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8
회귀자 사용설명서 508화
잠깐의 휴식(1)
-돌아가지, 로노베. 재미있는 일이 생긴 것 같군.
-네, 이기영 님.
‘키야, 한 번 더 보자.’
-돌아가지, 로노베. 재미있는 일이 생긴 것 같군.
-네, 이기영 님.
‘진짜 괜찮네.’
한 번 지나간 작품에 미련을 두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이건 왠지 모르게 계속 돌려 보고 싶은 장면이었다.
멀리 떨어진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생각을 하는 채 각자를 노려보는 모습은 그중에서도 백미라고 할 수 있는 명장면.
미련 없이 등을 돌려 자리를 떠나는 둠기영의 뒷모습 역시 마찬가지였다.
“키야, 이게 연출이지. 이게 연출이야.”
사실 조금 오그라드는 것은 아닌지 생각했지만, 이 정도면 준수하게 역할을 마무리했다고 생각할 만했다.
흘러넘치는 중2 감성이 로노베의 것과 별다른 차이가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머릿속에서 치워 버린 채 와인을 냉큼 목구멍으로 퍼부으니 마치 천국에 온 것 같은 느낌.
이런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 좋다.
소소하게 그날의 성과를 자축하며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것. 인간이라면 싫어할 리가 없다.
‘이런 시간이 있으니까, 더 빡세게 일할 수 있는 거 아니겠어.’
사실 기왕이면 평생 쉬는 게 가장 좋기는 하다.
조금 더 편하게 있고 싶어 다리를 책상 위로 쭉 뻗은 채로 다시 한번 와인을 들이켰을 때였다.
갑작스레 상황실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온 것.
낯 뜨거운 동영상을 감상하다 습격당한 청소년처럼 황급히 영상을 끄려고 했건만, 당황한 나머지 되감기를 눌러 버렸다.
듣기 부끄러운 비음이 튀어나오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했지만, 타이밍 좋게 흘러나온 영상은 다름 아닌 도노반의 영상.
‘아이고….’
-내가, 내가 고작…. 고작 인간 따위에게….
-하아, 하아, 하아….
-미안… 하다. 내 친우…. 죄송… 니다. 벨리알….
‘에이, 씨바. 눈 버렸네.’
살짝 당황하기는 했지만 그걸 다 표현할 리 만무.
조심스레 옆을 바라보자 이쪽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리무르아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죄, 죄송합니다. 이기영 외부고문님. 제가 너무 갑작스럽게….
“아, 아닙니다.”
뭔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것 같은 얼굴.
-외부고문님의 잘못이 아닙니다.
“네? 아… 네.”
상황을 파악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너무 그렇게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절대로 외부고문님이 잘못하신 게 아닙니다. 도노반 그 멍청한 놈이 오히려….
“…….”
-이기영 님….
“죄송할 따름입니다. 이런 사고가 터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는데, 도노반 님이 안타깝게 돌아가신 건…. 어디까지나 제 부주의였습니다. 다른 분들이 얼마나 실망하셨을지….”
-아니,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기영 외부고문님께서 그렇게까지 깊게 생각하실 일이 아니에요. 예상할 수 없던 상황이었습니다. 어처구니없고 멍청한 사고였습니다.
“하지만….”
-애초 시나리오를 무시한 채 17거점으로 달려간 것은 그자의 잘못입니다. 심지어 역소환을 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완전 강림을 시도하다니…. 단순히 멍청하다는 말로는 부족합니다. 그런 멍청한 놈 때문에 이기영 님께서 마음고생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나도 알고 있다. 리무르아야. 내가 무슨 잘못이 있겠니. 무슨 잘못이 있겠어. 나는 잘못 없다. 이게 다 전부 다 도노반 잘못이죠. 네, 그렇습죠.’
사실 내 반응과는 별개로 악마들은 도노반의 죽음에 크게 연연하지 않았다.
어느 쪽이냐고 묻는다면 오히려 멍청한 놈이라거나 부끄러워하는 쪽.
27군단의 다른 만인장 입장에서는 당연하게 비칠 수도 있는 이야기이리라.
이를테면 연극의 배역에 너무나도 몰입한 나머지 뒈진 거나 다름이 없는 상황이다.
심지어 시나리오도 무시한 채로 단독 행동을 펼치다 인간에게 몸이 반으로 갈라져 돌아가셨단다.
