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9
회귀자 사용설명서 579화
악마 계약자(3)
“따라오세요.”
‘아암요, 그래야죠. 당연히 따라가 드려야죠. 끝까지 함께하겠습니다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조혜진을 바라보는 것이 당연했다. 살면서 이렇게 따뜻한 표정으로 누군가를 바라본 적이 있을까.
‘진짜 말로 다 표현 못 하겠다, 야.’
뭔가 마음이 통한 것 같은 느낌.
어째서 그녀가 이 자리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본능적으로 친우의 위기를 눈치챈 것이 분명하리라.
티격태격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나를 챙기고 있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이래저래 혼란스러운 장내에 갑작스레 훈훈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은 느낌.
‘이거 감사의 인사라도 건네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아무리 친하다고 한들, 말로 표현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는 생각에 말을 잇던 찰나였다.
“저기….”
조혜진이 먼저 선수를 쳐온 것.
충분히 내 감정이 전달됐을 거라고 생각했건만, 들려오는 목소리는 상당히 의외, 솔직히 한 대 후려치고 싶은 대사였다.
“괜찮으신 게 맞습니까? 무척 기분 나쁜 표정을… 혹여나… 두통이 심해지신다면 꼭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기분 나쁜 표정이라뇨….”
“아니요… 잠깐 악마… 같은… 아니, 죄송합니다. 뭔가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소름이 등 뒤를 타고 올라와서… 제 착각일 겁니다. 하지만 이상이 생길 것 같으시면 곧바로 조치를 취하셔야 합니다.”
‘얘는 못하는 말이 없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럴 게 아니라 지금 당장 그 모습부터 바꾸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제한 시간이 있다고는 하나… 그 힘은 틀림없이 부길드마스터의 정신을 갉아먹을 겁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아직까지는 여유가 있어요. 혜진 씨가 와서 조금 안심이 되기는 하지만, 저는 이곳에 있는 모두와 함께 빠져나가고 싶습니다.”
“위원… 위원장님.”
“저희는 걱정하실 필요 없으십니다, 위원장님.”
“부길드마스터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저희의 안전은 아무렇지도 않게 내놓을 자신이 있습니다. 저희의 본래 역할을 생각하시고 부디 자신의 몸을 소중히 여겨주세요.”
“저희가 목숨을 던져서라도….”
‘그러니까 너네 목숨 안 던져도 된다고… 얘들 도대체 왜 이래. 너희가 얼마나 중요한 자원인데….’
“…….”
“…….”
“…….”
“후우… 제한 시간은 두 시간 반으로. 약속하는 겁니다. 만약 그래도 그 상태가 유지된다면 제가 직접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네, 오히려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아마 김현성이라면 말도 안 된다며 성화를 내지 않았을까.
쓸모없는 설정까지 만들어 길드원들을 안심시켰지만, 그래도 둠기화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것이 바로 김현성이었으니까.
오히려 원인 제공자였던 정하얀은 은근슬쩍 이 모습을 원하는 것 같았지만, 우리 사랑스러운 회귀자는 트라우마를 넘어 기벽까지 생성됐을 정도로 이 모습에 민감해졌다.
아니, 애초에 김현성이 있었다면 이런 모습을 유지할 필요도 없었으리라.
조혜진이 강하기는 하다만 어디까지나 인간계에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던가.
지금도 계속해서 화력을 퍼붓고 있는 저 반동 놈 쉐끼들은, 김현성의 등장과 함께 사지가 분할되고 땅바닥을 뒹굴게 될 확률이 높다.
객관적으로 말하건대 조혜진 홀로 저 악마 계약자 놈들을 모두 상대하는 것은 무리다.
그녀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둠기영과 함께하겠다고 잠정적으로 합의한 것이 아닐까.
나 혼자였다면 그녀 혼자 구출에 성공할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은 딸린 입이 한둘이 아닌 상황이지 않은가.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건 무린가.’
지금 길을 열고 있는 것을 보면 가능할 것 같기도 하다.
명실상부 파란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강자.
명실상부 무력 순위 1, 2위, 이미 인간으로 분류하기 힘든 김현성과 정하얀을 제외하고서는 파란에서 가장 강하다 해도 무리가 없는 인물.
대륙을 전부 뒤져봐도 이 정도로 창술에 조예가 깊은 사람은 없다.
우리 현성이가 괜히 그녀를 불러와 캐스팅한 게 아니다.
‘와, 쟤 진짜 잘 싸운다. 진짜 잘 싸워.’
항상 간결하게 일을 처리하는 김현성에 비해서 동작이 크다는 느낌이 들기는 했지만, 그만큼 화려해 보이게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마법을 어떻게 흘릴 수 있을까.
아까도 이해가 되지 않은 장면이 많았지만, 지금은 더욱더 이해가 되지 않는다.
처음 조혜진에게 화력을 집중했었던 반동분자들 역시 이대로라면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마법을 범위형으로 전환한 지 오래.
