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4
회귀자 사용설명서 574화
시위(2)
‘이 새끼 무슨….’
분명히 어디선가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다.
오지랖이 넓은 녀석의 성격상 내가 있는 곳으로 조용히 올라오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무리수였으니까.
‘시바….’
하지만 고작해야 동네 이장이 내려주는 심부름 같은 퀘스트를 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던 것이 사실.
어느새 메인스트림에 해당되는 큼지막한 곳의 중심이 되어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머리에 붉은 띠를 감은 채 군중들을 사로잡는 모습은 가관이었다.
아니, 마법사는 또 어디서 구했는지 모르겠다.
민주투사 바쿠더쿠인지 아니면 물리 마법의 바크 세르게이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덥수룩한 수염이 녀석의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는 것.
터질 듯한 근육으로 덮인 상체는 누가 봐도 고된 일로 만들어진 것만 같은 노동 실전 근육이다.
저 새끼는 300m 떨어진 곳에서 확인해도 5현장에서 오랫동안 일해온 토박이로 보일 것이다.
그 옆에 함께 있는 아르기르모는 또 어떠한가.
녀석 역시 굳은 얼굴로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부패한 권력의 군대와 대치하고 있었다.
‘김예리 쟤는 또 왜 저기에 있어? 아니, 시바. 다들 저기서 왜 정모를 하고 있는 건데? 한 날, 한 시에 저기서 모이자고 약속이라도 했어?’
매혹의 춤, 예트니코바.
조혜진, 김현성과 함께 합동 훈련소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그녀는 어느새 노동자들을 아끼는 투쟁의 여신이 되어 있었다.
‘쟤네들은 그냥 못 뭉쳐 다니게 해야 돼. 아주 신났네.’
하지만 이미 똘똘 뭉쳐 있는 그림이 보인다.
아직 확실치는 않았지만, 태업의 형태를 띠던 게 어째서 갑자기 이런 시위로 전환되었는지 이해되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올랐던 5현장이, 뭉칠 수 있는 구심점을 만나, 들고 일어선 게 분명하리라.
미하일 이 새끼도 얼마나 당황했을까.
지가 살기 위해 어떻게든 이번 일을 수습하려고 했건만, 어처구니없게 일이 커져 버렸으니 지금쯤 불안함에 덜덜 떨고 있지 않을까.
물론 이 사태에 기분이 나쁜 것은 녀석뿐만이 아니었다.
‘하, 이거 시바….’
기왕이면 조용히 처리하는 게 베스트라고 생각한 그림이 망가져 버렸다.
나는 그나마 고개를 끄덕일 수준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까지 열심히 노력했던 이지혜의 표정이 구겨진 것은 당연지사.
물론 그녀가 한 일이 전부 쓸모없는 일이 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런 식으로 일을 해결할 거였다면 굳이 여러 가지 내용을 수집하고 파고들어 기소, 재판, 소환 준비를 하지 않았어도….
‘별로 상관없었겠지.’
지난날의 고생이 생각났는지 볼살이 파르르 떨린다. 최대한 조용히 일을 처리하기 위해 뛰어다녔던 이지혜의 지난날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지금까지 이지혜가 무섭게 느껴진 적은 없었지만, 지금의 이지혜는 조금 무섭다.
소식을 전하려고 찾아온 전령 역시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느꼈는지 조용히 집무실을 나가 버렸고.
“씨발!! 씨발!!!”
콰직!
하는 소리와 함께 이지혜가 유리컵을 바닥으로 집어 던졌다.
보여줘선 안 되는 모습을 보여줬다고 생각했는지, 잠깐 내 눈치를 살피기는 했지만, 이미 전부 목격한 이후다.
안 그래도 평상시 이미지 관리에 신경 쓰던 그녀였다. 지금 모습이 얼마나 의외였는지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할까.
“손이 미끄러졌네요.”
“아, 응.”
‘성질이 있기는 있네.’
깜빡 잊고 있었지만, 확실히 1회 차 가면녀 짬밥이 어디로 가는 것은 아니다.
아마 혼자 있었다면 방 안에 있는 물건들을 전부 박살 내지 않았을까.
“크흠….”
“진짜로 손이 미끄러졌을 뿐이니까. 마음에 담아두지 마세요. 방금 본 건 잊는 게 좋겠네요, 오빠.”
“아, 응….”
“저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영상 보고 계세요.”
“알겠어.”
