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3
회귀자 사용설명서 533화
거울 호수(3)
이쪽의 요청대로 베니고어가 어둠 어쩌고를 성소에서 내뱉은 것은 파티원들뿐만이 아니라 교국민들의 머릿속에도 확실히 자리 잡았다.
물론 교국민들은 빛기영이 본인의 의지로 둠기영으로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지만, 파티원들을 비롯한 가까운 지인들은 대충 눈치를 챈 것 같았다.
정확히 말하면 이쪽에서 정보를 흘렸다는 게 올바른 표현이리라.
대놓고 ‘둠기화가 가능합니다. 지금부터 둠기화 갑니다’라고 밝히며 가면을 소환한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어쩌면 제정신을 유지한 채 변화가 가능할지도 모릅니다.’라고 어렵게 말을 떼며 가능성을 드러낸 것이 전부.
김현성을 포함한 길드원들의 얼굴이 구겨진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후로는 딱히 내가 작업을 하지 않아도 착착 이야기가 진행되었다.
나조차도 확신하는 말을 건네지 못한 만큼 여러 가지 추측이 나돌았고 끝에 이르러서는 자신들끼리 의견을 모으고 결론을 내기 시작했다.
그 의견들을 대충 정리해 보자면 이렇다.
1. 이기영은 준신화 등급의 직업 ‘빛의 연금술사’에서 같은 준신화 등급의 직업 ‘어둠의 역병군주’로의 전직이 가능하다.
2. 변화의 조건은 정신에 무리가 갈 정도의 마이너스 감정을 느끼는 것이다.
3. ‘빛의 연금술사’에서 ‘어둠의 역병군주’로의 직업 전환은 가능하지만, 그 반대는 여신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4. 힘을 사용하거나 오랫동안 역병군주로 지낼 경우, 이전처럼 정신이 먹힐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
5. 지금으로서는 이 저주에 대한 마땅한 해주 방법이 없다. 지속해서 멘탈을 케어해 주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다.
딱 이 정도.
노린 그대로였고, 클리셰 그대로였다.
힘을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정신이 좀먹힌다는 설정은 놀라울 정도로 캐릭터에 입체감을 부여하고 있었고, 정하얀을 비롯한 일부 사고뭉치들이 함부로 활동하지 못하게 하는 억제제 역할을 톡톡히 해주고 있었다.
마이너스 감정을 느끼면 점점 더 본신의 정신을 잃어 간단다.
이쪽의 멘탈을 케어하기 위해 별의별 이벤트를 준비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앞서 말한 대로 이 피크닉 이벤트 역시 어떻게든 플러스 감정을 느끼게 해주기 위한 이벤트일 터.
길드원들에게 휴식을 부여하고 싶다는 김현성의 의도까지 완벽하게 들어맞은 이벤트였지만, 왜인지 모르게 이쪽은 별다른 도움을 받지 못할 것처럼 느껴졌다.
슬그머니 뒤쪽을 바라보니 커다란 배가 시야에 비친다.
배다.
보트도 아니고 배다.
마차 뒤에 저런 걸 달아서 끌고 온다는 게 황당하게 느껴질 지경.
시간이 조금 지나면 적응되리라고 생각했지만, 몇 시간째 마차 여행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런 내 모습을 눈으로 직접 확인했는지 옆에 있던 박덕구가 자랑스럽게 입을 열었다. 벌써 수십 번은 더 귀에 담은 이야기였다.
“틈틈이 만든 거요. 거, 왜 튜토리얼 던전 근처에서 보트 만들었던 때, 기억 안 나는 거요?”
“기억은 나는데… 그때는 작지 않았어? 저건 보트라고 부를 수도 없잖아.”
“거, 취미 생활로 계속해서 만지다 보니까 여기까지 왔다니까. 린델에 있는 커다란 지하 작업장 하나 빌려서 만들고 있었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까 자꾸만 손이 커진 거 아니요. 때마침 우리 아영이도 들어와서 큰 도움을 줬다니까.”
“아무리 그래도….”
