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3
회귀자 사용설명서 513화
린델에서(4)
‘조금 빨리 온 건가.’
“어느 쪽이든 상관없지만, 뭐.”
이지혜가 더 빠른 액션을 취하지는 않았을까 기대했지만,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아직 준비가 안 된 상태로 맞부딪치는 것 역시 그리 나쁜 그림은 아닐 테니까.
어차피 어느 정도는 이쪽에서 조절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아니던가.
단순히 방어만 하며 기회를 노려도 되는 인간들과는 다르게, 군단 측은 여러 가지로 생각할 문제가 많다.
김현성과 나의 일 대 일 구도가 그렇게 쉽게 나오는 게 아닌 만큼 전투 초반부터 꾸준히 설계해야 한다.
물론, 인류 측에 너무 커다란 피해가 누적되는 것 역시 최대한 지양해야 했다.
전투 초반, 김현성을 열심히 뛰어다니게 하면서 체력을 소모하게 하고, 이후 만남의 장소에서 감동과 충격의 해후를 나누는 것은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일.
말은 쉽지만, 행동으로 옮기기는 쉽지 않다.
여러 가지로 불안 요소가 많은 만큼 주의에 또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나 역시 이게 될까 싶을 정도로 무리한 요소들이 많았으니, 걱정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린델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고개가 끄덕여졌다.
병력의 구성, 병력의 형태, 지원 병력의 위치와 저들이 촘촘하게 짜 놓은 진영까지.
마음의 눈으로 바라보자 확실히 보이는 것이 많았다.
‘키야, 이래야 우리 지혜 누나지.’
완벽하게 이쪽을 중심으로 맞춰져 있었던 것.
‘얘, 알고 있었네. 와, 소름이 돋는다, 진짜.’
과연 1회차 가면쓰레기와 함께 빌런 투톱을 유지했던 쓰레기의 눈치.
지혜 누나야, 이쪽과 굉장히 성향이 비슷하기도 했고, 함께 만든 작품들도 많았으니 눈치채는 게 꼭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완벽하게 생각이 맞아떨어졌다는 건 놀라울 수밖에 없는 부분.
나 역시 그녀가 뭘 원하는지 알고 있고, 그녀 역시 내가 뭘 원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
적당히 죽어야 할 놈들을 죽어야 할 장소에 모아서 배치해 놓은 것은 물론, 아군 피해가 누적되지 않도록 조치한 것도 많다.
이쪽이 조금 더 강하게 병력을 밀어 넣어야 할 곳은 조금 더 단단하게, 뚫어내야 하는 곳은 자동문처럼 열어놓고 있었다.
심지어 이쪽이 죽여야 할 악마를 위한 덫까지 마련되어 있는 모습은 마치 잘 차려놓은 밥상 같은 느낌을 받게 할 정도였다.
‘뭘 좋아할지 몰라서. 일단 준비해 놨어요.’
도저히 손을 대지 않고서는 참을 수 없는 식탁을 마련해 놓고 젓가락을 이쪽으로 떠넘기는 상황.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김현성의 위치 역시 그렇다.
아마 녀석 같은 경우는 지원조로 따로 운영될 것이 분명.
이지혜 본인이 직접 전술 김현성을 운용해 볼 생각이라는 건 불 보듯 뻔했다.
마음의 눈이 없는 만큼 효율은 형편없고, 내려야 할 명령 자체도 굉장히 제한적일 거다.
하지만 내가 있는 쪽으로 녀석을 인도할 수는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쾌재를 지르고 싶은 심정.
복잡하게 생각할 게 단 1도 없다는 걸 인식한 순간이기도 했다.
‘진짜 설계는 이렇게 해야지.’
나 역시도 놀랄 수밖에 없는 퀄리티. 준비해 놓은 연출도 기대된다.
아팠던 머리가 순식간에 상쾌해지는 기분이었다.
살짝이었지만 미소를 띠는 걸 눈치챘는지, 새로 수행 비서로 선정된 로노베가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외부고문님.
“네, 로노베 님.”
-어떻게 하시겠어요? 이곳에서 전선을 유지한 채로 한마디 하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선전전이라면….
“아, 딱히 그러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평소였다면 여러 가지로 협상 카드를 내세울 수도 있겠지만, 대화 자체가 통하지 않은 간악한 존재라는 설정이 조금 더 먹힐 겁니다.”
-역시… 빨리 보고 싶으신 거군요.
‘보고 싶기는 하지. 얼마나 공을 들였는데.’
“네, 그만큼 고대하고, 고대했던 일이니까요. 준비한 시간이 길었던 만큼 제대로 된 마무리를 해야 한다는 압박감도 있습니다. 로노베 님 같은 악마분들을 실망하게 할 수야 있겠습니까. 어서 제대로 된 성과를 낸 이후에 악마 여러분들이 안심하고 지옥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드려야지요.”
