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5
회귀자 사용설명서 545화
고백(2)
‘이건 됐다. 이건 무조건 됐어.’
조금 불안해 보였던 녀석의 모습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한 순간 속으로는 주먹을 꽉 쥘 수밖에 없었다.
김현성이 무척 감동한 것 같은 얼굴을 내보인 것은 당연지사, 다른 말을 할 필요도 없다.
긴가민가하던 얼굴에 어느새 확신이 자리 잡고 있었으니까.
지금 김현성이 정확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느 정도 마음이 정리된 것처럼 보이는 모습에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와인을 홀짝였다.
무의식 세계에서 일어난 일을 기억하고 있는 것은 김현성뿐이다.
아쉽게도 우리 빛기영 님께서는 후유증을 겪은 나머지, 그 아름답고 따뜻했던 장면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상황.
당시에 김현성의 감정을 흔들어 버린 대사를 이곳에서 한 번 더 내뱉는 드라마틱한 전개가 세상에 어디 있을까.
마치 처음 내뱉는 듯한 얼굴과 표정으로.
감동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는 것이 옳다. 비록 나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지만, 마음만은 똑같은 거라고, 이 사람은 확실하게 나를 믿고 있다고, 이 새끼뿐이라고, 그렇게 느끼고 있을 게 분명했다.
죄책감이 한 번 더 녀석의 멘탈을 뒤흔들 거라는 건 두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말해야 돼. 고백해야 돼.’
라거나.
‘더 이상 숨기는 건 기영 씨를 배신하는 짓이야. 오늘, 지금 당장 고백해야 돼.’
라는 생각으로 머리가 꽉 차 있는 것 같은 얼굴을 보는 것은 즐겁다.
내가 생각해도 조금 악취미 같았지만 모든 걸 바쳐 키워온 열매를 수확하게 됐으니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단언컨대 현재 김현성의 상태는 핸들이 고장 난 8톤 트럭이요, 존버 없는 비트 코인러.
더 이상 브레이크를 걸 수 있는 건 남아 있지 않다. 아마 그 누구보다 본인이 말하고 싶은 걸 참기 힘들어하지 않을까.
‘무장 해제. 무장 해제.’
“네… 그랬었죠. 기영 씨는… 네. 항상… 네.”
“네?”
“아니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그래, 현성아. 시바, 그렇게 가는 거야.’
“잠시… 잠깐만 함께 가줬으면 하는 장소가 있습니다.”
‘왔다. 왔드아!’
“어디를….”
“조금 갑작스러우시겠지만, 꼭 함께 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드리고 싶은 말씀도 있고요.”
“…….”
뒤돌아가기는 없지만, 긴장한 것 같은 모양새. 말끝이 조금 떨리는 게 느껴진다.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일어서자 녀석도 계산 후 슬쩍 몸을 일으켰다.
이윽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니 어느새 어두워진 헤르엔을 눈앞에서 바라볼 수 있었다.
곳곳에 야명주가 길을 밝히고는 있었지만 린델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두운 거리.
덕분에 하늘 위에 무심하게 떠 있는 별이 더 도드라지게 눈에 들어왔다. 분위기도 좋으니 잔잔한 음악이나 좀 깔렸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어디로 향하는 겁니까?”
“그리 멀지 않은 곳입니다.”
“…….”
‘얘, 옛날에도 이쪽에서 살았던 적이 있었나.’
도시 바깥으로 몸을 옮기고는 있지만 린델로 향하는 것 같지는 않다.
가장 많은 추억이 담겨 있는 장소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것 말고도 준비된 장소가 있는 모양.
‘이 새끼 시간 끄는 건 아니지?’
