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2
회귀자 사용설명서 542화
진심 어린 사과(2)
“오, 오, 오빠. 오늘 어디 나가세요?”
“아, 현성 씨랑 같이 볼 업무가 좀 있을 것 같아서… 왜?”
“아니요. 그냥….”
“조금 급한 일인 것 같더라고… 나도 웬만하면 하얀이랑 같이 시간 좀 보내고 싶었는데, 타이밍이 안 맞았네.”
“정, 정말요?”
“그럼. 모처럼 거울 호수에 왔는데 덕구 말처럼 간만에 데이트 좀 하려고 했지. 이야기할 것도 많고… 둘이 시간 보낸 지 오래됐으니까. 아쉽게 됐네. 미안해. 대신 돌아오면 꼭 같이 돌아다니자.”
“아, 아니요. 오늘은 저도… 시간이 없어서… 현성이 오빠가 시킨 일이 조금 많거든요. 다른 길드원들이랑 같이 거울 호수에 대한 보고서 작성하고 근처 던전이 있는지 수색 나가게 됐어요. 오빠만 명단에 빠, 빠진 것 같아서…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예요.”
“근처 던전?”
“네. 추가 던전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혹시 유입된 몬스터가 있는지도 확인해 봐야 하고요. 저도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생각보다 후처리할 일이 많은 것 같아서….”
‘김현성 이 새끼. 마음을 먹어도 단단히 먹었네….’
굳이 다른 길드원에게 쓸데없는 업무를 맡긴 것을 보니 오늘만큼은 방해받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모양인 것 같았다.
길드 내에 있는 공략 후 조사팀에게 일을 맡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길드원 전원에게 이런 명령을 내린 건 어떻게 봐도 노골적이었다.
물론 던전의 등급이 등급이니만큼, 길드 직원들에게 맡기기 어려운 일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길드원 전체를 임무에 투입하는 것은 여러모로 비효율적이지 않은가.
휴가 중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생각하면 더욱더 그렇다.
덕분에 데이트가 예정되어 있다고 철썩같이 믿고 있었던 정하얀은 뜻밖의 방해를 받아버린 상황.
극대노까지는 아니지만, 충분히 중노로 분류할 수 있을 만한 사건을 아무렇지도 않게 넘긴 것을 보자, 확실히 납치 사건이 효과가 있기는 있었던 것 같았다.
‘얘가 기가 많이 죽기는 했어.’
원래도 조금 소심한 성향이었지만 조금 더 소심해졌다. 조금 더 조심스러워졌고….
더 강해져야겠다고 생각하는 건 이전과 변함이 없는지 마법에 미친 듯이 몰두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때의 죄책감이 어디로 가겠는가.
어젯밤만 해도 악몽을 꿨다고 훌쩍거리며 방 안으로 들어온 걸 보면 아직도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는 게 분명하리라.
‘덕분에 잠도 제대로 못 잤네, 시바.’
중간에 깨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일어났을 때 상쾌한 느낌이 없다. 덕분에 얼굴도 엉망이고….
슬그머니 거울을 바라보자 적당히 수척해진 것 같은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다지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괜찮기는 하다.’
왠지 모르게 마음고생을 한 것 같은 효과를 불러오고 있었으니까.
‘적당적당히 하고 가자.’
이쪽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정하얀을 애써 무시한 채로, 천천히 씻고 옷을 갈아입자 어느새 제법 시간이 지난 듯한 느낌.
길드원들은 나와 김현성이 이곳을 떠난 뒤에야 움직일 것 같았다.
다시 한번 거울을 본 이후에 항상 들고 다니던 무한의 가방을 바라봤지만, 오늘은 굳이 들고 가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녀석이 함께 있을 테니 안에 있는 포션을 사용할 일도 없을 거고, 무엇보다 네가 선물해 준 것 따위는 들고 가지 않을 거라는 액션을 선보이고 싶었기 때문이다.
“가방 안 들고 가세요?”
“응, 전투가 일어날 것 같지는 않아서… 어차피 안에 들어 있는 건 전부 연금 용품들이고.”
“언, 언제쯤 돌아오세요?”
“아마 오늘 안에는 돌아오지 않을까 싶은데… 나도 확실히는 모르겠어. 돌아오는 즉시 곧바로 데이트 나가면 되니까, 힘들더라도 조금 참아.”
“나, 나도 같이 가고 싶은데….”
‘안 돼, 하얀아. 오늘은 중요한 날이야.’
인류가 한 발자국 나아가느냐 마느냐가 달려 있거든.
“다음에 가면 되지. 하얀이는 언제 나가려고?”
“조, 조금만 더 누워 있다가 갈래요.”
“그럼 그렇게 해.”
마지막에는 꽈악 안기기까지. 인제 그만 떨어질 때가 됐다는 표현으로 살포시 밀어냈지만, 계속해서 힘을 주고 있는지 밀려나지 않는다.
