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4
회귀자 사용설명서 584화
오랜만의 해후 그리고…(1)
순수한 에너지 그 자체로 이루어진 마력의 응집체.
‘어… 어….’
콰드드드드득!
콰아아아아아아앙!!!
녀석의 생사에는 이미 관심이 없다. 애초에 저런 걸 맞은 뒤 살아남기를 바란다는 것 자체가 무리수였으니까.
대기가 떨린다. 후드득 후드득거리는 소리와 함께 성벽이 진동하고 있다.
풍압 때문에 눈을 제대로 뜨고 있기가 힘들다.
멀찍이 떨어져 환호성을 보내고 있었던 갤러리들은 자연재해라도 목격한 것처럼 비명을 지르며 최대한 외곽으로 도망친다.
정하얀이 쏘아 보낸 마법에 휘말리면 죽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어울리는 표현은 아니었지만, 지진이 일어나기 전 몸을 피하는 야생동물들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빌런이 각성했을 때보다 더욱더 격정적인 반응.
정하얀이 빌런인 것처럼 느껴지는 반응이었다.
‘안 돼에… 씨바… 무너지지 마… 무너지지 마. 버틸 수 있잖아. 버틸 수 있지?’
현재 상황에 최대 관심사는 그래도 끝까지 지켜보고 싶었던 제5구역의 성벽, 아니, 전진기지 그 자체.
쿠웅! 하는 소리와 함께 악마 놈이 마력의 응집체를 막아냈지만, 마치 인간이 지구를 들어 올린 것 같은 모양새다.
으직으직 하는 소리와 함께 놈을 지지하고 있었던 바닥이 움푹 파인다.
‘그만해, 씨바, 하얀아… 그만… 우리 성벽 날아간다. 전진기지 날아간다. 이거 아니야, 이건 아니야. 씨바….’
서둘러 뒤를 바라보자 눈에 보이는 것은 반쯤 공중에 떠 있는 정하얀, 어느새 내 몸도 공중에 떠 있다.
입술을 꽉 깨문 입에서는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상기된 얼굴과 핏발이 선 눈으로 자신의 공격에 겨우 버티고 있는 개자식을 노려보고 있는 얼굴.
어째서 결사단의 단장이 정하얀의 모습을 보고 악마라 중얼거렸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치 악귀처럼 보이는 모습이지 않은가.
“죽어… 죽어… 죽여 버릴 거야. 죽여 버릴 거야.”
같은 혼잣말 때문에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당연.
그래도 내 말이라면 듣겠지 싶어 입을 열어봤지만, 순간적으로 정신이 흐려진다.
‘어?’
체력이 다했기 때문이 아니다. 정하얀이 이쪽에 뭔가 마법을 걸었다.
‘뭐야, 너… 왜 갑자기….’
그제야 내 겉모습이 어떤 상태인지 깨닫는다.
아마 계속해서 지금의 상태를 유지하는 건 내 정신에 영향이 갈 수 도 있다고 생각한 거겠지.
그렇기 때문에 수면 마법 같은 종류의 마법을 때려 박은 것이리라.
제발 그런 거였으면 좋겠다. 다른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제발 그런 거였으면 좋겠다.
눈을 뜨니 미친 마법사의 저주받은 신단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흐릿한 정신을 최대한 잡아보려고 노력해 봤지만 다른 방도가 있을 리 만무.
그 와중에 버티고 있는 우리 결사단 단장이 자랑스럽다.
‘그래, 새끼야. 이겨낼 수 있어… 악마한테… 영혼도 팔아넘긴 놈이… 이 정도 공격은… 버텨야지. 씨바, 그렇잖아. 저건 밀어내고 죽어야지.’
우지지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점점 땅 속으로 꺼지고 있는 녀석. 자연스럽게 마력의 응집체는 성벽에 닿는다.
콰드드드드드득드드득드드득!
‘안 돼!!!’
정신을 잃기 직전.
자연재해 같은 마법이 성벽 한 쪽을 완전히 부숴 버리는 모습을 시야에 담을 수 있었다.
‘하얀이… 성장했구나. 씨바….’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
“…….”
“…….”
* * *
“씨발!”
벌떡 일어난 순간 눈에 보이는 것은 평소와 같은 병실. 며칠이나 잔 건지는 모르겠지만, 몸이 제법 뻐근했다.
“일, 일어나셨군요. 이기영 님.”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시야에 비치는 것은 붉어진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엘레나.
깜짝 놀랐는지 달리기라도 한 것처럼 호흡이 거칠어져 있는 모습이 보인다.
본인의 앞섬은 왜 잡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무척 당황한 듯한 모습.
