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3
회귀자 사용설명서 503화
녀석이 원하는 것(1)
‘사실 될지 안 될지는 저도 확신할 수가 없어요. 평범한 인간이라면 들어가는 게 쉬웠겠지만, 이기영 님께서 들어가시고자 하는 인간 같은 경우에는 저와 같은 격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라 무의식에 들어가기도 쉽지 않지만 들어간다고 해도 금방 튕겨 나갈 가능성이 클 거예요. 어쩌면 위험해질 수도 있고. 시, 시간은 현세로는 1시간, 꿈속 시간으로는 하루가 걸리지 않는다고 보시면 될 것 같아요.’
‘현세에서의 1시간이 꿈속에서의 하루라는 겁니까?’
‘그건 조정하기 나름이지만… 일단 최대로 잡을 수 있는 시간은 3일 정도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네요. 따로 주의 사항은 없지만, 확신을 드릴 수가 없어서 자신 있게 말씀드리기가 민망하네요. 물론 저 인간의 상태를 보면 가능할 것 같기는 하다만, 보통 격이 올라간 인간의 정신력이라는 걸 그렇게 쉽게 뚫을 수 없어서….’
‘시도는 한번 해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생각하던 것보다 조금 더 혼란스러워 하고 있는 것 같은 터라.’
‘힘들 것 같은데….’
‘한번 시도해 봅시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될 것 같지 않다고 혼자 중얼거리던 로노베의 모습을 떠올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로노베, 그녀가 판단하는 것보다 김현성이 망가져 있을 거로 생각하긴 했지만 이렇게 쉽게 진입할 거라고는 나도 생각지 못했다.
마치 자동문처럼 열린 녀석의 무의식은 외부의 침입을 거부하기는커녕 ‘어서 오세요.’를 외치며 들어오라 재촉하는 것 같았다.
그만큼 과정이 스무스했다는 거다. 음마 로노베조차 의아함을 표현할 정도였으니 다른 말이 필요 없다.
‘좋다고 봐야 하는 건지 모르겠네.’
일단 들어온 것은 좋지만, 그만큼 김현성의 정신이 흔들리고 있다는 걸 설명해 주는 것 같아 불안한 것도 사실이다.
녀석의 무의식을 설명해 주는 주변 풍경을 둘러보니 더욱더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폐허가 된 공간을 메우고 있는 것은 칠흑 같은 어둠. 벨리알의 그것보다 더욱더 칠흑 같은 어둠이다.
그 안에서 웅크리며 앉아 있던 녀석을 본 순간 이상할 정도로 짠한 느낌이 들기 시작한다.
평소의 김현성답지 않게 눈물을 흘리며 이쪽을 바라보는 모습은 가관이다.
이런 최악의 상황에서도 잘생김을 잊지 않는 모습에는 괜스레 짜증이 일었지만, 기본적으로는 반가운 마음이 먼저였다.
녀석 역시 그건 마찬가지인 모양인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이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얼굴에는 뭐라고 형용하기 어려운 감정이 들어가 있는 건 당연했고.
‘정신을 차리긴 한 거야?’
무의식 속이라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생각보다 빠르게 정신을 차린 모습이었다.
연패를 반복했던 히로인들처럼 나 역시 패배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문제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 이가 나타나자 조금이지만 정신을 차리기 시작한 것이다.
일이 한층 더 쉬워질 거로 생각되었다.
저쪽에서 1시간, 이쪽에서의 3일.
사랑스러운 회귀자의 멘탈을 케어하기에는 나름대로 충분한 시간으로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아직도 두 눈을 비비고 있는 녀석에게 다시금 입을 열자 뭐라 말하지 못하고 입을 뻐끔뻐끔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아….”
“제법 오랜만에 보는 것 같습니다.”
“아으…. 어…. 흐윽….”
‘이 새끼 실어증 걸렸나. 왜 이래, 진짜.’
“하, 하하.”
“아…. 윽…. 끄윽….”
뭐라고 말을 하려고 하는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자꾸만 목이 메는지 속 안에 있는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하고 있다.
끄윽, 끄윽 흐느끼는 소리를 애써 속으로 삼키는 소리가 들려와 내가 다 민망할 정도.
“…….”
슬퍼 보이기도 하지만 기뻐 보이기도 했다.