오히려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킁킁거리고 있는 모습은 이쪽을 당황스럽게 만들 뿐이었다.
결국, 몇 분이 더 지난 이후에야 해방될 수 있었다. 혹여나 조금만 더 있다가 가라는 말이 나올까 싶어 황급히 로비로 나가자, 어색한 몸짓으로 나를 바라보는 김현성의 얼굴이 가장 먼저 시야에 비쳤다.
평소와 다르게 무장을 하지 않은 상태, 허리춤에 검이 달려 있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 편한 복장이기는 했다.
그렇다고 후줄근한 복장은 또 아니었는데 왠지 모르게 살짝 신경 쓴 것 같은 느낌이 낭낭했다. 전체적으로 딱딱한 느낌이라고 하는 게 맞으리라.
‘얘가 진짜 왜 이래….’
이쪽에서 원인 제공을 하기야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로 굳어 있을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경직된 돌덩이마냥 꼿꼿이 서 있는 모습을 보니 조금 안쓰러운 느낌이 들었을 정도. 살살 풀어줄까 싶기도 했지만 양보할 생각은 없다.
후에 가서는 서서히 말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게 중요하지만, 조금은 긴장감 있는 분위기 역시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먼저 인사를 건네지 않는 것도 중요.
어색하게 손을 든 김현성의 얼굴이 보이기는 했지만, 살짝 허리를 굽힐 뿐 다른 리액션을 취하지는 않았다.
“기영 씨.”
“제가 좀 늦었나 보군요.”
“아닙니다. 딱 시간에 맡게 나오셨습니다.”
“오늘 뭐 할 일이 있다고 들었는데….”
“사실 크게 중요한 일은 아니지만, 여러 가지로 상담하고 싶은 이야기도 있고 또… 사과드리고 싶은 부분도 있어서….”
“아….”
“혹시 바쁘신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요, 그렇지는 않지만….”
“…….”
“…….”
‘아… 이 새끼 답답하고 불쌍해 보이네.’
이런 표현을 사용하고 싶지는 않지만, 우물쭈물하는 모습은 커뮤니케이션에 문제가 있는 사람처럼 보일 지경.
동공이 흔들리고 있는 얼굴은 누가 봐도 불안감으로 가득 찬 얼굴이었다.
계속해서 차가운 모습을 보이고 싶었지만 이쯤 되면 다른 선택지가 없다.
“그럼 일단 나가시죠.”
“아… 네. 그렇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폰을 데려왔는데….”
“어디로 가는데 그리폰까지….”
“그리 먼 곳은 아닙니다만, 아무래도 마차로 가는 것보다는 더 빠를 테니까요.”
“잘됐군요.”
‘그래, 이 새끼야. 어디로 가는지 한번 보자.’
현재 육아를 하고 있는 화이트 폴 대신에 나와 있는 것은 이쪽이 선물로 준 검은색 그리폰이다.
앞뒤가 아니라 양옆에 탈 수 있는 안장을 올려놨었는데 마치 운전석과 조수석 같은 느낌이라 드라이브를 나가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자 녀석이 김현성을 발견하고는 총총걸음으로 발을 옮기기 시작.
김현성은 녀석을 잠깐 쓰다듬은 이후에야 자리에 앉을 수 있었는데 확실히 그리폰을 좋아하는 게 느껴졌다.
확실히 녀석의 유일무이한 취미라고 할 만하다.
마치 질 좋은 소파에 앉은 것처럼 안장도 푹신하고 심지어는 벨트까지 달려 있지 않은가.
그리폰을 운전하는 모습 역시 수준 급. 갈기를 툭툭 치자 곧바로 하늘 위로 날아오르는 녀석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커 보였던 나무와 건물과 호수가 순식간에 작아지기 시작했고, 그렇게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린델과 교국이 있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 같아 둘 중 한 곳으로 가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도착한 곳은 대도시가 아닌 작은 소도시, 린델과 교국의 사이를 잇는 작은 소도시다.
‘소도시, 헤르엔?’
딱 린델과 교국의 중간에 위치한 도시. 김현성은 모르겠지만 나는 그리 자주 들린 적이 없다.
위치가 좋다 보니 수도와 린델을 잇는 중간 지점 역할을 하고 있었지만, 아니, 정확히 말하면….
‘딱 중간 지점이라고 볼 수도 없지.’
헤르엔을 들리기 위해서는 중간으로 살짝 빠져야 했으니까.
마차를 타도 귀찮아서 들리지 않는 마당에 그리폰을 가지고 있는 이쪽이 굳이 헤르엔에 머무를 필요가 없지 않은가.
그나마 휴식이 필요한 중소 규모의 파티나, 수도로 대량의 보급품을 수출 수입하는 대형 길드들이 자주 애용하는 도시.