-저희는 이미 충분히 만족하고 있어요. 외부고문님. 지금까지 외부고문님이 해주신 일을 생각하면….
“하하하. 그렇다고 하더라고 더 잘 풀리면 더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 다른 악마분들께도 전파해 주세요. 도노반 님 같은 사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소환, 역소환에 꼭 유의하시고 따로 드리는 지령은 꼭 완수해 달라고 말입니다.”
-아, 네, 알겠습니다. 외부고문님.
‘어우야, 이거 긴장되기는 하네….’
여러 가지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긴장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새로운 대작 게임의 출시를 앞둔 상황에서 누가 이기는지 보자며 SNS에 뻘 글을 올렸던 게임사의 심정이 이러할까.
점점 더 심장이 쿵쾅거리고 있다.
심지어 김현성과 함께 분량을 뽑아내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
이유야 조금씩 다르겠지만, 현재 이 지역에 자리 잡은 다른 이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27군단의 배우 여러분 역시 긴장한 것은 마찬가지.
이미 충분히 실적을 얻기는 했지만 제대로 된 마무리를 하고 싶다는 건 어딜 가나 만국 공통이 아니던가.
중요한 촬영에 진입하기 직전 대기하고 있는 배우들의 표정이라고 할 만했다.
‘그래도 얘네는 조금 사정이 나은 거지, 뭐.’
27군단과 정면으로 몸을 부딪쳐야 하는 인간들 같은 경우는 공포를 넘어 혼란스러워하는 듯한 느낌.
심지어 얼굴이 파랗게 질린 채로 부들부들 떨고 있는 놈들도 보인다.
알 수 없는 신념을 가지고 검을 들고 있는 이들도 눈에 띄지만, 저들 역시 겁먹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래서 전투가 성립될까 생각하던 중이었다. 여기까지 닿을 듯한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투 준비! 전투 준비!!!”
어색한 표정으로 연신 주먹으로 방패를 두드리며, 목이 터지라 외치는 이는 다름 아닌 박덕구.
“전투 준비!!! 전투 준비이이이!!!”
[전설 등급의 특성 사기의 외침의 영향을 받으셨습니다. 능력치가 일시적으로 소폭 하락합니다.]
‘키야, 박덕구 이 새끼….’
동생의 성장에 기분 나빠할 형은 없다. 슬그머니 미소가 지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새 성장했네. 그새 성장했어. 돼지 새끼야, 형은 네가 자랑스럽다. 진짜.’
공포심에 짓눌려 바닥을 칠 뻔한 연합의 사기를 끌어올리는 것은 물론 버프까지 챙겨주고 있단다.
이번 일로 성장한 것은 김현성뿐 만이 아니다.
1인분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고기 방패는 어느새 타 모험가들을 이끌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
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지다. 마음의 눈으로 보기에도 인류 전체의 수준이 전반적으로 성장했다.
파란 길드는 물론이거니와 이름 없는 중소 규모의 클랜들과 교국에 소속된 병사들 역시 고생한 것이 티가 날 정도의 급성장을 이룩해 냈다.
아마 정신적인 부분 역시 성장했으리라.
연합 안에서 사고를 치지 않고 조용히 지내는 정하얀은 물론이거니와 처음부터 심성이 여린 엘레나도 무척 독해진 모습이었다.
날뛰는 것밖에 하는 게 없을 거라고 여겨졌던 차희라는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법을 배웠고, 다분히 의존적이었던 카스가노 유노도 손톱만큼의 자립심을 길렀다.
1회차의 마지막과 비교했을 때는 부족한 점이 많을 수도 있겠지만, 현재 인류는 72악마 군단 전력의 일부를 막아낼 수 있을 정도로 강해졌다.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들어 올렸다.
사기의 외침 영향을 받고 있었던 연합의 장내가 조용해진 것은 바로 그때.
인간들의 함성을 지워 버린 군단은 발걸음을 옮긴다.
군단의 만인장들은 각자의 방법으로 병력의 사기를 끌어올리며, 점점 더 린델에 다가가고 있다.
거대한 함성이 터져 나온 것은 조금 더 린델에 가까워진 이후.
“벌레 같은 놈들.”
땅을 울리는 소리와 함께 전 병력이 성벽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크워어어어어어어어!!!
-크르르르르륵!!
‘얼마나 버틸 수 있으려나.’
린델의 성벽은 약하다. 캐슬락처럼 국경에 자리한 것도 아니었고, 몬스터의 숲이 커다랗지도 않았다.
튜토리얼 던전이 대륙에 자리 잡은 이래로, 수많은 모험가와 교국민들을 수용할 수 있는 부지를 마련하기 위해 너비는 넓어졌지만, 방어력은 감소했다고 보는 것이 맞으리라.