자신의 나이가 더 많다는 것조차 숨기려고, 이쪽을 꼬박꼬박 오빠라고 부르는 이지혜였으니, 자신도 모르게 벌인 작은 사건에 당황할 만도 하다.
머리를 식히려고 화장실에 간 건지, 미처 풀지 못한 분을 풀러 간 건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일단 흘러나오는 영상에 집중해야 될 것 같아 시선을 고정시켰다.
대치하고 있는 노동자들과 현장 경비대원들.
커다란 구호를 외치는 이들은 절대로 물러서지 않겠다는 단호한 얼굴로 전방을 응시하고 있었다.
-우리는 노예가 아니요!
-우리는 노예가 아니다!
-정당한 권리를 요구해야 한다니까! 미하일은 각성하라! 각성하라!
-각성하라! 각성하라!
-임금 및 복지 지원금이 다른 곳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다는 정황이 있었다니까. 다른 지역에서는 다 받을 수 있는 기본적인 복지들을 어째서 우리 현장에서만 찾아볼 수 없단 말이요! 현장 관리자는 지금 당장 자금이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니까!
-공개하라! 공개하라!
-미하일은 처벌되어야 한다니까!
-처벌하라! 처벌하라!
-지금 당장 우리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니까!
-각성하라! 각성하라!
-우리는 노예가 아니요!
-우리는 노예가 아니다!
‘시바, 이거 생각보다 센 거 같은데….’
이미 분위기가 달아올라도 단단히 달아올랐다. 시위 초기라고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단합력 역시 눈에 띈다.
분노한 노동자들이 계속해서 소리치고 있었고 당연히 작업은 중단되어 있다.
어서 빨리 자기 위치로 돌아가라고 외치는 현장 경비대원들도 무척이나 당황한 모습이다.
하지만 태업하던 노동자들이 잠자코 돌아갈 리가 없지 않은가.
저 자리에 서기까지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렸던 만큼 시위대 역시 결코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지금 당장 불법 시위를 해산하고 정해진 위치로 돌아가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돌아가지 않을 거요!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시위에 참여하신 노동자 여러분들은 지금 당장 불법 시위를 해산하고 정해진 위치로 돌아가 주시기 바랍니다. 더 이상의 시위는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에 반하고 있다고 판단, 강제 해산 조치하겠습니다.
‘무슨 시바…. 새끼야, 이거 나랑은 상관없는 이야긴데…. 위원회 핑계 대지 마라, 이 새끼야.’
-빨리 해산시켜!
-절대로 물러서면 안 된다니까! 우리의 권리는 우리 스스로가 쟁취해야 하는 거요!
-지금 당장 해산시켜! 해산시켜!
-현장 책임자는 당장 나타나서 내역에 대한 투명한 공개를 해야 한다니까!
-여러분이 지금 하고 계신 시위는 신고 되지 않은 불법 시위입니다. 대륙 보호법에 따라 지금부터 불법 시위를 강제 해산시키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경고합니다. 현 시간부로 일어나고 있는 모임을 불법 시위라고 판단 강제해산 조치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애초에 신고를 막고 있는데, 무슨 불법 시위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빨리 책임자 불러오라니까!
-뭉쳐! 뭉쳐!!!
-마법사들은 뭐 하고 있는 거야! 빨리 시작해!
-절대로 물러서지 맙시다! 우리의 뜻을 보여줍시다!
이 장면을 여기서 또 볼 수 있을 거라고 누가 상상했겠는가.
마법사들이 쏘아낸 물대포가 시위대를 정면으로 강타하고 있는 모습은 어딘가에서 많이 봤던 그 장면.
순식간에 물대포에 휘말리는 시위대의 모습, 경비대는 커다란 마차들로 시위대를 가로막고 있다.
시위대는 물대포에 맞으면서도 커다란 마차를 뒤흔들기 시작했고, 방패를 든 경비대원들이 이게 무슨 난리냐는 듯이 전방을 바라본다.
-쏴! 쏴!
이곳에 와서 수많은 공성전을 겪어봤지만, 지금 이 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공성전도 만만찮지 않은가.
아니, 오히려 더 박진감이 넘친다. 마냥 구경할 수 있는 입장이었다면 남 일 바라보듯 바라봤겠지만, 작금의 사태를 그렇게 바라볼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저딴 식으로 진압하면 어쩌자고.’
애초에 명분이 저쪽에 있는 만큼 저런 방식의 진압이 달가워 보일 리가 없었다.