역소환이라는 방법을 선택할 수 있었는데도 실적을 몸에 때려 박은 이후 쓰러진 걸 떠올리면 더욱더 바보 같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숭고한 죽음이나 명예로운 죽음과는 거리가 먼 죽음.
27군단이 72군단에 합류하기 전부터 군단을 지켜온 전사 도노반의 죽음은 웃음이 나올 정도로 형편없었다.
오죽했으면 도노반 만인장에 소속된 상급 악마들 역시 그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을 정도겠는가.
군단 내 온건파들에게 힘이 더 실렸다는 건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는 이야기였다.
마지막까지 친우를 생각하는 녀석의 마음씨 자체는 안타깝기는 했지만, 동정심 따위가 생길 리 만무한 상황이다.
악마 역사상 가장 바보처럼 죽은 녀석을 꼽는다면 단연 1위안에 꽂힐 수도 있을 정도의 위엄.
자신의 소원대로 이름을 날리기는 했으니 어떻게 보면 내가 녀석의 소원을 이루어준 셈이다.
조금 방법이 다르기야 했지만 도노반 녀석도 저승에서 내심 만족하고 있지 않을까?
머릿속에서는 자꾸만 뿌듯함이 느껴지는 와중에도 얼굴에서는 악어의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후우, 좋은 분이셨는데…. 도노반 님은 말입니다.”
-네….
“저에게 새로운 지옥을 만들고 싶다고, 모두가 만족할 만한 장소를 만들겠다고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7군단을 위해서는 죽을 수도 있다고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외부고문님….
“죄송합니다, 리무르아님. 잠깐 혼자 있어도 되겠습니까?”
-네, 물론이고 말고요.
“아, 혹시 여기 오신 이유는….”
-아뇨, 급한 일은 아니에요. 다만 앞으로의 일을 어떻게 처리하실지 궁금해서, 개인적인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보다는 너무 심려치 마세요. 진심으로 드리는 말씀입니다. 이번 일에 대해 불만을 품은 이들은 아무도 없어요. 정말입니다.
“네,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후 일정에 대해서는 최대한 빠르게 연락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아, 네. 괜히 신경 쓰이게 해서 죄송합니다.
“아니요. 오히려 제가 더 죄송합니다.”
촉수르아가 잠깐 고개를 숙여 뺨에 살짝 키스해 준 이후, 슬쩍 고개를 숙인다.
아마 그녀 나름대로 위로의 표현이었을 테지.
뭐가 됐든 상관은 없지만, 이쪽은 다시 한번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어 다행이라 할 만했다.
즐겁게 시간을 보내는 건 보내는 거고, 이번 일에 대해 개인적으로 정리해 볼 시간도 필요하기는 했으니까.
마침 리무르아가 딱 적당한 타이밍에 치고 들어와 줬다고 봐도 무방했다.
‘사실 내가 뭐 어떻게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긴 한데….’
상황에 대한 전체적인 그림을 그러고는 있었지만, 선제권을 가진 건 어디까지나 인류 측이다.
이제 막 반격의 불씨를 피워 올리고 있었으니, 조만간 쳐들어올 것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아마 최종 장을 아름답게 마무리하기 위해 여러 가지 계획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하루 정도는… 분위기를 환기할 시간도 필요할 거고.
리무르아가 따라준 와인을 홀짝거리며 화면을 돌리자 확실히 좋은 분위기에 둘러싸인 대륙 연합의 본대의 모습을 시야에 담을 수 있었다.
-위하여! 위하여! 승리의 노래를 불러라. 나가자, 내 친우들과 전우들이여. 희생은 있었지만, 그들의 희생은 우리의 가슴속에 평생 기억될 것이라네. 위하여! 위하여! 우리들의 승리를 위하여!
승리의 노래를 부르는 드워프들부터.
-잔을 들어라. 승리의 축배를 올리자. 희생자들을 기리고. 작지만 커다란 승리에 감사하자.
경건한 분위기에서 승리의 축배를 드는 인간들까지.
분위기가 너무 풀어졌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딱 적당한 선에서 승리를 자축하고 있는 모습은 오히려 침체된 분위기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는 것처럼 느껴졌으니까.
어찌 됐건 간에 저런 종류의 시간은 꼭 필요하다.