연합 측에서도 성벽에 마력을 주입하며 버티기야 하겠지만, 린델은 애초에 수성전을 하기에 적합한 장소가 아니다.
-성벽에 마력을 더 밀어 넣어! 최대한 오래 버텨야 한다! 뚫려서는 안 돼!
-벌레 같은 인간 놈들이 잘도 설치고 있구나. 이 만인장 발리토스의 도끼를 받아낼 영웅은 어디에 있나. 푸핫! 다진 고기로 만들어주지.
-서쪽 지역에 최대한 빠르게 지원 부대 보내! 빨리! 지금 뚫려서는 안 된다.
-아아아아악!
-크워어어어어어어!!
-베니고어 여신님께서 우리와 함께 싸울 것이다. 빛의 검사가 우리와 함께하고 있다.
‘초반부터 격렬하네… 어우야….’
아마 연합 측에서도 전투가 끝날 때까지 성벽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명장이 린델의 수성전을 지휘하더라도 그만한 결과는 이룩해 낼 수 없다.
아마 적당한 시점에서 성벽을 포기하거나 성벽을 무너뜨려 소소한 이들을 취하려고 할 게 분명했다.
서로 그리고 있는 그림은 같을 터.
유례없는 대규모 시가전.
린델 안에서 싸우는 그림을 그리고 있을 거라는 건, 서로 묻지 않아도 알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그렇기에 이 수성전은 중요하다.
본격적인 시가전에 돌입하기 전에 얼마만큼의 병력을 줄일 수 있는지가 달린 싸움.
모든 걸 내던질 정도는 아니지만, 그 정도 각오로 싸워야만 하는 전투라고 할 수 있다.
그 각오를 보여주듯 난장판이 된 전쟁터의 모습은 가관.
끊임없이 밀고, 밀어내야 하는 처절한 싸움은 마치 지옥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중에서도….
‘어우야, 저기는 왜 저렇게… 진짜 소름 돋을 정도로 열심히 싸우네.’
여성 모험가들과 여성 악마들이 비율이 높아 보이는 장소 한 곳은 그 어떤 지역보다 더욱더 처절해 보였다.
-베니고어시여! 저 더러운 리… 악마들을 멸하소서!!!
-주제도 모르는 인간들! 주제도 모르는 인간들이!! 너희들이 알고 있는 것만이 세상 전부가 아니다. 이 어리석은 것들!!
-죽어라! 이 악마들아! 너희들과 같은 하늘 아래 있다는 게 수치스럽구나! 절대로 용서하지 마라!! 빛과 정의가 아직 이 자리에 살아 있다는 걸!! 저 악마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엘룬이시여! 부디 저 악마들을 멸하소서!!!
-이 땅 위에서 사라져야 할 것은 네년들이다! 절대로 밀리지 마라!! 군단의 어둠들아!!
-죽어라! 죽어!!
-아아아아아아악!!!
-마법 캐스팅해! 빨리!!! 신성 마법은 최대한 적들을 태우는 데 사용한다!! 가벼운 상처는 포션으로 응급 처치해!!
‘그래도 상처는 치료해야지, 애들아….’
-역소환은 포기한다. 군단의 어둠들아!!! 몸이 바스러지더라도 죽을 각오를 다 해 싸워야 한다!!
‘너희 역소환 안 하면 죽어….’
이유가 뭔지는 알 수 없다. 애초에 저렇게 격렬하게 싸울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전장이었으니까.
하지만 돌아가는 꼴을 보니 이 전투에서 메인을 차지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장면을 연출해 내고 있었다.
특수 직업을 얻은 사제라도 있는 모양인지 뭘 자꾸 멸하라고만 하고 있었는데 그때마다 빛이 번쩍이는 중.
정확히 무슨 직업인지 보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다른 전장이 신경 쓰여 제대로 확인해 볼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메인은 만인장들이 모여 있는 전장이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여러 곳에서 여러 가지 장면들이 연출되기 시작했다.
발리토스와 리무르아를 비롯한 몇몇 만인장들은 확실히 압도적인 존재감을 보여주고 있었다.
리무르아의 거대한 촉수를 막아내는 마법사들.
인간 고기를 즐기는 악마 발리토스는 거대한 식칼을 들고 묵직하게 전장에 자리 잡고 있었고, 다른 만인장들 역시 각자의 고유 능력을 통해 연합을 압박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쯤 되면 누가 등장할지는 뻔했다.
검 한 자루를 들고 전장을 헤집는 검사.
‘현성아….’
자신을 한계까지 밀어붙여야 할 김현성이었다.
‘체력 소모 확실하게 시켜 놔야지.’
체력과 마력은 무조건 절반 이상 소모하게 해야 했다. 그래야 이 비루한 몸으로 비비는 게 가능해진다.
‘아이고, 열심히 싸운다, 우리 현성이. 힘내라! 힘! 힘! 옳지! 잘한다.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