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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511화 (508/1,590)

# 511

회귀자 사용설명서 511화

린델에서(2)

“이건… 린델이에요. 어떻게 생각해도 그렇게밖에 결론이 나질 않네요.”

“그렇지만 이지혜 님. 지금 병력을 뒤로 뺀다는 건 위험부담이 너무 높을 거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에요. 저 역시 지금까지 얻은 포인트를 전부 날리고 싶지는 않지만, 저쪽에서 저렇게 나오니 응할 수밖에 없어요. 정말로 무의식이 남아 있기는 한 모양이네요. 이런 상황에서 굳이 강수를 두는 걸 보면. 확실히 파란 부길드마스터님의 작품이라 할 만해요.”

“…….”

“전 병력 철수합니다. 죄송하지만 다른 의견은 받지 않겠어요. 각 거점의 지휘관들에게 지금 바로 전파해 주셨으면 합니다. 추가로 현재 린델과 그 주변에 있는 모든 소도시에 완전 피난령을 내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개미 새끼 한 마리 없게 도시를 싹 비우도록 조치해 주세요. 오늘 안으로. 린델 같은 경우에는 다섯 시간.”

“하지만 다른 분들의 의견을 들어봐야 하지 않을지…. 현재 전선에 계신 야전 지휘관들은 조금 생각이 다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아무래도 에베리아 쪽이….”

“지금껏 만들어놓은 분위기를 전부 무위로 돌리는 것이 아닌지 걱정스럽습니다.”

“여러분의 생각도 이해는 갑니다만, 여기저기서 탁상공론하며 시간을 보내기에는 상황이 너무 급박합니다. 에베리아에 주둔한 병력으로서는 지금까지 얻은 거점들을 잃는 게 불안하겠지만, 현재 저들에게 필요한 것은 전선을 유지하는 거점이 아닙니다. 린델을 목표로 한 건 저들로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보는 게 맞을 거예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저들이 현재 어떤 식으로 소환 유지에 필요한 마력을 얻고 있는지를 생각하면 금방 답이 나올 겁니다.”

“아!”

“네. 소환 유지에 필요한 인간들이 부족한 시점이라고 판단하시면 될 거예요. 에베리아에 있는 세계수는 아마 린델을 습격한다는 걸 숨기기 위한 수단에 불과할 거고…. 악마들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현세에 더 오래 체류하는 겁니다. 대륙의 중심에 있는 교국, 그 중심에 있는 린델을 교두보로 삼을 수 있다면 완전히 대륙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겠죠.”

“그렇다면….”

“아마도 마지막 전투가 될 겁니다. 이번 싸움에서 이기느냐, 지느냐가 대륙의 운명을 판가름 지을 갈림길이 될 거예요. 이해하셨다면 정확히 한 시간 뒤에 다시 모이겠습니다. 그전까지 각 거점의 지휘팀 및 전략팀에게 전달 사항 전달해 주시고, 다시 모여서 이후에 시작될 린델 전투에 대해 회의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이지혜 님.”

“긴 회의가 될 거예요. 다들 감사합니다.”

“저희가 드리고 싶은 말씀입니다.”

“후우….”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전략 본부의 팀원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창문을 바라보자 눈앞에 보이는 것은 칙칙한 어둠.

저 이상 현상을 보며 온갖 생각을 다 했던 것이 무려 며칠 전이다.

하지만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파악한 이후에는 조금 마음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 심지어 지금은 조금 속에서는 알 수 없는 열이 튀어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사건이 터진 초기, 당황스러워 눈물을 터뜨린 걸 생각하면, 그 누구라도 화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쓰레기 같은 인간.’

사실 설마 설마 하기는 했다.

이 쓰레기 같은 인간이 연방민의 피난을 돕다가 악마들에게 납치당했다는 사실 자체가 이해가 가지 않았으니까.

그 누구보다도 제 몸을 챙기는 바퀴벌레 같은 놈이 제 발로 그쪽 근처를 배회한 것도 신경 쓰인다.

분명 자신은 모르는 사정이 있을 거로 생각했지만, 사람이라는 게 어디 이성적으로만 생각할 수 있는 동물이던가.

마음속, 한구석에 있는 불안감이 쿵쾅쿵쾅 울리기 시작했고, 그 불안감을 애써 지우려 잠까지 참아가며 필사적으로 매달려 왔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은 파란의 길드마스터 김현성이 각성한 직후.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김현성이 꿈에 관한 이야기를 한 이후였다.