“내가 저 보트 한 척에 얼마나 많은 돈을 쏟아부었는지 형님은 모를 거요.”
‘당연히 모르지, 이 새끼야.’
“정연 씨가 여러 가지로 도움도 많이 주고 디테일한 부분까지 확실하게 가다듬었다니까. 아마 저기에 무슨 기능들이 숨어 있는지 알면 형님도 놀랄 거요.”
‘그래, 시바. 확실히 그럴 만하다.’
교국 최고의 대장장이 기술자 유아영과 마법 지식 부문에서는 그 누구도 따라잡을 수 없는 마도학자 황정연.
거기에 보트장인 박덕구가 눈에 불을 켜고 만들었으니 회심의 역작이 만들어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전설 등급의 아이템 나이스 보트의 정보를 확인합니다.]
[나이스 보트-전설 등급]
[강철의 대장장이와 마도학자, 신념의 방패가 만들어낸 세기의 역작입니다.
용골과 마수의 뼈, 마수의 가죽과 빛의 마력으로 만들어진 이 커다란 배는 단순한 운송수단으로 평가할 수 없을 정도로 귀하고 특별한 예술 작품입니다.
소재 하나하나가 마력을 머금고 있는 것은 물론, 그 강도는 어떠한 파도와 바람에도 부서지지 않습니다.
드래곤의 브레스를 견딜 수 있을 정도의 내구력을 겸비하고 있으며 승선한 승무원들에게 지속적인 버프와 활력을 유지해 줍니다.
일정 시간 동안 바다 안을 잠수할 수 있는 기능이 있으며, 그밖에도….]
끝까지 다 읽어볼 필요도 없다. 중요한 건 박덕구 이 새끼가 무시무시한 걸 만들어 버렸다는 사실 하나였으니까.
소재로 마수 살라트와 디아루기아, 그 밖에도 여러 가지 고급 촉매와 아이템들이 들어간 게 눈에 보인다.
이쯤 되면 아이템 판정을 받아도 이상할 것도 없다.
아니나 다를까. 아이템 판정도 받아버렸다.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입이 떡 하니 벌어질 정도. 어떻게 이걸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런 결과가 퍽이나 만족스러웠는지 이 작품의 창작자들은 끊임없이 재잘거리는 중이다.
“린델이 부서지고 나서, 솔직히 이 작품도 망가졌을 거로 생각했는데, 무사해서 다행이었죠.”
‘아영아, 시바. 드래곤의 브레스까지 견딜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고 하잖냐. 마수의 가죽으로 마감했고, 지하에 보관되고 있었는데, 당연히 무사했겠지.’
“그때는 아직 완성 전이어서 아이템 판정도 받기 전이었으니까요. 부 길드 마스터가 깨어난 이후에 덕구 씨가 틈틈이 마무리했어요. 거울 호수로 갈 때까지는 꼭 완성하고 싶다면서요.”
“사실 나는 뭐 크게 한 것도 없다니까. 어떻게 봐도 정연 씨 때문에 이렇게 완성된 것 아니요. 애초에 마법으로 기틀을 잡아놓지 않았으면 저렇게 크게 만드는 것도 불가능했을 거라니까.”
“그래도 마무리는 끝까지 덕구 씨가 했잖아요. 땀까지 뻘뻘 흘리면서 한땀 한땀. 망치질 한 번도 얼마나 공들여서 한지 몰라요. 부길드마스터.”
‘알겠으니까, 남친 자랑은 인제 그만.’
“그거… 대단하군요.”
“이놈만 있으면 이제 어떤 바다든 호수든 안심이요. 애초에….”
‘애초에 저건 호수에 띄우는 물건이 아니지.’
“취미생활치고는 너무 커진 것 같아서 나도 이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조금 하기는 했는데, 다 완성된 걸 보니 그래도 마음에 들기는 합디다. 처음에는 형님이랑 누님만 태우려고 했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까 이렇게 되어버렸다니까.”
박덕구의 친구이자 파트너 안기모도 한마디 입을 열어온다.
