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8
회귀자 사용설명서 588화
모르는 미래(1)
“멍청한 사람들이 신념을 가지는 것만큼 무서운 게 없어요. 지금 보니, 딱 당신 같은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인가 봅니다. 이 대륙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여기에 뭐가 있는지,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고 있으니 오죽할까. 차라리 다른 사람들처럼 가만히 있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신념은 무슨, 개 풀 뜯어 먹는 소리를… 악마 계약자들이 만든 그 광경을 보고서도 잘도 그런 소리가 나온답니까.”
“방금 위원장님께서… 제게 한 말씀이야말로… 질문에 대한 답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네?”
“이 땅 위에 살아가는 모든 지적 생명체가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스스로 판단하며 살아갈 자격이 있습니다. 스스로의 신념을 가지고 스스로의 의지로 자유롭게 행동해야 합니다. 그게 사람입니다… 허억… 그게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이에요.”
“…….”
“위원장님께서… 민중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그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대우하고 있는지… 다시 한번 깨닫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말을 이어나가기가 힘든지, 간헐적으로 거친 숨을 몰아쉬는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개 소리 하네, 진짜.’
어처구니가 없어 실소가 나올 지경이지 않은가.
‘지적 생명체? 스스로 판단? 내 판단이 틀리지 않아?’
대륙에 없는 애니메이션을 너무 많이 봤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들어와 꽂힌다.
“만화영화를 너무 많이 보셨나 봅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알아듣지 못하겠는데… 저만큼 민중을 사랑하는 사람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들은 바보가 아닙니다. 멍청하지도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충분히 일어설 수 있는 이들입니다. 저는… 위원장님의 방식이 옳지 않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당신은 스스로를 대륙의 약이라고 생각했겠지만, 그렇지 않아요. 당신은 대륙의 암입니다. 민중들을 속이고 그들의 생각을 획일화하는 독재자에 불과합니다. 그들을 우매하게 만들고 있는 것은 당신이에요. 그들을 바보로 만드는 사람이 바로 당신입니다.”
“…….”
“대륙은 썩어가고 있습니다. 위원장님의 욕심이 대륙 전체를… 망가뜨리고 있습니다.”
“말 잘하시네. 우리 미하일 님. 내가 이런 모습을 좋아했었던 건데… 그래서 말 다했어요?”
“비록 이번 일은 실패로 끝났지만, 저는 절대로 위원장님께 반기를 든 것은 후회하지 않습니다. 해야 할 일을 했다고 생각했을….”
“제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이렇게까지 몰아붙이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정말로 모르실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몇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고 한들, 제가 한 일들은 모두 대륙을 위해서였어요. 미하일 님께서 제가 그들의 권리를 박탈했다고 느끼실지언정, 제가 대륙을 위해 기여했다는 결과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고개를 돌려서 대륙이 얼마나 발전됐는지를 보세요. 교국 먼저 짚고 넘어가 봅시다. 신성교국이 예전에는 제국이라고 불렸던 사실을 잊고 계셨나 봅니다.”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황제와 황녀에서 오스칼과 위원장님으로, 귀족에서 의회로 바뀌었을 뿐이지 않습니까. 혁명은 민중의 승리가 아니라 위원장님의 승리였습니다. 신성한 민주주의라는 듣기 좋은 말로 포장하고는 있지만, 현재 교국은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나라라고 볼 수 없습니다. 신의 이름을 팔아 권력을 확고히 하려는 수단에 불과합니다. 의회의 절반 이상이 당신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고, 모든 언론기관과 행정기관을 당신이 주무르고 있습니다. 민주주의 같은 게 아닙니다. 단순히 권력이 이동됐을 뿐이에요. 오히려 더 악질적인 방법으로 말입니다.”
“하하, 제국의 혁명에 가담한 민주투사들이 이 말을 들으면 무척 섭섭하게 생각할 겁니다. 과거의 교국에서 신분제도를 뜯어낸 건 어디 사는 누구였더라.”
“평민과 귀족을 구분하지는 않지만, 계급이 사라졌다고 볼 수는 없지 않습니까… 교국은 여전히 신분제도에 속해 있습니다. 그 계급을 만든 것 역시 당신이었고요.”
“결과적으로 삶의 질이 향상되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을 겁니다.”
“빈부 격차는 줄어들지 않았지요.”
“그렇게 민중들을 생각하시는 분이 노동자의 아픔은 무시하고 싶으셨나 봅니다.”