‘진짜, 이렇게 쓰레기 같은 놈이 또 있을까.’

어떤 이유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째서 이기영, 이 쓰레기 같은 인간이 악마들과 함께 어울리게 됐는지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둠기영이 노리는 것이 인류의 멸망은 아니라는 것.

당장 이번 일로 얻을 수 있는 게 무척 많지 않은가.

사건이 터지기 전에 가장 핫한 주제였던 인류의 성장부터, 대륙을 정상으로 돌리기 위한 신앙, 심지어는 김현성의 각성까지.

대부분 인간은 모르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하나하나 따지고 들여다보면 그에게 손해라고 할 수 있는 일이 전무했다.

‘오히려 이득을 봤으면 이득을 봤겠지.’

아마 악마 쪽에 붙어 신나게 와인을 마시고 있지 않을까.

어째서 상황을 조금 더 냉정하게 보지 못했는지… 예전의 자신에게 되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연락 정도는 해줄 수 있는 거 아니야?’

물론 그중에서도 가장 열이 뻗치는 건 자신에게까지 이 모든 일을 비밀로 했다는 것.

심지어 김현성의 꿈에 나타났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당황스러워 입이 다 벌어질 정도였다.

아마 차희라, 엘레나, 카스가노 유노 같은 이들 역시 자신과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으리라.

수많은 여자를 뒤로하고 기껏 처음 만나러 간 사람이 김현성이란다.

황당함을 넘어 분노를 느끼는 것 역시 무리가 아니다.

그래도 다른 년들의 꿈에 나타난 것보다는 조금 더 낫다고 자위하기도 했지만, 김현성의 반응을 보자니 상황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아마… 지금도 싸우고 있을 겁니다. 믿는다고… 자신도 버티고 있겠다고, 분명히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시발.”

‘아… 그 기술 말씀이시군요. 정확히 어떻게 깨달았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기영 씨가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니, 분명히 기영 씨가 준 선물일 겁니다. 지금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거겠죠.’

“이기영 개새끼.”

‘어떻게… 인지는 사실 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제게 찾아왔는지도 잘 모르겠고요. 아마 제가 무너져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주셨을 거로 생각합니다. 실제로 기영 씨가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저는 아직도 그 무의식 세계를 헤매고 다녔을 겁니다. 분명히… 눈치채셨던 겁니다. 본인 역시 싸우고 있는 도중에도… 말입니다.’

“내가 슬픈 건 눈치 못 챘다 이거네. 이기영, 이 쓰레기 같은 놈.”

물론 문제는 없다. 본부에서는 정확히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물었을 뿐이고, 김현성은 그에 대한 답을 했을 뿐이었으니까.

실제로 그가 무척이나 담백하게 이야기를 풀어냈다는 걸 생각하면 이렇게 열을 낼 필요도 없다.

하지만 본디 인간이란 이런저런 쓸데없는 감정을 느끼게 마련이다.

조용히 미소 짓고 있는 모습은 왠지 이쪽을 비웃는 것처럼 보이고, 목소리 역시 살살 약 올리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러니 화가 날 수밖에 없다.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그 쓰레기 같은 인간에 대한 원망이었다.

남자 친구가 자신보다 친구를 더 중요시한다는 동성 친구의 연애 고민을 들었을 때만 해도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실제로 이런 일이 닥치니 너무나 황당했다.

‘내 꿈에는 안 나타나?’

아마 모두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거다.

본디 질투하는 사람이 추하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괜스레 신경질이 난다.

하지만 그 얼굴을 떠올리자 괜스레 고개가 끄덕여진다.

‘취향 참… 중2병이기는 한데.’

“진짜 섹시해….”

은색의 눈동자와 은발의 머리카락.

가면까지는 취향이 아니었지만, 그것마저 섹시하게 느껴진다.

오죽했으면 저 모습을 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했겠는가.

이곳에 와서 고생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는 만큼 타지 않은 하얀 피부는 조금 더 창백하게 변했고, 아이덴티티를 잊지 않으려 노력한 악역 연기 또한 일품이었다.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이제 막 희망을 품으려는 인류를 내려다보는 영상은 개인적으로 소장까지 했다.

최근 공개된 디아루기아 타락 영상은 또 어떠한가.