“아마 교국 내에서 이런 배를 가지고 있는 길드는 저희밖에 없을 겁니다. 조선이 발달한 왕국연합의 몇몇 국가들도 이 정도로 퀄리티 있는 배가 없다고 들었습니다. 실제로 몇몇 조선 관계자들과 잡지사에서 연락을 받은 거로 알고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까?”
“받기는 했지만, 파란 길드의 공공재를 함부로 바깥에 유출할 수가 있나. 디자인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다는 예술잡지를 제외하고는 전부 돌려보냈다니까. 조선 관계자도 그렇고, 뭐 팔라고 하는 사람도 있기는 했었는데, 자식 같은 놈이라 팔기는 좀 그렇더오.”
“만약에… 팔았으면 부자 됐을 텐데….”
“예리 씨 말이 맞습니다. 사실 값으로 가치를 매길 수가 없는 물건이라 팔기도 좀 뭣 하지만….”
“큼! 뭐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 무엇보다 내정된 주인이 있다는 게 그 이유요.”
“…….”
“…….”
“처음부터 하얀 누님이랑 우리 형님 태워주려고 만든 것 아니요. 설계도 그렇게 했고 어떻게 생각해도 이건 선물로 주는 게 맞다니까.”
나무에 달라붙은 매미처럼 이쪽에 꼭 달라붙은 정하얀이 반응한 것은 바로 그때.
토끼처럼 눈을 번쩍 뜨더니 입꼬리를 실실 올리는 꼴이 왠지 불길하게 느껴진다.
“사실 이렇게… 큼… 말을 꺼내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다들 모인 자리니까 말하는 게 맞는 것 같소. 여기 마스터키 받으쇼, 형님.”
“아, 으응… 고맙다.”
“첫 출정을 다 같이 타게 돼서 조금 그렇긴 하지만, 틈이 나면 누님이랑 같이 여기저기 다녀오고 그러쇼.”
나보다는 정하얀이 고개를 더 격하게 끄덕이는 중, 심지어 작은 목소리로 귓속말을 해오기 시작했다.
“이, 이, 이걸로 신혼여행 가, 갈 수도 있겠네요, 멀리멀리.”
‘너 공간이동 할 수 있잖아….’
“자! 다들 박수! 박수!”
“축하드립니다, 부길드마스터.”
“추, 축하드려요, 정하얀 님.”
“축하드립니다, 기영 씨.”
순서대로 암살자 김창렬, 흑마법사 한소라, 심지어 김현성까지 박수를 보내왔다.
다른 이들도 별반 다르지는 않다. 그럴 것으로 예상한 것 같았지만, 박덕구의 통 큰 결단에 놀라워하는 눈치다.
김현성은 왜 저렇게 질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녀석도 기쁘기는 매한가지인 모양이다.
솔직히 이런 분위기 자체가 너무 오랜만이라고 느껴진다.
길드원들끼리 오순도순 모여 웃고 떠든 게 얼마 만인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그래도 예전에는 던전에 들어갔다 나온 이후는 항상 이런 시간을 보냈던 것으로 기억한다.
커다란 캠프를 만들고 모닥불을 켜놓고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나눴고, 나름대로 캠핑 분위기를 내며 딱 기분 좋을 정도로 취하며 웃고 떠들었었다.
길드가 커지고 본격적으로 바빠지면서 이런 여유가 없었던 것도 사실, 당연하지만 이 자리에서 얼굴을 구기고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엘레나와 선희영은 마차 안에 있는 테이블 위에서 체스를 두고 있었고, 김창렬은 오늘도 어김없이 구석 쪽에서 책을 읽고 있다.
한소라 역시 정하얀과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안기모, 김예리와 함께 보드게임을 즐기는 중.
김현성과 조혜진도 간단하게 마련된 미니바에서 와인을 홀짝이며 웃고 떠들고 있다.
오래간만에 찾은 여유라는 느낌이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나 역시도 박덕구에게 받은 나이스 보트와는 별개로 실실 웃음 짓게 된다.
마치 동네 주점에서 친구끼리 모여 각자 할 일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평화롭네.’
