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4
회귀자 사용설명서 554화
준비(1)
“물론 바깥 신의 파편이 인간의 개체수를 유지하려고 한다는 것 역시 정확하지 않습니다. 이런 말을 드리는 게 민망하지만, 당시 제가 접할 수 있는 정보가 많이 제한되어 있었던 터라… 무엇보다 마지막 순간에 남은 것이 저 혼자라는 걸 생각해 보면 진청, 그자가 거짓말을 했을 확률도 고려해야 할 겁니다. 아니면 바깥 신이 단순히 대륙을 관리하는 것에 염증을 느꼈을 수도 있고요.”
“마지막 순간이라면….”
“아무것도 없는 대륙 위에 홀로 남겨진 적이 있었습니다.”
“네?”
“…….”
“…….”
“역시… 기억 못 하시는군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아무것도 아닙니다.”
살짝 아쉽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김현성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무의식 세계에서의 일을 기억해 줬으면… 하는 표정이었지만 일단은 숨기는 것으로 결정을 내리자.
어차피 내가 기억하느냐, 못하느냐 여부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으니까.
기왕이면 혼자만의 추억으로 남겨놓는 편이 더 좋다. 기억한다고 하면 이것저것 설명해야 할 부분이 늘어날 수밖에 없으니까.
머릿속으로 계속해서 상황을 정리하는 중에도 중간중간 의문점들이나 새로 알게 된 흥미로운 부분들이 밟힌다.
대표적으로 대륙에 김현성이 홀로 남은 일이나 바깥 신의 파편과 가면 쓰레기의 관계 같은 것들 말이다.
김현성조차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 일도 꽤 있었기 때문에 더욱더 의문이 남았다.
“일단은 일어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밤새 이야기를 들어주시느라 많이 힘드셨을 텐데, 너무 피곤하시면 오늘은 주무시고 가셔도….”
“아뇨, 다른 길드원들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천천히 이동하면서 바깥 신의 파편이라는 것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시내로 나가 식사라도 하면서요.”
“아! 네, 그렇게 하는 게 좋겠군요.”
‘정보.’
“사소한 것이라도 괜찮습니다. 꼭 이야기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물론입니다. 오히려 제가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확실히 김현성은 속이 확 뚫린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녀석도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일이라고 판단해 내게 상담을 요청해 온 것이겠지만, 무의식 세계에서처럼 짐을 내려놓은 듯한 표정이었다.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알지만, 이걸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바로잡아야 할지는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을 테니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게 당연하다.
아마 우리 사랑스러운 회귀자 같은 경우에는 ‘무력을 키워야 한다. 모두를 지킬 수 있도록 더 강해져야 한다’라고 생각하는 것 정도가 한계였을 것이다.
어떤 식으로 위협에 관해 설명해야 하는지, 정확히 어떻게 대비해야 하는지, 그림이야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었겠지만, 그건 녀석의 전문 분야가 아니지 않은가.
정말로 속이 후련하다는 표정에 내가 다 기분이 좋아질 정도였다.
“일단 생김새를 설명하자면 이질적이라는 말이 어울릴 것 같습니다.”
“이질적이요?”
“네, 뭐라고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이질적입니다. 엘프들이나 다른 이종족들처럼 종족이 다르다는 느낌보다는 설명하지 못할 경외감을 느끼게 합니다. 마치 현세로 내려온 신들처럼 말입니다. 물론 그와도 다른 느낌입니다. 베니고어 님이나 다른 신들이 그나마 인간에 가깝다고 한다면, 그는 조금 더 고차원적인 느낌의 생물이라고 부르는 게 알맞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진청, 그자 말고도 그를 추종하는….”
“있었습니다. 인류를 저버리고 그자를 추종하고 신봉하는 이들 말입니다. 그들 자신을 신의 사도라고 부르며 바깥 신의 뜻에 따라 대륙에 영향력을 행사했었습니다. 물론 그 정점에 선 것이 바로 진청이었고요. 지금의 기영 씨가 베니고어 교단을 대표하듯이 그자 역시 바깥 신의 교단을 대표하는 상징이었습니다.”
‘신성을 모아준 거라고 봐야 되나?’
그렇게 생각해도 별 무리가 없을 것 같았다.
‘이 새끼는 완전히 카멜레온이네.’
여단 다음에는 교단, 사막 한가운데 떨어뜨려 놓아도 살아남을 새끼라는 건 확실하다.
아무튼, 여기서 알 수 있었던 것은 녀석 역시 신성이 필요하다는 것. 애초에 신들에게 있어서 신성은 힘이자 돈이며 모든 것이다.