하찮은 동물을 바라보는 듯한 눈빛과 태도로 멍청한 용을 다루고 있는 장면은 왠지 모르게 온몸을 찌릿찌릿하게 울리는 쾌감 같은 것을 느끼게 했다.

유치한 클리셰라는 건 안다. 언제적 은발이고, 언제적 타락 클리셰인지.

무대 안으로 들어가면 비극적인 장면이 따로 없지만, 무대를 벗어나면 욕을 얻어먹을 수밖에 없는 스토리텔링.

이 모든 걸 알고 있는데도 비주얼로 밀어붙이니 여심이 움직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내 남자로는 딱이지.’

내면 역시 마음에 들지만, 외관 역시 완전히 취향에 들어맞는다.

가끔 짜증 나는 구석이 있어도 외모를 떠올리면 용서가 된다.

‘이번에도 당해줘야지… 뭐, 어쩌겠어.’

괜스레 테이블을 툭툭 두드리며 상황을 돌아보고 있을 때였다.

다시 한번 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한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들어오세요’라는 말을 하기도 전에 활짝 열린 문 사이로 보인 건 조금 당황한 듯한 전령의 얼굴이었다.

“이지혜 님.”

“네?”

‘무슨 상황인지 예상이 되기는 하는데….’

“27군단이 점령한 주요 거점들에 자리 잡고 있던 악마들의 수가… 줄고 있다고 합니다. 각 거점에 있는 지휘관들께서 곧바로 공략하실 수 있을 정도라고….”

‘역시나.’

“공략은 불가하다고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 다시 가서 전하세요. 거점 공략은 포기한다고, 혹시 적 본대의 움직임은 포착됐나요?”

“정확히는 확인할 수 없었지만 아메라를 벗어나고 있는 악마들이 보인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확실하네.’

예상하던 게 맞았을 때만큼 짜릿한 것은 없다.

조금 불안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역시나 내 남자는 마지막 무대로 린델을 선택했다.

대륙의 중심이며 교국의 중심, 모험가들이 첫발을 내딛기 시작한 장소이며 상징.

아마 굳이 마지막 장소로 린델을 선택한 이유는 전략적인 목적 외에 다른 부분도 고려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결착을 짓기에는 나쁘지 않은 무대다.

연출에 집착하는 걸 생각해 보면 더욱더 그렇다.

익숙한 장소만큼 아름다운 장면을 만들기에 적절한 장소는 없다.

타락한 둠기영과 그런 그에게 제발 정신을 차리라고 외치는 파란 길드원들.

악마의 힘에 취해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은 힘을 선보이는 그와 그에 맞서는 빛의 검사.

구태여 디아루기아를 섭외한 걸 보면 원하는 건 아마 김현성과의 일 대 일 대결이라 봐도 무방할 것이다.

“나 참….”

“네?”

“아니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진짜 연출이 어떤 건지 확실히 보여줄 준비가 되어 있다.

조금 부족하게 느껴졌던 지난 연출 따위는 완전히 잊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완벽하게 세팅된 무대가 뭔지 제대로 보여주겠다는 열의가 생긴다.

무슨 사정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이벤트에 자신을 끼워주지 않았다는 건 자신을 무시하고 있다는 거로밖에 해석되지 않았으니까.

‘이번 기회에 다시 한번 돌아보게 해야지, 뭐.’

본래 능력 있는 여자라는 건 어딜 가도 매력적으로 보이는 법이다.

조금 억지스럽더라도 일단은 둠기영과 김현성을 만나게 하는 장소와 장면 자체가 중요했고, 상황을 더 극적으로 만들기 위한 장치 역시 필요했다.

병력의 편성을 머릿속으로 생각하며 둠기영과 빛의 검사를 위한 무대를 떠올리기 시작.

왠지 모르게 약 올리는 것 같이 느껴지던 표정을 떠올리면 이렇게까지 밀어주고 싶지는 않았지만, 결착을 짓기에 이것보다 더 적절한 그림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하루.

에베리아를 압박하고 있던 군세가 빠져나가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이윽고.

27군단이 린델로 향하는 것 같다는 정보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확실하게 찍어놔야겠네.’

저 버전의 이기영이 끝까지 남아 있을지 모르는 만큼 최대한 많은 자료를 확보해야겠다는 쓸데없는 생각과 함께 린델에는 전운이 드리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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