지금 당장 달려들어 오기에는 인류가 얻은 상처가 너무 크기도 하고….
체력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병력 전체가 너무나도 지쳐 있다.
아마 지휘부로서도 이번 자리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당장 나였어도 비슷한 선택을 했을 거고….
가까이서 볼 수 없는 게 흠이기는 했지만, 조금 멀리서 보기에도 흥분하고 있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물론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김현성을 칭송하는 이들이다.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그래 감사해야지.’
-인류의 새로운 영웅을 위하여. 앞으로 있을 모든 전투를 위하여.
‘분위기 좋네. 진짜.’
-빛의 검을 위하여! 빛의 검을 위하여어!!
‘별명 한번 좋다. 크으, 빛의 검이란다, 빛의 검! 딱 어울리네. 딱 어울려. 현성아, 들리냐.’
-노을빛의 희망을 위해 노래를 불러라!
‘노을빛의 희망. 필살기가 강렬하기는 했지. 아암….’
-노을빛의 검사를 위하여!
‘아이고야. 좋다.’
완전히 무너졌던 인류의 첫 번째 승리.
모든 희망의 등불이 꺼졌다고 생각했을 때, 사천왕을 단신으로 쓰러뜨린 인류의 영웅이 등장했다.
인류 측에서 저런 반응을 보이며 설레발을 치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그래, 이런 게 한 번쯤 등장할 만했다니까.’
사실 그동안 김현성의 임팩트가 약하기는 했다.
물론 여러 가지 사건을 통해 조금씩 조금씩 인지도를 올리고는 있었지만, 아무래도 강력한 한 방이 없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오죽하면 내가 왜 김현성 밑에 있는지 모르겠다는 소리까지 나왔겠는가.
김현성은 바지사장일 뿐이고, 파란의 실질적인 주인은 이기영이라는 큰일 날 소리를 떠드는 것들까지 있었다는 걸 생각해 보면 현재 상황을 응원할 수밖에 없었다.
본래 세상은 어려울 때일수록 영웅을 바라는 법이지 않겠는가.
김현성은 그 영웅의 조건에 완벽하게 부합했고, 인류를 다시 하나로 뭉치게 하는 매개체로서 커다란 역할을 하는 중이다.
그동안 인류의 희망으로서 고군분투했던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었는데, 적당한 타이밍에 김현성이 치고 들어와 줬다고 봐도 될 것 같았다.
내가 지던 짐의 반쪽을 김현성에게 떠넘긴 상황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화면에 비치는 김현성의 표정은 짐을 버린 것처럼 보였다.
물론 거리가 멀어 자세히 보이지는 않고 있었지만, 더 이상 초조해하지 않는 것 같은 느낌.
한층 더 홀가분해진 얼굴은 녀석의 현재 심리를 설명해 주고 있는 것만 같았다.
당장 이쪽이 악마 측에 붙어 있으니 마음이 편치만은 않겠지만, 녀석이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 이유는 아마….
‘믿고 있겠습니다.’
이쪽이 버텨줄 거라고 믿고 있는 거겠지, 뭐.
다른 이들의 표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김현성이 뭐라고 말하는지는 잘 들리지 않았지만, 몰려 있는 이들의 얼굴을 보니 대충 뭐라고 하는지 예상이 간다.
물론 박덕구의 커다란 목소리가 가장 도움이 되고 있었고.
-그러니까 혀… 형씨 말은 아직도 우리 형님이 싸우고 있다, 이 말이요?
아마도 내가 자신을 찾아왔을 때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리라.
-형님이 형씨를 찾아왔다는 거요?
심지어 찾아왔을 때의 이야기도 하고 있다.
-그러니까 형님이 형씨 가슴을 두드리고, 믿겠다고 말했다는 거 아니요?!
굉장히 쓸데없는 부분까지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그러니까. 둘이 같이 노을빛을 봤다, 그 말이요?
무척 디테일한 부분까지.
-형씨가 그 악마를 싸울 때 사용한 기술이 형님의 선물이라, 이거요?
본대 전체가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커다랗게 소리치고 있었다.
‘이 새끼, 진짜….’
이유는 모르겠지만, 여성 모험가들이 녀석의 주변에 몰려드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심지어 이상할 정도로 사기가 상승한 것 같은 느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기영 명예추기경을 구해내고야 말겠다는 열망은 그 집단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