한 곳에 힘을 집중하지 못한 방사형 마법은 아군에게 커다란 대미지를 주지 못하고 있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커버할 수 있지.’
이미 인간을 벗어난 놈들을 상대하는 만큼, 집중형은 뼈나 촉수로 막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한 곳에 집중하지 않는 저런 종류의 마법은 충분히 막아낼 수 있다.
콰아아아아아앙! 콰드드드드득! 하고 요란한 소리를 내고는 있지만, 아군 진영 전체를 감싸 안은 뼈의 갑옷은 쉽사리 부서지지 않았다.
빠져나가기 힘들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건만, 의외로 무척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그 와중에도 역병 유령들이 스멀스멀 날아다니며 적들에게 대미지를 주고 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힘내라, 얘들아. 어이쿠! 그래 잘하고 있다. 잘하고 있어.’
같이 죽자고 달려들었던 녀석들에게 변화가 생기고 있었다.
‘장기전을 바라보겠다, 이거네.’
급하게 병력을 운용하여 틈을 보이느니 끝까지 발목을 물어뜯는 것을 선택한 것이 분명해 보인다.
“급하게 달려들지 마. 이점을 우리 쪽에 있다. 약한 부분부터 공략하면서 최대한 갉아먹는다. 창잡이는 무시해.”
“창잡이는 무시하고 후방을 노린다. 전위들은 창잡이를 막아내는 데 집중하고 직접 공격은 자제한다. 최대한 움직임을 제한시키는 것만 생각해! 저주나 디버프 중첩시켜. 묶어놓고 후방을 노린다. 후방을 노려!”
‘그래, 그렇게 더럽게 나올 수밖에 없겠지 뭐.’
“정화 주문으로 혜진 씨에게 쏟아지는 저주만 해제해 주세요. 제가 말씀드린 저주만 해제해 주시면 됩니다. 신성력은 최대한 아끼는 게 좋으니….”
“죄, 죄송합니다… 부길드마스터.”
“아니요. 여러분들이 죄송할 일이 아닙니다.”
‘마음의 눈이 이래서 좋아.’
조혜진에게 어떤 종류의 저주들이 쏟아지는지 눈에 보인다.
‘이동 속도 감소는 해제. 근력 감소는 조금 더 두고 봐도 될 것 같고… 무력화 저주 저것도 해제. 정신계열도 모조리 해제. 아니, 쟤는 정신력 단단하니까… 신성력을 조금 더 아끼는 게 좋으려나.’
이런 종류의 수 싸움에서 잘 버틸 수 있게 되니까.
‘후방 향해서 암흑 계열 주문 다수. 이건 내가 막으면 되겠고, 왼쪽으로 치고 들어오는 병력은 박리안이 마크, 구석에서 큰 주문 외우고 있는 놈은 화살이랑 원거리 공격으로 견제, 이것도 내가 할 수 있겠는데.’
명령에 잘 따르게 훈련된 병력 역시 현재 상황을 잘 풀어나갈 수 있게 해주는 요소 중에 하나.
내 말에 그 어떤 의문도 품지 않고 믿음으로 움직이고 있다.
어째서 저쪽에 원거리 견제를 해야 하는지, 어째서 왼쪽에 더 힘을 줘야 하는지 스스로 판단하지 않는다.
완전히 이쪽에 자신들의 운명을 맡긴 것이다.
‘이게 맞아.’
어떻게 생각해도 이 방법이 가장 합리적이지 않은가.
이런 정신없는 상황에서 전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기가 쉬운 것은 아니지만, 마음의 눈이 쏟아내는 정보는 그걸 가능하게 만든다.
보라.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성과가 올라오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않은가.
‘상대 병력 리타이어 13명 정도….’
약 50명 정도에서 13명이 줄었다. 이쪽은 친위대 한 명도 죽지 않았고 말이다.
저들이 힘에 익숙해지지 않은 까닭이기도 했지만, 전력적으로 우리가 열세라는 걸 고려해 본다면 족히 대승이라고 불러야 함이 옳다.
딱 이대로만 흘러간다면 누가 승자의 자리에 서게 되는지는 뻔했다.
‘이렇게만 가자, 이렇게만….’
“포기하지 마라! 결사단 동지들아, 절대로 포기하지 마. 우리가 어떤 한을 품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저 더러운 사기꾼에게 깨닫게 해야 한다.”
“움직여! 움직이자! 마법을 시전하다가 죽어도 좋으니 계속해서 퍼부어! 멈추지 마라! 손을 쉬지 마. 계속 움직이면서 압박해!”
“제기랄, 어째서… 어째서 닿지 않는 거냐. 어째서… 어째서!”
“우리가 여기서 전부 죽더라도 기필코 네놈만은 데려가고 말겠다. 기필코 네놈만은 데려가고 말 것이다.”
여기서 한마디 정도는 박아주자.
“대륙의 빛은 꺼지지 않습니다. 당신들이 아무리 빛을 꺼트리려고 한들, 절대로 꺼지지 않아요.”
“그… 모습으로 잘도 지껄이는… 크억.”