나름 작은 규모의 경매장을 가지고 있기는 했지만, 한 번 돌아가야 한다는 단점 때문인지 그마저도 잘 이용되지 않는 도시였다.
린델의 삼대 길드 중에서도 여성 길드원들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검은 백조 말고는 내팽개치듯이 방관만 하고 있는 지역이라는 거다.
‘박연주한테 연락 좀 넣었나 보네.’
김현성과 긴밀한 커넥션을 유지하고 있는 그분.
아무래도 수도는 너무 사람들이 많아 부담스러울 테니 그나마 소도시라고 분류할 수 있는 곳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결정한 모양이다.
‘그래, 나도 수도는 조금 그렇다.’
“헤르엔이로군요.”
“네.”
“…….”
“그… 린델 복구 작업이 조금씩 늦어지기 시작하면서 헤르엔의 규모를 조금 더 늘리기로 했습니다. 기영 씨가 그… 방에서 쉬고 계실 때 추진하고 있던 작업이었고요. 길드원들이 모두 바빠서… 제가 조금 손을 보기는 했지만, 역시 도시 사업은 조금 불안한 감이 있어서 조언을 얻고자… 그러니까….”
“아. 그런 일이라면 맡겨주셔도 됩니다. 김미영 팀장님에게 도움 좀 받으셨습니까?”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팀장님은 다른 쪽에서 일을 해주시고 계셔서 사실상….”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건지 잘 알겠습니다. 괜찮겠네요. 빨리 보고 싶어요.”
‘좋은 핑계였어. 응.’
본인이 생각해도 좋은 핑계라고 여겨졌는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지만, 이건 말 그대로 빌드업의 일환이다.
애초에 도시 사업을 내팽개치고 휴가를 갈 리가 없지 않은가. 이미 준비된 것은 물론, 시행 직전에 있는 상황이라고 하는 게 맞다.
딱 봐도 도시 자체가 어수선해 보였으니까….
아마 도시 사업을 핑계 삼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려는 게 아닐까.
미리 가져온 서류를 살짝 이쪽으로 건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헤르엔의 거리를 천천히 걸으며 한 장 한 장 문서를 읽어봤지만, 거슬리는 부분은 단 1㎜도 없다.
“일단은 주거지가 문제라는 거네요.”
“네. 수도에서 린델의 인구를 수용하고는 있지만, 아무래도 포화 상태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복잡한 상태니까요. 딱히 원성이 터져 나오고 있지는 않지만, 수도 인구가 불편함을 호소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선택하신 지역에 거주지를 두는 게 괜찮을 것 같기는 하네요. 광장을 지금보다 더 넓힌다는 아이디어도 마음에 들고요. 하지만 역시….”
“네, 아무래도 모험가들이 이용할 수 있는 사냥터까지는 제법 멀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어서 길드 자체에서 마차를 운용하기로 했습니다. 안 그래도 휴식을 위해 마차들이 자주 드나드는 장소이니만큼 시설을 굳이 새로 지을 필요도 없고요. 휴게소 같은 느낌으로 사용하기도 괜찮고… 파란 길드에서는 따로 보급품 상점을 유치할 것 같습니다. 포션도….”
‘그래, 형이 돈 좋아하는 거 아주 잘 아네. 속물이라 미안해. 그래도 기특하다, 이 새끼야.’
“포션 상점 역시 균열랜드 이후에 최대 규모가 될 것 같습니다. 조건만 주어진다면 실리아까지 이어질 수도 있을 것 같고요. 이미 타 길드와 몇몇 투자자와도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는 상태입니다.”
“괜찮네요.”
빈말로 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괜찮다. 슬그머니 입꼬리가 올라갈 정도로 말이다.
소도시 하나를 거대한 휴게소로 사용한다는 발상도 괜찮고… 헤르엔 만의 아이덴티티를 살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
돌아가는 게 귀찮아서 오고 싶지 않은 곳이라면 와서 머무르고 싶은 장소로 만들면 되지 않은가.
이 도시 사업은 그 조건에 완벽하게 들어맞고 있었다.
내가 제법 괜찮은 반응을 보이니 김현성도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아주 약간은 점수를 땄다는 걸 본인도 인지하고 있는 모습, 심지어 자신감을 되찾았는지 곧바로 말을 잇는 모습이다.
“어떻습니까. 슬슬 시간인데 식사라도 하시면서….”
“아, 네. 그러는 게 좋겠군요.”
“예약한 곳이 있습니다. 그쪽으로 가시죠.”
“네.”
시선을 계속 고정하고 있던 서류에서 천천히 눈을 뗀 것도 그즈음. 조금은 본격적으로 도시를 살펴보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고 있을 때였다.
‘뭐야… 왜들 이래.’
말 그대로 사방에서.
사방에서 시선이 쏟아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