심지어 땀으로 젖은 머리카락은 묘하게 고혹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평소 엘레나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에 정말로 그녀를 보는 게 오랜만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여신의 손거울을 통해 이미 사전에 연락을 하기는 했지만, 실제로 모습을 보니 반갑기야 하다.
겨우 1년 인데 뭐가 그리 변했냐고 할 수 있겠지만 이전보다 더욱더 성숙해지지 않았는가.
“아… 오랜만입니다, 엘레나 님. 언제 도착하신 겁니까?”
혼자 있었다면 쌍욕이라도 퍼부었을 것이다. 아직까지 정신을 잃기 전에 본 장면이 생생했으니까.
하지만 엘레나를 통해 사정을 전해 듣자 정하얀에 대한 분노가 절로 사그라든다.
“정하얀 님께서… 마중 나와주셨어요. 이기영님께서 쓰러져 계신다고… 같이 가자고 급하게 말해주셔서 예정보다 더 빠르게 도착할 수 있었어요. 희영 씨, 그리고 길드에 있는 정연 씨도 함께 왔고요. 또 소라 씨도….”
“…….”
“…….”
‘그래, 하얀아… 네가 무슨 잘못이 있겠어.’
당시에 가장 놀랐던 것이 바로 정하얀 본인이였으리라.
안 그래도 돌발 상황에 대한 판단능력이 떨어지는 그녀였으니 달리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적을 죽이고 나를 구해야겠다는 생각 말고는 다른 걸 떠올릴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정확한 피해 규모를 아직 듣지 못해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찝찝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아… 그랬군요.”
“네, 처음에는 굉장히 횡설수설 말씀하셔서…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덕분에 제 시간에 맞출 수 있었어요.”
‘많이 울기도 울었겠네.’
나야 기절해서 모르고 있었겠지만, 대충 어떤 상태였는지는 예상이 간다.
“그보다 이기영 님, 잠깐 따로 이상이 없는지 검사를 해봐도 되나요? 그 은발의 상태를 3일이나 유지하고 계셔서… 물론 눈에 보이기에는 다른 이상이 없으신 것 같지만, 내부는 조금 다를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네?”
“다행히 베니고어 교단의 사제님들이 오신 이후에 본래 모습으로 돌아오시기는 했지만….”
‘아… 시바. 직업 전환 안 풀고 기절했구나.’
“네, 물론입니다. 하지만 딱히 몸이나 정신에는 이상이 있는 것 같지는 않네요. 혹시… 제가 얼마나 잠들어 있었습니까?”
“딱 나흘이에요.”
‘한번 누웠다 하면 3일 이상은 누워 있는 것 같네. 이렇게 오래 기절할 이유가 없었던 것 같은데… 둠기화가 생각보다 체력을 많이 잡아먹나?’
아니면 정하얀의 마법이 워낙 강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워낙 체력이 유약하다 보니 후자보다는 전자에 더 가능성을 높이 주고 싶기도 하다.
벨리알이 아무리 내 편의를 봐주고, 지원을 해주고 있다고 한들, 한낱 인간의 몸으로 악마의 힘을 받아들이는 게 쉬운 건 아니지 않은가.
결사단인지 뭔사단인지 하는 놈들의 모습이 악마의 취한 놈들의 말로가 어떤 것인지 아주 잘 보여주고 있는 지표다.
‘너무 밥 먹듯이 쓰지는 않는 게 좋겠네.’
여러 가지를 떠올리는 도중에도 엘레나는 심각한 얼굴로 내 몸을 이곳저곳 살펴보고 있다.
하지만 베니고어에 의해 이미 직업전환이 됐으니, 다른 부작용이 발견될 리 만무.
몇 분이 지난 이후에는 안심하듯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행히 몸에 다른 이상은 없는 것 같아요. 하지만 체력이 많이 떨어지신 것 같으니 당분간은 따로 영양제를 섭취하시는 게 좋겠네요. 당연하지만 끼니도 거르시지 말고요. 밤을 새시거나 하는 일도 자제하셨으면 좋겠어요.”
“가능하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번 일만 제대로 마무리 짓고요.”
“이번 일이라고 하시면….”
“5구역은 어떻게 됐습니까? 그리고 미하일이나 나탈리의 신원의 확보나… 다른 뒤처리는 어떻게 됐는지 궁금한데. 혹시 알고 계시는 게 있으면 전부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후우… 그건 저한테 듣는 것보다 다른 분들한테 들으시는 게 좋겠네요. 지금 모두 밖에 나가 있는 상태이기는 한데, 아마 연락을 드리면 금방 모일 거예요. 잠깐 밖에 좀….”
“네.”