혹시나 사망자라도 나오는 순간 헬게이트가 열릴 거라는 건 두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자꾸만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 혹은 대륙 보호법을 운운하며 시위대를 해산시키는 꼴은 가관이다.
저 멍청한 사태가 나 때문에 일어난 것 같은 그림이 그려지고 있다.
물론 시위대는 미하일을 겨냥하고는 있었지만, 간접적으로 피해를 볼 수도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아닌가.
물론 저 멍청한 돼지가 이런 것까지 염두에 두고 일을 벌였을 리는 없다.
아마 본인이 보기에도 문제가 있으니, 직접 해결해서 도움을 주겠다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겠지.
‘이거 가만히 있을 때가 아닌데.’
이런 식의 행태가 방송된다면 베니고어 넷의 여론도 좋지 않아질 것이다.
주위 노동자들이 영향을 받는 것도 너무나 당연한 수순이고….
“어떻게 할 거예요?”
때마침 다시 돌아온 이지혜가 슬그머니 말을 건넸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데. 수습해야지. 뭐, 어쩌겠어. 사실 이런 그림도 크게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데… 누나가 조금 짜증 나겠네.”
“아니요. 별로… 뭐. 준비한 게 다 물거품이 됐지만, 아예 망친 건 아니니까요. 곧바로 쓸 수 있는 내용이기도 하고, 별로 상관없어요. 제가 뭐, 이런 데 열 내는 사람인가요.”
‘아까 열 냈잖아.’
“오히려 잘됐어요. 이번 기회에 오빠 쪽으로 힘을 더 쏠리게 할 수도 있고… 전면적으로 나서서 수습하는 그림을 보여줄 수도 있으니까요. 작업에 제동이 걸린 게 아쉽지만,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라고 생각해요. 사건 수습하는 즉시 그 연놈들 감방에 처넣고, 노동자들에게 배상해 준 이후에 적당한 관리자 하나 집어넣으면 되겠죠. 다른 현장에 경고도 될 테고… 오랜만에 얼굴마담 할 수 있으니까, 지지율도 올라가겠네. 좋아요. 잘된 것 같네요. 네, 잘된 것 같아.”
‘아직 화난 것 같은데….’
“곧바로 나갈 준비 해요. 피드백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으니까.”
“응, 뭐… 그렇게 하자. 잠깐 복장 좀 갖추고….”
“네, 일단 즉시 현재 같은 시위 진압 행태를 멈추라고 전달할게요. 그쪽에서 얼마나 내 말을 알아들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미하일 사단에서도 냄새 맡지 않았을까요? 곧 위원장님이 행차하실 텐데, 이거를 그냥 두고 봐야 하는 건가, 말아야 하는 건가… 생각하고 있을 거예요. 카운트다운이 몇 시간 안 남았는데 도망치지나 않았으면 좋겠네요.”
“도망쳐 봤자 갈 곳이 어디 있겠어?”
“병력도 준비할게요. 혹시 모르니까.”
“응, 여론 반응은 확인해 봤어?”
“좋을 리가 있나요. 아직은 미하일에 대한 부분이 상당한데… 이건 책임을 아예 안 질 수는 없겠는데요. 그래도 쉴드 쳐주는 사람들이 많아서 괜찮을 것 같아요. 일단 빨리 가죠. 4번이랑 5번에서도 병력 지원 요청해 놓고… 그리폰 타고 열심히 가다 보면 비슷하게 도착할 거예요.”
실제로 먼 거리지만, 그리폰을 타고 가면 금방 닿을 거리이다.
병력 전체가 그리폰을 타고 갈 수 없다는 게 문제였지만, 주요 친위대 정도는 전부 움직일 수 있으니 안전상에도 별문제는 없다.
몸이 달아오른 이지혜 역시 그리폰 위에 안착, 이륙장을 떠난 후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난장판이 된 5현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시위대는 누나가 정리해 줘. 최대한 안정시키고 말 좀 잘해줘.”
“그렇게 할게요. 안쪽은 오빠가 정리하게요?”
“그렇게 해야지.”
현장 경비대원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그리폰 부대를 경계하던 것도 잠시, 깃발을 확인하고는 곧바로 착륙장으로 안내했다.
한참이나 시위를 이어나가던 시위대 측에서도 환호성이 튀어나온다.
현재 일어나는 상황이 정리될 거라고 느끼는 것이다.
“우와아아아아아!!!”
“위원장님이 오셨다!”
“위원장님께서 우리 목소리를 들어주시려고 오셨어!”
조금 오그라들기는 했지만.
당연한 반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