“그들에게는 죄송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대를 위한 희생이었군요. 키야… 거, 대단하십니다. 재미있기도 하고요. 코에 붙이면 코걸이고, 귀에 붙이면 귀걸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십니다. 나 참… 본인이 저질렀던 죄는 대를 위한 희생인데… 왜 제가 하는 일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시는지 모르겠습니다.”
“…….”
“…….”
잠시 입을 다물고 있는 미하일의 모습이 보였다. 당황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내가 생각해도 궤변처럼 들리기는 했으니까.
“뭐, 미하일 님의 말씀을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
“하지만 이거 하나는 짚고 넘어갑시다. 저는 인간을 존중합니다. 당신 생각처럼 인간을 부정하거나 바보로 보고 있는 것도 아니에요. 개인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사람이 세상천지에 어디 있겠습니까. 절대로 인간들을 바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계몽을 통제하려고 하는 게 아니에요. 오히려 이 새끼들이 너무 똑똑해서 문제라니까요.”
“…….”
“한 놈만 똑똑하면 문제가 없는데, 이 똑똑한 놈들끼리 서로 싸우고 뭉치는 게 또 문제예요.”
“당신은….”
“평소였다면 뭐, 저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을 겁니다. 어디서 뭐가 일어나던 누가 누구랑 치고받고 싸우던, 또 어디서 내가 모르는 개짓거리를 하든지 간에 그게 다 무슨 상관이랍니까. 나만 잘 먹고, 잘살면 되는 건데…. 그런데 말입니다. 제가 지금 처해 있는 상황이, 그런 개짓거리를 그저 바라만 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에요, 미하일 님. 인간을 믿어야 된다고 민중들을 믿어야 된다고 말씀하신 게 맞습니까?”
“그건….”
“그 결과를 보세요. 알 만한 사람이 왜 이럴까. 기억을 더듬어서 대중들에게 선택을 맡긴 결과가 어땠는지 한번 보세요.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습니다. 가까이에서 있었던 일부터 차례대로 더듬어 보세요. 아니, 제가 들어오기 전, 몇 년 전 대륙은 어떤 상태였습니까. 얼마나 평화로웠으면 우리 미하일 님께서 옛날을 그리워하실까. 얼마나 행복했으면 민중 자유를 외치며 그들을 널리 이롭게 하려고 하실까 몰라.”
“…….”
“출산률이나 경제성장률도 천장을 뚫을 것처럼 치솟아 올랐나 봅니다. 평화로웠겠네. 다툼도 일어나지 않았고, 행복한 한때를 보내고 있었나 보네. 내가 씨발, 대륙에 들어온 게 잘못인가 봐. 내가 알고 있던 사실과는 많이 다른 것 같은데, 그렇지 않나?”
“…….”
“당신도 알다시피 그런 거 아니잖아. 전쟁은 끊이지 않았고, 기근으로 죽어가는 사람들도 많았습죠. 여기저기에서는 분란이 끊이지 않았고, 서로 으르렁거리며 모두 다 함께 똥통 속으로 잠수하자고 독려하는 분위기 아니었나. 나는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말이야. 참 이상하네. 내 기억력이 안 좋은 편이 아닌데 말이야.”
“위원장님이 옳았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당장 공화국의 경우만 봐도 그래요. 결사단 그놈들도 참 멍청한 놈들이에요. 추억팔이도 정도껏 해야지. 진청, 그 사람도 애초에 깨끗한 사람이 아니라는 거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는 전범이에요. 전쟁을 먼저 일으킨 것은 공화국이고, 피해자의 입장에 있었던 것은 교국과 파란 길드였습니다. 공화국이 일으킨 사고가 어디 그것뿐입니까. 접견 지역에서는 매번 소규모 전투가 일어났었고, 하루에도 수십 명이 죽었습니다. 이종족들은 또 어떻습니까. 수만의 이종족 노예들이 고통받았고 미하일, 당신이 사랑해 마지않는 인간들에게 고통받고 차별받았습니다. 이종족과의 전투 역시 끊이지 않았고, 강자가 약자를 짓밟고, 약자는 상대적 약자들을 짓밟았어요. 별것 아닌 이유로 다투고 서로를 향해 검을 들이밀었습니다. 어떻습니까, 미하일 님. 제 자랑을 하는 건 아닙니다만, 제가 없었으면 어떻게 됐을 것 같아요? 인류가 하나로 뭉쳐 영차영차 하면서 새 미래를 향해 힘찬 발걸음을 뻗어 나갔을 것 같습니까?”
“…….”