혹시라도 박덕구처럼 꽉 껴안아 오는 감동적인 연출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기는 했지만, 왠지 모르게 자신을 억누르고 있는 것이 보인다.
눈물을 보이는 것이 민망해 고개를 돌릴 만도 하건만 혹시라도 도망칠까 봐 시선이 고정된 모습도 확실히 녀석다웠다.
“괜찮으신 겁니까?”
“…….”
‘그냥 진정할 때까지 놔둬야겠네.’
감정에 북받쳐 대화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고맙긴 고마워…. 언제 또 형을 그렇게까지 생각해 주고 있었니. 새끼야. 표현 좀 하지 그랬어. 이 정도 일 줄은 몰랐다, 진짜.’
“이제 조금 괜찮아지셨습니까?”
“…….”
아직 완전히 진정됐다고 하기에는 힘들긴 했지만 아까 전보다는 상태가 좋다.
다시 한 발자국 앞으로 더 다가가 슬쩍 손을 뻗자 다시금 눈에서 눈물이 차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당황하기는 했지만 이내 숨을 가다듬으며 뻗어온 손을 잡고 몸을 일으키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죄송… 죄송합니다.”
‘아 씨, 또 울지 마.’
“죄, 죄… 죄송합니다.”
‘너 이렇게 눈물 많은 캐릭터 아니잖아.’
“그렇게 죄송하다고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현성 씨 잘못이 아니니까요.”
“그, 그렇지만, 그렇지만.”
“일단 일어납시다. 계속 여기에 머무를 수는 없으니까요.”
중의적인 표현이었다.
‘우리 빨리 나가자. 이제 알을 깨고 나와야지.’
라고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하지만 그 말이 녀석에게는 들리지 않는 모양. 아주 잠깐이었지만 몇 가지 고민을 해볼 수밖에 없었다.
무엇이 옳은 선택인가.
‘이거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지금 뭘 하는 거냐고 다그치는 것이 좋을지, 아니면 살살 달래는 것이 좋을지, 그것도 아니라면 구해달라고 소리치는 것이 좋을지 도무지 감을 찾을 수가 없다.
녀석의 멘탈이 바닥을 향해 사정없이 꼬꾸라졌다고 판단되는 만큼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정말로 싸우는 게 무서워서 회피하고 있는 거라면 다그치는 것은 역효과다.
혹시라도 내가 잘못되는 게 무서운 거라면 구해 달라고 소리치는 것 역시 역효과를 초래할 수 있다.
혹시나 자신의 실수로 인해 이쪽을 죽이는 상황을 상정하고 있다면 더욱더 그렇다.
잠깐 정신을 차리기는 했지만, 금방이라도 깨질 것처럼 위태로운 상태였다.
강경하게 수정펀치를 날리기에는 열심히 일하는 녀석의 눈물샘이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많이 남기는 했으니까.’
일단 몇 시간 정도는 상황을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복잡한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김현성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주변을 둘러보는 중이다.
자신이 현재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보고 있는지 의아해하는 얼굴이었다.
“여긴…. 그렇군요. 그렇게 된 거군요.”
‘그렇게 되긴 뭘 그렇게 돼.’
잠시 의문을 품기는 했지만, 함께 길을 걷자 녀석이 무슨 말을 해오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새끼, 구분 못 하고 있구나.’
지금 자신이 바라보고 있는 것이 현실인지, 무의식인지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전부 끝났군요. 전부….”
본인이 정신을 잃은 사이에 모든 상황이 마무리됐다고 생각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건지 의아하기는 했지만, 다시 한번 주변을 둘러본 이후에는 어느 정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칠흑 같은 어둠, 완전히 폐허가 되어 무너져 내린 도시, 확실하지는 않지만, 현재 나와 김현성이 함께 있는 곳은….
“린델….”
“네, 린델인 것 같습니다. 결국… 이번에도…. 그, 그보다 기영 씨는 어떻게 된 겁니까? 어째서… 정신이 돌아오신 겁니까? 악마들, 아니…, 그들이 결국….”
“…….”
“그렇죠. 전부 끝났는데, 이런 질문 같은 건….”
“…….”
‘이건 시바, 뭐라고 말해줘야 하나.’
일단은 닥치고 있는 게 답.
