리며 병력을 줄이는 정하얀.

피를 뒤집어쓴 상태로 천사들의 날개를 잡아 뜯고 있는 차희라.

순식간에 난전이 되어버린 전장의 상황은 내가 그리고 있었던 그림과는 많이 다르다.

미하일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장면이기는 했지만, 내게도 도움이 되는 장면들이 많다.

‘이건… 베드 엔딩이네.’

아직 끝까지 본 것은 아니었지만, 전황 자체는 뒤집을 수 없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이대로 무난하게 흘러가기만 해도 비둘기들에게 하나둘 뒈져 나가는 건 시간 문제나 다름없을 터.

박덕구를 위시한 파란 길드의 진영 역시 안전하지는 않다.

혹시나 다른 정보가 있을 수도 있는 만큼 조금 더 집중하려고 했지만, 아름다운 외관을 가진 천사가 가까이에 있는 대상을 향해 창을 뻗는 것으로 카스가노 유노의 능력은 마무리됐다.

‘…….’

푸욱.

너희들이 볼 수 있는 것은 딱 여기까지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가.

‘매번 여기가 끝이네?’

조금은 아쉬웠던 것이 사실.

혹시나 조금 더 쓸만한 정보가 있지 않을까… 했지만, 만약 카스가노가 새로운 무언가를 봤다면 부르지 않아도 찾아왔을 테니,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고 판단하는 것이 맞으리라.

잠시 손가락으로 허벅지를 툭툭 두드리며, 정신을 다잡은 것은 당연지사.

근처에서 기분 나쁜 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우웨에에에에엑….”

‘…….’

“우웨에에에에에에에엑….”

눈앞에 의연하게 서 있었던 녀석이 시원하게 토악질을 시작한 것.

“허억… 허억… 허억… 우웨에에엑… 우웨에에에엑! 우웨에에엑….”

“봤습니까?”

‘말할 수 있는 상태처럼 보이지가 않는데.’

그 말 그대로였다. 얼굴은 이미 일그러진 지 오래.

안에 있는 것을 게워내는 게 고통스러워 흘리는 눈물인지, 아니면 방금 본 것에 대한 충격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되어 있는 모습은 가관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시간이 조금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구역질하고 있는 모습은 정말로 추해 보이지 않은가.

“우웨엑… 웨에에엑… 허억… 허억… 허억….”

“예상했지만, 생각보다 더 충격받으신 모양입니다. 잠깐 이나마 미래를 엿본 감상이 궁금한데. 어떻습니까?”

“웨엑… 허억… 허억….”

“조금 어떠셨어요?”

“허억… 허억….”

“내가 어땠는지 묻잖아.”

“…….”

“…….”

“지… 지금 제가 우웁… 제가… 우웁… 제가 본….”

“구차하게 믿어 달라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미하일 님. 믿든, 믿지 않든 간에 그건 당신 자유고… 내가 일일이 설명하는 것도 지겹잖아요. 이걸 본 사람은 당신이 네 번째예요. 조금 더 기뻐하셔도 됩니다. 울상 지으실 필요 하나 없어요.”

“지금… 제가 본 게….”

“정확히 언제인지는 확인이 되지 않습니다만, 머지않은 시기에 벌어질 미래라고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개인적으로는 시간이 조금 더 남았다고 판단하고 있는데… 정확히 언제가 될지는 몰라요. 1년이 될지, 2년이 될지, 아니면 5년이 걸릴지, 복장이나 외관이 그다지 달라지지 않은 것을 보면 최대 10년이라고 봅니다. 최소가 1년이고.”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믿든, 안 믿든 간에 그건 당신 자유라고. 저는 제가 보여줄 수 있는 걸 전부 보여줬어요, 미하일 님. 대륙에 위협이 다가오고 있다고 발표했었고, 지속해서 그 건에 대해 대륙 전체에 경각심을 심어줬습니다. 음모론에 취한 병신들한테는 대륙을 지배하기 위한 악의에 가득 찬 계획으로 비치겠지만, 이런 새끼들을 어떻게 하나하나 신경 쓸 수가 있었겠어요. 저는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습니다. 베니고어 님께서 강림하셔서 직접 언급한 건 기억에서 지워지셨나 봅니다. 믿지 못하는 것 같아서 더 정확한 증거를 보여드렸는데, 아직도 믿지 못하시는 모양이네요.”

“…….”

“미하일 양반. 제가 진짜로 할 짓이 없어서 그 골드를 처박아서 성벽을 올리고 전진기지를 만드는 줄 알았습니까? 독재로 한 발자국 더 나아가기 위한 군대를 양성하기 위해 대륙 합동 훈련소에 그만한 돈을 투자한 줄 알았어요? 그런 미친 새끼가 세상에 어디 있답니까.”

“그건… 우웁.”

“제가 아까 말씀드린 게 이거예요, 미하일 님. 말을 해도 들어 처먹지를 못하는… 그러니까 당신 같은 사람들이 넘쳐나는 데, 제가 어떻게 모든 선택을 민중에게 맡기는 소년만화 주인공 같은 행동할 수 있겠어요. 이게 아니면 전부 다 뒈지겠거니 싶었다는 게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세요? 이 일 외에 다른 쪽으로는 도박하고 싶지 않았다는 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셨습니까?”