녀석의 진짜 목적이 대륙의 관리든 대륙의 파괴든 간에, 신성을 필요로 한다는 건 변하지 않는다.
‘으음….’
예상하건대 추종자들을 통해 신성을 모으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으리라.
김현성이 앞서 묘사한 대로 녀석은 신성을 뿌리고 다니는 신이었으니까.
그 베니고어조차 실제로 보면 정체를 알 수 없는 경외심을 느끼게 한다.
김현성이 그렇게 느낄 정도이니 바깥 신의 파편인지 뭐시기인지도 어련할까.
단순히 겉모습만으로도 대부분 인간에게 알 수 없는 감정을 품게 하기에 충분하다는 거다.
이를테면 사이비 종교에 특화된 외관, 신성을 뿌리며 ‘믿습니까.’를 외친다면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은 쉽게 걸려들 확률이 높다.
거기에 진청 쓰레기의 특기라고 할 수 있는 선동과 날조가 조미료처럼 뿌려지면 인간 몇 속이는 건 일도 아니다. 그에 상응하는 무력을 갖추고 있다면 더욱더.
‘너무 쉬웠겠는데.’
인류의 일부만 추종자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이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혼자 내려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를 따르는 이들 역시 있었고, 외관은 천사의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심지어 신의 군대까지 보유하고 계셨단다. 입을 털기에 최적의 상황이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다.
김현성은 그 외에도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을 하나하나 풀어내기 시작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걸 쏟아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정보를 대략 정리해 보자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으리라.
1. 녀석의 정확한 목적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표면적으로 내세우고 있는 목적은 인류의 개체수 감소를 통한 관리이며, 외부 신이 대륙을 배정받지 않거나 못했다는 걸 생각해 본다면 그럴듯한 이야기다.
2. 녀석의 생김새는 기본적으로 신성을 가진 신이나 다름이 없다. 베니고어를 비롯한 다른 신들보다 더 이질적이며 인간으로 하여금 경외심을 느끼게 한다.
3. 녀석의 정확한 무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김현성조차 확실하게 알지 못한다. 짐작하기로는 현세로 소환된 벨리알 이상이라 예상하며, 준신화 등급 아래로 분류된 공격은 통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말하자면 녀석의 공략에 참여할 수 있는 인원수가 한정적이라는 뜻이다.
4. 녀석을 따르는 추종자들이 있고 인류는 그들을 천사라고 불렀다. 녀석을 보좌하는 존재들이며, 무력은 최소 도노반이나 리무르아 같은 악마들과 비슷한 수준으로 추정된다.
5. 최초로 소환된 장소는 북쪽일 확률이 높다. 최초의 빛이 북쪽에서 일어났고, 그 이후에 그들이 활동을 시작했으니까.
그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큼지막하게 분류할 수 있는 것은 이 정도가 전부다.
조금 더 세부적으로 파고들 여지가 남아 있었지만, 이건 굳이 오늘이 아니어도 들을 수 있는 이야기고, 대응할 수 있는 이야기다.
일단 이 그림에 상응하는 그림을 그려줘야 이야기가 된다.
가장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은 역시 최북단에 전진기지를 만드는 것.
‘정확하지는 않다지만,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나아.’
최초 소환된 위치를 알 수 있다는 것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이점이다.
‘회귀가 좋기는 좋네.’
물론 모든 상황이 1회 차처럼 돌아가지 않기에 제한적일 수도 있다.
아주 작은 일에도 영향을 받고 행동 방향을 바꾸는 인간군상의 경우에는 그 나비효과가 커다란 것이 사실이니까.
그것 때문에 김현성조차 이번 회차를 겪으면서 여러 가지로 혼란스러워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일어나는 것이 확정된 이번 이야기는 다르다.
녀석은 대륙의 적이었고 대륙에 소환될 존재다. 여기에는 그 어떤 나비효과가 끼어들 여지가 없다.
아주 먼 나라에서 나비 수백만 마리가 날갯짓한다고 한들, 바깥 신의 파편이 대륙의 위협으로 다가오는 것은 이미 확정된 이야기다.
‘이건 쉬울 수도 있어.’
미리 알고, 미리 대비할 수 있다. 녀석과 싸울 수 있는 병력을 양성하고 녀석을 맞이할 성벽을 쌓는다.
녀석을 카운터칠 수 있는 여러 가지 무기를 준비하고, 대륙을 계속해서 담금질한다.