“그리고 방금 전은 너무 갑작스러워서 미처 말씀을 드리지 못했지만… 이, 이렇게 오랜만에 뵙게 돼서 정말 기쁘네요.”
“네, 오랜만에 보니 저도 참 좋습니다.”
잠깐 동안 꽈악 나를 안아오는 게 느껴진다.
본인도 부끄러웠는지 붉어진 얼굴로 후다닥 밖을 나가는 뒷모습.
확실히 1년 전에 순수했던 사람은 1년 후에도 순수한 모양이다.
아무튼 간에 엘레나가 나간 이후의 병실에는 적막함이 감돈다.
‘다들 와 있겠네.’
아마 엘레나 뿐만이 아닐 것이다.
‘선희영이랑 황정연도 와 있겠고….’
엘레나와 함께 떠났었던 유아영도 같이 들어왔으리라.
박기리 혁명 삼남매와 조혜진, 정하얀도 마지막에 함께 있었으니, 어딜 떠나지 않았을 것이고… 아마 김창렬에게도 소식이 닿지 않았을까.
정하얀 절친 한소라도 분명히 함께 있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김현성, 이 새끼도 왔겠지?’
아마 틀림없이 와 있을 것이다.
그동안 연락까지 씹고 폐관수련에 들어갔다고 한들 내가 병실에 누워 있었는데 달려오지 않았을 리가 없다.
‘내가 해준 게 얼만데… 안 오면 진짜 쓰레기지. 안 오면 개 쓰레기다, 진짜.’
연락을 받았다면 한걸음에 달려오지 않았을까.
괜스레 옆에 있는 면회자 명단을 뒤적거리자 그동안 이곳을 들렸던 면회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저번처럼 밥 먹듯이 들락날락거린 이들이 가장 눈에 띈다.
그중에서도 가장 압도적인 지분을 차지하는 것은 역시나 정하얀.
의외로 이지혜의 이름이 별로 보이지 않는 것을 보니 뒤처리 일이 생각보다 바빴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어? 희라 누나도 왔다 갔네.’
카스가노 유노의 이름도 적혀 있다. 길드원들도 단체로 들르기도 했고… 교국 쪽의 인사들 역시 들린 것이 눈에 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김현성의 이름이 없는 것이 문제. 살짝 섭섭한 마음이 퍼지려던 찰나였다.
정확히 둠기화가 풀린 지 사흘째 되던 날 녀석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
[면회자 명단]
[10/24]
[김현성] AM 08:43-PM 05:50
베니고어 교단에서 둠기화의 해결을 위해 사제단을 보내기 전까지 온종일 붙어 있었던 것 같았다.
몇 시간을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온종일 있었던 것을 보면 어지간히 걱정된 모양이다.
심지어 이때는 둠기화가 아직 풀리기 전이 아니었던가.
‘괜찮았을려나?’
이렇게 한 사람이 면회를 오래 한 것도 주목해야 할 부분.
어떻게 봐도 월권이 분명했지만, 내부에서 어느 정도는 용인해 준 것 같았다.
만족스러운 미소가 지어지는 게 당연했다. 그동안 불철주야 내조를 했던 게 효과가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곳에 온 이후에 했던 노력이 허사가 되지 않았다는 것. 그것만으로 가슴 속에 훈훈한 마음이 피어난다.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였던 찰나, 갑작스레 불안한 생각이 머릿속을 휘저을 수밖에 없었다.
‘아… 이거 또 귀찮아지겠는데.’
지난 감금 사건 때처럼 움직임에 제한이 생기는 것이 문제.
본래 일을 하는 것보다 끝난 뒤의 뒤처리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게 나다.
특히나 이번 일은 여러 가지로 처리해야 할 사안이 많았던 만큼 개인적인 시간이 반드시 필요했다.
결사단과 계약한 악마가 누구인지 알아야 했고, 어떻게 제5구역에 똬리를 틀 수 있었는지 확인해야 했다.
무엇보다 결사단과 미하일이 나와 관련된 날조된 정보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만큼 사랑스러운 회귀자가 그 증거들에 접근하는 것을 최대한 막아야 했다.
‘차라리 오지를 말지.’
귀신같은 태세 전환이었지만 나로써도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어느 정도 안전에 신경 쓰는 것은 나로서도 환영할 만한 일이기는 했지만, 본인이 직접 밀착 마크하겠다고 달라붙는다면 여러 가지로 귀찮아지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괜스레 한숨을 쉬며 면회자 명단을 본래의 자리로 집어넣었을 때였다.
“기영 씨! 기영 씨!”
하는 목소리와 함께 사랑스러운 회귀자가 문을 박차고 튀어나온 것.
‘현성아, 시바… 형 기절했었다.’
9개월 만에 만나는 녀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