폭풍 전의 고요함이 아닐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했지만, 즐거웠다는 건 부정할 수가 없었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풍경도 그렇고 여유를 즐길 수 있는 사람들이 함께 있다는 것도 그렇다.
마차가 그리 빠르지는 않았지만 나보트 남작, 아니, 나보트 의원이 관리하는 도시까지는 그리 멀지 않다.
아마 잠시 후면 도착할 거라는 생각에 모두의 얼굴이 들뜨는 게 눈에 보였다.
거울 호수, 거울 호수 하고 노래를 불렀던 건 정하얀과 박덕구뿐만이 아니었으니까.
나름대로 소녀 감성을 유지하고 있는 조혜진도 평소답지 않게 들떠 있는 표정이다.
도착을 얼마 남기지 않은 시점에 쓸데없는 잡담을 나누고 있을 때였다.
옛날이야기나 여행 이야기 같은 여러 가지 주제를 돌고 돌아 다시금 돌아온 것은 뒤에 매달려 있는 커다란 나이스 보트.
누가 보기에도 오늘 가장 핫한 토픽감이었으니 다시금 이야기가 나온다고 하더라도 이상하지는 않았지만, 제작자 3인방 이외에도 꽂힌 사람이 있기는 있는 것 같았다.
천연덕스럽게 입을 연 것은 원래 말이 좀 많은 안기모다.
“으음, 기회가 된다면 바다로 한번 나가고 싶군요.”
“나도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거울 호수도 크게 다르지 않을 거요. 면적이 워낙 커서 얼핏 보면 바다로 착각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합디다.”
“그래도 바닷바람에 맞서 싸운다는 이미지 같은 게 있지 않습니까. 뱃멀미가 있지만 거친 바다와 싸우는 선원이나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해적선 같은 게 어릴 때부터 로망이었습니다. 이곳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곳이나 섬나라도 드무니까 모험항해 같은 걸 할 수 있을 리 만무하지만….”
“음….”
“마음 같아서는 이 배를 사용할 수 있는 던전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입니다.”
“거, 그게 가능한 거요?”
“보통 등급이 높은 일부 던전들은 맵이 완전히 뒤바뀌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파란 일지에 기록된 공포의 정원 역시 그런 던전이었고요. 실제로 몇 년 전에 발견됐던 한 던전은 시작 지점이 물 위였다고 합니다.”
“환장할 상황이었겠구만.”
“많은 희생을 치른 것은 물론 그 던전을 공략하는 데 반년 정도가 더 걸렸다고 들었지만, 아마 저 물건만 있다면 그런 종류의 던전을 공략하는 것도 꿈이 아니지 않겠습니까. 어쩌면 거울 호수에서 비슷한 던전을 발견할지도 모르고요.”
“거, 그런 것도 좋지만, 이번은 원정이 아니라 여행이 목적 아니요. 그리고 거울 호수에는 매년 많은 관광객과 모험가들이 돌아다니는데 거기서 던전이 발견된다는 건 대관절 말도 안 되는 소리 아니요? 거,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형님이 알아서 바다로 데리고 나가 줄 거요, 기모 형씨.”
“하하하, 제가 실없는 소리를 했군요. 그럼 꼭 부탁드리겠습니다, 부길드마스터.”
‘오랜만에 정신 똑바로 박힌 소리 했네, 저 돼지는.’
어쩜 저렇게 정상적인 발언을 할 수 있을지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다. 평소답지 않게 정색 빤 진지한 표정이라 어울리지도 않는다.
‘안기모, 저 사람도 참… 로망 같은 걸 너무 밝혀서 문제야.’
언제적 해적이고 언제적 항해 모험인지….
김예리는 제법 기대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다 큰 어른들은 대부분 안기모의 로망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거울 호수에 던전이 숨겨져 있단다. 생긴 것답지 않은 깜찍한 생각에 코웃음이 나온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 생각이 바뀌기까지는 몇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형님, 아무래도 던전에 들어오게 된 것 같은데….”
“…….”
“…….”
김현성조차 모르고 있었다는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