뭐라고 호응해 주고 싶기는 했지만, 완전히 폐허가 되어버린 린델을 본 이후에는 나 역시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이건 1회 차의 풍경이다.
멸망한 이후의 대륙이다.
김현성의 무의식이 만들어낸 1회 차의 기억이다.
카스가노 유노를 통해서도 보기는 했지만, 시간이 전부 지난 이후를 보는 것은 또 처음이었다.
녀석이 여기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이 이후에 무슨 일이 일어났길래 이 모양 이 꼴이 됐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녀석이 측은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무의식에서조차 이런 풍경을 봐왔다는 건 녀석이 아직 1회 차에 매달려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지표였으니까.
완전히 무너져 내린 상황에서조차 여기에 매달려 있다.
‘이 새끼 괜히 사람 심각해지게 만드네.’
더 씁쓸하게 느껴졌던 것은 녀석이 조금은 편해 보였다는 것.
기뻐 보이지는 않았지만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한 표정이 무척 편해 보였다.
“제대로 된 게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들어가시죠.”
“…….”
‘파란 길드 하우스.’
내가 모르는 풍경이다.
전부 다 무너져 내려 제대로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내가 모르는 사람의 액자와 내가 본 적 없는 물건들이 나뒹굴고 있는 게 눈에 띈다.
김현성은 아직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지만 말이다.
조금 흥분한 표정으로 주방에 들어간 녀석은 이것저것 뭔가를 챙겨오기 시작했다.
“깨지지 않은 게 남아 있었군요. 운이 좋았습니다.”
“그건….”
“입맛에 맞으실지는 모르겠습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남아 있는 게 별로 없는 것 같아서…. 아마 붉은 용병 쪽이나 검은 백조 쪽으로 가면 나오는 게 더 있을지도 모릅니다. 오늘은 시간이 조금 늦었으니 여기서 주무시고 내일부터 천천히 움직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누울 곳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기영 씨.”
‘현성에몽, 오랜만이네.’
뭐라 말을 시작하자마자 어딘가로 들어가 침대를 가져오는 모습은 가관이었다.
무의식 안에서도 힘이 센 것은 마찬가지였는지 매트리스를 손으로 팡팡 내리치는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한순간에 커다란 먼지가 훅 들어오자 콜록거리는 모습은 꽤 귀엽게 보인다.
얼굴에 흙먼지가 묻을 거라는 건 생각하지 않은 것 같았다.
이윽고 폐허였던 장소가 한순간에 그럴듯한 공간으로 변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마법이 없어 클린 마법을 사용할 수는 없었지만, 기민한 움직임으로 이곳저곳을 싸돌아다녔다.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살림살이가 조금씩 늘어나는 것 같은 느낌에 정말로 여기에서 며칠 지내도 괜찮을 것 같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앉아 있는 테이블 위에 놓인 것은 시간이 지나도 먹을 수 있는 통조림과 아직 깨지지 않은 싸구려 와인.
조금은 어린애 같은 얼굴로 내 옆에 자리 잡은 이후에 와인을 따라주는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즐거웠기 때문이 아니다.
녀석의 행동이 부자연스럽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무슨 즐거운 생각이라도 하십니까?”
“아뇨, 딱히 그렇지는 않습니다만…. 상황이 조금 재미있게 느껴져서 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너무 여유를 부리고 있는 것 같아서….”
“생존자는 없을 겁니다. 아마도요. 이곳저곳을 돌아다닌다고 한들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을 겁니다.”
“그렇군요.”
‘눈치 못 챌 리가 없지.’
그래 다른 사람도 아니고, 씨발. 김현성이 눈치 못 챌 리가 없다.
1회 차의 기억으로 만들어진 파란 길드의 흔적을 녀석이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다.
바닥을 나뒹굴고 있는 모르는 이들의 사진.
미묘하게 달라진 인테리어.
누구의 것인지 가늠조차 되지 않은 여러 가지 물건.
나는 모르고 녀석은 알고 있는 1회 차의 흔적.
아무리 폐허가 됐다고 한들 김현성이 이걸 놓치고 있다는 건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
‘알고 있는 거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 현실이 아니라는 걸 이 새끼는 벌써 눈치채고 있었다.
‘너, 여기서 나갈 생각이 없구나.’
“그래서 부정하고 있는 거야.”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웃고 있는 김현성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