그렇지는 않다. 걸음걸이가 조금씩 느려지고 있는 걸 보면 아직도 무서워하는 것 같았지만, 김현성은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아니나 다를까 천천히 빌드업을 하는 모습, 불안한 얼굴로 입을 여는 녀석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마 모… 르고 계셨겠지만, 사실 기영 씨에게 사과드려야 할 일이 하나가 더 있습니다. 전에 말씀드린 것 이외에 다른 이유로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저는 잘… 사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마 믿지 못하실 겁니다. 깜짝 놀라실 수도 있고요. 어쩌면 저에게 실망하실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제 모든 걸 걸고 말씀드리건대, 제가 이 사실을 숨긴 것은 절대로 기영 씨에게 다른 뜻이 있거나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래, 그래. 다 이해해 줄 수 있다, 현성아. 내가 너를 이해하지 누가 너를 이해하겠어. 그리고 형은 다 믿을 수 있다, 인마. 다 믿어줄게.’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너무… 그리고 숨기신 일이라니… 굳이 그런 걸 말씀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제게 모든 걸 공유할 필요도 없고요. 현성 씨가 개인의 문제를 숨긴다고 해서 실망하거나 다른 생각을 하게 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저 역시 말씀드리기 곤란한 일들 몇 가지 정도는 가지고 있습….”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네, 그렇게 간단한 일이었다면… 기영 씨가 말하기 곤란한 일과는… 종류가 조금 다를 겁니다.”
‘내가 숨기고 있는 이야기를 들으면 넌 아마 기절할 거다….’
“부디 당황하지 마시고 차분히 이야기를 들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래, 그러니까 빨리 이야기해. 빨리.’
이윽고 녀석과 함께 도착한 곳은 작은 집, 한 가족이 겨우 살 수 있을 것 같은 집이었다.
헤르엔 근교에 있는 작은 마을, 그곳에서도 조금 떨어져 있는 집을 보니 어째서 김현성이 나를 여기로 데려왔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여기 있었네.’
시기가 정확히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김현성은 이 장소에서 지낸 적이 있었다.
‘숨어 살기라도 했었나?’
어차피 곧 듣게 될 테니 추측할 필요도 없다.
김현성은 제법 굳은 얼굴로 오래된 집의 문을 열었다. 오랜 시간 사람이 살지 않은 것치고는 말끔하게 정리된 것 같은 장내.
녀석은 아무 말 없이 집 안으로 먼저 들어가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떨리는 손과 얼굴 그리고 입.
그러더니 갑자기 벌떡 일어나 간단하게 마실 수 있는 차를 준비한다. 그 모습이 생소하다.
벽난로의 불을 때우고 야명주가 없는 집 안을 밝힐 초를 켠다.
전체적으로 산만하게 움직이는 게 눈에 밟힌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와서 포기하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이 들어 도움을 줄까 싶었지만, 별다른 도움이 필요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괜찮은 집이네요, 여기는….”
“예전에 잠깐 살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네?”
“몇 개월. 잘은 기억이 안 납니다만, 딱 그 정도 살았던 거로… 기억합니다.”
“…….”
의문스러운 표정을 띄우는 것은 당연했다. 이곳에 들어온 이래로 김현성과 나는 단 한 번도 떨어진 적이 없었으니까.
물론 서로 해결해야 할 업무를 위해 떨어져 있던 적은 있지만, 그렇게까지 긴 시간을 떨어져 지낸 기억은 없다.
놀란 표정을 보이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 되물으려는 찰나, 지금은 아무 말도 하지 말아달라는 김현성의 표정은 나를 움직이지 못하게 만든다.
‘계속 듣는 게 맞지.’
이제야 풀기 시작한 이야기보따리를 다시 묶을 정도로 나는 어리석지 않다.
그런 내 반응을 본 김현성 역시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는 마찬가지, 살짝 안도의 한숨을 내쉰 후에 다시금 말을 이었다.
다짜고짜 회귀자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의 김현성을 생각해 보면 조금 의외라고 할 수 있는 튜토리얼 던전 때의 이야기였다.
“저는 조금 못난 사람이었습니다.”
“…….”
“튜… 튜토리얼 던전에서도….”
“…….”
“싸우지 않았고… 그저 몬스터들을 피해 다니기 바빴습니다. 당시에 제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힘든 일이었습니다. 많은 사람의 죽음을 지켜봤고 도와달라고 말하는 이들을 외면하고 도망쳤습니다.”
“무슨 말씀을….”