최대의 난적인 진청 쓰레기마저 이미 극에서 퇴장한 상황, 1회 차보다 유리하면 유리했지 불리하다고는 볼 수 없는 형국이다.
잘 돌아가지도 않는 대가리를 계속해서 굴리자, 김현성이 조금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기영 씨. 많이 피곤해 보이시는데….”
“아, 네, 조금은 피곤합니다만 버틸 만합니다. 계속 깨어 있다 보니 배가 고프기도 하고요. 주문은….”
“식당에 들어오면서 이미 마쳤습니다. 간단하게 빵과 스튜로 했는데 괜찮으실지.”
“아, 괜찮네요.”
“아침에는 종종 드시고는 하셨으니까요. 생각에 너무 빠져 계신 것 같아 따로 물어보지 않았습니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같은 걸 시켰을 것 같아서….”
“다행이군요. 일단 생각은 잠시 넣어두시고 식사부터 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무래도 몸도 성치 않으신데 너무 무리하신 것 같아서… 제가 너무 붙잡아둔 건 아닌지 걱정됩니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조금 피곤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일반인보다는 체력 수치가 높다.
하루 정도는 밤을 새워도 문제의 여지는 없지 않을까. 피로 회복 포션을 슬쩍 들이키기도 했고….
하지만 그동안 많은 걸 눈으로 봐온 녀석으로서는 혹시라도 내가 쓰러지지 않을까 걱정스러운 모양.
본인이 밤새도록 이야기를 쏟아낸 건 기억나지 않는지 지금에 와서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게 우습기는 했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어차피 레스토랑에 들어온 이후로 저번처럼 시선이 집중되고 있었기 때문에 계속해서 이야기를 나누기에도 무리가 있다.
김현성이 마력의 장벽을 겹겹이 쌓아 놓았다고 한들, 쏟아지는 시선을 감당하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지 않겠는가.
‘여기는 아침부터 왜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돌아다녀. 우리나라 사람들 진짜 부지런하다, 부지런해.’
무거운 몸을 이끌고 일어나 일터로 몸을 옮기는 와중에도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사람들이 눈에 띈다.
너무 이른 아침이라 법으로 규정된 근무 시간을 어기고 있는 건 아닌지 내가 걱정이 다 될 정도.
분명한 것은 이곳 헤르엔은 아침부터 활기가 넘친다는 것.
파티를 구하는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있는 모습도 보였고, 식당에 앉아 하루를 시작하기 위한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모험가들도 눈에 많이 띈다.
멍하니 그들을 바라보고만 있다 보니 마침내 간단한 스튜와 빵이 나왔고 기계적으로 녀석들을 떠먹기 시작했다.
김현성이 뭐라 말을 걸어왔지만, 대부분이 영양가 없는 이야기들.
잠깐은 생각을 멈추라고 부탁받았지만, 머릿속은 1회차 생각에 여념이 없다.
‘핵심이 뭘까.’
어떻게 해야 꿀 덩어리에 퐁당 빠져 행복을 영위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었다.
‘일단 가장 중요한 건 그거네.’
이것 역시 확실하지는 않지만, 보험상 투척해 놓으면 좋을 이야기이기는 할 것이다.
‘신성.’
이번 회차에 가면쓰레기 진청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경외심에 속아 녀석을 모시는 이들이 없다고는 단언할 수 없다.
베니고어에 대한 믿음이 워낙에 확고한 교국민들이야 녀석에게 낚이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건 준비를 하는 게 맞아.’
아우터 뭐시기가 신성이 충분하든 충분하지 않든 간에 일단은 대비해야 한다. 힘을 깎을지언정 보태줄 수는 없었으니까.
대륙인들에게 이 모든 상황을 설명하지는 못하더라도 이런 녀석이 올 거라는 것은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충분한 교육과 설명이 없다면 집단 중 몇몇은 녀석에게 속아 소중한 신성을 헌납할지도 모른다.
해야 할 일이 많지만, 가장 쉬운 것부터 차근차근 해결하자.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짓자, 내가 뭣 때문에 웃는 것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김현성도 얼떨결에 미소를 보내온다.
그렇게 정확히 3일 뒤, 교국일보, 아니 대륙 전역의 언론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같은 헤드라인의 기사를 내보내기 시작했다.
[이기영 명예추기경님의 육신에 베니고어 님이 다시금 강림. “신과 천사의 탈을 쓴 고대의 악마가 대륙의 전역을 불태우고 모든 이 땅 위에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를 울부짖게 할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교국일보 김성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