‘촉수 형, 개이득.’
점점 더 초조해지는지 상대적으로 얇아진 방벽, 조금씩 이성을 잃어가는 악마 계약자들.
적 진영 내부에서도 뭔가 다른 선택을 해야만 하는 시점이다. 예상대로 아껴왔던 상급 언데드를 투입시키는 게 눈에 보인다.
‘할 줄 아는 게 이것밖에 없나 보네.’
물론 저건 눈속임.
지금 와서 언데드들을 투입시킨다는 건 시간을 끄는 것 외에는 다른 목적이 있어서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었으니까.
예상했던 대로 더 이상 전투를 진행할 수 없다고 생각한 계약자들의 마력이 폭발적으로 팽창하기 시작했다.
‘이건… 화력이… 아까랑 다르겠는데.’
하지만 굳이 정면으로 받아낼 필요는 없다.
폭발 시점까지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충분히 해볼 만한 도박.
리타이어한 13인의 결사단이 의미 없는 폭탄 테러를 준비하는 동안 남은 인원들도 이곳은 빠져나가고 있지 않은가.
필연적으로 생긴 공간을 가리키자 이미 길을 뚫어내고 있는 조혜진이 눈에 보였다.
“빠져나갑니다. 지금 빠져나갈 수 있습니다.”
“네.”
“박리안 씨도 지원해서 길을 여세요. 마법사들은 폭발 피해를 최소화시킬 수 있는 방어 마법에 집중해 주시고요.”
“빠져나가! 지금이야! 위원장님께서 지금이라고 말씀하셨다. 발을 쉬지 마! 달려!”
“밀어! 밀어어어!”
“크아으아아아악!”
‘븅신들.’
“제기랄! 저거 막아! 저거 당장 막아!”
“저희까지 폭발에 휘말릴 겁니다. 이미 늦었….”
“제기랄! 빠져나간다! 더러운 사기꾼 무리가 빠져나간다! 지금 당장 막아!!”
후드드드드득.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달려요! 달려! 달립니다! 달려! 혜진 누나 달려! 달려! 누나아아! 달려!”
콰지지지직! 콰아아아아아앙!
‘중첩, 중첩, 중첩.’
콰드드드득! 퍼어어어엉! 퍼어어어어엉!
달리면서도 계속해서 주문을 외운다.
당연히 이동 속도가 느린 이쪽은 조혜진이 반쯤 업고 뛰는 중. 모양새는 제법 추하지만, 효율은 나온다.
출구 쪽으로 터져 나오는 폭발의 영향을 막아내기 위해 만들어진 뼈의 방패가 허무할 정도로 쉽게 박살이 났지만, 새로운 방패가 빈자리를 계속해서 메운다.
폭발 속에서 간발의 차로 빠져나가는 주인공 일행.
이 황당한 클리셰를 담은 헐리웃 영화들을 지금까지 얼마나 비웃었던가.
막상 내가 그 자리에 있으니 그저 다행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폭음과 연기로 뒤덮인 곳을 간신히 빠져나가자, 굉장히 오랜만에 맡는 듯한 바깥 공기 냄새가 코를 찌른다.
미처 주변을 둘러보기도 전에 들려온 목소리는 가관.
이 청사 안에서 마무리를 짓고 싶었던 녀석들의 계획에는 없었던 외침이었겠지만, 저들로서는 최선이기도 한 절규였다.
“보… 보… 보라! 이 모습을 봐라! 대륙인들이여! 이것이 바로 네놈들의 빛의 헌신이라고, 베니고어 여신의 재림이라고 말했던 명예 추기경의 진정한 정체다. 그는 악마와 계약해 대륙을 기만하고 있으며, 이에 우리 결사단은 우리가 살아갈 이 땅을 위해, 당신들이 살아갈 삶의 터전을 위해. 진정으로 자유롭고, 정의로우며 평등한 사회를 위해 목숨을 걸고 이 자리에 있다.”
‘…….’
“믿기 힘들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말하는 것은 절대로 대륙에 밝혀지지 않은 진실이며, 어둠이다. 이기영 위원장은 대륙의 독재자이며 모두를 속이는 사기꾼이자, 기만자다. 그래, 그는 기만자다! 두 눈을 들고 똑바로 직시해라. 이 가면을 쓴 모습이 이 자의 진짜 모습이다!”
‘여기 설득력 없는 설득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역할에 너무 취하신 것 같네. 아저씨 정신 차려요, 진짜.
청사를 빠져나온 순간부터 이 자식들은 악마계약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사실 굳이 내가 나서서 변명할 필요도 없다.
직업 전환을 미리 하지 못한 건 아쉬웠지만, 그래도 나는 우리 사랑하는 대륙인 여러분들을 믿고 있으니까.
‘어느 쪽이 진짜 악인지는 우리 국민 여러분이 판단해 주실 겁니다.’
꼴에 어두운 기운을 모두 숨긴 결사단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혹시 모르니 각혈 정도는 해주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