“제가 버리고 온 이들의 얼굴을 제대로 기억할 수도 없… 없습니다. 그저 살아남아야겠다는 생각으로 머리가 꽉 차서 고의로 다른 이들의 죽음을 바라본 적도 있었습니다. 그들을 죽음으로 내몬 적도 있었습니다. 벽 하나를 두고 죽어가는 사람들의 비명을 들으며, 나는 살았다고, 살아남았다고 안도의 한숨을 내쉰 게 몇 번인지 제대로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의외네.’
무척 의외다.
‘그게 마음속에 남았던 건가?’
확실하지는 않다.
하지만 가능성은 있다.
김현성이 사람 좋은 것은 맞지만, 무골호인은 아니다. 무조건 퍼주는 성격은 더욱더 아니었고….
지옥 같았던 1회 차에서 살아남고 본의 아니게 다시 시작해야 했던 녀석의 인간성이나 감정이 마모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실제로 우리 사랑스러운 회귀자의 감정은 빛기영의 빛을 쐬기 전까지는 상당히 마모된 상태였었다.
필요하다면 사람을 죽이는 것도 개의치 않았고, 도덕적 잣대보다는 개인과 파티의 이득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성격이었다.
‘이해가 안 되기는 했지.’
아직 빛을 쐬기 전이었던 2회 차 초반의 김현성이 어째서 쓸모없는 놈들을 모아놓고 생존캠프 놀이를 했는지.
왜 굳이 생존자들을 구하러 다녔던 건지.
정하얀이나 살인마 정진호를 찾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어쩌면 1회 차의 영향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지금처럼 사람들을 이끌고 던전을 공략한 게 아니라.’
계속해서 도망치고, 도망치고 또 도망쳤었다.
어째서 이곳에 떨어졌는지 이유도 모른 채로 살아남아야 했던 평범한 20대가 보여줄 수 있는 반응이다.
검을 든 순간 몬스터들을 도륙 내며 ‘어이, 이게 내 숨겨진 힘이다’라고 지껄이는 것보다는 설득력 있다.
‘이거 재미있네.’
무척 재미있다.
김현성이 1회 차의 튜토리얼 던전에서 본의 아니게 죽음으로 내몬 사람 중에 나와 박덕구가 포함되어 있었을지 누가 알겠는가.
“운이 좋아서 살아남기는 했지만, 무척 힘들었던 거로 기억합니다.”
“현성 씨. 죄송합니다만… 어떤 말씀을 하시는 건지 이해하기 힘듭니다. 분명히 현성 씨는….”
“네, 파티원들과 함께 튜토리얼 던전에서 공략조로 참여했었죠. 하지만 이전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
“혹시 시, 실, 실망하셨습니까.”
“아니요. 잘 이해되지는 않지만… 그게 일반적인 반응일 테니까요.”
‘내가 피해자였으면 조금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다행이군요.”
조금은 안심한 듯한 얼굴, 김현성이 고민한 것 중에는 이런 부분도 포함되어 있었나 보다.
‘형 앞에서는 착하게 보이고 싶었어? 우쭈쭈.’
“그보다… 이전이라고 하면 도대체 언제… 인지. 혹시 튜토리얼 던전을 두 번 경험하신 겁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두 번 경험한 것이 맞지만, 기영 씨가 생각하는 형태가 아닐 겁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저는….”
“…….”
“저는 기영 씨를 만나기 전에 이 세상을 한 번 더 경험해 본 적이 있습니다.”
“…….”
“…….”
“…….”
“저는 회귀자입니다.”
저도 모르게 주먹이 꽉 쥐어진다.
하지만 섬세한 표정 연기를 잊을 리가 없다. 도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는 듯 김현성을 바라본다.
회귀자의 눈은 흔들리지 않는다. 자신의 말을 믿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조금씩 조금씩 과거를 회상하는 것 같은 표정, 무슨 표정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김현성은 알고 있을 것이다.
실제로 나는 일반인의 관점에서 녀석이 미래를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정황을 되짚어보고 있었으니까.
이다음은 믿을 수 없다는 반응, 그다음은 김현성이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다는 반응이다.
시시각각 변하는 내 표정을 바라보며.
우리 회귀자는.
덜덜덜 손을 떨고 있을 뿐이었다.
“저는… 저는 회귀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