“그렇다고는 해도…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저도 윤리적으로는 잘못됐다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쩌겠습니까. 가끔 세상과 타협해야 하는 법도 있는데. 트롤리 실험이라고 들어봤습니까. 저는 한 명보다는 다섯 명을 살리기 위해 레버를 당기는 쪽입니다. 하물며 우리 같은 경우에는 그 한 명을 희생할 필요 없어요. 다섯 명을 살리기 위해서 선택해야 하는 게 한 명의 희생이 아니라… 당신이 그렇게 울부짖었던 작은 자유라 이 말입니다.”

“…….”

“개똥밭을 굴러도 살아 있는 게 더 좋잖아요. 전부 다 같이 뒈지는 것보다는 아주 조금 비윤리적인 게 더 좋잖아, 그렇지 않나?”

“다른 방법이… 다른 방법이 있었을 겁니다. 위원장님은… 영특하신 분입….”

“저 안 영특합니다. 제가 진짜로 똑똑했으면 미하일 님이 그렇게 외친 다른 방법을 찾아냈을 겁니다. 참고로 대륙인들을 한 번 더 믿어보자는 개소리는 목구멍에 다시 넣어두세요. 이미 시도해 봤고, 방금 봤던 것보다 더 지옥 같았던 걸 보고 왔으니까.”

“…….”

“…….”

“어째서, 어째서 제게 이런 걸 보여준 겁니까.”

“어째서 보여줬다고 생각하십니까, 미하일 님은.”

“잘,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지 마시고 잘 생각해 봅시다. 어째서 제가 이런 걸 보여줬다고 생각하세요?”

“…….”

“…….”

“이미 답을 알고 있을걸.”

“제 도움이 필요하신 거군요.”

“…….”

“아마도 제 도움이 필요하시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정확히 뭘 원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위원장님께서는… 제가 그들을 막는 데 도움…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고 계신 것 아닙니까. 그렇기 때문에… 제게 이런 장면들을 보여주신 게 아닙니까? 저를 설득시키기 위해서, 이 부족한 사람에게 맡기실 일이 있기 때문… 때문에….”

“기다렸던 대답입니다.”

“어떤 일을 맡기시려고 하시는 것인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저는 아직도… 아직도 머릿속이 혼란스럽고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어째서 위원장님께서 이렇게 직접 오셔서 저를 납득시키려고 하시는 건지, 저런 상황에서 제가 도대체 무슨 일을 할 수 있는 건지, 무엇이 진짜 옳은 건지… 또 제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슴 속에서는 여전히 위원장님을 부정하고 있습니다만, 이성은… 위원장님을 따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최선을 다해 대륙을 지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만약… 만약 제가 본 게 정말로 가까운 미래에 일어날 일이라면….”

“하지만 정답은 아니네요.”

“…….”

“기다린 대답이기는 했지만, 정답은 아니었어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푸흣… 푸하핫.”

“어째서 웃으시는 겁니까.”

“푸흐하허헤헤핫. 그야 웃겨서 웃지 다른 이유가 있겠습니까.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신 거예요? 내가 당신한테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 이걸 다 보여줬다고 생각하고 있는 겁니까?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 거예요? 아쉽지만 오답입니다, 미하일 님. 이유야 뭐 별 게 있겠습니까.”

“지금… 무슨….”

“진짜로 아무것도 아닌 이유예요. 그냥 당신이 틀렸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거든.”

“뭐… 뭐?”

“네가 틀렸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고, 푸…푸하흐하핫. 그래서 보여준 거야. 뭐 거창한 이유라도 있는 줄 알았어요? 그냥 화풀이였다고… 푸흐흐흣, 신념, 신념 하고 울부짖는 꿈 많은 이상주의자한테 조금이라도 현실이 어떤 건지 알려주고 싶어서 보여준 거라 이 말입니다, 푸흐하하핫. 그래야 내가 덜 억울하잖아. 네 눈빛이 얼마나 기분 나빴었는지 알아?”

“와… 알고는 있었지만… 오빠… 진짜 악취미에… 쓰레기 같아요.”

‘응, 지혜야. 그거 아니야.’

“제가 왜 당신을 한 번 더 기용하겠어요? 당신이 꿈꾸는 세상이었다면 ‘한 번 싸웠으니 동료다’라는 흐름으로 가겠지만… 여기서 그딴 일이 생길 리가 있겠습니까. 저는 한번 배신한 사람은 절대로 안 믿어요. 한번 통수를 친 새끼는 반드시 한 번 더 통수를 치게 돼 있거든. 푸흐하하핫, 뭐? 일을 맡겨? 뭐 이제 와서 대륙 구하기에 합류라도 하고 싶어진 겁니까? 이제 와서 빛과 함께 싸우고 싶다고요? 그럴 수는 없지, 이 악마 조력자 새끼야.”

“미… 미친놈….”

“엿이나 까 드시고 정보나 뱉으세요, 이 양반아. 그게 그나마 네가 대륙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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