“대륙 역사 몇 천 년, 몇 만 년 동안 왜 인류는 새 미래를 향해 힘찬 발걸음을 뻗지 못했을까… 미하일 님이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던 인간들이 통제 없는 자유로운 삶을 누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그들은 행복한 미래를 향해 조금도 나아가지 못했을까. 궁금하지 않습니까. 나는 모르겠는데… 답을 알고 있다면 조금 알려주세요, 미하일 님.”
“자기합리화일 뿐입니다. 당신은 독재를 합리화하고 있어요.”
“누가 관심이나 있답니까.”
“무슨 말을….”
“내가 들고 있는 짐 때문에 여기서 이 지랄병을 하고 있는 거지. 당신들이 생각하고 있는 원대한 계획이나 목표 같은 건 없습니다. 조금 극단적으로 말하면 내 사람들 챙기려고 이렇게 개고생을 하고 있다 이거예요. 저 스스로의 얼굴에 기름칠하는 건 아니지만, 결과만 봅시다. 새끼야, 지금 대륙의 전쟁이 멈춘 게 누구 덕분인 것 같아?”
“…….”
“수만 년 동안이나 아무 의미 없이 치고받던 놈들이 일순간 아가리를 다물고, 하나 된 과업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게 누구 덕분일 것 같아? 지금부터 제가 개인에게 판단을 맡기고, 모든 통제를 풀어놓는다고 가정해 보자.”
“위원장님의 방식은….”
“계속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미하일 님의 의견에는 무척 부정적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과 결사단, 그 반동분자들이 원하는 세상을 만들었다고 가정해 보자고. 어쩌면 당신 말처럼 행복하고 모두가 하하 호호하는 날이 올 수도 있어요. 일순간 모든 인간이 인류애를 깨닫고, 개탄의 눈물을 흘리며, 손을 맞잡을 수도 있다고 봐. 근데 나는 의심이 많은 성격이거든. 혹시 모를 상황까지 가정하면서, 나 개인이 스트레스를 받아가면서까지 그런 선택을 할 이유가 없다, 이거야.”
“방식은 틀렸습니다.”
“어디서 개짓거리 하는 새끼들이 나타나서 물이 흐리고 개판을 쳐놓으면, 지금까지 그리고 있던 그림이 전부 개박살이 나는데 당신이라면 그런 선택을 할 수 있겠어? 그 커다란 리스크를 지고서, 자유니 통제를 벗어나야 한다느니 떠들 수 있겠냐고. 나는 가능성이 더 크다고 생각한 쪽에 패를 던진 거야. 이상주의자들의 뜬구름 잡는 개소리보다는 지금까지 인류가 걸어온 역사를 보고 배운 거라고요, 미하일 님.”
“…….”
“X 같은 인류애 타령은 소년 만화 책에서나 떠들어 새끼야. 나는 리스크를 내버려 두면서까지 대륙 구하기 하고 싶은 생각 없으니까. 알겠어? 오히려 이번 사건으로 한 번 더 확신할 수 있었다고, 새끼야. 나처럼 이해타산 따지는 인간이 정말로 아무 의미 없이 이 성벽에 수백만 금화를 쏟아붓는 줄 알았어?”
“그, 그건….”
“지혜 누나.”
“왜요?”
“카스가노 유노 좀 데리고 와줘.”
“네, 그렇게 하죠.”
“고마워.”
“사실 보여줄 필요도 없지 않아요? 쟤가 안다고 해서 뭐 달라지는 것도 아닐 텐데… 뭐, 아무튼 전할게요.”
이지혜가 방을 나가는 게 시야에 들어왔다. 미하일, 이 새끼는 계속해서 뭔가를 생각하고 있는 표정.
방음 마법이 쳐 있어, 조혜진이나 박리안은 무슨 대화를 하는지는 정확히 모르는 것 같았지만, 흘러가는 분위기로 대충 예상하는 것 같았다.
조금 오래 기다려야 될 것 같다는 내 걱정과는 다르게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카스가노가 천천히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은 아니다. 이 자리에 앉은 후에 카스가노와는 간혹 만나기도 했으니까.
조용히 인사를 건네오는 모습에 고개를 끄덕였다. 간단한 대화라도 나누고 싶었지만, 상황상 긴 말은 필요 없다.
카스가노 유노를 향해 살짝 손짓하자, 천천히 미하일 쪽으로 다가가는 그녀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 뭘 하려고 하는 겁니까… 지금….”
“입 닥치고 눈이나 똑바로 쳐다봐요.”
“당신들의 뜻대로는….”
“거지 같은 망상하지 말고 그 여자 눈이나 쳐다보라고.”
그렇게 그녀와 녀석의 눈이 마주친 순간, 정신을 잃은 듯 잠잠해지는 놈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나 역시 마찬가지. 곧바로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